공작이 어릴 때 죽으면 번식을 할 수 없다. 그래서 자연선택은 살아남은 생명체를 선호한다. 그러나 오래 살면서도 이성에게 어필하지 못하여 번식에 실패하면 아무런 보람이 없다. 번식에 성공하려면 살아남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생명체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후손을 낳는 것이므로, 짝짓기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유할 수만 있다면 안전은 어느 정도 포기할 수 있다.6 그렇다고 몸을 가누기 어려울 정도로 꼬리가 크면 번식을 하기 전에 포식자에게 먹힐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적정한 한계를 넘지 않아야 한다. 공작이 지금도 생존한다는 것은 그들의 전략이 제대로 먹혀들었다는 뜻이다(커다란 꼬리 때문에 과도한 대가를 치르진 않았지만 공짜는 아니었다. 수컷 공작은 포식자의 눈에 잘 뜨이기 때문에 암컷보다 생존 확률이 낮다).

미국의 심리학자 제프리 밀러Geoffrey Miller와 철학자 데니스 듀턴Denis Dutton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예술적 능력은 안목 있는 여성이 남성을 선택하는 기준"이라고 주장했다.

"나는 생존에 별 도움이 안 되는 예술 활동에 귀중한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할 정도로 남들보다 뛰어난 육체적 능력과 자원을 소유하고 있다!" 이 정도면 이성의 관심을 끌 만하지 않은가(홍적세의 예술가들은 분명히 빈민층에 속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예술 활동이란 재능 있는 예술가들이 눈 높은 여성을 짝으로 영입하는 홍보 수단에 불과하다.

스티븐 핑커는 언제부턴가 예술이 바로 이 피드백 회로에서 벗어나, 독립적으로 쾌락 중추를 자극하는 행위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즐거운 적응’을 위해 탄생했던 예술이 언제부턴가 적응이라는 타이틀을 던져 버리고 오직 즐거움을 창출하는 수단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중요하다고 해서 반드시 적응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엘렌 디사나야크Ellen Dissanayake는 "인류의 역사에서 예술과 종교는 일주일에 한 번쯤 관심을 갖거나, 딱히 할 일이 없을 때 시간을 때우거나, 마음대로 거부할 수 있는 여가 활동이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인간이 최종승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임기응변과 창의력,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회적 생활 방식을 추구한 덕분이었다.

디사나야크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은 인간이 친사회적 성향을 갖게 된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예술을 꼽았다.

예술을 매개체로 삼아 강렬한 감정을 공유한 사람들 사이에는 일종의 공동체 의식이 형성된다.

과학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이론이 상상력과 창의력의 산물임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현실이라는 견고한 성의 레고 블록을 완전히 해체한 후 새로운 방식으로 재조립하여,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간과했던 놀라운 진실을 발견했다. 그가 상대성이론을 구축한 과정은 가장 높은 수준의 창조적 예술 활동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캐나다 출신의 천재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Glen Gould(1932~1982)는 바흐의 음악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그의 선율은 전치轉置와 반전, 역행을 정신없이 반복하면서도 새롭고 완벽한 하모니를 창출한다… 이것이 바로 바흐가 천재임을 보여 주는 확실한 증거다."

아인슈타인의 천재성도 이와 비슷하다. 그는 기존의 이론을 쌓아 올린 벽돌을 낱낱이 해체한 후, 새로운 개념이 적용된 청사진을 토대로 처음부터 다시 쌓아 올렸다. 흥미로운 것은 아인슈타인이 자신의 연구 과정을 종종 음악에 비유했다는 점이다.

그는 가끔 방정식과 수학 기호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상대성이론이 지배하는 우주의 영상을 머릿속에 그려 보곤 했다. 우주의 리듬을 듣고 패턴을 상상하면서 현실 깊은 곳에 숨어 있는 통일성을 찾아내는 것. 이것이 바로 아인슈타인이 실행했던 예술이다.

치열한 전투에서 승리하려면 두 부대가 모두 필요하듯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려서 성공적으로 구현하려면 창의력과 결속력을 발휘해야 한다.

브라이언 보이드는 그의 저서 《이야기의 기원On the Origin of Stories》에서 "예술은 사회성을 키우고, 상상력을 자극하고, 스스로 개척한 삶에 자신감을 불어넣음으로써 인간과 세상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꿔 놓았다."고 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그날 있었던 일은 ‘안타깝지만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사고였을 뿐이다. 그러나 나와 우연히 마주친 개가(고의는 아니었지만) 나 때문에 죽었다는 것은 결코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었다.

미국의 시인 제인 허시필드Jane Hirshfield는 "새로운 이미지에 적절한 어휘를 구사하면 존재의 폭이 확장된다."고 했고,19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솔 벨로Saul Bellow는 인식의 폭을 확장시키는 예술 특유의 능력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진실의 겉모습일 뿐이다. 오직 예술만이 자부심, 열정, 지성, 습관을 초월하여 보이지 않는 진실에 다가갈 수 있다. 바로 이것이 또 하나의 진실이자 진정한 진실이다. 예술이 없다면 진정한 진실이 우리에게 던지는 힌트를 포착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존재는 실용적인 언어로 번역될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삶의 일부라고 오해할 것이다."2

경직된 믿음에서 벗어나 수천 년에 걸쳐 개발되어 온 창조적 본능은 콘래드가 말한 감정의 세계를 누비면서 솔 벨로가 말한 ‘진정한 진실’의 속삭임을 들었다. 특히 글을 쓰는 작가들은 주인공을 통해 인간사를 조명하는 가상의 세계를 창출하여, 독자들에게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기회를 제공했다. 복수와 충성으로 가득 찬 오디세우스Odysseus의 파란만장한 여행, 레이디 맥베스Lady Macbeth와 욕망, 자책의 갈고리, 홀든 콜필드Holden Caulfield와 주체할 수 없는 반항, 애티커스 핀치Atticus Finch와 침묵의 힘, 엠마 보바리와 인간관계의 비극, 도로시와 자신을 찾아 떠나는 구불구불한 길… 이 작품(소설)들은 다양한 이야기를 통해 예술적 진리를 통찰하고, 사람들이 대충 알고 있던 인간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시각과 청각에 기초한 예술도 마찬가지다. 음악과 미술은 콘래드의 말대로 "지식을 초월한 곳에서" 감정을 사정없이 자극한다. 벨로의 목소리는 우리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현실을 이야기하고, 프란츠 리스트Frantz Liszt의 ‘죽음의 춤Totentanz’*은 본능적인 육감을 자극한다. 또한 브람스의 교향곡 3번은 이루어지지 않은 소망을 떠올리게 하고, 바흐의 샤콘느Chaconne**는 숭고함의 극치이며,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의 ‘환희의 송가Ode to Joy’에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희망적인 메시지가 담겨 있다. 가사가 있는 곡으로 레너드 코언Leonard Cohen의 ‘할렐루야Hallelujah’는 더할 나위 없는 진정함으로 불완전한 삶을 찬양하고, 주디 갈랜드Judy Garland의 ‘무지개 너머Over the Rainbow’는 어린 시절을 동경하는 순수한 마음이 담겨 있으며, 존 레논John Lennon의 ‘이매진Imagine’은 이상적인 세상을 그리며 부드러우면서도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누구나 인생에서 잊지 못할 순간이 있듯이, 평생 잊지 못할 감동을 받은 책이나 영화, 안무, 그림, 또는 음악이 있다. 우리는 이런 매혹적인 경험을 통해 삶의 본질적인 특성을 과도하게 소비하고 있지만, 일상적인 삶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있다고 해도 아주 드문) 통찰력을 제공하므로 ‘영양가 없는 음식’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음악적 선율을 들으면 무언가가 느껴진다. 그러나 노래를 들으면 ‘생각을 느낀다.’"

하버그의 말대로 생각은 지적인 행동이고 느낌은 감정적이지만, ‘생각을 느끼는 것’은 예술적 과정이다.

프랑스의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주장대로, 이것은 축하해야 할 일이다. 그는 오직 예술을 통해서만 다른 사람의 비밀스런 우주로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그것은 별과 별 사이를 오가는 진정한 여행이다. 의식이 개입된 직접적인 방법으로는 결코 이런 여행을 떠날 수 없다."

나는 프루스트의 관점이 현대물리학과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런 말을 한 적도 있다. "진정한 발견은 낯선 지역을 찾아갈 때가 아니라, 다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이루어진다. 다른 사람의 눈, 수백 개의 다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완전히 다른 세상이 모습을 드러낸다."

"자신의 얼굴을 보고 싶을 때는 거울을 보고, 자신의 영혼을 보고 싶다면 예술 작품을 보라." 1925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던 조지 버나드 쇼의 말이다.

성능 좋은 천체 망원경을 동원하면 수백만 년, 또는 수십억 년 전에 방출된 빛도 볼 수 있다. 이들 중에는 오래전에 수명을 다하여 죽은 별도 있지만, 빛이 지구에 도달하려면 수백만 년, 또는 수십억 년이 걸리기 때문에 여전히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 빛은 물체가 현존한다는 증거가 아니라, 한때 그곳에 존재했음을 보여 주는 흔적일 뿐이다.

당신과 나의 몸에서 방출되거나(복사) 반사된 빛 중 아무런 방해 없이 지구 탈출에 성공한 부분은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방대한 우주로 나아가고 있다.

사람들은 과연 어떤 삶을 기억해 줄 것인가? 어떤 예술 작품이 오래 살아남는가? 우리의 삶과 작품이 그들과 함께하려면 어떤 조건을 만족해야 하는가?

랭크의 주장에 의하면 예술을 창조함으로써 죽음에 대항하는 것이야말로 죽음을 극복하는 올바른 길이다.

"모든 인간은 목에 굴레를 두르고 태어난다. 그러나 죽음이 코앞에 닥친 후에야 자신을 평생 동안 따라다닌 삶의 위험을 깨닫는다."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는 죽음을 부정하는 마음을 극단적인 문학으로 승화시켰다. "나는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질렀다. 손톱으로 허벅지를 긁었고,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관 바닥을 타고 흘렀다. 손가락 피부가 찢어지고 손톱이 닳을 정도로 나무 벽을 미친 듯이 긁다가 완전히 탈진해 버렸다."

미국의 시인 실비아 플라스Sylvia Plath는 이 정서를 좀 더 감정적으로 표현했다. "오, 신이여, 저는 당신과 같지 않습니다 / 당신의 공허한 어둠 / 그곳에 종잇조각처럼 빛나는 판에 박힌 별들 / 나는 영원이 지루합니다. 저는 그런 것을 윈치 않았습니다."

첼리스트이자 지휘자인 파블로 카살스Pablo Casals는 ‘평범한 행동에 열정을 부여하고, 일시적인 것에 영원을 달아 주는 것이 음악의 힘’이라고 했다.

우리는 음악을 통해 더 큰 무언가의 일부라는 느낌을 갖게 된다. 조지프 콘래드는 이를 두고 ‘외로운 마음들을 하나로 묶어 주는 막강한 힘’이라고 했다.

1960년대 말, 맨해튼의 한 초등학교 3학년 교실에서 저버 선생님Mrs. Gerber이 학생들에게 숙제를 내 주었다. "어른 한 사람을 골라서 직업을 물어보고, 그런 일을 하게 된 동기를 인터뷰해서 보고서로 제출하세요." 그 교실에 앉아 있던 나는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다가 가장 쉬운 방법을 떠올렸다. 오케이, 우리 아버지를 인터뷰하면 된다. 작곡가이자 연주자였던 아버지는 누군가가 자신의 학력을 물어올 때마다 "SPhDSeward Park High School dropout(시워드 고등학교 중퇴)"라며 익살스런 표정을 짓곤 했다.* 아버지는 10학년(고등학교 1학년) 때 교과서를 집어던지고 집을 나와 곡을 쓰고 노래하면서 전국을 돌아다녔다. 저버 선생님이 내준 숙제를 제출한 지도 근 50년이 넘었지만, 그때 아버지가 했던 한마디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 PhD는 미국에서 ‘박사’라는 뜻이다.)

나: 아버지는 왜 남들 다 다니는 학교를 버리고 음악을 택하셨어요?
아버지: 외로운 게 싫어서 그랬단다.

아버지가 1940~1950년대에 작곡한 발라드와 피아노곡을 지금도 가끔이나마 듣는 사람은 이 세상에 나밖에 없을 것이다. 나에게 이 곡들은 보물과도 같은 존재이며, 음악을 인생의 목표로 삼았던 젊은 시절의 아버지와 지금의 나를 이어 주는 유일한 연결 고리이기도 하다.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영웅, 헬렌 켈러Helen Keller가 바로 그 증인이다.

1924년 2월 1일, 뉴욕시의 WEAF 라디오 방송국은 뉴욕 필하모니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생방송으로 내보냈다. 때마침 집에서 라디오 앞에 앉아 있던 헬렌 켈러는 스피커의 진동판에 손을 얹고 불후의 명곡을 들었다. 아니, 손으로 ‘느꼈다’. 그녀의 손은 각 악기 소리를 구별할 수 있을 정도로 예민했다고 한다. "오케스트라의 화음이 격정적으로 치닫다가 갑자기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손은 그것이 사람의 목소리임을 금방 알 수 있었지요. 뒤로 갈수록 합창단은 점점 더 환희에 찬 목소리로 기쁨을 노래했고, 저는 심장이 멎는 듯한 감동에 빠져들었습니다." 베토벤의 교향곡은 헬렌 켈러의 영혼을 뒤흔들면서 영원을 향해 치닫는 것 같았다.

그녀는 감상을 마친 후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어둠과 멜로디, 그림자와 소리가 방안을 가득 메웠습니다. 그 순간, 그토록 위대한 곡을 만든 음악가가 저와 같은 청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을 떠올렸습니다. 청력을 잃은 고통 속에서도 사람들에게 그런 엄청난 기쁨을 가져다준 불멸의 정신력에 경탄할 뿐입니다. 저는 라디오 앞에 앉아서 스피커에 손을 얹은 채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환희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그와 내가 똑같이 느꼈을 고요함 속에서 거대한 파도처럼 부서지는 웅장한 교향곡을 느끼면서 말이지요.39

모든 문화권에는 영원히 변치 않는 숭고한 개념이 존재한다.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추상적 영원함’은 인간이 항상 동경해 오면서도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신기루였다. 거기에 남들보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간 사람은 삶의 관점이 통째로 달라지는 희귀한 경험을 겪곤 한다(행복한 만남이나 비극적인 만남, 명상적, 또는 화학적인 유혹, 종교적, 또는 예술적인 경험을 통해 시간이 사라진 듯한 느낌을 받는다).

수십 년 전에 나를 포함한 아홉 명의 청소년들이 버몬트Vermont주의 깊은 숲속에서 생존 훈련을 받은 적이 있다. 하루 훈련을 마치고 밤이 되어 모두 텐트 안에서 자고 있는데, 갑자기 훈련 교관의 불같은 명령이 떨어졌다. "모두 기상! 신속하게 옷 입고 텐트 앞에 집합!" 비몽사몽간에 대충 옷을 걸치고 나왔더니, 난데없이 야간 행군을 간다는 게 아닌가. 우리는 한 줄로 서서 컴컴한 숲을 헤치며 걷기 시작했다. 수시로 나타나는 아름드리 관목을 피해 가는 것도 문제였지만, 허리까지 빠지는 진흙 늪은 정말 압권이었다. 온몸에 오물을 뒤집어쓰고 물에 빠진 생쥐처럼 홀딱 젖은 채 추위에 덜덜 떨다가 마침내 공터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마치 천국에 도착한 것처럼 기뻐 날뛰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교관은 침낭 3개를 던져 주며 알아서 자라고 했다. 인원은 아홉인데 침낭이 달랑 3개뿐이라니! 그러나 우리는 항의를 해 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침낭의 안감을 끄집어내서 임시변통으로 이불을 만들어 덮고 잠을 청했다. 당연히 아이들 입에서는 불평과 원망 어린 한탄이 쏟아져 나왔다. 훈련을 포기하고 내일 아침에 집에 가겠다는 아이도 있었고, 아무 말 없이 눈물만 떨구는 아이도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밤하늘에 오로라aurora borealis*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정말이지 난생처음 보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밤하늘을 빼곡하게 채운 별을 배경으로 비단 자락 같은 빛줄기가 출렁대던 모습… 마치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것 같았다. 힘든 행군과 허리까지 빠지는 늪, 그리고 살을 에는 듯한 추위는 사람과 자연, 그리고 우주의 일부가 되어 멀리 사라져 버렸다.

지구의 한 지점에 서 있던 나는 춤추는 불빛에 에워싸였고, 결국 멀리 있는 별들에게 흡수되었다. 그날 새벽에 잠들 때까지,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오로라와 별을 쳐다봤는지 아무런 기억도 없고, 굳이 알고 싶지도 않다. 몇 분이건 몇 시간이건,(지속) 시간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날 내가 잠시나마 시간을 초월한 경험을 했다는 점이다.

우주의 겉모습이 아무리 안정적으로 보여도 그 안에는 변덕스럽고 불안정한 속성이 자리 잡고 있다.

진화가 만들어 놓은 구조를 엔트로피가 약화시키는 것은 사실이지만, 엔트로피와 진화가 반드시 반대 방향으로 진행될 필요는 없다.

볼프강 파울리Wolfgang Pauli(그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자네 생각이 느린 건 걱정 안 해. 자네의 논문이 그 느려 터진 생각보다 먼저 출판될까 봐, 그게 걱정이라구!"8)는 2개의 전자가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거리에 양자역학적 한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2개의 동종 입자는 동일한 양자 상태에 놓일 수 없다. 그러나 지금은 대략적인 설명으로 충분하다).

그렇다. 모든 만물이 그렇듯이 당신의 몸도 부피가 커지다가 결국은 산산이 분해될 것이다.

그렇다. 별로 달가운 사실은 아니지만, 우주가 팽창할수록 천문학은 퇴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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