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세계 명작 소설이나 소녀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책 속에 등장하는 낯선 문물에 열광했다.

음식 이야기는 언제나 나를 사로잡았다. 소설 속에서는 내가 한 번도 맛본 적 없고 만져본 적 없는 음식이 쏟아져 나왔다.

책이 불러일으킨 상상 속에서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었고, 어디로든 갈 수 있었고, 누구든 만날 수 있었다. 나와는 상관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살아보는 것. 그건 내게 주어진 어마어마한 자유의 경험이었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어른들이 내 주위에 그어놓은 한계를 넘어 종횡무진 활약했다.

백과사전이나 문학 교과서에 요약된 굵직굵직한 줄거리나 주제, 교훈 따위가 아니라, 그 주변에 흩어져 있는 낯선 단어들, 정체 모를 물건들, 신기한 음식들. 어떻게 보면 사소하기 그지없는 디테일이야말로 내가 다른 세상과 다른 삶을 꿈꿀 수 있는 마법의 주문이다.

번역을 하는 일을 하다 보니 그 시절 미처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되었다. 내게 그토록 신비롭게 들렸던 마법의 주문들 중 일부는 사실 잘못된 번역이었으며, 그 환상적인 뉘앙스는 번역가가 음식의 이름을 적절한 우리말로 옮기지 못해서 생긴 오해일 뿐이었다는 것. 그렇게 환상이 깨질 때마다 나는 당황했고 배신감마저 느꼈다.

나 스스로가 번역가이니만큼 섣불리 비난할 수 없었다. 외국 문물을 ‘적절하게’ 옮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아니까.

번역된 문장은 결국 번역가 자신이 쓴 문장이므로, 번역가 고유의 생각, 가치관, 판단, 개성이 개입되게 마련이다. 더 나아가 한국어로 번역된 문장이라면 한국어라는 언어가 비롯된 한국적 토양, 사회, 문화, 사고방식이 담길 수밖에 없다. 따라서 번역문은 원문의 의미를 잃을 뿐만 아니라, 원어에는 없었던 새로운 의미를 낳기도 한다.

‘라즈베리 코디얼’을 마시는 소녀와 ‘나무딸기 주스’를 마시는 소녀는 외모도, 성격도, 말투도 다를 것만 같다. 그러므로 진저브레드, 블루베리, 라즈베리 코디얼이 나오는 책을 읽은 독자의 경험과, 생강빵, 월귤, 나무딸기 주스가 나오는 책을 읽은 독자의 경험 역시 다를 수밖에 없다.

훌륭한 책은 번역판이 많이 나오면 나올수록 이롭다는 말이 있다. 다양한 번역이 나올수록 그만큼 다양한 의미가 생겨나고, 독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경험의 폭도 넓어지기 때문이다. 많은 소설을 읽을수록 다양한 삶을 체험할 수 있듯이 말이다.

이른바 세계 명작이라 불리는 작품들의 상당수가 서구 문학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오늘날 우리가 아는 문학이 얼마나 1세계 중심적인지 새삼 상기하게 된다.

사실 나는 문학 작품 속 음식에 대한 환상이라는 것이 구태여 큰 소리로 논할 가치가 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거나, 언젠가 제대로 된 지식을 접하고 ‘교정’되어야 할 사소한 오해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비슷한 책을 읽고 비슷한 환상을 떠올렸다면 그것은 더 이상 개인적인 오해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함께 나누고 이야기할 만한 공통의 ‘경험’인 것이다.

《하이디》에서 먹는 장면을 그렇게 자세하게 다룬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주인공들의 행복과 불행을 먹는 모습으로도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 소박하고 건강하고 자유로운 삶이 하이디에게는 행복이다.

도시에는 하이디가 사랑하는 것들이 없다. 할아버지도, 염소도, 향긋한 들꽃도, 바람에 흔들리는 전나무도, 하늘을 찬란한 빛깔로 물들이는 저녁노을도. 오로지 살풍경한 건물들만 빽빽이 늘어서 있는 도시의 삶이 하이디에게는 답답하고 무서울 뿐이다. 어른들은 하이디에게 알파벳 공부를 시키고, 복잡한 식사 예절과 공손한 말씨를 강요하며, 마음대로 밖에 나가서 뛰어놀지 못하게 방 안에 가두어놓는다. 하이디는 어른들의 구박과 업신여김 속에서 나날이 시들어간다. 밤마다 알프스가 그리워 눈물짓는 소녀에게 식욕이 생길 리 없다.

흰 빵은 하이디가 도시를 떠나야 하는 이유이지만, 한편으로는 하이디가 도시에서의 슬픔과 외로움을 끝까지 견딜 수 있는 힘이기도 하다.

길고 어려운 시기에 어떤 음식 하나가 우리에게 선사하는 힘이란 때로는 어마어마하다.

《하이디》의 등장인물들이 염소젖이나 치즈를 늘어놓고 그 색깔이며 질감이며 맛에 대해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 ‘먹방’을 펼치는 동안, 검은 빵은 그 배경에서 돌멩이처럼 아무렇게나 굴러다닐 뿐이었다.

내가 모르는 알프스 시골의 소박한 맛을 체험해보고 싶었다. 내가 겪어본 적 없는 ‘유럽식 가난’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아무리 가난이라 해도 한국의 구질구질한 가난과는 무언가 다를 것만 같았다. 김치나 소주 냄새와는 거리가 먼, 건강하고 고소하고 담백한 가난. 어린이책 삽화 속 백인 여자아이들처럼 예쁘고 깨끗한 가난.
이제는 그런 생각이 얼마나 철없는 것이었는지 안다.

한마디로, 나는 현실의 내가 절대로 가질 수 없는 모든 것을 ‘검은 빵’에 대입했던 것 같다.

역설적이게도, 내게 검은 빵이란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다.

공주의 삶을 생각하면 자동으로 왕자 또는 기사가 딸려온다. 마녀의 계략으로 죽음의 위기에 처했다가 왕자의 입맞춤으로 깨어난다든지, 이웃 나라 왕자와 정략결혼을 맺었는데 비천한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든지, 용에게 붙잡혔다가 기사에게 구출된다든지, 자신을 지키는 수호 기사와 사랑에 빠진다든지 하는 이야기들.

이렇게 보면 공주들의 삶이란 순전히 어떤 남자와 결혼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모든 것이 걸려 있는 것만 같다. 하지만 이건 공주들에 대한 편협한 고정관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공주들은 이외에도 다양한 인생 목표를 가지고 있을 테니까. 여왕이 되기 위해 제왕학과 외교술을 공부하는 공주들도 있다. 이웃 나라와의 전쟁에 나가서 용감무쌍하게 싸우는 무사 공주들도 있다. 문학과 예술의 후원자가 되어 수많은 예술가의 작품 활동을 지원하는 공주들도 있다. 철학과 그리스어, 고전 들을 섭렵하고 걸출한 논문을 써서 학계에 업적을 남기는 공주들도 있다. 그런가 하면, 백성을 잘 보살필 궁리를 하며 나라의 어둡고 외로운 곳들을 굽어보는 공주들도 있다. 굶주린 거지 소녀에게 건포도빵을 베푼 세라 공주처럼.

아버지 잃은 슬픔을 추스를 새도 없이 악독한 교장 선생에게 학대를 당하면서 춥고 배고픈 채로 나날이 노동을 해야 하다니. 한 아이에게는, 더구나 힘든 일 한번 해본 적 없이 곱게 자란 아이에게는 지나치게 가혹한 시련이었을 것이다.

세라는 단 하나의 일념으로 그 힘겨운 일상을 버텨낸다. 자신이 공주라는 생각. 비록 왕궁에서 쫓겨나 수모와 수치를 당하고 있지만 자신은 사실 공주이며,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지라도 공주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고 공주답게 처신해야 한다는 믿음.

세라가 생각하는 공주는 그렇게 왜곡된 이미지가 아니다. 그녀는 언제 어디서나 위엄과 기품을 지키고, 자신을 미워하거나 괴롭히는 사람들에게 너그럽게 대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무시하지 않고 그들에게 손을 내밀고, 작은 것 하나라도 베풀고 양보하는 공주이고 싶어한다. 그런 자세로 살고 싶어하고, 또 자신이 그런 사람임을 증명하고 싶어한다. 좋은 사람이고 싶다는 열망이 세라의 삶을 더 나은 곳으로 이끌고 고통을 견딜 정신적 힘을 준다. 세라가 자신이 공주라는 것을 잊지 않는 한 그 무엇도 그녀를 해치지 못할 것이고, 아무리 악한 세력이 그녀를 굴복시킬지라도 언제나 그들보다 그녀가 더 우월할 것이다. 이런 것을 우리는 고결함이라고 부른다.

대부분의 여자아이들은 분수에 맞게, 튀지 않게, ‘둥글게’ 주변에 맞춰 살기를 요구받으니까.

고통스러운 현실을 잊기 위해 그야말로 온갖 상상을 동원한다. 그럼에도 왕자에게 구원받는 상상은 단 한 번도 하지 않는다. 세라의 상상 속에서 그녀는 누군가에게 구출받는 존재가 아니다. 스스로 역경을 돌파하는 주인공이고, 고결한 이상을 수호하는 영웅이다. 세라가 상상하는 ‘공주’는 그 영웅 중 한 명이다.

《소공녀》의 결말에서 세라의 바람은 그대로 이루어진다. 잃어버렸던 재산을 되찾아서 그 돈으로 배고픈 아이들에게 빵을 나눠주는 일을 시작한 것이다. 세라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언젠가 유난히 춥고 배고팠던 겨울날, 기적처럼 손에 넣은 따끈따끈한 건포도빵 여섯 개 중 다섯 개를 자신보다 더 배고픈 거지 소녀에게 양보하는 선행을 베풀었기 때문이다. 그때 세라는 자신이 공주인 척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공주임을 자신에게 증명했다. 그녀가 원했던 대로, 영웅이 된 것이다.

영국인들은 건포도빵을 유독 사랑했다. 자연히 영국 및 아일랜드 소설 속에서도 건포도빵은 자주 등장한다. 소공녀 세라의 건포도빵을 필두로, 《피터 래빗 이야기》에서 엄마 토끼가 숲 건너 빵집에서 갈색빵 한 덩어리와 함께 사 오는 빵이 건포도빵이다. 제임스 조이스의 <우연한 만남>에서 학교를 땡땡이친 두 주인공이 강가에 앉아 나누어 먹는 빵도 건포도빵이고, 《비밀의 화원》에서 디콘의 엄마가 신선한 우유와 함께 바구니에 넣어 아이들에게 보내주는 것도 건포도빵이다. 열거하자면 수도 없이 많다.

아무리 소설의 힘이 세다고 해도, 입맛에 안 맞는 음식을 맞도록 만들기는 힘든 법이다.

프랭크 올리버는 엄숙하게 말했다.
"롤빵에는 우리에게 한없는 위안을 주는 무언가가 있어요."

롤빵을 구할 수 있는 곳도 없다. 프랜차이즈 베이커리에서도, 동네 빵집에서도, 천연 효모 제과점에서도, 마트의 빵 코너에서도, 백화점 식품관에서도, 디저트 카페에서도, 롤빵이라는 이름의 빵은 팔지 않는다. 패밀리 레스토랑에서는 부시맨 브레드를, 이탈리안 비스트로에서는 마늘빵을, 경양식 식당에서는 모닝빵을 주지만, 롤빵이라는 이름의 식전 빵을 주는 식당은 찾아볼 수 없다. 롤빵을 취급하는 곳은 오로지 소설책 속 세상뿐이다.

그 순간 둘 사이에는 강렬한 공감대가 오간다. 롤빵을 좋아하는 마음이 이심전심 통하면서 둘은 롤빵에 찬사를 보내며 서로 연신 맞장구를 친다. 그 빵은 참으로 맛있고, 참으로 달콤하고, 참으로 폭신폭신하고, 사람을 편안하게 해준다면서. 숙녀는 마침내 프랭크의 데이트 신청을 받아들인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에 나오는 클로이 아줌마에게도 옥수수빵은 특별한 음식이다. 그녀는 켄터키의 한 농장주 집안에서 요리사로 일하는 노예인데, 음식 솜씨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파이, 푸딩, 파운드케이크, 스튜 등 못하는 음식이 없는 그녀는 평소 주인 나리와 마님, 도련님의 식사를 살뜰히 차려낼 뿐더러, 만찬이나 파티를 열라치면 기막힌 음식들로 손님치레를 해내서 열렬한 찬사를 듣는다.
하지만 그녀가 요리사로서 가장 큰 보람을 느낄 때는 주인집의 으리으리한 저택에서 백인들을 위한 상차림을 감독할 때가 아니라, 자신의 아늑한 오두막에서 남편과 자식들의 식사를 준비하는 시간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입맛에 꼭 맞는 옥수수 팬케이크를 부치는 것만큼 행복한 일도 없다. 아내가 요리하는 동안 톰은 소박한 테이블에 앉아 열심히 알파벳 공부를 하고, 아이들은 펄쩍펄쩍 뛰어놀며 갓난쟁이 막내를 데리고 장난을 친다. 불빛이 새어 나오는 아늑한 오두막 앞 텃밭에는 딸기와 라즈베리, 능소화와 분꽃이 탐스럽게 자라난다. 화목한 가정과 안락한 집과 적성에 맞는 일까지 가진 클로이 아줌마는 자신이 노예 중에서도 아주 운이 좋은 축이라고 생각하며 만족한다.

그녀는 요리사로서 자기 분야와 능력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다른 흑인들은 물론이고 백인 나리들이나 심지어는 마님조차도 클로이 아줌마의 부엌일에는 함부로 간섭하지 못한다. 클로이 아줌마는 치킨 파이 껍질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잔소리하는 마님에게 "귀부인 주제에 주방 일에 참견하는 게 아니다"라고 면박을 주고, 백인 도련님에게 이렇게 맛있는 푸딩을 먹을 수 있는 집안에서 태어난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인지 알라며 거드름을 피우는가 하면, 어떤 백인 나리가 ‘훌륭한 파이에 필요한 몇 가지 요건’을 알고 있는 걸 보니 음식에 대해 제법 일가견이 있는 것 같더라며 백인의 지식을 평가하기까지 한다. 게다가 주인 나리가 돈이 없다는 이유로 톰을 되사 오지 못하자, 그녀는 도시의 제과점에서 제빵사로 일해 돈을 벌어 남편의 몸값에 보탬으로써 전문가로서의 실력을 유감없이 증명하기도 한다.

슬픈 일이다. ‘메리 포핀스’ 시리즈를 보다 보면, 나 역시 뭔가 아주 중요한 걸 잊어버린 게 아닐까 하는 조바심이 든다. 비록 나는 제인이나 마이클처럼 신나는 유년 시절을 보낸 것 같지는 않고 이제 와서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지만, 어쩌면 나도 나름대로 엄청나게 행복한 일들을 겪었는데 어른이 되면서 잊어버린 건 아닐까 싶은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무지막지한 손해가 아닌가! 하지만 그 시절을 아무리 돌이켜보려 해도, 그때의 기억들은 이미 반쯤은 잊혔고 반쯤은 돌이킬 수 없이 변형되어버려서 더는 알아볼 수가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메리 포핀스가 선보이는 마법을 지켜보면서, 그 마법이 나에게 알려주는 것들을 꿰어 맞춰보는 것뿐이다. 아주 조금씩이지만 거기에서 실마리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도 나이가 몇 살만 더 들면 그런 체험은커녕, 메리 포핀스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조차 잊어버릴 것이다.

금종이들은 하늘에 달라붙는 것과 동시에 반짝반짝 빛을 내뿜기 시작한다. 그 광경을 본 제인과 마이클은 아연히 서로에게 묻는다. "별이 금종이일까, 금종이가 별일까?"

‘메리 포핀스’ 시리즈는 이 질문을 끊임없이 던진다. 현실과 환상을 던져놓고, 둘 중 어느 쪽이 진짜일지를 묻는다. 우리가 현실이라고 알고 있었던 것이 사실은 환상이고, 환상이었다고 알고 있었던 것이 사실은 현실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정확히 어느 쪽이 맞다는 답을 주지 않고 그저 질문만 남기면서 늘 이야기를 끝맺는다. 메리 포핀스의 마법은 바로 이 모호함에서, 매혹적이고도 혼란스러운 현실과 환상의 중간 지대에서 펼쳐진다.

우리 자신은 가상이 아니라는 보장이 있나? 어쩌면 우리도 어떤 책 속 인물들이고, 우리가 사는 이 세상도 책 속 세상이며, 누군가가 우리 삶을 지켜보면서 재미있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모든 게 아찔하게 뒤바뀐 이 세계에서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그것의 모방인지는 의미를 잃는다. 거울 속에 비친 무수한 거울들처럼 그것들은 모두 현실이면서 동시에 모두 환상이다.

제인과 마이클은 종이 별을 ‘영원히’ 간직하겠다는 다짐을 지키지 못하지만, 그래도 그리 슬픈 일만은 아닌지도 모른다. 그 금종이들은 하늘에 붙어서 영원히 누구나 볼 수 있게 되었으니까.

독자들의 궁금증을 해결하겠다고 시작한 글이 오히려 더 많은 의혹으로 이어진 것 같아 참으로 면구스럽다.

수프에는 원초적인 마법의 힘이 있는 것 같다.

마법의 수프에 정확히 무슨 재료가 들어갔는지, 어떤 맛이 나는지, 색깔이나 식감이 어떤지는 알 수 없다. 미하엘 엔데는 우리에게 그런 디테일을 전혀 알려주지 않는다. 그저 ‘맛있고 영양이 풍부한 수프’라고만 할 뿐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각자가 생각하는 최고의 수프를 떠올리기만 하면 된다. 육개장, 클램차우더, 굴라시, 콩소메, 보르시치…… 그 어떤 수프를 상상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동화가 발휘하는 강력한 마법의 힘이니까. 전세계의 어느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고 즐길 수 있는 이야기의 힘.

옛날이야기에서 이런 말썽을 일으키는 마녀는 한둘이 아니다. 마녀들은 사악한 저주가 걸린 물건을 선물하고, 공주를 영원한 잠에 빠뜨리고, 용맹한 왕자의 눈을 멀게 하는가 하면, 아리따운 아가씨를 탑에 감금해놓고, 마녀 집회에 참석하고…… 그렇게 바쁘게 돌아다니다가 집에 오면,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 참으로 부지런하게도, 수프를 끓인다.

얼마나 많은 여자가 자신이 저질렀거나 저지르지 않은 마법의 대가로 목숨을 잃었을까? 그리고 그들의 죽음 위에서 또 얼마나 많은 동화가 만들어졌을까? "옛날 옛적에……"로 시작해서 21세기까지 전해지는, 끊임없이 솟아나는 마법의 수프 같은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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