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는 자아(‘저자’라고 생각되는 자아)가 일상생활을 하는 자아와 같지 않다는 이런 관념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불쌍한 어린 넬8을 죽음에 이르게 한 자가 자식들을 위해 부지런히 크리스마스 게임을 만들던 유쾌한 가장 찰스 디킨스가 아닌 게 확실한가요? 디킨스가 펜을 든 자신의 손이 무자비하게 넬을 죽이는 내내 눈물을 흘렸다는 사실을 떠올려보세요.

아뇨, 넬을 죽인 건 그의 내면에 잉크로 된 촌충처럼 도사리고 있던 시체 애호가였습니다.

이자크 디네센이 《지킬 박사와 하이드》를 읽은 게 아닌가 싶네요. 그녀라면 읽을 필요가 없었겠지만 말이지요. 그런 식의 변신이라면 몸소 겪어서 익숙했을 테니까요. 그녀는 평범한 인간일 때는 카렌 블릭센으로, 소설가일 때는 이자크 디네센으로 살았지요. 일부 여성 작가들처럼 지킬 박사에서 한 술 더 떠 성별까지 바꾸어서요.

《지킬 박사와 하이드》는 오랜 늑대인간 이야기(평범한 남자가 특정 상황만 되면 날카로운 이빨의 미치광이로 돌변한다는 이야기)에도 영향을 받았지만, 도플갱어에 대한 옛이야기에도 큰 빚을 지고 있습니다.

일부 아프리카 사회에서는 불행을 막기 위해 일란성 쌍둥이를 죽였는데 아직까지 우리는 일란성 쌍둥이를 뭔지 모르게 기괴하다고 여깁니다. 똑같이 복제된 생김새가 우리의 고유성을 부정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닮은꼴은 쌍둥이나 형제보다 더합니다. 그는 ‘나’이니까요. 나의 가장 본질적 특징(외모, 목소리, 심지어 이름까지)을 공유하는 나이지요.

스코틀랜드의 민속 신앙에서는 자신의 닮은꼴을 만나는 것을 죽음에 대한 징조라고 봅니다.

고대 그리스 신화의 나르시스 이야기는 자신의 닮은꼴을 만나는 상황을 경고하는 미신과 관련이 있을 수 있지요. 나르시스가 자신의 비친 얼굴, 즉 자기 자신이지만 반대쪽 수면에 비친 자신을 보고, 그 얼굴이 그를 죽음으로 유인하니까요.

누군가 여러분이 농가에서 소들에게 마법을 거는 장면을 봤다고 칩시다. 그런데 같은 시간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을 봤다는 증언이 나온 겁니다. 그러면 결백을 증명할 수 있겠다 싶겠지만 이는 오히려 여러분이 닮은꼴을 만들어낼 능력이 있다는 것을, 즉 마녀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결과만 낳습니다(법정에서 ‘유령의 증거’를 금지하고 나서야 뉴잉글랜드 마녀재판은 마침내 끝이 났지요).

〈스텝포드 와이프〉 〈디 아더〉 〈데드 링거〉와 같은 ‘닮은꼴’ 영화들을 본 영화팬이라면 알 겁니다.

유형의 ‘닮은꼴’을 다룬 초기 영문학 작품 중 하나가 제임스 호그의 《사면된 죄인의 고백》(1824)이지요. 구원받을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에 마음껏 죄를 지어도 된다고 확신하는 이 책의 주인공은 긴 잠에서 깨어난 뒤 자신과 똑같이 생긴 남자가 고약한 짓을 저지른 걸 깨닫고 대신 책임을 지게 됩니다.

에드거 앨런 포의 이야기 〈윌리엄 윌슨〉(1839)도 비슷하지요. 여기서 주인공은 양심적으로 참견을 해대는, 자신과 외모도 이름도 똑같은 남자에게 평생을 시달립니다. 그러다 결국 또 다른 윌리엄 윌슨, 고로 자신을 죽이면서 생을 마감하지요.

두 명의 윌리엄 윌슨은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죽음을 공유한 사이이므로 나머지 한쪽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당연히 마법의 그림 속 주인공, 도리언 그레이13(오스카 와일드의 소설 주인공―옮긴이)도 있습니다.

이 책의 교훈은 이겁니다. 마법의 그림이 있으면 함부로 건드리지 마라. 그냥 가만히 둬라.

여기에 보탤 이야기가 하나 더 있어요. 《다섯 손가락의 야수》14라는 묘하게 무서운 작품입니다. 적어도 10대 시절, 밤에 아기 돌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읽었을 때는 이상하게도 무섭더군요.

최고의 메타소설 《마녀의 망치》15에 나오는, 마녀의 꾐에 넘어간 음경이 주인의 몸에서 떨어져 나와 새둥지에서 잠을 잔다는 이야기를 떠올릴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은 코가 한 남자에게서 도망쳐서 제복 차림의 궁중 관리가 되었다가 마침내 붙잡혀 다시 몸에 붙여진다는 내용을 그린 고골리의 소설 〈코〉가 떠오르시나요?

삼촌이 죽고 손이 담긴 소포가 도착했을 때 그가 받았을 충격을 상상해보세요. 손이 유언장을 위조해 삼촌의 몸에서 자신을 잘라낸 뒤 우편으로 부치도록 지시하다니요. 멀쩡히 살아 있는 손은 밖으로 뛰어나와 커튼을 기어오르고 주인공을 괴롭히며 많은 닮은꼴들이 그런 것처럼 그의 인생을 망치기 시작합니다(이를테면 편지도 쓰고 주인공 이름으로 서명도 합니다. 손으로서는 불필요한 능력이 아닐 수 없지요).

남자가 손을 파괴하지만 손 역시 남자를 파괴하면서 이 책이 어떤 문학적 혈통을 물려받았는지 분명히 보여주지요.

만화 위에는 이런 설명이 붙어 있어요. "움직이는 손가락이 글을 쓴다. 집필을 끝낸 뒤엔 3주에 걸쳐 20개 도시로 북투어를 다닌다."16 물론 현실에서 북투어를 가야 하는 건 손가락이 아니라 불운한 인간의 몸입니다. 작가의 그 빌어먹을 손가락, 실제로 글을 써내려간 그 녀석은 북투어는 나 몰라라 하고선 혼자 어딘가에서 햇볕을 즐기는 동안 말이지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훨씬 멀리 나아갔습니다. 〈보르헤스와 나〉라는 작품에서 그는 그저 손이나 손가락에 만족하지 않고, 지킬 박사와 하이드라는 주제에 작가를 결합시켜 자기 자신(보르헤스)을 둘로 나눕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 보르헤스라는 사람에게 벌어지는 일이다."17 스스로를 ‘나’라고 칭하는 나머지 반쪽이 이렇게 말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보르헤스는 자신과 취향을 공유하지만 "헛되이 배우의 상징으로 바꾸는 방식을 취한다. 우리의 관계가 적대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과장일 것이다. 내가 살아가고, 내 자신이 계속 살아가게 하므로, 보르헤스가 용케 자신의 문학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고 그 문학이 나를 정당화시켜 주는 것이다"라며 말을 이어나가지요.

오직 나의 일부 순간들만이 그의 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그가 사물을 왜곡하고 과장하는 괴팍한 습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나는 조금씩 그에게 모든 것을 넘겨주고 있다.(…) 나는 나 자신이 아니라(만약 내가 어떤 사람인 게 맞다면) 보르헤스로 남을 수밖에 없다."

작가는 글을 쓸 때 자신을 작품(가식과 거짓 요소들을 품고 있지요) 속에 집어넣는데, 이렇게 하면 할수록 자신의 진짜 자아라 할 수 있는 것을 잃어버립니다. 하지만 심지어 이렇게 적으면서도 보르헤스는 글을 씁니다. 그는 이 역설을 잘 압니다. 다음 구절로 글을 마무리하는 걸 보면요. "우리 중 누가 이 글을 쓴 건지 모르겠다."

말하기의 역사는 길지만 글쓰기는 그렇지 않습니다. 말하기는 대부분 유아기에 습득하지만, 읽기는 평생 못 배우는 사람이 많습니다. 읽기는 해독이고, 해독을 하려면 임의적인 표식의 집합, 즉 추상적인 공식을 배워야 하지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글을 깨친 사람은 아주 소수였습니다. 읽기는 희귀한 기술이었으며, 글을 읽을 줄 안다는 건, 즉 이상하게 생긴 표식을 쳐다보면서 멀리 있는 누군가가 보낸 메시지를 술술 풀어내는 건 경외의 대상이었어요.

신도 구원받을 사람들의 이름이 적힌(그들이 직접 쓴 건 아니지만요) 책을 가지고 있었지요. 둘 중 어디든 한 번 이름이 오르면 지우기 어려웠지만, 그래도 언제나 악마의 악한 책보다는 신의 선한 책에서 이름을 없애는 게 더 쉬웠어요.19

기록된 글은 고정되고 변치 않는 성질을 얻게 되었지요.

주목할 건, 신약에 등장하는 예수는 이야기꾼이라는 겁니다. 예수는 우화로 가르치지 글로 적지 않습니다.20 그 자신이 말씀이요, 소망하는 곳으로 흘러가는 성령인 까닭이지요. 또한 음성처럼 유동적이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어요. 하지만 그의 원수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법문, 즉 기록된 글을 고수합니다.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책으로 배웠다는 점을 생각하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지요.

존 키츠는 자신의 묘비명에 다음과 같이 새겼습니다. "여기 물 위에 이름을 새긴 사람이 잠들다." 이름을 기록하면서 영혼의 유동성까지 한꺼번에 얻다니, 참으로 탁월한 안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카라바조의 그림에서 사도 마태가 그토록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의 손에는 펜이 들려져 있고, 곁에선 천사가 살짝 강압적인 표정을 지으며 뭐라고 쓸지 지시하고 있잖아요.

글쓰기는 마음에 부담을 주는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기록된 말은 증거와 흡사해요. 나중에 나에게 불리하게 쓰일 수도 있으니까요.

평론가가 작가가 마침내 진짜 자기 ‘목소리’를 냈다고 비평하는 걸 본 적이 있나요? 당연히 작가는 ‘진짜’ 목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그 대신 목소리라는 ‘착각’이 들게끔 쓸 뿐이지요.

평론가들도 작가를 별로 의식하지 않아요. 그러기엔 너무 늦어서죠. 책이 나올 때면 텍스트는 완성됐고, 루비콘 강은 건넜으며, 작가의 일은 끝난 뒤니까요. 다음 책에는 지적인 비평이 어느 정도 도움이 되겠지만, 가엽게도 갓 출간된 책은 이 넓고도 사악한 세상에서 모든 것을 제 운에 맡겨야 합니다.

텍스트를 읽는 행위는 음악을 연주하면서 동시에 듣는 것과 비슷해요. 이때 독자는 고유한 통역가가 됩니다

작가와 독자는 서로를 모릅니다.

창조하는 행위와 작품을 손에 넣는 행위가 시기적으로 동떨어져 있는 데다 책을 무한정 복제하는 게 가능해진 탓이지요. 그런데 이 두 가지가 현대 작가들이 자신을 모호하게 바라보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어요.

인쇄 기술과 유통 방식이 개선되고 문맹률이 급속히 낮아지면서 별안간 작가들은 전에는 절대 상상할 수 없던 규모로 빠르게 인기를 끌고 엄청난 유명세를 얻게 되었어요. 즉, 실제보다 훨씬 거대하고 훨씬 훌륭한 존재로 비춰지게 된 거지요.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지는 책은 메가폰과 비슷한 역할을 합니다. 목소리는 확대시키지만 그 목소리를 낸 개인은 지우는 거예요.

자연스레 작가는 자신이 창조한 이미지에 의해 가려져버리지요.

바이런이 좋은 예입니다. 그는 하루아침에 유명인사가 되면서 자신의 시처럼 비장하고 낭만적인 인물이라는 이미지를 얻었지만, 몸무게가 늘자마자 독자들의 기대를 저버릴까봐 대중의 시야로부터 벗어났지요.

비장하고 낭만적인 바이런적 영웅이 되는 것은 심지어 바이런에게조차 젊은 시절에나 가능한 일이었던 겁니다.

어떤 이야기가 실은 꾸며낸 게 아니라 권위 있는 어르신들로부터 들은 실화라고 말하면 하찮은 거짓이 아니라는 뜻으로 오히려 타당성을 얻었지요.

누군가 천재적인 작품을 쓴다면 그 사람 자체도 틀림없이 천재라는 소리였지요. 언제나 말입니다.

알곤퀸 인디언,25 윌리엄 버로스,26 그리고 스티브 벨과 같은 몇몇 영국 만화가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사람의 항문이 그만의 목소리와 개성을 가진 완벽한 제2의 자아로 거듭나는 우화를 지었습니다.

시가 자아의 표현이라면 위대한 시인은 자기 안에 든 훌륭한 것들을 작품에 쏟아부었기에 인간으로서 남아 있는 게 많지 않다는 논리지요.

대문자 A인 작가Author와 그의 닮은꼴 존재, 그들은 교대합니다. 머리에 머리를 맞대고서 말이지요. 각자 자신의 중요한 본질을 비워내 상대방을 채워줍니다.

글을 쓸 때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우리가 하는 작업에 온전히 집중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두 층위의 에너지 사이를 위아래로 오가며 이중 도약한 이 세포가 내 손을 이끌어 종이 위, 이곳에, 이 점을 찍게 만든다, 바로 이 마침표를.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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