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의 과학 이론이나 상식에 위배되는 주장을 펼치면서 이를 뒷받침할 만한 데이터가 없고 앞으로 나올 가능성도 없다면 나는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다.

나 역시 가끔은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이나 전능한 존재를 떠올리며 일이 잘 풀리게 해달라고 기원할 때가 있다. 이런 것은 세상에 대한 나의 믿음에 부합되지 않지만, 소원을 빌고 나면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다. 사실 과학적 논리를 잠시나마 벗어나는 것 자체만으로도 나에게는 소소한 기쁨이다.

가끔은 새로 발견된 것이 심하게 낯설고 기이해서, 현실 세계에 대한 기존의 이해 방식을 송두리째 갈아엎은 적도 있다.

그러나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하기 위해 일부러 낯선(또는 희한한) 방법을 동원하는 것은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다.

물리학 분야에서 새로운 발견은 거의 예외 없이 수백 년 동안 갈고 닦아 온 전통적 방법을 통해 이루어졌다.

통계로부터 얻은 결과가 틀릴 확률이 350만분의 1을 넘지 않아야 무언가를 발견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임의로 정한 값이 아니라, 통계이론에 입각하여 결정한 수치다).

찰스 다윈은 1872년에 출간한 그의 저서 《인간과 동물의 감정표현The Expression of the Emotions in Man and Animals》에서 "인간의 감정은 문화적 적응이 아닌 생물학적 적응과정의 산물"이라고 주장했다(자연선택을 최초로 주장했던 《종의 기원On the Origin of Species》은 1859년에 출간되었다).

과학은 지속적인 연구와 보정작업을 거치면서 객관적 진실에 조금씩 다가가고 있다.

가장 중요한 감정은 ‘두려움’이다.

과학 연구의 기초는 누가 뭐라 해도 수학과 실험이다. 이것은 동료나 후배에게 과학적 지식을 전수하는 수단이자 ‘숨은 진리를 찾는 능력이 입증된’ 유일한 도구이기도 하다.

물리학의 역사는 바깥 세계에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론과 실험으로 규명해 온 ‘발견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자의 자기쌍극자모멘트magnetic dipole moment는 이론으로 계산된 값과 실험실에서 측정한 값이 소수점 이하 9번째 자리까지 정확하게 일치한다. 그러나 신에 관해서는 정확한 데이터가 부족하기 때문에 양자역학만큼 신뢰가 가지 않는다.

우리의 두뇌는 복잡한 처리 과정을 거쳐 다양한 믿음을 양산해 왔지만, 그 믿음이 항상 진실과 일치하는 쪽으로 진화하지는 않았다.

모름지기 신뢰란 주어진 증거를 냉정하게 판단함으로써 생기는 것이다.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의 말대로 자연선택은 자녀에게 생존에 유리한 정보를 제공하는 부모를 선호하기 때문에, 부모가 자녀에게 하는 말은 진화적으로 의미가 있다. 아이가 자라서 성인이 되면 조사, 토론, 독서, 그리고 다양한 도전을 통해 자신만의 믿음을 갖게 되지만, 이것도 기존의 사상이나 다른 사람의 믿음에 영향을 받아 종종 한쪽으로 편향된다. 또한 많은 사람들은 스승이나 지도자, 친구, 직장 상사, 성직자 등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의 목록을 갖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다.

개중에는 과학에 기반을 둔 믿음도 있고, 개인이나 집단의 권위에 의존하는 믿음도 있으며, 직접, 또는 간접적인 강요에 의해 유지되는 믿음도 있다. 그 외에 오래된 전통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집단도 있고, 자신의 직관을 신뢰하는 사람도 많다. 그리고 마음속 깊은 곳에 은밀하게 숨어 있는 정보 처리 센터에서 위에 열거한 믿음을 다양한 방식으로 조합하여 자신만의 믿음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세상 그 누구도 수천 년 동안 쌓여 온 지식을 혼자서 재발견하거나, 그것이 옳다는 것을 증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실 양자역학의 타당성을 증명한 실험 중 내가 직접 확인한 것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당신은 내가 양자역학을 아는 것이 아니라 ‘믿는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코앞에 닥친 것만 보는 사람은 바닥난 식량 재고나 은밀하게 다가오는 독거미를 간과하기 쉽다.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이 철저한 검증을 거쳐 형성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이로부터 유도된 예측은 틀리는 경우가 훨씬 많다.

파스칼 보이어의 말대로, "우리는 초자연적 존재가 마음속에 거주한다고 가정하고 있지만,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서 그런 존재를 수용할 수도, 거부할 수도 있다".

"주변 어디를 둘러봐도 삶과 죽음은 불가분의 관계임이 분명하다. 대지大地도 계절에 따라 삶과 죽음을 반복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조상들도 페르세포네의 여행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신화는 믿음을 강요하지 않으며, 이미 갖고 있는 믿음을 위협하지도 않는다. 신화의 시적詩的이면서 은유적인 서사는 그 안에 표현된 현실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창의적인 표현으로 내용을 강조하기 위해, 화자話者는 문장 곳곳에 은유를 뿌린다. 이것도 일종의 은유법인데, 아마 대부분의 독자들은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은유가 과도하게 남용되면서 은유법 특유의 설득력이 점차 증발하여(사실 증발하는 것은 물이지, 설득력이 아니다) 무미건조한 기법이 되었다(맛이 없고[無味] 마른 것[乾燥]은 음식이지, 기법이 아니다).

처음에는 시적인 표현과 은유로 가득 찬 이야기였는데,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은유에 담긴 의미와 시적인 감성이 거의 사라지고 문자만 남은 꼴이다.

과학은 객관적 현실을 추구하지만, 우리는 오직 마음이라는 주관적 과정을 통해 현실을 접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말하는 ‘객관적 현실’이란 주관적인 마음의 산물인 셈이다.

제임스가 말한 아름다움과 두려움, 약속과 목소리, 그리고 온화함과 웅장함에서 선과 악, 경이로움과 불안함, 외경심과 감사하는 마음에 이르는 모든 것이 내면 세계에서 탐험을 기다리고 있다. 자연에 존재하는 입자를 아무리 열심히 관찰하고 자연의 수학 법칙을 아무리 열심히 쫓아가도 이런 개념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여기 도달하려면 특정 입자들이 특정한 배열로 모여서 생각하고, 느끼고, 추론하는 능력을 획득해야 한다.* 융통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물리 법칙의 통제하에서 이런 입자 배열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놀랍고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난 수천 년, 또는 수백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종교적 수행을 실천하면서 의식를 치르고, 이 세상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립하고, 도덕심을 키우고, 예술적 영감을 떠올리고, 죽음을 초월한 이야기의 일부가 되고, 죽음이 끝이 아님을 되새기고, 가혹한 징벌을 두려워하고, 치열한 전쟁을 치르고, 죄인을 가두거나 죽이는 행위를 정당화해 왔다. 개중에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소름끼치는 것도 있지만, 이 모든 것들이 종교적 전통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나는 정말로 궁금하다. 작곡 과정에서 오직 자신의 마음으로만 들었던 소리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선사하리라는 것을 그는 어떻게 미리 알 수 있었을까?

신화와 종교에는 우리 조상들이 이 세상을 ‘여럿이 함께 이해해 온’ 역사가 담겨 있다. 의식儀式과 믿음이 반영된 전통은 우리에게 지금까지의 여정을 설명하고 앞으로 더 나아가도록 유도하기 위해 그에 걸맞은 ‘이야기’를 만들어 냈고(개중에는 열정이 담긴 이야기도 있고, 입에 담기 어려울 정도로 무자비한 이야기도 있다), 각 개인은 본능과 창의력을 발휘하여 생존력을 높이면서 집단과 같은 길을 따라갔다. 개인의 생존도 중요하지만, 집단과 융화되어야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숭고한 마음(드물긴 하지만 모든 세대에 존재하며, 대부분이 자연으로부터 형성되지만 가끔은 신을 상상하다가 떠올리는 경우도 있다)은 초월적 존재를 표현하는 새로운 방법을 개발했고, 이들의 창조적 여정은 유도誘導나 검증을 초월한 진실을 표현함으로써 ‘자신이 직접 겪지 않는 한 침묵을 지키는’ 인간의 본성에 목소리를 부여했다.

인간의 생존 기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패턴을 인식하는 능력이다.

당신이 나를 한 번 속였다면 당신은 짓궂은 사람이고, 두 번 속이면(다소 섣부른 판단이긴 하지만) 나에게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일이 세 번, 네 번 반복되면 내가 잘 속는 사람임이 분명하다.

지구인 중 일부는 무형無形에서 형태를 만들어 내기 위해, 또는 침묵에서 소리를 만들어 내기 위해 밤낮을 가지리 않고 깊은 사색에 잠긴다. 상상 속의 비전과 시공간의 패턴을 구현하기 위해 삶의 모든 에너지를 투여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결과물을 보고 감탄을 자아내건, 혐오감을 느끼건, 또는 아예 무시하건, 그런 것은 상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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