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조용한 열차 칸(암트랙에는 조용한 열차 칸이 따로 지정되어 있는데, 이곳에서는 대화를 나누거나 전화를 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옮긴이)에 앉아 있다. 우리 조용한 사람들은 만족스럽게, 물론 아무 말 없이 서로를 쳐다본다.

헛된 노력이다. 암트랙이 명한 "도서관 같은 분위기"를 해치는 제멋대로인 승객 몇 명에게 안내원이 무성의하게 주의를 주는 걸 보면 말이다. 우리 조용한 사람들은 사실 이번 전투가 이미 글렀음을 알고 있다.

어쨌거나 지금은 전부 중요치 않다. 나에게는 몇 권의 책이 있고,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나의 노트와 펜이 있기 때문이다. 갑자기 열차가 요동치고, 스테인리스스틸로 정교하게 만든 일본의 미美이자, 심미적 완벽함과 인체공학적 완벽함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내 펜이 사라져버린다.

결국 펜을 찾지 못한다. 나답지 않게도 아무렇지 않다. 열차의 리드미컬한 움직임(흔들린다기보다는, 그렇다, 녹슨 시소를 타는 느낌에 가깝다)이 마음을 고요하게 가라앉혀주고, 옆으로는 풍경이 흘러 지나간다. 늦봄의 하늘에 마구 묻어 있는 하얀 뭉게구름, 넓은 서스쿼해나강, 코네티컷과 로드아일랜드의 고급스러운 해변 마을.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것들이다. 아니,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철학책을 충분히 오래 읽어보라. 곧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게 될 테니.

어떤 사람은 소로로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소로가 되는 데 성공한다. 대부분은 억지로 소로를 떠안는다.

내 삶은 간소함의 모범이 못 된다. 은둔하려는 성향이 있긴 하지만, 은둔을 한다면 호텔방에서 하고 싶지, 수도 시설과 빵빵 터지는 와이파이가 없는 좁은 오두막집에서 하고 싶진 않다. 나는 즉시 《월든》을 내 머릿속의 시베리아로 유배시켰고, 그곳에서 《월든》은 《모비딕》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적분학과 만났다.

내가 철학 연구에서 배운 게 있다면, 그건 첫인상은 틀릴 때가 많다는 것이다. 의심은 필수다. 의심은 우리를 하나의 확신에서 또 다른 확신으로 옮겨주는 버스다. 아주 천천히, 모든 정류장에 정차하는 버스.

"호수의 찌꺼기" 기사에서 폭로한 소로의 위선을 감안해, ‘소로처럼 직접 구운 쿠키를 먹으려고 엄마 집에 몰래 들어가면서 홀로 간소하게 사는 척하는 법’이 될 것이었다. 어쨌거나 고립되어보겠다는 소로의 실험은 그리 고립된 것이 아니었다.

초월주의 운동의 위인들이 대리석에 갇혀 가만히 나를 내려다본다. 랠프 월도 에머슨과 아모스 브론슨 올콧Amos Bronson Alcott이 있고, 당연히 소로가 있다. 반신상 속의 소로는 수염을 기르고 두꺼운 안경을 쓴 말년의 모습이다. 인상이 좋아 보인다. 이 좋은 인상은 호수의 찌꺼기 같은 어두운 내면을 감추기 위한 가면일까?

"내가 아이디어를 어디서 얻는지, 무엇이 그런 아이디어를 시사하는지를 나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

좋은 철학은 좋은 전구처럼 방 안을 환히 밝힌다. 전구가 방 안을 밝혀주는 한,나의 방 안을 밝혀주는 한 어디서 만들어졌는지, 가격이 얼마인지, 몇 와트짜리인지, 수명은 얼마나 되는지, 어떤 과학적 원리가 숨어 있는지 같은 것은 전혀 중요치 않다.

레슬리는 키가 크고 늘씬하며, 무언가를 살피는 듯한 초롱초롱한 눈을 가졌다. 그 모습이 좋다. 레슬리가 수십 년간 소로와 함께 살아오면서 소로에게 질리지 않았다는 것이 좋다. 소로에게 감탄하면서도 무조건적으로 미화하지 않는다는 점이 좋다.

레슬리의 말을 믿지 못한다면 소로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장소는 우리가 그 장소를 특별하게 만드는 만큼만 특별해진다

월든에 오지 마시오. 소로라면 자신의 21세기 팬들을 꾸짖었을 것이다. 자신만의 월든을 찾으시오.직접 만든다면 더더욱 좋고.

황야는 저 바깥에 존재한다. 야생은 우리 안에 있다. 야생은 강하고 완고하다.

《월든》의 영웅이자 미국 설화의 사랑받는 아이콘, 환경주의의 주창자, 문학의 거성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개자식이었다.

소로가 받는 혹독한 비난은 주로 위선에 관한 것이다. 소로는 숲속에서 홀로 자족하는 척하면서 몰래 엄마 집에 들러 파이를 먹고 빨래를 맡겼다.

소로는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만큼 월든에 고립되어 살지 않았다. 엄마의 요리를 먹으려고, 또한 우체국과 카페에 들르려고 종종 걸어서 30분 거리에 있는 마을로 향했다. 그렇다면 《월든》은 사기인가? 미국 전역의 중학교 3학년생은 그동안 기만당한 것인가?

내가 철학에 실용적으로 접근하고 있음을 레슬리에게 알리고, 소로는 어떤 방법으로 다루는 게 좋을지 묻는다. ‘혼자 사는 법’이나 ‘간소하게 사는 법’처럼 평범한 대답이 나올 거라고 기대하면서.
"보는 법이오." 레슬리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말한다.
"보는 법이오?"
네. 레슬리가 말한다. 나머지, 즉 간소한 삶, 고독, 자연주의는 더 큰 것, 바로 시력을 위한 것이었어요. 소로는 우리에게 앞을 보는 법을 가르쳐줘요.

소로의 철학은 내가 보는 것이 곧 나라는, 아웃사이드 인outside-in 철학이었다.

오늘의 확신은 내일의 헛소리다. "그게무엇인지 누가 말할 수 있는가?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건 내가 그것을어떻게 보는지뿐이다."

좋은 모델이다. 하지만 틀린 모델이기도 하다. 본다는 것은 사진보다는 언어에 더 가깝다. 우리는 세상을 보는 게 아니라 세상과 대화를 나눈다.저게 뭐지? 머그컵처럼 보이지 않아? 내가 데이터베이스를 확인해본 다음에 알려줄게. 맞네. 머그컵이 맞아.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머그컵을 보지 않는다. 그 대신 우리 앞에 머그컵이 있다고 스스로에게 말을 한다.

가끔 우리는 의미를 너무 빨리 창출한다. 어쩌면 머그컵처럼 보이는 저 물체는 완전히 다른 것일 수 있다. 물건과 사람을 너무 빨리 정의 내리면 그것들의 유일무이함을 보지 못할 위험이 있다.

소로는 그러한 경향을 경계했다. "보편 법칙을 너무 성급하게 끌어내지 말 것." 소로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특수한 사례를 더 명확하게 들여다볼 것." 눈앞에 보이는 것을 바로 규정하지 않고 기다리면 더 많은 것을 보게 된다.

"아주 오랜 시간 들여다봐야만 볼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예술가들이 비슷한 경험을 이야기한다. 이들은 어떤 대상을 볼 때 그 대상도 자신을 쳐다본다고 느낀다. 이들 모두가 미친 것일 리는 없다.

일기를 읽으세요. 레슬리 윌슨의 말이 머리에서 떨쳐낼 수 없는 구린 음악 톱 40처럼 내 뇌에 콕 박혀 있다. 소로는 성인이 된 후 거의 쉬지 않고 일기를 썼고, 열네 권에 걸쳐 이어진 일기는 거의 200만 단어에 달한다.

소로는 말했다. "더 잘 보려면 손을 움직여야 한다."

소크라테스와 소로 둘 다 무례한 질문을 던져서 사람들을 짜증나게 했다. 두 사람 다 자기가 속한 시대의 골칫거리였고, 훌륭한 자극제였다. 그리고 둘 다 그 대가를 치렀다. 아테네인들은 소크라테스를 처형했다. 콩코드 주민들은 소로의 글을 혹평했다.

"현실은 너무나도 멋지다." 소로가 철학자보다는 경이로워하는 10대처럼 보인다는 점이 좋다. 어쩌면 둘은 그리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6월 20일은 하지다. 잘 보는 기술에 대해 숙고하기 좋은 날이다. 우리가 정말로 빛의 아이들이라면 오늘은 우리의 생일이다

"모든 지성은 아침과 함께 깨어난다"라는 고대 인도 경전 《베다》의 한 구절을 즐겨 인용했다.

휴대전화가 없으니 발가벗은 기분인 것은 아니다. 발가벗는 것은 감당할 수 있다. 꼭 내 간이나 그 밖의 다른 중요 신체 기관을 빼놓고 산책에 나선 것 같다.

미국 공영방송 NPR에서 통신원으로 일한 덕분이다. 그곳에서 나는 다른 사람은 듣지 못하는 것을 듣는 법을 배웠다. 모든 것에는 소리가 있다. 쥐 죽은 듯 고요해 보이는 방에서도 귀를 잘 기울이면 소리가 들린다.

오디오 엔지니어들은 그 소리를 ‘룸톤room tone’이라고 부른다. 궁금해진다. 예리한 감각을 옮기는 게 가능한가? 예리한 청력을 예리한 시각으로 바꿀 순 없나?

랠프 월도 에머슨은 소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소년이고, 언제까지나 나이 든 소년일 것이다." 소크라테스처럼 소로도 철저하게 의식적인 무지12를 중요하게 여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유용한 무지를 전파하는 모임"을 만들겠다고 했다.

교통체증과 비슷한 거다. 차가 꽉 막히면 우리는 "차가 왜 이렇게 막히냐"고 불평을 해대면서 나 또한 차에 타고 있다는 사실, 나 또한 문제의 일부라는 사실은 무시한다.

"내가 숲속으로 들어간 것은 인생을 의도적으로 살고 싶기 때문이었다. 인생의 본질적인 실상에 직면하고 싶어서, 그것들이 가르치는 바를 내가 배울 수 있는지 알아보고 싶어서, 죽음을 맞이했을 때 내가 제대로 살지 않았음을 깨닫고 싶지 않아서였다."

소로의 말처럼 우리는 "무한한 세상에서 자신의 몫"만을, 더도 덜도 아닌 딱 그만큼만 받아들이도록 타고난다.

아니다, 나는 핵심을 놓쳤다. 소로의 뛰어난 시력은 한낱 기술이나 재미난 시각적 속임수와 관련된 것이 아니다.15 그건 품성에서 나오는 능력이었다.

자기 자신을 향상시키지 않고는 자신의 시력을 향상시킬 수 없다. 보는 것의 역학은 양쪽으로 작용한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가 무엇을 보는지를 결정할 뿐만 아니라, 무엇을 보는가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결정한다. 《베다》에서 말하듯, "당신이 보는 것이 곧 당신 자신이다."

덜커덩거리며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소로가 살던 시대는 철도가 급성장하던 시대였다. 오두막집에 있으면 "어느 농부의 밭 위를 날아가는 매의 울음소리 같은" 기관차의 경적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우리가 스스로를 "앎에 민감"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썼다.

"왜 우리는 겉모습을 비방하는가?" 소로는 궁금해했다. "표면에 대한 인식은 감각에 기적과도 같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여기서 소로가 가만히 응시하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있다. 소로는 훑어보았다.

스캔, 스캔, 스캔. 값진 교훈이다. 우리는 응시할 때보다 훑어볼 때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월든은 완벽한 호수가 아니지만, 아름답기 위해 완벽할 필요는 없으며, 심지어 실용적일 필요도 없다. 소로는 종종 자연의 결함 속에서 아름다움을 보았다. 평온한 9월 오후에 월든 호수를 바라보던 소로는 물 위에 떠 있는 티끌 몇 개를 제외하면 수면이 완벽하게 매끄럽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른 사람들은 흠이라고 여겼을지 모르지만, 소로는 거기서 "유리의 결함처럼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을 보았다.

나도 내가 되고 싶다. 진짜다. 하지만 더 나은 나, 덜 우울한 내가 되고 싶다. 소로의 눈을 가진, 소로의 추종자가 되고 싶다. 어디서 어떻게 봐야 하는지를 배우고 싶다. 장소가 중요한 인간인 나에게, 그 둘은 불가분이다. 어떻게는 어디서다. 어디서는 어떻게다.

제프의 생각이 마음에 든다. 소로가 살던 시절의 콩코드에도 카페가 있었고, 소로는 카페의 단골손님이었다. 게다가 다른 진정한 지혜처럼 소로의 지혜도 휴대 가능하다면, 값비싼 음료를 홀짝홀짝 마시는 것도 숲속에서 불편하게 지내는 것만큼이나 도움이 될 것이다. 월든이고 뭐고. 나는 스타벅스로 간다.

"아름다움은 인식되는 곳에 있다."

내 옆에 있는 남자가 몽테뉴를 읽고 있다. 남자는 내가 소로를 읽는 것을 보고 격려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 아주 조심스럽게. 콩코드는 뉴잉글랜드의 조용한 열차 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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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2-05-27 15: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좋아하는 1인 입니다. 목차를 보고 끌려서 구매한 책이랍니다. 야금야금 읽을 거예요.

라로 2022-05-27 19:01   좋아요 0 | URL
저는 제목을 보고 구매했는데요,,^^;;
이 책의 또 다른 좋은 점은 작가가 기차를 타면서 쓰거나
아니면 그 장소에 직접 가서 쓴다는 것이 좋아요,
물론 작가의 유머도 좋고,,, 페크님의 글쓰기에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도 했어요,, 두 분의 글쓰기가 좀 비슷하잖아요.^^
 

‘아무래도 이상하다. 전에 가본 적이 있는 곳이니 당연히 갈 수 있어야 하는데, 갈 수가 없다. 오늘이 몇 월 며칠이고 뭘 하려고 했는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다. 어쩌면 나는 치매에 걸린 게 아닐까?’

2015년 10월 어느 날의 일기에 이런 글이 적혀 있습니다.

"강연. 주제는 ‘모두 함께 생각하는 치매 케어’다. 약 한 시간쯤 이야기했는데, 중간중간 내가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를 잊어버렸다. 세 번 정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 어떻게든 얼버무리고 얼렁뚱땅 마쳤다.(중략) 이런, 맙소사!"

치매는 누구나 걸릴 가능성이 있으며 설령 치매에 걸린다 해도 ‘인간’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없다는 것, 오늘날과 같은 장수 시대에는 누구나 치매를 마주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 그리고 치매에 걸리더라도 평상시의 생활을 그대로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했습니다.

제 고백을 들은 참석자들은 모두 무척 진지하고도 따뜻하게 받아주었습니다. 당시 저는 만 88세였습니다. 오늘날에는 저처럼 장수하는 사람이 늘고 있습니다.

100세 이상의 고령자 수는 2019년 9월 15일 기준 7만 1274명(그중 여성은 6만 2810명)으로 49년 연속해서 과거 최다 기록을 경신했고 처음으로 7만 명을 돌파했습니다. 노인복지법이 제정되면서 국가가 100세 이상의 고령자를 표창하기 시작한 1963년에는 전국을 통틀어 겨우 153명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인간의 삶은 여전히 60대 은퇴에 맞춰 흘러갈까요? 그렇다면 사람들은 은퇴 후 30~40년이라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게 될까요? 여전히 활력이 넘치는데 갈 곳이 공원밖에 없다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엄청난 손해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인간의 평균 수명이 늘어나면서 ‘인생 100세 시대’라는 말도 널리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원래 세계에서 급격히 진행되는 장수화에 입각해 지금까지와는 다른 인생 설계가 필요하다고 주장한, 영국 런던비즈니스스쿨의 린다 그래튼과 앤드루 스콧 두 교수가 처음 발표한 개념입니다. 예전에는 인생을 ‘교육, 일, 퇴직’의 3단계로 나누는 설계가 일반적이었지만, 100세 인생이 당연해진 사회에서는 연령에 따른 구분이 없어지고, 일하는 시기를 거쳐 다시 배우는 시기를 맞이하는 등 인생의 로드맵이 다양해져야 한다는 게 그들의 주장입니다.

린다 그래튼과 앤드루 스콧 교수의 공동 저서 《100세 인생》에 따르면 일본에서 2007년에 태어난 아이들은 그 절반 정도가 100세까지 살아갈 것이라고 합니다.

80대, 90대로 점점 나이 듦에 따라 치매에 걸리는 사람이 증가하는 것은 더 이상 낯선 현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100세를 넘어서면 거의 모두가 치매에 걸린다고 해도 과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치매에 걸리지 않고 만년까지 건강하고 의식이 또렷한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극히 일부일 뿐이며 그 사람들도 더 나이가 들면 시간문제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치매는 결코 남의 일이 아닙니다.

치매에 걸린 사람이 생사를 건 심정으로 부딪혀 올 때는, 그 자리를 모면하려는 임시방편의 대답이나 어설픈 위로는 통하지 않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상대가 무슨 말을 하든 끝까지 듣겠다는 자세로 고통과 슬픔을 함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때까지의 임상 경험을 통해 절실히 느끼고 있었습니다.

치매의 대표적인 유형에는 알츠하이머형 치매, 혈관성 치매, 루이소체형 치매, 전두측두형 치매 등이 있는데, 그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알츠하이머형 치매의 경우 가장 먼저 시간을 가늠할 수 없게 되고, 그다음에는 장소를 알 수 없게 되며, 마지막으로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게 됩니다.

저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어떻게든 병의 진행을 늦춰서, 가능하면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단계는 저세상에 간 후로 미루고 싶었습니다. 가족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건 너무나 괴로운 일이니까요. 그리고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게 되면 삶의 마지막 순간도 가까워졌다는 의미가 되겠지요.

치매를 앓는 사람은 슬프고 괴롭고 안타까운 마음을 품고 매일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치매 당사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여러분이 꼭 알았으면 했습니다.

"괜찮아요. 우리가 곁에 있으니까 안심하세요." 이런 메시지를 전해 주는 존재가 있으면 치매에 걸렸더라도 얼마나 든든하고 마음이 놓이겠습니까. 또한 치매 당사자를 단순히 지켜보기만 하는 게 아니라, 공감하고 함께 걸어가고자 한다면 얼마나 용기가 날까요.

치매를 스스로 밝힌 이유를 한층 파고들면 ‘나 자신이 더욱 잘 살아가기 위해서’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 타인과 사회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었고, 정말로 도움이 될지 안 될지는 몰라도 치매를 있는 그대로 알려 주는 일이야말로 내가 살아가는 이유라고 생각했습니다.

증상이 점점 심해져 끝내 기억이 없어질지도 모릅니다. 매우 불편할 뿐만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는 안타까움 그리고 끝까지 해낼 수 없는 데서 솟는 분노와 애달픔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상 외로 진행이 더뎌서 죽음의 문턱까지 갔을 때 증상이 심해진다든가, 진행 속도 자체를 늦출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저는 어차피 모르는 일이라면 모르는 대로 일단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일밖에 모르던 제가 이 나이가 되고 나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가보지 못했던 지역을 다니면서 마음과 신체의 재활 치료가 되고 자극을 받은 것이지요.

예전 같았으면 얼마든지 세심하게 배려할 수 있었던 일인데 이제 그럴 수 없게 되었다는 현실이 실감 나더군요. 말이나 행동을 한 그 자리에서는 스스로 잘 깨닫지 못합니다. 누군가 지적해 주거나 한참이 지나서야 어떤 순간의 우연이나 계기를 통해 깨닫고 반성하게 됩니다.

저는 치매라는 사실을 주변 사람들에게 사실대로 말하고 교류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치매 당사자가 스스로 치매라는 질환과 똑바로 마주하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이 사회가 적어도 치매 당사자를 깔본다거나 부끄러운 일로 여기는 사회가 아니기를 바랍니다.

정상적으로 발달한 뇌의 신경세포가 외상이나 감염증, 또는 혈관 장애 같은 다양한 질병과 원인으로 인해 손상되어 장애를 입었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 바로 치매입니다.

치매의 특징을 조금 더 상세히 말해 보면, 우선 뇌에 기질적器質的 장애가 생겨 인지기능이 저하된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이때 ‘기질적 장애’란 뇌의 신경세포와 신경세포 간의 연결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전문가들은 이렇게 부수적으로 일어나는 분노와 폭력, 폭언, 의심 같은 감정과 행동을 ‘BPSDBehavioral and Psychological Symptoms of Dementia(치매에 따른 행동심리증상)’라고 부릅니다.

치매란 ‘대개 만성 또는 진행성 뇌질환으로 인해 생기며 기억, 사고, 지남력指南力, 이해, 계산, 학습, 언어, 판단 등 다양한 고차뇌기능 장애가 발생하는 증후군’입니다.

이 분야에 오랜 세월 동안 몸담아 온 저의 시각으로 보자면, 치매의 본질은 ‘지금까지의 일상생활을 지속할 수 없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은 알지만, 상대의 입장이 되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지원의 손길을 내미는 배려가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제 무엇을 해야 좋을지 모를 때 불안해지기 마련입니다. 치매 당사자는 계속해서 그런 상황에 처합니다.

눈높이를 같게 하고 치매 당사자의 입장에 서서 배려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세계 최초로 확인된 환자는 독일에 사는 아우구스테 데터Auguste Deter라는 여성이었습니다. 그녀에게 두드러지게 나타난 증상은 질투와 망상이었습니다. 남편이 바람을 피운다고 생각하고는 남편과 이웃 여성에게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고 누군가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고 주장하거나 주위 사람들이 온통 자신의 험담을 한다고 믿게 되었지요.

알츠하이머 박사가 아우구스테 데터의 뇌를 해부해 병리학적 검사를 실시한 결과, 현저한 뇌의 위축과 뇌내 신경세포의 이탈, 노인반senile plaque이라고 불리는 기미 같은 반점, 신경세포체 속의 섬유 매듭 등 특징적인 변화를 발견했습니다.

아밀로이드 베타가 쌓이기 시작하고부터 10~15년 넘게 치매가 천천히 진행됩니다.

알츠하이머형 치매에 걸리면 건망증 같은 기억 장애나 시간과 장소 등을 알지 못하는 지남력 장애 등 다양한 형태의 인지 장애가 일어나 일상생활에 지장을 초래합니다.

과거 일본을 포함한 동양권에서 가장 많이 보고됐던 유형은 혈관성 치매Vascular dementia였습니다. 혈관성 치매는 뇌경색이나 뇌출혈 등 뇌의 혈관성 장애로 인해 일어나는 치매입니다.

혈관 질환을 일으키는 주요 원인은 동맥경화입니다. 동맥경화의 위험인자로는 고혈압, 당뇨병, 심질환, 고지혈증, 흡연 등이 있습니다. 일본에는 짠 음식이 많았기 때문에 혈관성 치매의 발생률이 높았지만, 오늘날에는 생활습관병 예방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혈관성 치매 예방에도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혈관성 치매의 증상으로는 기억 장애 외에도 보행 장애가 많이 일어나며 배뇨 장애가 동시에 생기기도 하고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 사소한 일에도 금세 울거나 화를 내는 ‘감정실금emotional incontinence’이 나타납니다.

과도한 감정 표현이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고 감정 기복이 심하게 나타나는 것이 바로 혈관성 치매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루이소체형 치매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은 ‘환시’ 현상입니다.

사회성이 저하되고 문제가 발생하는 일이 많아서 이 치매의 특징을 잘 이해하지 못하면 본인도 가족도 무척 힘들어집니다.

치매의 증상은 모두 똑같지 않습니다. 루이소체형 치매 환자는 뚜렷한 환시를 호소합니다. 집안에 벌레가 있다고도 하고 모르는 사람이 들어와 있다고도 합니다.

‘루이소체형 치매Lewy body dementia’라는 병명을 들어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루이소체는 신경세포에 생기는 특수한 단백질을 가리키는데 이 단백질이 뇌의 대뇌피질과 뇌간에 많이 모이면 신경세포를 파괴해서 치매 증상을 일으킵니다.

측두엽은 언어 이해, 청각, 미각뿐만 아니라 기억과 감정을 담당하지요. 전두엽과 측두엽은 모두 뇌의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이 두 부분의 기능이 저하되면 사람의 인지능력과 행동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전두측두형 치매Frontotemporal dementia’도 대표적인 치매의 한 종류입니다. 전두측두형 치매는 뇌의 전두엽과 측두엽이 위축되어 혈류 기능이 저하됨에 따라 여러 가지 증상이 생기는 치매입니다.

루이소체는 파킨슨병에서도 나타나기 때문에 루이소체형 치매인 사람은 파킨슨병 환자와 증상이 비슷합니다

전두측두형 치매의 특징은 인격의 변화와 상식에서 벗어난 행동을 유발한다는 점입니다.

지금은 치료와 회복이 가능한 치매도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 정의에서 제외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병과 마찬가지로 치매 역시 조기 진단이 중요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대뇌피질은 인간이 무언가를 생각할 때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뇌간은 호흡과 혈액 순환 등 사람이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역할을 담당하는 부분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더라도 본인에게는 자꾸 뭔가 보이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니, 다짜고짜 부정하거나 비웃지 말고 이야기를 잘 들어 주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억제능력이 떨어지고 똑같은 일을 여러 차례 되풀이하기도 합니다. 또한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감정에 공감하지 못하게 되고 감정이입이 불가능해지는 등 감정이 둔해지는 증상도 나타납니다.

전두엽은 사고와 감정의 표현, 판단을 통제하는 기관으로 인격과 이성적인 행동, 사회성에 크게 관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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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91세까지 딸의 도움을 받아 강연을 계속했으며, 지금도 컨디션이 좋을 때면 전쟁터라고 부르는 자신의 서재에서 여전히 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

BOKU WA YATTO NINCHISHO NO KOTO GA WAKATTA

저 자신을 세심히 관찰해 보면 한때 ‘기억의 천재’라는 칭찬을 듣던 사람답지 않게 이미 심한 ‘기억장애’를 겪고 있답니다.
꿈과 현실이 종종 혼돈되고, 안 급해도 될 일에는 서두르고 정작 급히 움직여야 할 땐 게으름을 부려서 생활의 중심과 리듬이 깨지는 것을 경험하곤 합니다. 물건을 정리하는 일에 두서가 없고 죽음에 대한 책을 너무 많이 읽다 보니 명랑한 기분이 사라지고 자주 우울해지는 저를 봅니다.

100명 넘게 사는 공동체에서 누가 나를 따돌리거나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염려와 긴장 속에 살고 있는 제 모습을 발견할 때도 있습니다.

타인이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치매 환자가 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우리 모두가 예비 치매 환자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평범하게 살아가는 일 자체가 실은 신에게 받은 특별한 보물

죽음도 삶의 일부인 것처럼 제가 어느 날 치매 진단을 받게 되더라도 가장 ‘나다운 나로 돌아가는 여행’일 수 있도록 순하게 받아들이고 감사하는 마음을 배우겠습니다.

이 책은 치매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 답하여 "누구나 치매에 걸릴 수 있고, 치매를 지나치게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분명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이 책을 통해 그는 타인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문제로 치매를 겪으며, 의사로서뿐만 아니라 환자의 입장에서 체험한 치매에 대해 말한다. 또 이렇게 도와주면 좋겠다는 소망도 이야기한다.

"이 책을 쓰면서 하고 싶은 말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으면 큰일이기에"라는 저자의 뜻에 따라, 요미우리신문사의 이노쿠마 리쓰코 편집위원이 함께 저술에 참여했다. 주변의 적절한 도움이 있다면 치매를 앓게 되더라도 여전히 많은 것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의 출간 자체가 보여 주는 듯하다.

어쨌든 당시는 ‘노망나면 끝!’이라고 하여 치매에 걸린 사람을 ‘아무것도 분간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낙인찍는 심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가정에서는 치매 당사자를 방에 가두기도 했고 정신과나 노인 전문병원에서도 침대에 묶어 놓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던 시절이었지요. 그런 시대를 살며 치매의 의료와 간병에 더 깊이 관여하게 된 것 같습니다.

일본의 경우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 태어난 베이비 붐 세대가 모두 75세 이상이 되는 2025년에는 고령자 다섯 명 가운데 한 명꼴인 약 700만 명이 치매에 걸릴 것이라는 후생노동성의 발표도 있었습니다.

애초에 치매가 생겼다고 사람이 갑자기 바뀔 리는 없는 것이지요. 어제까지 살아온 인생의 연장선상에 좀 더 노화된 자신이 있을 뿐입니다.

실제로 치매에 걸리고 나서 절실히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일단 치매에 걸리면 증상이 하루 종일 그리고 매일 계속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한번 걸리면 끝’이라든가 ‘아무것도 분간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특별 취급도 하지 말아 주세요. 그것이 의사이자 치매 환자인 제가 이 책을 통해 전하고 싶은 말입니다.

주위 사람들이 치매 당사자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이 장애의 정도를 훨씬 줄일 수 있습니다.

2021년 2월에 만 92세가 되었습니다. 신이 기다리는 곳으로 떠날 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음을 느낍니다.

돌이켜 보면 지금까지 줄곧 일을 중심으로 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환자와 그 가족들을 돕기 위해 저 나름대로 온 힘을 다한 인생이었습니다. 다행히도 지금 저 역시 가족과 이웃 사람들의 따뜻한 온정에 둘러싸여 영화를 보거나 교회에 가기도 하고, 마음에 드는 찻집이나 이발소에도 들르면서 평온한 생활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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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삶의 리듬을 바꾸기 위해, 빈둥거리는 느낌을 기억하기 위해 기차를 탄다.

1837년 8월 22일자 편지에서 빅토르 위고는 기차 창문을 통해 바라본 풍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길가의 꽃들은 더 이상 꽃이 아니라 얼룩, 아니 빨갛고 하얀 줄무늬다……. 모든 것이 줄무늬가 된다. 곡물 밭은 부스스하게 마구 자라난 노란색 털이며, 알팔파 밭은 초록색 머리칼을 길게 땋은 것 같다……. 가끔씩 어떤 그림자, 형태, 허깨비가 나타났다가 번개처럼 창문 뒤로 사라진다."1 위고가 탄 기차는 시속 24킬로미터의 속도로 이동했다. 속도는 상대적인 것이다.

존 러스킨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격언을 남겼다. "모든 여행은 정확히 그 속도만큼 더 따분해진다."

이동수단은 가장 빠른 것이 살아남아 앞으로 내달리며 이전의 수단을 지우는 방식으로 점점 진화해왔다. 이제 우리는 너무 빠른 속도로 이동하고 있어서 잠시 멈추고 지금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물을 수조차 없다.

장 자크 루소는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철학자, 소설가, 작곡가, 에세이 작가, 식물학자였고, 독학자, 도망자, 정치이론가, 마조히스트였다. 무엇보다 루소는 산책자였다. 그는 자주 걸었고, 혼자서 걸었다. 물론 걷기 모임에서처럼 가까운 친구와 걷는 데에도 나름의 즐거움이 있지만 본질적으로 걷기는 개인적인 행위다.

루소는 어디에도 뿌리 내리지 않은 최초의 자유인이었고, 오늘날 우리는 그런 사람을 도시 유목민이라고 부른다. 모든 곳이 집이요, 그 어디도 집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인류 역사에서 걷기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어디론가 가고 싶다면 반드시 걸어야 했다. 오늘날 보행은 선택이다.

"혼자서 두 발로 여행할 때만큼……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존재하고, 이렇게 살아 있고, 이렇게 나 자신이었던 적이 없다." 걷기는 루소를 살렸다. 또한 걷기는 루소를 죽이기도 했다.

루소는 자서전 《고백록》에서 이렇게 회상한다. "나는 늘 친구들보다 멀리까지 나아갔다. 그리고 친구들이 나 대신 생각해줄 때를 제외하면 다시 돌아올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아름다움과 로맨스를 떠올리는 도시인 파리에 처음 도착한 루소는 이렇게 말한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더럽고 냄새나고 좁은 길, 못생긴 까만 집들, 전반적인 불결함과 가난, 거지, 짐마차꾼, 옷 수선공, 허브차 행상, 오래된 모자뿐이다."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 또한 아니었다. 루소는 요즘 말로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이었다. 루소의 탁월한 전기를 쓴 작가 레오 담로시는 루소가 "어려운 친구, 실망스러운 애인, 난감한 직원"4이었다고 말한다.

루소는 평생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사실도 모르는 사람 앞에서 자기 엉덩이를 까는 루소의 기이한 강박을 막지 못했다. 루소는 스스로 마조히스트라고 인정했고, 세게 볼기짝 맞는 것을 즐겼다. 루소는 사상 처음으로 사적이고 음란한 내용을 담은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고통, 심지어 수치심 안에서 엉덩이를 더 맞고 싶게 하는 관능을 느꼈다.

나는 내가 걷는 법을 안다고 생각했지만 루소를 읽다 보니 내게 그런 기본적인 능력이 있는지조차 의심하게 되었다.

걷는 방식을 보면 그 사람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걸음걸이는 지문이나 서명처럼 개개인이 다 다르며, 최근 국방부에서는 95퍼센트의 정확도로 걸음걸이를 식별할 수 있는 첨단 레이더를 개발했다.5 모두에겐 자기만의 걷는 스타일이 있다.

마을 목사의 부추김에 넘어간 마을 주민들이 루소의 집에 돌을 던진 것이다. 루소는 사회적 신호를 종종 잘못 해석하곤 했지만, 이번에는 제대로 이해했다. 루소는 모티에를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도 똑같이 하기로 한다.

나는 책에 푹 빠져든다. 루소에 손을 적시기만 하는 건 불가능하다. 머리부터 뛰어들든가, 아예 뛰어들지 않든가 둘 중 하나다.

샤르도네는 정말로 책과 잘 어울린다.

곧 나는 루소의 언어에 명확성 외에 무언가가 더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루소는(어떻게 이 이야기를 예의 바르게 할 수 있을까?) 드라마퀸이다.

루소는 주기적으로, 또 길고 상세하게 울부짖는다. 폭발적인 황홀경에 쉽게 빠져든다. 루소는 자주 기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루소가 가장 선호하는 신체 기관인 심장은 늘 바쁘다. 루소의 심장은 "활짝 열리"거나 "불이 붙"거나 "흔들"린다. 그리고 대개는 고동친다. 루소의 심장은 "조급함"이나 "기쁨"으로, 그리고 종종 "난폭하게" 고동친다.

비열하고, 옹졸하고, 앙심을 품고, 피해망상에 빠진 채 태어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훈연한 브리치즈와 인스타그램을 향한 사랑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확신하지만 사실은 문화적인 것이다. 어쨌거나 1970년대 사람들은 활주로만큼 넓디넓은 털 카펫과 넥타이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지 않았는가.

자기 사랑은 혼자 샤워하면서 노래를 부를 때 느끼는 기쁨이다.

자기 편애는 뉴욕 록펠러센터에 있는 라디오시티 뮤직홀에서 노래를 부를 때 느끼는 기쁨이다.

샤워실에서 노래를 더럽게 못 부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기쁨은 오로지 자신만의 것이며 타인의 의견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러므로 루소는 이것이 더 진실한 기쁨이라고 주장한다.

이제 우리는 루소가 왜 걸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걷는 데에는 인류 문명의 인위적 요소가 전혀 필요치 않다. 가축도, 사륜마차도, 길도 필요 없다. 산책자는 자유롭고, 아무런 구애도 받지 않는다. 순수한자기 사랑이다.

정신은 시간당 5킬로미터의 속도, 즉 걷기에 적당한 속도에서 가장 활발하게 움직인다.

니체는 "진정으로 위대한 생각은 전부 걷기에서 나온다"라고 확신하며 종종 기운차게 스위스 알프스 산맥으로 두 시간가량의 짧은 여행을 떠났다.

토머스 홉스는 느긋하게 걸을 때 떠오른 생각을 기록할 수 있도록 잉크병을 넣을 수 있는 산책용 지팡이를 특별 주문 제작했다.

모두 훌륭한 산책자들이다. 하지만 루소만 한 사람은 없다. 루소는 하루에 30킬로미터 이상을 걷곤 했다. 한번은 제네바에서 파리까지 480킬로미터를 걸은 적도 있었다. 제네바에서 파리까지 가는 데에는 2주가 걸렸다.

루소가 걸어 다닌 첫 번째 철학자는 아니지만, 걷는 행위에 대해 이렇게 두루 철학적으로 사고한 철학자는 루소 이전에 없었다.

아르키메데스가 욕조에서 유레카를 외친 순간부터 데카르트의 걸출한 펜싱 실력과 사르트르의 성적 모험에 이르기까지, 철학에는 신체와 관련된 조류가 흐른다. 신체와 분리된 철학자, 신체와 분리된 철학은 존재하지 않는다. 니체는 "철학보다 몸에 더 많은 지혜가 있다"고 말했다.

이번에는 루소의 미완성 유작인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이다. 리베카 솔닛이 자신이 걸어온 역사를 담은 책에서 말했듯이, 이 이상하지만 사랑스러운 책은 "걷기에 관한 책이기도 하고 아니기도"7 하다.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루소의 작품이다. 이 책에는 추방당하고 돌에 맞고 조롱당했으나 이제는 더 이상 눈곱만큼도 신경 안 쓰는 사람의 도덕적 명료함과 생생한 지혜가 고동친다. 이 책 속의 루소는 주류 의견에 반대하는 루소도, 속마음을 고백하는 루소도, 개혁을 주창하는 루소도 아니다. 여기서의 루소는 쉬고 있는 루소다.

매 장마다 루소는 산책에 나서지만, 산책은 책의 진짜 주제인 추억으로 향하는 수단일 뿐이다. 어떻게 하면 인생에서 가장 달콤했던 순간들을 되찾을 수 있을까? 그 순간들은 두 번째 기회에서도 똑같이 달콤할까? 아니면 전보다 더 달콤할까?

다섯 번째 산책에서 루소는 생피에르라는 이름의 작은 섬에서 보낸 시간을 회상한다. 모티에에서 돌 던지는 사람들을 피해 달아난 곳이다. 생피에르는 루소의 파라다이스였다. 루소는 "살면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술회한다.
나는 이 문장을 읽고 마시던 샤르도네를 거의 뱉을 뻔한다. 자신의 병적인 측면을 전문가처럼 정확히 꿰고 있었던 루소는 쉽게 행복에 빠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내 눈으로 그 섬을 보고 싶어졌다.

스위스의 기차는 시간을 잘 지킨다는 명성을 누릴 자격이 있다.

루소는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끊임없는 변화의 흐름 속에 있다."

"만물은 변화한다"라는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격언을 떠올리게 하는 말이다. 우리가 두 번째로 발을 담그는 강물은 절대로 전과 같은 강물이 아니며, 우리 자신도 전과 같은 우리가 아니다.

나는 배에 탄 술고래처럼 이쪽저쪽으로 휘청거린다. 진화적 관점에서 보면 당연한 일이다. 우리 인간은 바다에서 왔는데, ‘걷다walk’라는 단어의 어원에서도 그 사실이 드러난다. 11세기에 이 단어는 바다처럼 ‘굽이치고 요동치다’8라는 뜻이었다. ‘걷다’라는 단어가 해안으로 걸어 나와 몸을 말리고 현대의 의미를 획득한 것은 13세기의 일이다. 단어는 진화한다.

우리는 두 발로 걷지만 우리의 뼈는 네 발로 걷는 것에 가장 적합하다. 예로부터 변하지 않은 신체 구조와 현대의 몸 사용법 사이의 이런 간극 덕분에 발 전문가들은 계속 먹고살 수 있다.

루소는 발에 생긴 티눈으로 거의 평생을 고생했다. 루소는 거만하게 뒤꿈치로 걸었다.

더 이상 섬이 아닌 섬에 들어서자 왜 루소가 이곳을 그렇게 좋아했는지를 알게 된다. 목가적이지만 가식적이지 않다. 아름답지만 호화롭지는 않고, 푸릇푸릇하지만지나치게 푸르지는 않다.

철학자이자 황제인 마르쿠스가 대답을 해준다.상상 속에서든 현실에서든 역경을 만나면 자기 연민이나 절망에 빠지지 말고 그저 다시 시작하라.

이런 식으로 바라보면 삶은 더 이상 실패한 서사나 망쳐버린 결말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건 진실이 아니다. 결말 같은 건 없다. 무한한 시작의 사슬만이 있을 뿐.
그래서 다시 시작한다. 한 걸음 한 걸음씩. 좋아. 이제 다시 또 한 번.

우리는 또 한 명의 훌륭한 산책자였던 윌리엄 워즈워스의 표현처럼 "우리에게 너무한" 세상을 잠시나마 잊기 위해 걷는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잊기 위해 걷기도 한다.

이런 장식의 시대에 걷기는 우리가 아직 행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꾸밈없는 활동이자, 리베카 솔닛이 지적하듯 "인류가 시작된 이래로 전혀 진보하지 않은"11 활동이다.

"나 실컷 울어야겠어"라고 말한 적이 있다면 루소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상상력을 이용해봐"라고 말한 적이 있다면 루소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한창 열띤 논쟁을 벌이다 "이게 말이 안 돼도 상관없어. 난 그렇게느끼니까"라고 내뱉은 적이 있어도 마찬가지다. 배우자가 "당신에게 좋을 것"이라는 이유로 춥고 축축한 날 당신을 16킬로미터 트레킹에 끌고 간 적이 있다면 루소에게 고마워하거나 저주를 퍼부을 수 있다. 루소 덕분에 우리는 다르게 생각하고 느끼게 되었으며, 우리의 감정에 대해 다르게 사고할 수 있게 되었다.

루소는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수십 년 전에, 캘리포니아에 고속도로가 깔리기 수 세기 전에 환경 문제를 예측했다.

걷고 있지만 걷고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닌 듯하다. 나는 동사일 뿐, 주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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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글쓰기에 대하여 - 작가가 된다는 것에 관한 여섯 번의 강의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박설영 옮김 / 프시케의숲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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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를 책으로 접한 적이 몇 번 있지만 이렇게 호흡이 가픈 책은 처음이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질문들, 인용되는 방대한 작품과 그 방식(?)에 머리가 빙빙 돌 지경이다. 더구나 이 모든 것을 그녀는 분명 안 보고 했을 것이란 생각을 하니 아찔하다. 일단 책에 인용된 작가와 작품 제목을 적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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