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조용한 열차 칸(암트랙에는 조용한 열차 칸이 따로 지정되어 있는데, 이곳에서는 대화를 나누거나 전화를 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옮긴이)에 앉아 있다. 우리 조용한 사람들은 만족스럽게, 물론 아무 말 없이 서로를 쳐다본다.

헛된 노력이다. 암트랙이 명한 "도서관 같은 분위기"를 해치는 제멋대로인 승객 몇 명에게 안내원이 무성의하게 주의를 주는 걸 보면 말이다. 우리 조용한 사람들은 사실 이번 전투가 이미 글렀음을 알고 있다.

어쨌거나 지금은 전부 중요치 않다. 나에게는 몇 권의 책이 있고,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나의 노트와 펜이 있기 때문이다. 갑자기 열차가 요동치고, 스테인리스스틸로 정교하게 만든 일본의 미美이자, 심미적 완벽함과 인체공학적 완벽함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내 펜이 사라져버린다.

결국 펜을 찾지 못한다. 나답지 않게도 아무렇지 않다. 열차의 리드미컬한 움직임(흔들린다기보다는, 그렇다, 녹슨 시소를 타는 느낌에 가깝다)이 마음을 고요하게 가라앉혀주고, 옆으로는 풍경이 흘러 지나간다. 늦봄의 하늘에 마구 묻어 있는 하얀 뭉게구름, 넓은 서스쿼해나강, 코네티컷과 로드아일랜드의 고급스러운 해변 마을.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것들이다. 아니,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철학책을 충분히 오래 읽어보라. 곧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게 될 테니.

어떤 사람은 소로로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소로가 되는 데 성공한다. 대부분은 억지로 소로를 떠안는다.

내 삶은 간소함의 모범이 못 된다. 은둔하려는 성향이 있긴 하지만, 은둔을 한다면 호텔방에서 하고 싶지, 수도 시설과 빵빵 터지는 와이파이가 없는 좁은 오두막집에서 하고 싶진 않다. 나는 즉시 《월든》을 내 머릿속의 시베리아로 유배시켰고, 그곳에서 《월든》은 《모비딕》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적분학과 만났다.

내가 철학 연구에서 배운 게 있다면, 그건 첫인상은 틀릴 때가 많다는 것이다. 의심은 필수다. 의심은 우리를 하나의 확신에서 또 다른 확신으로 옮겨주는 버스다. 아주 천천히, 모든 정류장에 정차하는 버스.

"호수의 찌꺼기" 기사에서 폭로한 소로의 위선을 감안해, ‘소로처럼 직접 구운 쿠키를 먹으려고 엄마 집에 몰래 들어가면서 홀로 간소하게 사는 척하는 법’이 될 것이었다. 어쨌거나 고립되어보겠다는 소로의 실험은 그리 고립된 것이 아니었다.

초월주의 운동의 위인들이 대리석에 갇혀 가만히 나를 내려다본다. 랠프 월도 에머슨과 아모스 브론슨 올콧Amos Bronson Alcott이 있고, 당연히 소로가 있다. 반신상 속의 소로는 수염을 기르고 두꺼운 안경을 쓴 말년의 모습이다. 인상이 좋아 보인다. 이 좋은 인상은 호수의 찌꺼기 같은 어두운 내면을 감추기 위한 가면일까?

"내가 아이디어를 어디서 얻는지, 무엇이 그런 아이디어를 시사하는지를 나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

좋은 철학은 좋은 전구처럼 방 안을 환히 밝힌다. 전구가 방 안을 밝혀주는 한,나의 방 안을 밝혀주는 한 어디서 만들어졌는지, 가격이 얼마인지, 몇 와트짜리인지, 수명은 얼마나 되는지, 어떤 과학적 원리가 숨어 있는지 같은 것은 전혀 중요치 않다.

레슬리는 키가 크고 늘씬하며, 무언가를 살피는 듯한 초롱초롱한 눈을 가졌다. 그 모습이 좋다. 레슬리가 수십 년간 소로와 함께 살아오면서 소로에게 질리지 않았다는 것이 좋다. 소로에게 감탄하면서도 무조건적으로 미화하지 않는다는 점이 좋다.

레슬리의 말을 믿지 못한다면 소로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장소는 우리가 그 장소를 특별하게 만드는 만큼만 특별해진다

월든에 오지 마시오. 소로라면 자신의 21세기 팬들을 꾸짖었을 것이다. 자신만의 월든을 찾으시오.직접 만든다면 더더욱 좋고.

황야는 저 바깥에 존재한다. 야생은 우리 안에 있다. 야생은 강하고 완고하다.

《월든》의 영웅이자 미국 설화의 사랑받는 아이콘, 환경주의의 주창자, 문학의 거성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개자식이었다.

소로가 받는 혹독한 비난은 주로 위선에 관한 것이다. 소로는 숲속에서 홀로 자족하는 척하면서 몰래 엄마 집에 들러 파이를 먹고 빨래를 맡겼다.

소로는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만큼 월든에 고립되어 살지 않았다. 엄마의 요리를 먹으려고, 또한 우체국과 카페에 들르려고 종종 걸어서 30분 거리에 있는 마을로 향했다. 그렇다면 《월든》은 사기인가? 미국 전역의 중학교 3학년생은 그동안 기만당한 것인가?

내가 철학에 실용적으로 접근하고 있음을 레슬리에게 알리고, 소로는 어떤 방법으로 다루는 게 좋을지 묻는다. ‘혼자 사는 법’이나 ‘간소하게 사는 법’처럼 평범한 대답이 나올 거라고 기대하면서.
"보는 법이오." 레슬리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말한다.
"보는 법이오?"
네. 레슬리가 말한다. 나머지, 즉 간소한 삶, 고독, 자연주의는 더 큰 것, 바로 시력을 위한 것이었어요. 소로는 우리에게 앞을 보는 법을 가르쳐줘요.

소로의 철학은 내가 보는 것이 곧 나라는, 아웃사이드 인outside-in 철학이었다.

오늘의 확신은 내일의 헛소리다. "그게무엇인지 누가 말할 수 있는가?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건 내가 그것을어떻게 보는지뿐이다."

좋은 모델이다. 하지만 틀린 모델이기도 하다. 본다는 것은 사진보다는 언어에 더 가깝다. 우리는 세상을 보는 게 아니라 세상과 대화를 나눈다.저게 뭐지? 머그컵처럼 보이지 않아? 내가 데이터베이스를 확인해본 다음에 알려줄게. 맞네. 머그컵이 맞아.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머그컵을 보지 않는다. 그 대신 우리 앞에 머그컵이 있다고 스스로에게 말을 한다.

가끔 우리는 의미를 너무 빨리 창출한다. 어쩌면 머그컵처럼 보이는 저 물체는 완전히 다른 것일 수 있다. 물건과 사람을 너무 빨리 정의 내리면 그것들의 유일무이함을 보지 못할 위험이 있다.

소로는 그러한 경향을 경계했다. "보편 법칙을 너무 성급하게 끌어내지 말 것." 소로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특수한 사례를 더 명확하게 들여다볼 것." 눈앞에 보이는 것을 바로 규정하지 않고 기다리면 더 많은 것을 보게 된다.

"아주 오랜 시간 들여다봐야만 볼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예술가들이 비슷한 경험을 이야기한다. 이들은 어떤 대상을 볼 때 그 대상도 자신을 쳐다본다고 느낀다. 이들 모두가 미친 것일 리는 없다.

일기를 읽으세요. 레슬리 윌슨의 말이 머리에서 떨쳐낼 수 없는 구린 음악 톱 40처럼 내 뇌에 콕 박혀 있다. 소로는 성인이 된 후 거의 쉬지 않고 일기를 썼고, 열네 권에 걸쳐 이어진 일기는 거의 200만 단어에 달한다.

소로는 말했다. "더 잘 보려면 손을 움직여야 한다."

소크라테스와 소로 둘 다 무례한 질문을 던져서 사람들을 짜증나게 했다. 두 사람 다 자기가 속한 시대의 골칫거리였고, 훌륭한 자극제였다. 그리고 둘 다 그 대가를 치렀다. 아테네인들은 소크라테스를 처형했다. 콩코드 주민들은 소로의 글을 혹평했다.

"현실은 너무나도 멋지다." 소로가 철학자보다는 경이로워하는 10대처럼 보인다는 점이 좋다. 어쩌면 둘은 그리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6월 20일은 하지다. 잘 보는 기술에 대해 숙고하기 좋은 날이다. 우리가 정말로 빛의 아이들이라면 오늘은 우리의 생일이다

"모든 지성은 아침과 함께 깨어난다"라는 고대 인도 경전 《베다》의 한 구절을 즐겨 인용했다.

휴대전화가 없으니 발가벗은 기분인 것은 아니다. 발가벗는 것은 감당할 수 있다. 꼭 내 간이나 그 밖의 다른 중요 신체 기관을 빼놓고 산책에 나선 것 같다.

미국 공영방송 NPR에서 통신원으로 일한 덕분이다. 그곳에서 나는 다른 사람은 듣지 못하는 것을 듣는 법을 배웠다. 모든 것에는 소리가 있다. 쥐 죽은 듯 고요해 보이는 방에서도 귀를 잘 기울이면 소리가 들린다.

오디오 엔지니어들은 그 소리를 ‘룸톤room tone’이라고 부른다. 궁금해진다. 예리한 감각을 옮기는 게 가능한가? 예리한 청력을 예리한 시각으로 바꿀 순 없나?

랠프 월도 에머슨은 소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소년이고, 언제까지나 나이 든 소년일 것이다." 소크라테스처럼 소로도 철저하게 의식적인 무지12를 중요하게 여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유용한 무지를 전파하는 모임"을 만들겠다고 했다.

교통체증과 비슷한 거다. 차가 꽉 막히면 우리는 "차가 왜 이렇게 막히냐"고 불평을 해대면서 나 또한 차에 타고 있다는 사실, 나 또한 문제의 일부라는 사실은 무시한다.

"내가 숲속으로 들어간 것은 인생을 의도적으로 살고 싶기 때문이었다. 인생의 본질적인 실상에 직면하고 싶어서, 그것들이 가르치는 바를 내가 배울 수 있는지 알아보고 싶어서, 죽음을 맞이했을 때 내가 제대로 살지 않았음을 깨닫고 싶지 않아서였다."

소로의 말처럼 우리는 "무한한 세상에서 자신의 몫"만을, 더도 덜도 아닌 딱 그만큼만 받아들이도록 타고난다.

아니다, 나는 핵심을 놓쳤다. 소로의 뛰어난 시력은 한낱 기술이나 재미난 시각적 속임수와 관련된 것이 아니다.15 그건 품성에서 나오는 능력이었다.

자기 자신을 향상시키지 않고는 자신의 시력을 향상시킬 수 없다. 보는 것의 역학은 양쪽으로 작용한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가 무엇을 보는지를 결정할 뿐만 아니라, 무엇을 보는가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결정한다. 《베다》에서 말하듯, "당신이 보는 것이 곧 당신 자신이다."

덜커덩거리며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소로가 살던 시대는 철도가 급성장하던 시대였다. 오두막집에 있으면 "어느 농부의 밭 위를 날아가는 매의 울음소리 같은" 기관차의 경적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우리가 스스로를 "앎에 민감"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썼다.

"왜 우리는 겉모습을 비방하는가?" 소로는 궁금해했다. "표면에 대한 인식은 감각에 기적과도 같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여기서 소로가 가만히 응시하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있다. 소로는 훑어보았다.

스캔, 스캔, 스캔. 값진 교훈이다. 우리는 응시할 때보다 훑어볼 때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월든은 완벽한 호수가 아니지만, 아름답기 위해 완벽할 필요는 없으며, 심지어 실용적일 필요도 없다. 소로는 종종 자연의 결함 속에서 아름다움을 보았다. 평온한 9월 오후에 월든 호수를 바라보던 소로는 물 위에 떠 있는 티끌 몇 개를 제외하면 수면이 완벽하게 매끄럽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른 사람들은 흠이라고 여겼을지 모르지만, 소로는 거기서 "유리의 결함처럼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을 보았다.

나도 내가 되고 싶다. 진짜다. 하지만 더 나은 나, 덜 우울한 내가 되고 싶다. 소로의 눈을 가진, 소로의 추종자가 되고 싶다. 어디서 어떻게 봐야 하는지를 배우고 싶다. 장소가 중요한 인간인 나에게, 그 둘은 불가분이다. 어떻게는 어디서다. 어디서는 어떻게다.

제프의 생각이 마음에 든다. 소로가 살던 시절의 콩코드에도 카페가 있었고, 소로는 카페의 단골손님이었다. 게다가 다른 진정한 지혜처럼 소로의 지혜도 휴대 가능하다면, 값비싼 음료를 홀짝홀짝 마시는 것도 숲속에서 불편하게 지내는 것만큼이나 도움이 될 것이다. 월든이고 뭐고. 나는 스타벅스로 간다.

"아름다움은 인식되는 곳에 있다."

내 옆에 있는 남자가 몽테뉴를 읽고 있다. 남자는 내가 소로를 읽는 것을 보고 격려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 아주 조심스럽게. 콩코드는 뉴잉글랜드의 조용한 열차 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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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2-05-27 15: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좋아하는 1인 입니다. 목차를 보고 끌려서 구매한 책이랍니다. 야금야금 읽을 거예요.

라로 2022-05-27 19:01   좋아요 0 | URL
저는 제목을 보고 구매했는데요,,^^;;
이 책의 또 다른 좋은 점은 작가가 기차를 타면서 쓰거나
아니면 그 장소에 직접 가서 쓴다는 것이 좋아요,
물론 작가의 유머도 좋고,,, 페크님의 글쓰기에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도 했어요,, 두 분의 글쓰기가 좀 비슷하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