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공부의 위로 - 글 쓰는 사람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곽아람 지음 / 민음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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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과 체크된 평점의 별만 보고 정보 없이 이 책을 선택했다. 저자가 대학시절 강의에서 배운 것에 대한 회고일 줄은 몰랐다. 처음엔 내가 이런 것까지 읽어야 하나?는 생각이 들었지만, 뭐든 읽다 보면 배울점이 있고 동기화되는 기능이 책을 읽는 장점인 것 같다. 기억보다 기록의 중요성을 다시 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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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버 2022-05-28 14: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책을 읽으며 저자가 대학시절 공부한 노트와 레포트들을 거의 다 보관하고 있다는 것에 깜작 놀랐습니다 ㅎㅎ

라로 2022-05-28 17:58   좋아요 1 | URL
저도요!! 저는 간호대학 다닐 때 것은 여전히 가지고 있지만 겨우 3~4년 전이니 곽아람씨와는 비교도 안 되죠. 기록은 함이 쎄요!! ㅎㅎㅎ
 

어머니는 교회의 기준에선 냉담자였지만, 자식들의 교육에 있어서는 ‘종교적인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 강의의 가장 큰 가르침은 편견에 갇히지 않고 남의 말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유연함, 경계 없이 열린 마음이었던 것 같다. 책 속에 틀어박혀 머리만 키운, 재승박덕(才勝薄德)한 사람이 되지는 않겠다고, 학식과 함께 따스하고 도타운 마음도 본받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릇’이라 함은 떨어뜨렸을 때 깨지는 식기(食器)를 일컫는다. 냄비류와 목기(木器), 커트러리는 제외한다.

요리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고 음식에 큰돈 쓰는 걸 아까워하지만, 그릇 욕심은 있다. 역시나 그릇을 좋아하는 한 친구는 이를 ‘그릇된 그릇질’이라 명명하였는데, 좋아하는 것에 돈을 쓰는 일이 과연 그릇되었는지는 한번 생각해 볼 문제.

쓰지도 않는 그릇을 왜 계속 사들이는 거냐고 잔소리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모르는 소리! 그릇의 용도는 사용하는 것에만 있지 않다. 완상(玩賞)하고 쓰다듬으며 기형(器形)과 문양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것만으로도, 그릇은 그 의무를 족히 다한다.

일상에서 쓰는 그릇이 단조로우니, 그릇에 대한 나의 상상에도 한계가 있었다.

주입식 교육의 힘이란 놀랍게도 끈질긴 것이다.

중국 청동기 시대 제기(祭器)를 연상시키는 그릇만은 집에 들이지 않는다. 도자사 수업을 들었기 때문에 그런 형태의 그릇은 망자(亡者)를 위한 것이라는 인식이 강하게 박혀 있기 때문이다.

깨끗한 백자를 조심스레 씻어 물기를 훔쳐내면서 나는 종종 ‘경덕진’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한번도 가본 적 없는 그 지명이 아스라하게 그립기까지 한 건, ‘백자=경덕진’이라고 외우고 또 외웠기 때문이겠지.

어떤 분이 "와인잔의 구연부는 얇디얇아서 입에 대는 순간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지는 편이 좋다."는 이야기를 했다. 아마도 술은 휘발하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잔 역시 그 속성과 맞아떨어지는 것이 좋지 않을까?

차는 온기를 머금어야 하므로 찻잔의 구연부는 적당히 도톰한 편이 좋은 것 같다고. "입에 닿는 건 좋은 걸 써야 한다."면서 구연부에 푸른 문양이 박힌 로얄코펜하겐의 프린세스블루 라인 머그를 내게 선물해 주신 분이 있었다.

그 머그가 내 인생 최초의 ‘코페니’였는데, 그걸 주신 분은 이제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그렇지만 입 대는 부분이 도톰하고 감각적인 그 잔을 사용할 때마다 그분에 대한 기억이 입술 끝 촉각으로 살아난다.

그 잔을 선물 받았을 때만 해도, 그릇 사치는 돈 아까운 일이라 생각했다. 이제는 식기는 최대한 좋은 걸 쓰려고 한다. 그건 스스로를 대접하는 마음 같은 것.

최근에 읽은 여행작가 김남희 에세이 『호의는 거절하지 않습니다』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혼자 먹더라도 예쁜 그릇을 꺼내 제대로 차려 먹는 것이 최소한의 디그니티(dignity)를 지켜준다는 그 이야기에, 아마도 혼자 살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차를 마실 때 특히 자주 사용하는 건 하늘색 바탕에 푸른 초롱꽃과 민들레 솜털이 그려져 있고 종(鍾)을 뒤집어 놓은 듯한 형태가 우아한 로열앨버트 100주년 머그다. 10여 년 전에 영국 출장을 다녀오는 길에 런던 히드로공항의 해로즈에서 사 온 것인데, 이때 처음으로 ‘나도 이제 사회생활을 어느 정도 했으니 좋은 그릇 한번 사보자.’는 생각을 했었다.

이 모든 컵에는 나만의 이야기가 있다. 어떤 그릇에든 사용한 사람들의 사연이 담겨 있고, 깨지지 않는 한 그 이야기는 천년 만년 이어진다. 로얄코펜하겐과 로모노소프, 웨지우드와 빌레로이 앤드 보흐, 포트메리온 그릇이 찬장 가득 쌓여 있지만, 나는 개수대에 항상 놓고 쓰는 20년 넘은 나의 코렐을 버릴 생각이 없다. 오랜 세월을 함께하면서 흰 바탕에 푸른색으로 잔잔한 열매가 그려진 그 그릇과 나만의 역사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누구도 알지 못하는 은밀한 이야기.

화려하고 섬세한 그릇과 마찬가지로 잘 깨지지 않는 만만한 그릇 역시 참으로 귀한 존재. 사람 사귐도 그렇지 않나, 나는 생각해 본다. 다루기 조심스럽고 까다로워서 쉽게 다가서기 힘든 사람들의 묘한 매력에 이끌려 항상 곁에 있는 튼튼하고 듬직한 사람들의 중요함을 종종 잊어버리지만, 결국 오래 남아 곁을 지켜주는 건 그런 사람들이 아닌가, 하고.

청춘이란 그렇게 서슬 푸른 것이다. 지금은 부드럽고 푸근한 정요 백자 같은 사람이 더 나을 수도 있겠다 생각한다. 모난 성미에 정 맞아 보기도 하고, 싸늘한 성정 때문에 미움받기도 해보아서 이제는 그만 동글고 눅진하게 살고 싶은, 40대란 뭐, 그런 시기인 것이다.

내 감정은 자주 튜닝이 필요하다. 조율이 덜 된 현악기 같다. 때때로 곤두박질친다. 아래로, 아래로, 더 아래로. 끝이 어딘지도 모르는 구덩이 속으로 추락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쿵 하고 심장이 내려앉으면서 마음이 나락으로 떨어질 때가 있다. 위로 솟구칠 때도 물론 있다. 그 솟구침은 분명 흥분이지만, 즐거움과는 거리가 멀다. 불안에 의한 각성으로, 지나치게 긴장돼 안절부절못한다. 잠을 이루지 못한다. 잠들더라도 쉽게 깬다. 음정이 편안한 악기처럼, 언제나 일정한 감정의 파고(波高)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종종 부럽다.

감정의 스펙트럼이 넓기 때문에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으며, 그리하여 글을 쓰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고 믿는다. 자주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신경은 약과 상담으로 다스린다.

많은 이들이 쉬쉬하며 정신과를 드나들던 20년 전부터 나는 거리낌 없이 병원을 찾았다. 과정은 힘들었지만 그 덕에 나 자신의 문제를 빨리 발견하고, 스스로를 위험한 지경에서 구해낼 수 있었다. 우울증은 마음이 아니라 뇌의 문제이며, 의지로 해결할 수 없고 의사와 약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나는 일찍 배웠다. ‘심리학 개론’ 수업을 통해서다.

S는 뛰어난 수학적 두뇌를 지녔고 고등학교 때까지 ‘소설은 거짓말인데 그걸 왜 읽냐?’고 생각했다고 한다.

"내향적인 사람이 외향적인 사람에 비해 뇌의 각성 수준이 더 강하다."는 설명을 그 수업시간에 들었을 때, 나를 괴롭혀 왔던 문제에 대한 실마리를 찾은 기분이었다.

어떤 경우에도 안심하기 위해 항상 최악을 상정하는 ‘방어적 비관주의(defensive pessimism)’, 우울한 사람의 자기 지각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현실적이라는 ‘우울한 현실주의(depressive realism)’, ‘자기 인식(self awareness)’이 강하면 행복지수가 떨어진다는 이론 등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나는 심리학이라는 세계엔 그간 나를 힘들게 했던 여러 성격적 특질을 설명하는 보편의 언어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안도했다.

어른들은 "의지로 극복할 수 있는 일을 쓸데없이 병원에 가서 약을 먹는다."며 혀를 찼지만, 나는 단호히 말했다. "아니오. 이건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뇌의 문제예요. 제게 지금 필요한 건 약과 의사예요."

"약이랑 싸우려 하지 마세요. 약은 당신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가장 당신답게 만들도록 도와줍니다.", "게임으로 치자면 약은 아이템인 거예요, 아이템을 써서 더 잘 싸워 이길 수 있는데 왜 안 써요?", "혈압약이나 갑상선약을 평생 먹는 사람도 있어요, 그거랑 다를 게 없습니다."

"당신이 그 성격을 유지하고 있는 건, 당신 인생에서 그 성격이 가진 단점보다 장점이 더 많기 때문이에요.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을 겁니다. 당신의 성취는 당신을 힘들게 하는 그 성격 덕이라는 걸."

의사들의 이 말이 "네가 힘든 것은 사주에 의욕을 뜻하는 목(木)이

많은데, 목을 지지할 토(土)는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역술인의 말보다 더 의지가 되고 위안을 주는 이유는, 심리학 개론 시간에 배운 것처럼 그것이 과학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사태가 불거지고 화이자 미국 본사 벽에 ‘과학이 승리하리라(Science Will Win)’라는 표어가 붙은 걸 보았을 때,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기질적인 문제로 생긴 내 인생의 여러 고비에서도, 대개 과학이 승리해 왔다.

겨울이 그러하듯, 여름도 다시 오게 마련이다. 나는 밑바닥으로 굴러떨어졌을 때조차도 좋아진 때를 상상하는 법을 배웠고, 그 소중한 능력은 악마적인 어둠 속을 한낮의 햇살처럼 파고든다.
? 앤드루 솔로몬, 민승남 옮김, 『한낮의 우울』(민음사)에서

"우리의 소망이란 우리들 속에 있는 능력의 예감이다."라는 괴테의 말을 떠올렸다.

불쌍한 한스 기벤라트! 수업을 듣는 내내 헤르만 헤세의 소설 『수레바퀴 아래서』의 주인공 한스 기벤라트를 생각했다. 공부에 치이다 목숨을 잃는 이 가엾은 소년에게 한창 대입 준비 중이던 고등학생 때도 공감한 적이 없는데, 라틴어를 수강하면서 마침내 그를 이해했다. 소설의 디테일은 흐려지고 큰 줄거리만 기억났는데, 한스가 라틴어학교에 다녔다는 내용이 희미하게 머릿속에 남아서인지 한스가 라틴어 때문에 고생했고 그를 끝내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도 몹쓸 라틴어라고 생각했다.

친구 따라 강남 가려고 라틴어 강의에 등록해서 사서 고생 중이었던 나와, 아버지와 고향의 기대를 등에 업고 훌륭한 인물이 되기 위해 신학교에 진학한 한스의 처지는 사뭇 달랐지만, 어쨌든 라틴어를 배우는 내내 나는 ‘불쌍한 한스’가 된 기분이었다.

기억이란 어쩌면 그렇게 제멋대로인지!
한스를 괴롭혔던 건 신학교의 엄격한 규율과 숨막히는 분위기였지, 라틴어가 아니었다. 『수레바퀴 아래서』를 다시 읽어보니, 한스는 그리스어 문법을 어려워했고 히브리어에는 흥미가 없었지만, 라틴어를 뛰어나게 잘했고 심지어 좋아했다. 헤세는 한스가 "수학의 세계에서는 미로를 헤매거나 남을 속이는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마음에 들어 했다."면서 이렇게 쓴다.

같은 이유로 한스는 라틴어를 매우 좋아했다. 왜냐하면 그 언어는 뚜렷하고, 확실하며, 좀처럼 의혹의 여지를 남기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 헤르만 헤세, 김이섭 옮김, 『수레바퀴 아래서』(민음사)에서

"stat rosa pristina nomine, nomina nuda tenemus."(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

그 시절, 우리는 무엇 때문에 청춘의 일부를 투자하여 대학을 졸업하면 더 이상 쓸 일 없을 것 같은 언어를 붙들고 끙끙대며 머리를 싸매었던 것일까? 어떤 힘이 우리를 지식의 세계로 인도하였으며, 그 미지의 세계를 헤매며 끝없이 공부하고 또 공부하도록 만들었던 것일까?

교수 자리가 날지 불확실하지만 단지 공부가 좋아 서양 고전 연구를 업으로 삼겠다 결심한 시간강사와, 졸업 후에 미래가 불투명하지만 단지 공부가 좋아 쓸데도 없어 보이는 라틴어 강의를 듣겠다 마음먹은 학생들……. 그 낡고 허름한 지상(地上)의 강의실에서 우리는 천상(天上)의 언어를 배우고 있었고, 그 언어는 대부분의 수강생들에게 삶의 잉여였지만 분명 ‘위안’이었다. 세상은 우리에게 ‘쓸모’를 요구하지만 유용한 것만이 반드시 의미 있지는 않으며 실용만이 답은 아니라는 그런, 위로.

그렇지만 나 자신이 조직의 부품에 불과한 것만 같을 때, 부품인 주제에 쓸모라곤 없는 것 같을 때, 그래서 비참하여 마음이 괴로울 때, 위로와 안식을 주는 건 내가 떠난 지 오래된, 그저 ‘잉여’에 불과하다 여겼던 그 공부의 세계였다. 쓸모없어 보였던 그 라틴어 수업이 내 세계를 확장시켜 주었다. 세상에는 엄청난 세월이 지나 실생활에서 쓰이지 않아도 기억되는 언어가 있고, 온 힘을 다해 그 언어를 공부하는 사람이 있고, 그 언어로 쓰인 아름다운 노래가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하면서…….

다시 『수레바퀴 아래서』로 돌아가자면, 한스 기벤라트를 죽인 것은 공부가 아니었다. ‘쓸모’에 대한 세상의 강박이었다. 한스는 그리스어와 히브리어를 배우며 문법보다 내러티브에 더 감정이입한다. 호메로스의 영웅이나 복음서의 인물들을 단순한 이름이나 숫자로 기억하지 않고 붉은 입술과 얼굴, 영혼이 살아 숨 쉬는 손을 가진 이들로 가까이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학교가 그에게 허락한 언어는 틀에 박힌 문법의 세계, 향후의 영달을 위한 실용의 테두리 안에 갇혀 있었다. 친구 하일너와의 관계에 몰두해 성적이 떨어진 한스를 부른 교장은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약속해 주겠느냐고 물은 후에 이렇게 덧붙인다.

"아무튼 지치지 않도록 해야 하네. 그렇지 않으면 수레바퀴 아래 깔리게 될지도 모르니까."

교양은 비정한 현실 속에서, 더 비정하거나 덜 비정한 세계를 상상하고 그에 틈입할 여지를 준다. 그러한 자유라도 있기에, 우리는 지치지 않고 생(生)의 수레바퀴를 유연하게 굴릴 수 있는 것이다.

Sapiens nihil facit invitus nihil iratus
현명한 이는 어떤 것도 마지못해 하거나 분노한 채로 하지 않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지극히 이상적인 생각이었지만, 그런 믿음이라도 없었다면 그 시절을 견디기 어려웠을 것 같다.

원어로 읽었으면 축자적으로 따져가며 곱씹어 생각해 보았을 텐데, 번역본을 읽을 때는 그런 과정이 생략되었다. 나는 작품의 과감하고 독창적인 해석에 방점을 두고 과제와 시험 준비를 했다. 스스로가 꽤나 창의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텍스트를 꼼꼼히 읽지 않았는데 무엇을 밑거름 삼아 창의성이 싹을 틔우겠는가? 그렇게 한 학기를 보낸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나의 사고(思考)는 선생님의 가르침 그 이상을 넘어가지 못했다. 학점은 B-에 머물렀다. 다른 과목도 아니고 문학인데! 문학에는 자신이 있었는데…….

새로운 단어를 하나하나 알아가고, 문장의 뜻을 짚어가고, 글자 그대로의 의미를 이해하고, 행간에 숨겨진 뜻을 유추해 내는 일이 좋았다.

골수를 짜내듯 모국어를 한껏 동원해 취업을 위한 무기로 사용하던 지난한 시간 속에서 외국어로 된 문학 작품을 읽고, 여기가 아닌 다른 세계를 그려보고, 단어의 의미와 아름다움을 곱씹어보는 일이 숨통을 틔워주었다.

미래에 관한 모든 질문 앞에서 나는 자신이 없었고, 대답을 유예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현실은 즉답을 요구했다. 괴로움은 그 간극에서 왔다.

어쨌든간에 기말 리포트를 쓰면서 나는 왕성하고 자유롭게 사고하였는데, 그렇게 사유를 뻗어갈 수 있었던 힘은 텍스트를 착실하게 읽어낸 데서 왔다.

대학원 진학을 거세게 반대하던 아버지마저 걱정이 되었는지 "사람은 어디든 적(籍)이 있어야 한다."면서 "대학원 시험을 보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아무리 낡고 지루하다 해도, 기본은 변하지 않는다. 인문학의 기본은 긴 텍스트를 읽어내는 훈련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책상머리에 묵직하게 앉아 보내는 시간이 필요하다. 공부의 기본은 언제나 아날로그다.

책을 장악한다는 것은 날뛰는 야수의 목덜미를 낚아채어 도망가지 못하도록 틀어쥐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대학이라는 공간이 나를, 책이라는 맹수를 길들일 수 있도록 정교하게 훈련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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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디스 버틀러는 "페미니즘이나 정신분석학이나 여성을 생물학적 사실로 전제했다는 점에서는 똑같은 본질주의다."라는 다소 ‘과격한’ 주장으로 보편주의자들을 불편하게 했지만 사실 그 말은 맞다.

"가부장제가 여성을 동일성에 가둔다면, 우리는 다양성으로 맞서겠다." 이제까지 여성 공통성의 대표 요소로 여겨졌던 모성, 섹슈얼리티에 대한 여자들의 경험은 같지 않다. 남자 시스템이 그들의 필요와 원하는 기능에 따라 "여자는 모두 본질적으로 ‘창녀’이다.(어머니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같다."고 명명했을 뿐이다. 여자들은 같지 않다.

내가 취약해 보여서일까. 처음 만나는 여성들도 내게 비밀스런 이야기를 잘 한다.

모든 여성이 아이를 낳는 것은 아니며 아이를 낳은 모든 여성이 헌신과 희생(이것은 책임과 다르다)을 당연하게 수용하지 않듯, 모든 여성이 달콤하고 부드러운 섹스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 생각에 한국은 동성(애자) 사회(homosocial)다. 한국 사회에서 남자는 게이이고 여자는 레즈비언이다. 남자들은 접촉을 가장한 패싸움을 즐겨 벌인다. 그렇게 격렬히 만지고(싸우고) 나면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가 된다. 남자는 자기들끼리 밀어주고 아껴주고 키워주고 자리를 대물림한다. 여자를 가운데 둔 삼각관계에서도 지지고 볶고 질투로 진을 빼는 대신 협상하거나 친구가 되거나, 여자를 제물 삼아 함께 성장한다.(보 비더버그의 〈아름다운 청춘〉이나 알폰소 쿠아론의 〈이 투 마마〉를 보라.) 남자에게 여자와의 사랑은 남성 연대만큼 중요하지 않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이 레즈비언이 되는 방식은 남성의 타자, 대리인으로서이다. 여성 대부분은 몸만 ‘여자’지 남자의 사고방식을 머리에 이고 지고 남자의 비위 맞추기를 일상 노동으로 삼아 산다.

성기 노출이 성폭력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여성이 그것을 얼마나 두려워하고 불쾌해하는지 그들이 정확히 간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이성애자이면서도 남자의 벗은 몸이 아니라(남성의 시선으로) 여자의 벗은 몸을 보고 성욕을 느낀다.

우리는 남자의 안경을 너무 오래 쓴 탓에 아예 남자의 눈을 가지게 되었다.

성별 사회에서 여자에게 사랑은 사회적 관계, 생존, 돈, 자아 실현, 성취 같은 인생의 모든 것이기 쉽지만, 남자에게 사랑은 언제나 다시 올 버스, 여러 버스 중 한 대일 뿐이다.

남자가 사랑에 울고불고할 때는 자기가 찬 것이 아니라 차였을 때, 즉 게임에 지고 거부당해 자존심이 다쳤을 때뿐이다.

그들은 남자지만 여성 화자로서 말한다. 반면 여성 작가가 남성 화자로 말하는 작품은 별로 없다. 남자는 두 영역을 모두 오갈 수 있지만 여자는 그럴 수 없다.

남자에게도 사랑이 관계, 생존, 돈, 자아 실현, 인생의 목표여야 한다.

남자들도 친밀감에 목숨을 걸고 관계 유지를 위해 자기 생의 모든 가능성을 포기하고 사랑하는 여자의 출세를 위해 헌신한다.

사실 사도마조히즘은 준비되고, 기획되고, 동의된 대단히 ‘지적’인 섹스다. 남자의 권력과 폭력, 여성의 피학성을 정당화하는 것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여성이 남성을 ‘성폭행’하는 경우는(남자의 옷을 벗기는 것이 아니라) ‘벗겨 달라’고 강요(애원)하는 것이다.

여주인공이 "자신감을 잃는 것보다 버림받는 것을 더 두려워하는" 지독히 외로운 여자였기 때문에 비정상이 되었다는 식의 영화 읽기는 여성의 주체성과 삶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해석이다.

다시 말해 가부장제 사회는 여성에게 마조히즘이 있다고 강요하지만, 여성이 마조히즘을 선택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

이 영화를 두 번 봤다. 내내 울었고 그래서 많은 장면을 놓쳤지만 남자주인공이 여주인공에게 "당신은 미쳤어." "남자의 마음을 흔들어놓고 무시하면 어떡해?" "사랑은 함께하는 거야, 같이 즐기는 거야." "내 손이 더러워질까 봐 못 때린다." "다시는 남자를 모욕하지 마."라고 말하는 장면에서는 웃음과 비웃음을 모두 참기 힘들었다.

영화의 마지막 성폭력 장면은 남자주인공, 아니 남자 일반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욕망과 상상력의 종착지가 결국은 삽입(강간)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녀에게 잘못이 있다면 여자에게 폭력은 판타지지만 남자에겐 현실임을 알지 못한 것이다. 젠더 시스템은 남성에게 판타지에 머물지 않고 폭력을 실천할 수 있는 권력을 부여한다. 그녀는 게임의 법칙을 몰랐다. 게다가 그녀는 남자의 친절과 친밀함이 주는 ‘좋음’에 익숙하지 않았다. 아니, 아예 원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자아를 없애려면? 사랑하는 사람의 폭력의 대상이 되어 ‘그대 가슴에 물들어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여주인공이 원한 사랑이었지만 그녀의 젠더는 이러한 사랑조차 불가능하게 만든다. 여성은 아무것도 선택할 수가 없다. 남자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여성의 사랑은 그 어떤 것도 불가능한가? 이건 내가 강연에서 답하지 못한 두 번째 이유이기도 하다.

경험이란 무엇일까. 언젠가 박완서는 자신이 경험한 것밖에는 못 쓴다고 말한 적이 있다. 성찰적이며 삶의 진실을 관통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누구나 자신이 경험한 것밖에는 알지 못한다. 모든 언어 ? 소설, 영화, 예술, 이론, 학문…… ? 는 다 개인의 경험이다.

마르크스주의도 마르크스의 경험에 ‘불과’하며 푸코의 탈근대 이론도 푸코의 경험일 뿐이다.

특정인의 사적인 경험이 보편적 이론이 되는 것, 그것이 권력의 효과일 것이다. 개개인의 경험은 모두 사회적 권력 관계를 통해 구조화된 것이다. 개인들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그리고 그 해석을 통해 다른 주체가 된다. 각기 다른 경험은 모든 이들에게 공평하게 이해되지 않는다.

특수한 것은 보편의 적용을 받아야 한다.

영화 〈디 아워스(TheHours)〉에 대한 일부 남성들의 폄하나 무감동은 독해 불능에서 온 것이다. 권력자는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 것을 솔직하게 시인하지 않고 ‘나쁘다, 형편없다’고 해도 받아들여진다.

〈디 아워스〉는 ‘사소한’ 여성의 경험과 감정을 의미화하고 정치화했을 때만 보인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 영화를 보고 옷이 다 젖도록 운다. 어떤 사람은 그런 사람을 보고 감정 과잉이라고 느끼지만, 왠지 버지니아 울프 운운하면서 지적으로 포장된 이 영화에 대해 함부로 말했다간 무식하다고 망신당할 것 같아 입을 다물고 스트레스를 받는다. 어떤 사람은 감동은 받았지만 아리송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이 영화에 대해 물어보고 다닌다.

왜 여자의 일생은 〈디 아워스〉처럼 ‘단 하루를 통해서도 보여진다’고 가정될까? 남자는 진화하지만 여자는 진화하지 않기 때문에? 여자의 매일매일은 같기 때문에?

우리 사회에서 여성 문제가 사회 문제로 제기되려면 남편에게 맞거나, 성폭행당하거나, 아주 억울하게 해고당해야 한다. 남편이 때리지도 않았는데 심지어 〈디 아워스〉처럼 남편이 사랑한다고 주장하는데, 아이를 두고 집을 나오는 로라(줄리언 무어 분)는 미친 여자이거나 마녀로 여겨진다.

어떤 남성은 정말 진지하고 심각하게 내게 묻는다. "도대체 여자들은 왜 저래요? 남편이 행복하게 해주는데……." 문제는, 보이는 여성 억압과 보이지 않는 로라의 문제가 연속선 위에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고1 때부터 약 20년 동안 한 달도 ‘연애’ 상태가 아닌 적이 없었다. 남자든 여자든 이데올로기든 늘 누군가에, 무엇인가에 몰두해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은 예외 없이 상처로 남았다.

침묵이 두려워 파티를 여는 댈러웨이 부인처럼, 나는 자신과 만나지 않기 위해 연애가 필요했는지 모른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한 삶을 선택할 경우 겪어야 할 너무도 많은 공격들이 두려워 ‘연애 감정 상태’를 도피처로 삼았는지 모른다.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이 말은 사랑에 관해 내가 들어본 말 중 가장 올바른 슬로건이다. ‘움직임(운동, 변화)’은 사랑의 정치성을 기가 막히게 표현한다. 사랑은 권력 관계이기 때문에, 사랑의 감정은 역사적?문화적 산물이기 때문에 변할 수밖에 없다.

관계와 감정은 변화하고 발전하고 진화한다. 그리고 퇴화한다.

나는, 평생 한 사람만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 발전이 없는 사람이거나 한 사람하고만 치열할 수 있는 불가사의한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을 변화시킨 사람을 사랑한다. 영원한 사랑 ? 일부일처제, 배타적인 낭만적 사랑 ? 을 믿고 실천하는 자의 고통은 상대가 자신을 변화시킨 그 순간을 영원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 순간을 지속시키기 위해,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으려 하기 때문이다.

결혼은 사랑의 완성이 아니라 사랑의 종말이다.

사랑은 유기체다. 그래서 모든 사랑은 부패한다.

현실에서 사랑은 움직이지만, 여성에게 ‘주입된’ 사랑 이데올로기는 여전히 ‘사랑은 영원하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너 자신과 만나지 말고, 한 남자를 기다리고 그리워하다 돌이 되어라!’

몇 년 전 나는, 오랫동안 몰두해 온 어떤 관계의 상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물 밖으로 내던져진 물고기처럼 숨이 가빠 끊어질 것 같았고 매일 밤 흐르는 눈물로 귀에 물이 찼다.

고통이 고통스러운 것은 그것이 계속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그 어떤 것도 계속되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변한다. 인생무상이라는 말은 인생이 허무하다는 뜻이 아니다. 인생에는 상(常)의 상태가 없다는 것, 즉 삶은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의미이다. 그것을 어찌 붙잡을 수 있겠는가.

살아 있는 한, 정치적으로 발전하는 한,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한, 인간은 언제나 사랑을 한다. 다만 그 대상이 바뀔 뿐이다. 삶은 곧 움직임(movement)이고, 움직임은 변화하는 순간(moment)들의 분절적인 연속이다. 고로 영원한 사랑도 안전한 삶도 없다. 타인의 손을 잡는 것이 내 영혼에 사슬을 감는 행위여서는 안 된다. 키스는 사랑의 계약이 아니며, 애인이 주는 선물은 언약의 징표가 아니다.

기주봉 씨는 영화에서 본 그대로였다. 다만 더 잘생기고 기품 있고 멋있었다. 나도 모르게 로맨틱해졌다(?). 정말, 배우 같았다. ‘분위기가 있다’는 표현이 딱 그런 거였다. 배우란 ‘무엇’일까. ‘누구일까’라고 쓰지 않는 이유는 그들의 몸이 살아 있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주 조금은 나 자신에 대해 안다. 그래서 배우를 감히 단 한 번도 동경해본 적이 없다. 세상에는 절대로 안 되는 일이 있는 법이다.

사실 나 같은 ‘오타쿠’에게 영화는 이런 이야기들만으로도 충분하다. 생계 걱정 없이 혼자, 혼자 본 영화를, 혼자 생각하면서 가슴 뛰다가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완벽한 인생이다.

늘 정치적으로 치열하고 올바른 내 친구들은 영화 마지막 즈음 등장한 느닷없는 남녀 짝짓기에 분노했다. 나도 마찬가지다.

결혼으로 끝나는 영화는 질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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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에서 가장 문제적인 제도, 가장 부패한 제도, 가장 비인간적인 제도는 가족이다.

가족은 정치경제적 영역인데도 자연적인 장소로 묘사된다(특히, 모성). 어떤 글이나 텍스트를 읽어도 가족에 대해서는 어쩌면 그렇게 상상력이 부족한지 정말 놀랍고, ‘그들의 무지’가 이해되지 않는다. 가족에 관한 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뇌는 고정되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빈 집>은 김기덕 감독만이 만들 수 있는 작품이다.

중산층 남자들은 절대 <빈 집> 같은 발상을 할 수 없다.

나중에 채현과 경석은 연인 사이가 되는데, 채현은 어렸을 적 버림받은 경험의 공포 때문인지 모든 사람에게 잘해주는 착한 여자 콤플렉스를 뒤집어 쓴 성녀(聖女) 여대생으로 등장한다. 제3자가 봐도 얄미울 정도로 답답하지만 한편 안쓰럽다.

모르는 사람들이 모였지만 다들 정이 많고 서로 의지한다. 서로 싫은 소리를 주고받으면서도 뒤에서는 흐느낀다. 영화를 보면서 나도 저런 사람들 사이에 살짝 끼어 살았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이들이 사는 모습이 주는 특유의 안정감이 러닝 타임 내내 관객의 마음을 무장 해제시킨다.

남자의 집에 쳐들어가니 가족 넷이 단란하게 식사 중이다.(식사는 단란한 가정의 증표인가?) 물론 부인도 있다. 피아노도 있었던 것 같다.

한국 사회에서 가족의 지위는 자녀의 성공과 안락해 보이는 집에 근거를 둔다. <가족의 탄생>은 새롭다 못해 기존의 한국 영화와 격을 달리하면서, 프레임을 이동시킨 작품이다.

한국에도 이런 영화가 있으며, 이런 영화감독이 있다고 자랑할 만한 영화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섣불리 한국 사회에 좌절하지 않기로 했다.

감독에게 한마디. "이런 영화를 만들어줘서 고마워요. 가족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지겨운 사람이 많은데…… 제목이 <가족의 탄생>인데도 좋아요. 이 영화가 아니었다면 내 삶은 훨씬 힘겨웠을 거예요."

사랑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랑의 반대 상황은 확실하다. 사랑‘한다’의 반대말은 사랑‘했다’이다.

사랑은 시점이 개념을 좌우한다. 사랑할 때와 헤어질 때 혹은 ‘식었을 때’ 태도의 차이가 인간의 인격의 기준이라고 믿는다.

사랑은 별 게 아니다. 사회 구조의 일부이면서 체제 안에서 만들어진 인지(認知) 활동이자 인류 역사의 한 부분일 뿐이다. 《낭만적 사랑과 사회》(재클린 살스비),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울리히 벡, 엘리자베트 벡-게른스하임), 《현대 사회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앤서니 기든스)을 읽으면 사랑을 역사적 산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인간관계다. 사랑은 그중에서 가장 치열한 관계다. 사랑은 모호한 개념이고, 계산할 수 없는 노동이며, 돌변하는 퍼포먼스다

여자는 과거의 깊은 상처로 자포자기 상태다. 호방해 보이지만 사포(砂布)로 문질러낸 속살이 보이는 듯하다. 가슴 아픈 얼굴이다.

남자의 나이가 많다면 ‘사랑의 장벽’ 같은 것은 없다. 여성이 어리다면 계급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젠더는 이렇게 강력하다.(즉, 부유한40대 남자와 가난하지만 젊고 예쁜20대 여자의 결합은 ‘자연스럽다’.)

대중 가요는 기다리는 여자를 노래하지만, 여자는 절대로 기다려서는 안 된다. 여전히 방황 중인 남자가 다시 찾아왔을 때, 여자는 묻는다. "네 인생에 내가 필요한 거냐, 아니면 단지 그냥 좋은 거냐, 나를 원하는 거냐?" 남자는 당황스러워한다. 잘 모르겠단다.

원함의 다른 측면인 소유라는 관점에서 보면 상대의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원하는지를 알기 어렵다. ‘원한다’는 ‘사랑한다’보다 숨 막히고 섹시하다. ‘필요’도 그렇다. 필요야말로 가장 절실한 사랑인지도 모른다. 마치 식욕과 수면욕처럼, ‘나’라는 생물체의 생존 조건이 ‘너’에게 달렸다는 말이다.

‘모든’ 사랑은 사랑하는 자의 결핍이나 욕망에 대한 자기 판단, 회계(會計, 대차대조표), 자기 확신의 활동이다. 자기가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은 절대로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랑받음은 내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 상대방의 자기 혼란이다. 사랑은 내가 타인의 상태에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달려 있다. 본인이 매력적이고 잘나서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나는 <하얀 궁전>의 두 사람은 서로를 ‘필요로 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필요한 관계를 얻으려면, 그 관계를 오래 이어 가려면 무엇이 가장 필요한가를 아는 것이다. 너무 절실하게 필요하면 분별력이 사라져서, ‘아무나’가 상대가 되고 그 상처로 다시 절실한 필요가 더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경우가 많다.

‘필요’가 ‘사랑’이 되려면 윤리가 필요하다.

의사소통이 사랑의 기본이건만, 우리는 타인과 대화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 대화 자체가 권력 관계의 규제를 받는다는 점도 문제다.

두 사람 사이에 오간 대화의 정확한 의미는 어원에 있다. em/im(안에)+barrass(가두다). 그러니까 상대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지 못하고 자기가 원하는 생각에 가두어놓고,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혼자서 괴로워했다는 사실을 주인공들은 깨달았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연쇄 살인 사건의 주된 희생자들은 성 산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이다. 특히, 남자들 간의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낮은 계급의 남성들이 ‘매춘’ 여성을 살해하는 이유는, 남자들이 생각하기에, 그들이 여성 젠더를 대변하기 때문이다.

여성의 섹스가 매춘이든 사랑이든, 남성의 요구가 아니라 여성 자신의 선택일 때, 여성은 목숨을 잃는 것을 포함해 모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논리다.

여성주의에서 성과 사랑이 이론적, 정치적으로 중요한 주제가 되는 이유는, 젠더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의 섹스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여성은 섹스로 인해, 혹은 단지 성별 때문에 두들겨 맞고, 직장을 잃고, 사회적으로 매장되고, 목숨을 잃는다. 이런 문제가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정치적인 문제란 말인가?

내가 열광하는 영화들인 〈여인의 초상〉, 〈스위티〉, 〈피아노〉, 〈내 책상 위의 천사〉의 감독인 제인 캠피언의 〈인 더 컷〉은 스릴러를 표방한다.

스릴러만큼 형식미를 뽐내는 장르도 없지만, 이 영화는 ‘말하는 형식’보다는 ‘말의 내용’에 집중한다.

스릴러뿐만 아니라 로맨스, 공포, 액션 등 모든 장르의 법칙은 몰성적(gender‘blind’)이어서, 장르의 형식을 깨지 않고 여자의 이야기를 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 더 컷〉은 스릴러의 형식을 빌린 것이라기보다는 스릴러에 여성의 언어를 담는 작업은 필연적으로 남성 스릴러의 비정치성을 문제 삼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 영화다.

여성에게 섹스는 억압이자 자원이기도 하다. 그러나 평생 동안 자원이 되는 것도 아니고, 자원일 경우에도 여성이 자기 섹슈얼리티를 실천하기는 어렵다. 사회가 여자의 섹스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여자에게 섹스는 생명과 삶 전체를 걸어야 하는 정치적 투쟁의 목표가 된다. 여성이 다른 삶을 모색하거나,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고 싶을 때, 자신이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을 때, 성은 이 모든 것들의 변화를 알려주는 리트머스 시험지다.

섹스가 여성에게 정치적 의미를 발생시키지 않을 때는 젠더도 작동하지 않는다. 가부장제 사회가 여성을 섹스에 묶어 두었기 때문에, 여성에게 섹슈얼리티는 자기 혁명의 증표가 되어버린다. 사회가 얼마나 야비한 구도로 형성되어 있는지를 섹슈얼리티보다 더 분명하게 드러내는 영역은 없다.

팜파탈은 남성이 저지르는 폭력과 파괴가 결코 남성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는 남성 판타지의 산물이다. 남성의 성욕은 무한대라서 어디로 ‘분출’될지 모르지만(성의 피해자로서 여성), 성욕 폭발의 버튼을 누른 사람은 남자 자신이 아니라 남자를 유혹하는 여자(성의 유혹자로서 여성)라는 것이다.

〈인 더 컷〉은 이 공식을 뒤집는다. 이 영화에서는 욕망으로 고통받으며 사랑에 빠질까 봐 고뇌하는 사람이 여성이고, 매력적이나 치명적인 유혹자는 남성이다.

‘여성’도 갈등, 사유, 선택, 책임 같은 인간의 행위를 하는 살아 움직이는, 변화하는 존재가 된다. 행위자로서 여성, 역사적 주체로서 여성, 그리고 여성의 성적인 욕망은 남성 사회를 위협한다. 여성이 원하는 것은 언제나 그 사회의 경계와 만나고, 결국 정치적 갈등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네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다."라고 말로이가 불평하자, 프래니는 "내가 너무 많은 것을 원하게 될까 봐 두려워."라고 말한다.

‘여성이 원하는 것’은 남성에게 무기력과 수치심을 느끼게 한다. 프로이트뿐만 아니라 대개의 남성들에게 여성은 ‘검은 대륙’이다. ‘검은 대륙’에 접근하지 못하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남성들이 짜증스럽고 히스테리컬하게 말한다. "도대체 요점이 뭐야! 원하는 게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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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
? E. H. 곰브리치, 백승길·이종숭 옮김, 『서양미술사』(예경)에서.

실제로 곰브리치는 서문에서 "이 책을 쓰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 우선해서 염두에 둔 독자는 자신들의 힘으로 이제 막 미술 세계를 발견한 10대의 젊은 독자들"이라 밝힌다.

그림을 보고 도상을 읽어내는 걸 좋아했는데, 그러기엔 종교화가 제격이었다.

법학은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여러 번 말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항상 같았다. "세상에 적성이라는 게 어딨어? 하면 다 하게 돼 있어."

내 능력이 어떤지는 내가 누구보다도 잘 아는데, 내겐 그 논리와 합리의 세계를 이해할 만한 머리가 없는데……. 말을 해보았자 안 통하니 아버지를 설득할 만한 객관적인 증거가 필요했다. ‘그래, 법대 수업을 듣는 거야.’ 나는 결심했다.

① 권리의 행사와 의무의 이행은 신의에 좇아 성실히 하여야 한다.
② 권리는 남용하지 못한다.

낯선 강의실, 쏟아지는 생소한 용어와 판례에 허둥대고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신의(信義)’와 ‘성실(誠實)’이라는 말이 아름답다 여겨졌다. 딱딱하고 기계적이라고만 생각했던 법에도 심장이 있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 했던 것 같다. 인간이 만든 것이고 인간을 위한 것이니까.

돌이켜보면 말의 쓰임에 민감했기 때문에, 법률의 언어를 법률의 세계에 국한해 받아들이지 못하고 문학의 세계로까지 확장시켜 생각했던 것이 나의 패착이었던 것 같다.

내가 즐겨 사용하는 단어 목록, 그러니까 내 언어의 데이터베이스에는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 단어다.

시험에선 비록 C를 받았지만, 합당한 근거를 들이밀며 아버지를 설득했다는 점에서 당시의 나는 평소의 나답지 않게 논리적이었다.

여전히 용어는 낯설고 어려웠지만, 일단 용어를 체득하면 논리를 이해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생각하는 만큼 인간은 발전하다고 믿는다. 그간 사용하지 않았던 뇌의 다른 부위를 흔들어 깨워 억지로라도 열심히 쓰다 보면, 우수함을 타고난 이들만큼은 못해도 "서당 개 3년에 풍월을 읊는다."고, 어느 정도 문리가 트이게 된다. 뇌도 근육이라 잠들어 있던 부분을 인식하고 단련하면 힘이 생기기도 하는 것이다. 무……,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다시 ‘민법총칙’ 수업을 듣고 싶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학점으로 환산되지 않더라도 들을 가치가 있는 수업이 있다. 강의실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충만해지는 수업. 독문학과에서 개설한 교양 강좌 ‘독일 명작의 이해’가 그런 수업이었다.

같은 책을 읽고 그에 대해 자기 생각을 나누는 일의 즐거움, 다른 사람들의 해석에 귀 기울이는 법, 내 의견을 조리 있게 이야기하고, 때론 밀어붙이고 때론 거둬들이는 법도 배웠다.

일기장에 적거나 친구에게 편지를 쓰는 것에 그치던 자기 만족적 글쓰기에서 벗어나 여러 사람에게 글을 보여주며 의견을 듣는 법도 익혔고, 다른 이들의 글을 읽으며 내 식견의 한계를 깨닫고 사고를 확장하는 법도 체득했다.

"인간은 지향이 있는 한 방황한다.(Es irrt der Mensch, solang’er strebt.)"라는 문장은 수업을 들은 많은 이들에게 삶의 모토가 되었다. 괴테의 『파우스트』를 한 줄로 요약하자면 이 말이 될 것이라고 선생님은 일러주었다.

"선한 인간은 어두운 충동에 사로잡혀 있을지라도, 바른 길을 잘 의식하고 있다."고 덧붙이며 메피스토에게 파우스트를 맡긴다.

"선한 인간은 어두운 충동에 사로잡혀 있을지라도, 바른 길을 잘 의식하고 있다.(Ein guter Mensch in seinem dunklen Drange ist sich des rechten Weges wohl bewußt.)"

문학에 애정이 깊은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든 같은 책을 읽었다는 이유만으로 동류(同類)라는 걸 알아보고 친구가 된다.

조금 걸어 서원 뒤 ‘시정’을 보러 갔다. 같은 형태의 정자가 독일 도나우 강변에 있다고 했다. 선생님이 20년 지기인 독일 시인 라이네 쿤체에게 선물한 정자다.

모든 세속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그 공간, 이상주의자만이 만들 수 있는 그 서원의 대들보에 선생님은 적어 넣었다. "爲如白 爲後學 爲詩." 여백을 위해, 후학을 위해, 시를 위해……. 시를 읽지 않는 시대, 시를 위해. 실용의 시대, 잉여를 위해. 시 가르치는 사람의 딸로 태어나 자란 나는 그 말이 뭉클하면서도 아파서, 어두운 주차장에 차를 대고 집으로 올라오는 길에 조금 울었다.

‘독일 명작의 이해와 나’, ‘다시 읽는 독일명작’이라는 주제로 글을 쓰고 선생님과 수강생들의 사진을 넣어 자그마한 책을 만들었다. 제목은 "작은 여백들, 아름다운 유월에"라고 붙였다. 그새 선생님의 염원대로 문을 연 ‘여백 서원’과, 우리 모두가 좋아하는 『파우스트』의 명구 "멈추어라 순간이여, 너 참 아름답구나!"에서 따온 말이었다.

"글 배웠고 글 읽었으면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라고 선생님은 고별 강연에서 말씀하셨다. 우리가 선생님으로부터 수없이 들어온 ‘공부하는 이유’, ‘책을 읽는 까닭’의 핵심이기도 했다.

보수적이기로 이름난 경북 모 지역 출신이라 "남자는 평생 세 번만 우는 것"이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다는 한 수강생이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괴테의 시에서 "나를 울게 두어라! 우는 건 수치가 아니다/ 우는 남자들은 선한 사람"이라는 구절을 접하고 크게 충격받았다고 썼다. 그 글에 인용된 시를 읽으며 나는 다시 또 울었다.

나를 울게 두어라! 밤에 에워싸여
끝없는 사막에서,
낙타들이 쉬고, 몰이꾼도 쉬는데,
돈 셈하며 고요히 아르메니아인 깨어 있다
그러나 나, 그 곁에서, 먼먼 길을 헤아리네
나를 줄라이카로부터 갈라놓는 길, 되풀이하네
길을 늘이는 미운 굽이굽이들.
나를 울게 두어라! 우는 건 수치가 아니다.
우는 남자들은 선한 사람.
아킬레스도 그의 브리세이스 때문에 울었다!
크세르크세스 대왕은 무적의 대군을 두고도 울었고
스스로 죽인 사랑하는 젊은이를 두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울었다.
나를 울게 두어라! 눈물은 먼지에 생명을 준다.
벌써 푸르러지누나.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전영애 옮김, 『서·동 시집』(도서출판 길)에서

"오랜만에 아름다운 착각 속에 빠진 것 같습니다. 어쩌면 문학이 하는 일도 우리를 이러한 착각 속에 빠뜨리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인간은 자주 착각하고, 착각을 진실로 믿어 가끔씩 위대한 힘을 발휘하고, 착각에서 깨어나 슬퍼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착각한다. 착각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 흔들릴 수 있는 존재라는 것, 인간의 취약성을 인정하면서 그럼에도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인문학의 힘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독일 명작의 이해’를 통해 인간은 지향하는 바가 있는 한 방황한다고 배웠다.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교양인’의 자세라는 것도 함께 배웠다.

졸업한 후 10년쯤 지났을 때, 우연히 학교에서 선생님을 마주쳤는데 "세월이 흘러도 책을 읽겠다고 수업을 듣는 학생들의 근본은 같더라." 하신 말씀이 잊히지 않는다.

선생님은 여전히 공부에 몰두하느라 주방에 가스가 끊긴 것도 잊어버릴 정도로 열정적이며, 괴테가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머물렀던 집에 거하며 연구할 기회가 마침내 생겼다며 새로 이탈리아어를 공부하고 계신다.

"그 도저(到底)한 흐름 속에서 우리 모두는 다시 한 번 ‘독일 명작의 이해’가 진행되었던 강의실로 되돌아가 영원한 청년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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