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서 가장 문제적인 제도, 가장 부패한 제도, 가장 비인간적인 제도는 가족이다.

가족은 정치경제적 영역인데도 자연적인 장소로 묘사된다(특히, 모성). 어떤 글이나 텍스트를 읽어도 가족에 대해서는 어쩌면 그렇게 상상력이 부족한지 정말 놀랍고, ‘그들의 무지’가 이해되지 않는다. 가족에 관한 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뇌는 고정되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빈 집>은 김기덕 감독만이 만들 수 있는 작품이다.

중산층 남자들은 절대 <빈 집> 같은 발상을 할 수 없다.

나중에 채현과 경석은 연인 사이가 되는데, 채현은 어렸을 적 버림받은 경험의 공포 때문인지 모든 사람에게 잘해주는 착한 여자 콤플렉스를 뒤집어 쓴 성녀(聖女) 여대생으로 등장한다. 제3자가 봐도 얄미울 정도로 답답하지만 한편 안쓰럽다.

모르는 사람들이 모였지만 다들 정이 많고 서로 의지한다. 서로 싫은 소리를 주고받으면서도 뒤에서는 흐느낀다. 영화를 보면서 나도 저런 사람들 사이에 살짝 끼어 살았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이들이 사는 모습이 주는 특유의 안정감이 러닝 타임 내내 관객의 마음을 무장 해제시킨다.

남자의 집에 쳐들어가니 가족 넷이 단란하게 식사 중이다.(식사는 단란한 가정의 증표인가?) 물론 부인도 있다. 피아노도 있었던 것 같다.

한국 사회에서 가족의 지위는 자녀의 성공과 안락해 보이는 집에 근거를 둔다. <가족의 탄생>은 새롭다 못해 기존의 한국 영화와 격을 달리하면서, 프레임을 이동시킨 작품이다.

한국에도 이런 영화가 있으며, 이런 영화감독이 있다고 자랑할 만한 영화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섣불리 한국 사회에 좌절하지 않기로 했다.

감독에게 한마디. "이런 영화를 만들어줘서 고마워요. 가족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지겨운 사람이 많은데…… 제목이 <가족의 탄생>인데도 좋아요. 이 영화가 아니었다면 내 삶은 훨씬 힘겨웠을 거예요."

사랑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랑의 반대 상황은 확실하다. 사랑‘한다’의 반대말은 사랑‘했다’이다.

사랑은 시점이 개념을 좌우한다. 사랑할 때와 헤어질 때 혹은 ‘식었을 때’ 태도의 차이가 인간의 인격의 기준이라고 믿는다.

사랑은 별 게 아니다. 사회 구조의 일부이면서 체제 안에서 만들어진 인지(認知) 활동이자 인류 역사의 한 부분일 뿐이다. 《낭만적 사랑과 사회》(재클린 살스비),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울리히 벡, 엘리자베트 벡-게른스하임), 《현대 사회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앤서니 기든스)을 읽으면 사랑을 역사적 산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인간관계다. 사랑은 그중에서 가장 치열한 관계다. 사랑은 모호한 개념이고, 계산할 수 없는 노동이며, 돌변하는 퍼포먼스다

여자는 과거의 깊은 상처로 자포자기 상태다. 호방해 보이지만 사포(砂布)로 문질러낸 속살이 보이는 듯하다. 가슴 아픈 얼굴이다.

남자의 나이가 많다면 ‘사랑의 장벽’ 같은 것은 없다. 여성이 어리다면 계급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젠더는 이렇게 강력하다.(즉, 부유한40대 남자와 가난하지만 젊고 예쁜20대 여자의 결합은 ‘자연스럽다’.)

대중 가요는 기다리는 여자를 노래하지만, 여자는 절대로 기다려서는 안 된다. 여전히 방황 중인 남자가 다시 찾아왔을 때, 여자는 묻는다. "네 인생에 내가 필요한 거냐, 아니면 단지 그냥 좋은 거냐, 나를 원하는 거냐?" 남자는 당황스러워한다. 잘 모르겠단다.

원함의 다른 측면인 소유라는 관점에서 보면 상대의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원하는지를 알기 어렵다. ‘원한다’는 ‘사랑한다’보다 숨 막히고 섹시하다. ‘필요’도 그렇다. 필요야말로 가장 절실한 사랑인지도 모른다. 마치 식욕과 수면욕처럼, ‘나’라는 생물체의 생존 조건이 ‘너’에게 달렸다는 말이다.

‘모든’ 사랑은 사랑하는 자의 결핍이나 욕망에 대한 자기 판단, 회계(會計, 대차대조표), 자기 확신의 활동이다. 자기가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은 절대로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랑받음은 내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 상대방의 자기 혼란이다. 사랑은 내가 타인의 상태에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달려 있다. 본인이 매력적이고 잘나서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나는 <하얀 궁전>의 두 사람은 서로를 ‘필요로 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필요한 관계를 얻으려면, 그 관계를 오래 이어 가려면 무엇이 가장 필요한가를 아는 것이다. 너무 절실하게 필요하면 분별력이 사라져서, ‘아무나’가 상대가 되고 그 상처로 다시 절실한 필요가 더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경우가 많다.

‘필요’가 ‘사랑’이 되려면 윤리가 필요하다.

의사소통이 사랑의 기본이건만, 우리는 타인과 대화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 대화 자체가 권력 관계의 규제를 받는다는 점도 문제다.

두 사람 사이에 오간 대화의 정확한 의미는 어원에 있다. em/im(안에)+barrass(가두다). 그러니까 상대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지 못하고 자기가 원하는 생각에 가두어놓고,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혼자서 괴로워했다는 사실을 주인공들은 깨달았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연쇄 살인 사건의 주된 희생자들은 성 산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이다. 특히, 남자들 간의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낮은 계급의 남성들이 ‘매춘’ 여성을 살해하는 이유는, 남자들이 생각하기에, 그들이 여성 젠더를 대변하기 때문이다.

여성의 섹스가 매춘이든 사랑이든, 남성의 요구가 아니라 여성 자신의 선택일 때, 여성은 목숨을 잃는 것을 포함해 모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논리다.

여성주의에서 성과 사랑이 이론적, 정치적으로 중요한 주제가 되는 이유는, 젠더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의 섹스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여성은 섹스로 인해, 혹은 단지 성별 때문에 두들겨 맞고, 직장을 잃고, 사회적으로 매장되고, 목숨을 잃는다. 이런 문제가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정치적인 문제란 말인가?

내가 열광하는 영화들인 〈여인의 초상〉, 〈스위티〉, 〈피아노〉, 〈내 책상 위의 천사〉의 감독인 제인 캠피언의 〈인 더 컷〉은 스릴러를 표방한다.

스릴러만큼 형식미를 뽐내는 장르도 없지만, 이 영화는 ‘말하는 형식’보다는 ‘말의 내용’에 집중한다.

스릴러뿐만 아니라 로맨스, 공포, 액션 등 모든 장르의 법칙은 몰성적(gender‘blind’)이어서, 장르의 형식을 깨지 않고 여자의 이야기를 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 더 컷〉은 스릴러의 형식을 빌린 것이라기보다는 스릴러에 여성의 언어를 담는 작업은 필연적으로 남성 스릴러의 비정치성을 문제 삼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 영화다.

여성에게 섹스는 억압이자 자원이기도 하다. 그러나 평생 동안 자원이 되는 것도 아니고, 자원일 경우에도 여성이 자기 섹슈얼리티를 실천하기는 어렵다. 사회가 여자의 섹스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여자에게 섹스는 생명과 삶 전체를 걸어야 하는 정치적 투쟁의 목표가 된다. 여성이 다른 삶을 모색하거나,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고 싶을 때, 자신이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을 때, 성은 이 모든 것들의 변화를 알려주는 리트머스 시험지다.

섹스가 여성에게 정치적 의미를 발생시키지 않을 때는 젠더도 작동하지 않는다. 가부장제 사회가 여성을 섹스에 묶어 두었기 때문에, 여성에게 섹슈얼리티는 자기 혁명의 증표가 되어버린다. 사회가 얼마나 야비한 구도로 형성되어 있는지를 섹슈얼리티보다 더 분명하게 드러내는 영역은 없다.

팜파탈은 남성이 저지르는 폭력과 파괴가 결코 남성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는 남성 판타지의 산물이다. 남성의 성욕은 무한대라서 어디로 ‘분출’될지 모르지만(성의 피해자로서 여성), 성욕 폭발의 버튼을 누른 사람은 남자 자신이 아니라 남자를 유혹하는 여자(성의 유혹자로서 여성)라는 것이다.

〈인 더 컷〉은 이 공식을 뒤집는다. 이 영화에서는 욕망으로 고통받으며 사랑에 빠질까 봐 고뇌하는 사람이 여성이고, 매력적이나 치명적인 유혹자는 남성이다.

‘여성’도 갈등, 사유, 선택, 책임 같은 인간의 행위를 하는 살아 움직이는, 변화하는 존재가 된다. 행위자로서 여성, 역사적 주체로서 여성, 그리고 여성의 성적인 욕망은 남성 사회를 위협한다. 여성이 원하는 것은 언제나 그 사회의 경계와 만나고, 결국 정치적 갈등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네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다."라고 말로이가 불평하자, 프래니는 "내가 너무 많은 것을 원하게 될까 봐 두려워."라고 말한다.

‘여성이 원하는 것’은 남성에게 무기력과 수치심을 느끼게 한다. 프로이트뿐만 아니라 대개의 남성들에게 여성은 ‘검은 대륙’이다. ‘검은 대륙’에 접근하지 못하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남성들이 짜증스럽고 히스테리컬하게 말한다. "도대체 요점이 뭐야! 원하는 게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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