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
? E. H. 곰브리치, 백승길·이종숭 옮김, 『서양미술사』(예경)에서.

실제로 곰브리치는 서문에서 "이 책을 쓰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 우선해서 염두에 둔 독자는 자신들의 힘으로 이제 막 미술 세계를 발견한 10대의 젊은 독자들"이라 밝힌다.

그림을 보고 도상을 읽어내는 걸 좋아했는데, 그러기엔 종교화가 제격이었다.

법학은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여러 번 말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항상 같았다. "세상에 적성이라는 게 어딨어? 하면 다 하게 돼 있어."

내 능력이 어떤지는 내가 누구보다도 잘 아는데, 내겐 그 논리와 합리의 세계를 이해할 만한 머리가 없는데……. 말을 해보았자 안 통하니 아버지를 설득할 만한 객관적인 증거가 필요했다. ‘그래, 법대 수업을 듣는 거야.’ 나는 결심했다.

① 권리의 행사와 의무의 이행은 신의에 좇아 성실히 하여야 한다.
② 권리는 남용하지 못한다.

낯선 강의실, 쏟아지는 생소한 용어와 판례에 허둥대고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신의(信義)’와 ‘성실(誠實)’이라는 말이 아름답다 여겨졌다. 딱딱하고 기계적이라고만 생각했던 법에도 심장이 있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 했던 것 같다. 인간이 만든 것이고 인간을 위한 것이니까.

돌이켜보면 말의 쓰임에 민감했기 때문에, 법률의 언어를 법률의 세계에 국한해 받아들이지 못하고 문학의 세계로까지 확장시켜 생각했던 것이 나의 패착이었던 것 같다.

내가 즐겨 사용하는 단어 목록, 그러니까 내 언어의 데이터베이스에는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 단어다.

시험에선 비록 C를 받았지만, 합당한 근거를 들이밀며 아버지를 설득했다는 점에서 당시의 나는 평소의 나답지 않게 논리적이었다.

여전히 용어는 낯설고 어려웠지만, 일단 용어를 체득하면 논리를 이해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생각하는 만큼 인간은 발전하다고 믿는다. 그간 사용하지 않았던 뇌의 다른 부위를 흔들어 깨워 억지로라도 열심히 쓰다 보면, 우수함을 타고난 이들만큼은 못해도 "서당 개 3년에 풍월을 읊는다."고, 어느 정도 문리가 트이게 된다. 뇌도 근육이라 잠들어 있던 부분을 인식하고 단련하면 힘이 생기기도 하는 것이다. 무……,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다시 ‘민법총칙’ 수업을 듣고 싶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학점으로 환산되지 않더라도 들을 가치가 있는 수업이 있다. 강의실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충만해지는 수업. 독문학과에서 개설한 교양 강좌 ‘독일 명작의 이해’가 그런 수업이었다.

같은 책을 읽고 그에 대해 자기 생각을 나누는 일의 즐거움, 다른 사람들의 해석에 귀 기울이는 법, 내 의견을 조리 있게 이야기하고, 때론 밀어붙이고 때론 거둬들이는 법도 배웠다.

일기장에 적거나 친구에게 편지를 쓰는 것에 그치던 자기 만족적 글쓰기에서 벗어나 여러 사람에게 글을 보여주며 의견을 듣는 법도 익혔고, 다른 이들의 글을 읽으며 내 식견의 한계를 깨닫고 사고를 확장하는 법도 체득했다.

"인간은 지향이 있는 한 방황한다.(Es irrt der Mensch, solang’er strebt.)"라는 문장은 수업을 들은 많은 이들에게 삶의 모토가 되었다. 괴테의 『파우스트』를 한 줄로 요약하자면 이 말이 될 것이라고 선생님은 일러주었다.

"선한 인간은 어두운 충동에 사로잡혀 있을지라도, 바른 길을 잘 의식하고 있다."고 덧붙이며 메피스토에게 파우스트를 맡긴다.

"선한 인간은 어두운 충동에 사로잡혀 있을지라도, 바른 길을 잘 의식하고 있다.(Ein guter Mensch in seinem dunklen Drange ist sich des rechten Weges wohl bewußt.)"

문학에 애정이 깊은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든 같은 책을 읽었다는 이유만으로 동류(同類)라는 걸 알아보고 친구가 된다.

조금 걸어 서원 뒤 ‘시정’을 보러 갔다. 같은 형태의 정자가 독일 도나우 강변에 있다고 했다. 선생님이 20년 지기인 독일 시인 라이네 쿤체에게 선물한 정자다.

모든 세속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그 공간, 이상주의자만이 만들 수 있는 그 서원의 대들보에 선생님은 적어 넣었다. "爲如白 爲後學 爲詩." 여백을 위해, 후학을 위해, 시를 위해……. 시를 읽지 않는 시대, 시를 위해. 실용의 시대, 잉여를 위해. 시 가르치는 사람의 딸로 태어나 자란 나는 그 말이 뭉클하면서도 아파서, 어두운 주차장에 차를 대고 집으로 올라오는 길에 조금 울었다.

‘독일 명작의 이해와 나’, ‘다시 읽는 독일명작’이라는 주제로 글을 쓰고 선생님과 수강생들의 사진을 넣어 자그마한 책을 만들었다. 제목은 "작은 여백들, 아름다운 유월에"라고 붙였다. 그새 선생님의 염원대로 문을 연 ‘여백 서원’과, 우리 모두가 좋아하는 『파우스트』의 명구 "멈추어라 순간이여, 너 참 아름답구나!"에서 따온 말이었다.

"글 배웠고 글 읽었으면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라고 선생님은 고별 강연에서 말씀하셨다. 우리가 선생님으로부터 수없이 들어온 ‘공부하는 이유’, ‘책을 읽는 까닭’의 핵심이기도 했다.

보수적이기로 이름난 경북 모 지역 출신이라 "남자는 평생 세 번만 우는 것"이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다는 한 수강생이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괴테의 시에서 "나를 울게 두어라! 우는 건 수치가 아니다/ 우는 남자들은 선한 사람"이라는 구절을 접하고 크게 충격받았다고 썼다. 그 글에 인용된 시를 읽으며 나는 다시 또 울었다.

나를 울게 두어라! 밤에 에워싸여
끝없는 사막에서,
낙타들이 쉬고, 몰이꾼도 쉬는데,
돈 셈하며 고요히 아르메니아인 깨어 있다
그러나 나, 그 곁에서, 먼먼 길을 헤아리네
나를 줄라이카로부터 갈라놓는 길, 되풀이하네
길을 늘이는 미운 굽이굽이들.
나를 울게 두어라! 우는 건 수치가 아니다.
우는 남자들은 선한 사람.
아킬레스도 그의 브리세이스 때문에 울었다!
크세르크세스 대왕은 무적의 대군을 두고도 울었고
스스로 죽인 사랑하는 젊은이를 두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울었다.
나를 울게 두어라! 눈물은 먼지에 생명을 준다.
벌써 푸르러지누나.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전영애 옮김, 『서·동 시집』(도서출판 길)에서

"오랜만에 아름다운 착각 속에 빠진 것 같습니다. 어쩌면 문학이 하는 일도 우리를 이러한 착각 속에 빠뜨리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인간은 자주 착각하고, 착각을 진실로 믿어 가끔씩 위대한 힘을 발휘하고, 착각에서 깨어나 슬퍼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착각한다. 착각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 흔들릴 수 있는 존재라는 것, 인간의 취약성을 인정하면서 그럼에도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인문학의 힘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독일 명작의 이해’를 통해 인간은 지향하는 바가 있는 한 방황한다고 배웠다.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교양인’의 자세라는 것도 함께 배웠다.

졸업한 후 10년쯤 지났을 때, 우연히 학교에서 선생님을 마주쳤는데 "세월이 흘러도 책을 읽겠다고 수업을 듣는 학생들의 근본은 같더라." 하신 말씀이 잊히지 않는다.

선생님은 여전히 공부에 몰두하느라 주방에 가스가 끊긴 것도 잊어버릴 정도로 열정적이며, 괴테가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머물렀던 집에 거하며 연구할 기회가 마침내 생겼다며 새로 이탈리아어를 공부하고 계신다.

"그 도저(到底)한 흐름 속에서 우리 모두는 다시 한 번 ‘독일 명작의 이해’가 진행되었던 강의실로 되돌아가 영원한 청년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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