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디스 버틀러는 "페미니즘이나 정신분석학이나 여성을 생물학적 사실로 전제했다는 점에서는 똑같은 본질주의다."라는 다소 ‘과격한’ 주장으로 보편주의자들을 불편하게 했지만 사실 그 말은 맞다.

"가부장제가 여성을 동일성에 가둔다면, 우리는 다양성으로 맞서겠다." 이제까지 여성 공통성의 대표 요소로 여겨졌던 모성, 섹슈얼리티에 대한 여자들의 경험은 같지 않다. 남자 시스템이 그들의 필요와 원하는 기능에 따라 "여자는 모두 본질적으로 ‘창녀’이다.(어머니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같다."고 명명했을 뿐이다. 여자들은 같지 않다.

내가 취약해 보여서일까. 처음 만나는 여성들도 내게 비밀스런 이야기를 잘 한다.

모든 여성이 아이를 낳는 것은 아니며 아이를 낳은 모든 여성이 헌신과 희생(이것은 책임과 다르다)을 당연하게 수용하지 않듯, 모든 여성이 달콤하고 부드러운 섹스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 생각에 한국은 동성(애자) 사회(homosocial)다. 한국 사회에서 남자는 게이이고 여자는 레즈비언이다. 남자들은 접촉을 가장한 패싸움을 즐겨 벌인다. 그렇게 격렬히 만지고(싸우고) 나면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가 된다. 남자는 자기들끼리 밀어주고 아껴주고 키워주고 자리를 대물림한다. 여자를 가운데 둔 삼각관계에서도 지지고 볶고 질투로 진을 빼는 대신 협상하거나 친구가 되거나, 여자를 제물 삼아 함께 성장한다.(보 비더버그의 〈아름다운 청춘〉이나 알폰소 쿠아론의 〈이 투 마마〉를 보라.) 남자에게 여자와의 사랑은 남성 연대만큼 중요하지 않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이 레즈비언이 되는 방식은 남성의 타자, 대리인으로서이다. 여성 대부분은 몸만 ‘여자’지 남자의 사고방식을 머리에 이고 지고 남자의 비위 맞추기를 일상 노동으로 삼아 산다.

성기 노출이 성폭력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여성이 그것을 얼마나 두려워하고 불쾌해하는지 그들이 정확히 간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이성애자이면서도 남자의 벗은 몸이 아니라(남성의 시선으로) 여자의 벗은 몸을 보고 성욕을 느낀다.

우리는 남자의 안경을 너무 오래 쓴 탓에 아예 남자의 눈을 가지게 되었다.

성별 사회에서 여자에게 사랑은 사회적 관계, 생존, 돈, 자아 실현, 성취 같은 인생의 모든 것이기 쉽지만, 남자에게 사랑은 언제나 다시 올 버스, 여러 버스 중 한 대일 뿐이다.

남자가 사랑에 울고불고할 때는 자기가 찬 것이 아니라 차였을 때, 즉 게임에 지고 거부당해 자존심이 다쳤을 때뿐이다.

그들은 남자지만 여성 화자로서 말한다. 반면 여성 작가가 남성 화자로 말하는 작품은 별로 없다. 남자는 두 영역을 모두 오갈 수 있지만 여자는 그럴 수 없다.

남자에게도 사랑이 관계, 생존, 돈, 자아 실현, 인생의 목표여야 한다.

남자들도 친밀감에 목숨을 걸고 관계 유지를 위해 자기 생의 모든 가능성을 포기하고 사랑하는 여자의 출세를 위해 헌신한다.

사실 사도마조히즘은 준비되고, 기획되고, 동의된 대단히 ‘지적’인 섹스다. 남자의 권력과 폭력, 여성의 피학성을 정당화하는 것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여성이 남성을 ‘성폭행’하는 경우는(남자의 옷을 벗기는 것이 아니라) ‘벗겨 달라’고 강요(애원)하는 것이다.

여주인공이 "자신감을 잃는 것보다 버림받는 것을 더 두려워하는" 지독히 외로운 여자였기 때문에 비정상이 되었다는 식의 영화 읽기는 여성의 주체성과 삶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해석이다.

다시 말해 가부장제 사회는 여성에게 마조히즘이 있다고 강요하지만, 여성이 마조히즘을 선택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

이 영화를 두 번 봤다. 내내 울었고 그래서 많은 장면을 놓쳤지만 남자주인공이 여주인공에게 "당신은 미쳤어." "남자의 마음을 흔들어놓고 무시하면 어떡해?" "사랑은 함께하는 거야, 같이 즐기는 거야." "내 손이 더러워질까 봐 못 때린다." "다시는 남자를 모욕하지 마."라고 말하는 장면에서는 웃음과 비웃음을 모두 참기 힘들었다.

영화의 마지막 성폭력 장면은 남자주인공, 아니 남자 일반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욕망과 상상력의 종착지가 결국은 삽입(강간)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녀에게 잘못이 있다면 여자에게 폭력은 판타지지만 남자에겐 현실임을 알지 못한 것이다. 젠더 시스템은 남성에게 판타지에 머물지 않고 폭력을 실천할 수 있는 권력을 부여한다. 그녀는 게임의 법칙을 몰랐다. 게다가 그녀는 남자의 친절과 친밀함이 주는 ‘좋음’에 익숙하지 않았다. 아니, 아예 원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자아를 없애려면? 사랑하는 사람의 폭력의 대상이 되어 ‘그대 가슴에 물들어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여주인공이 원한 사랑이었지만 그녀의 젠더는 이러한 사랑조차 불가능하게 만든다. 여성은 아무것도 선택할 수가 없다. 남자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여성의 사랑은 그 어떤 것도 불가능한가? 이건 내가 강연에서 답하지 못한 두 번째 이유이기도 하다.

경험이란 무엇일까. 언젠가 박완서는 자신이 경험한 것밖에는 못 쓴다고 말한 적이 있다. 성찰적이며 삶의 진실을 관통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누구나 자신이 경험한 것밖에는 알지 못한다. 모든 언어 ? 소설, 영화, 예술, 이론, 학문…… ? 는 다 개인의 경험이다.

마르크스주의도 마르크스의 경험에 ‘불과’하며 푸코의 탈근대 이론도 푸코의 경험일 뿐이다.

특정인의 사적인 경험이 보편적 이론이 되는 것, 그것이 권력의 효과일 것이다. 개개인의 경험은 모두 사회적 권력 관계를 통해 구조화된 것이다. 개인들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그리고 그 해석을 통해 다른 주체가 된다. 각기 다른 경험은 모든 이들에게 공평하게 이해되지 않는다.

특수한 것은 보편의 적용을 받아야 한다.

영화 〈디 아워스(TheHours)〉에 대한 일부 남성들의 폄하나 무감동은 독해 불능에서 온 것이다. 권력자는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 것을 솔직하게 시인하지 않고 ‘나쁘다, 형편없다’고 해도 받아들여진다.

〈디 아워스〉는 ‘사소한’ 여성의 경험과 감정을 의미화하고 정치화했을 때만 보인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 영화를 보고 옷이 다 젖도록 운다. 어떤 사람은 그런 사람을 보고 감정 과잉이라고 느끼지만, 왠지 버지니아 울프 운운하면서 지적으로 포장된 이 영화에 대해 함부로 말했다간 무식하다고 망신당할 것 같아 입을 다물고 스트레스를 받는다. 어떤 사람은 감동은 받았지만 아리송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이 영화에 대해 물어보고 다닌다.

왜 여자의 일생은 〈디 아워스〉처럼 ‘단 하루를 통해서도 보여진다’고 가정될까? 남자는 진화하지만 여자는 진화하지 않기 때문에? 여자의 매일매일은 같기 때문에?

우리 사회에서 여성 문제가 사회 문제로 제기되려면 남편에게 맞거나, 성폭행당하거나, 아주 억울하게 해고당해야 한다. 남편이 때리지도 않았는데 심지어 〈디 아워스〉처럼 남편이 사랑한다고 주장하는데, 아이를 두고 집을 나오는 로라(줄리언 무어 분)는 미친 여자이거나 마녀로 여겨진다.

어떤 남성은 정말 진지하고 심각하게 내게 묻는다. "도대체 여자들은 왜 저래요? 남편이 행복하게 해주는데……." 문제는, 보이는 여성 억압과 보이지 않는 로라의 문제가 연속선 위에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고1 때부터 약 20년 동안 한 달도 ‘연애’ 상태가 아닌 적이 없었다. 남자든 여자든 이데올로기든 늘 누군가에, 무엇인가에 몰두해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은 예외 없이 상처로 남았다.

침묵이 두려워 파티를 여는 댈러웨이 부인처럼, 나는 자신과 만나지 않기 위해 연애가 필요했는지 모른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한 삶을 선택할 경우 겪어야 할 너무도 많은 공격들이 두려워 ‘연애 감정 상태’를 도피처로 삼았는지 모른다.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이 말은 사랑에 관해 내가 들어본 말 중 가장 올바른 슬로건이다. ‘움직임(운동, 변화)’은 사랑의 정치성을 기가 막히게 표현한다. 사랑은 권력 관계이기 때문에, 사랑의 감정은 역사적?문화적 산물이기 때문에 변할 수밖에 없다.

관계와 감정은 변화하고 발전하고 진화한다. 그리고 퇴화한다.

나는, 평생 한 사람만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 발전이 없는 사람이거나 한 사람하고만 치열할 수 있는 불가사의한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을 변화시킨 사람을 사랑한다. 영원한 사랑 ? 일부일처제, 배타적인 낭만적 사랑 ? 을 믿고 실천하는 자의 고통은 상대가 자신을 변화시킨 그 순간을 영원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 순간을 지속시키기 위해,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으려 하기 때문이다.

결혼은 사랑의 완성이 아니라 사랑의 종말이다.

사랑은 유기체다. 그래서 모든 사랑은 부패한다.

현실에서 사랑은 움직이지만, 여성에게 ‘주입된’ 사랑 이데올로기는 여전히 ‘사랑은 영원하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너 자신과 만나지 말고, 한 남자를 기다리고 그리워하다 돌이 되어라!’

몇 년 전 나는, 오랫동안 몰두해 온 어떤 관계의 상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물 밖으로 내던져진 물고기처럼 숨이 가빠 끊어질 것 같았고 매일 밤 흐르는 눈물로 귀에 물이 찼다.

고통이 고통스러운 것은 그것이 계속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그 어떤 것도 계속되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변한다. 인생무상이라는 말은 인생이 허무하다는 뜻이 아니다. 인생에는 상(常)의 상태가 없다는 것, 즉 삶은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의미이다. 그것을 어찌 붙잡을 수 있겠는가.

살아 있는 한, 정치적으로 발전하는 한,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한, 인간은 언제나 사랑을 한다. 다만 그 대상이 바뀔 뿐이다. 삶은 곧 움직임(movement)이고, 움직임은 변화하는 순간(moment)들의 분절적인 연속이다. 고로 영원한 사랑도 안전한 삶도 없다. 타인의 손을 잡는 것이 내 영혼에 사슬을 감는 행위여서는 안 된다. 키스는 사랑의 계약이 아니며, 애인이 주는 선물은 언약의 징표가 아니다.

기주봉 씨는 영화에서 본 그대로였다. 다만 더 잘생기고 기품 있고 멋있었다. 나도 모르게 로맨틱해졌다(?). 정말, 배우 같았다. ‘분위기가 있다’는 표현이 딱 그런 거였다. 배우란 ‘무엇’일까. ‘누구일까’라고 쓰지 않는 이유는 그들의 몸이 살아 있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주 조금은 나 자신에 대해 안다. 그래서 배우를 감히 단 한 번도 동경해본 적이 없다. 세상에는 절대로 안 되는 일이 있는 법이다.

사실 나 같은 ‘오타쿠’에게 영화는 이런 이야기들만으로도 충분하다. 생계 걱정 없이 혼자, 혼자 본 영화를, 혼자 생각하면서 가슴 뛰다가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완벽한 인생이다.

늘 정치적으로 치열하고 올바른 내 친구들은 영화 마지막 즈음 등장한 느닷없는 남녀 짝짓기에 분노했다. 나도 마찬가지다.

결혼으로 끝나는 영화는 질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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