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 공표한 하세가와 치매척도는 "오늘은 몇 월 며칠입니까?", "나이가 어떻게 되십니까?"와 같은 기본적인 질문에서 시작해 일반 상식 문제와 계산 문제 등 총 11개 문항이었습니다.

"하세가와 군, 치매를 검사할 때 어제와 오늘의 판단이 다르면 안 된다네. 진단 기준을 만들게나."

‘아! 어려운 숙제를 받았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치매는 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므로 눈에는 보이지 않으니까요. 그렇지만 검사자에 의해 왜곡되지 않고 치매 유무를 판별할 수 있는 보편적인 진단법은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치매 진단법이 완성된 후 누가 검사하든 거의 같은 점수가 나오자 ‘단연코 우수한 검사법’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모리타 요법은 신경과의이자 지케이 의대 교수였던 고 모리타 마사타케 박사가 불안장애 등 신경증을 치료하기 위해 1920년경 창시한 정신요법입니다. 불안과 공포를 배제하고 통제하는 게 아니라 자연스러운 감정으로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현재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실행하며 자기실현을 추구하도록 돕는 것이 목적입니다.

"공포심을 배제하려고 하니까 힘든 거야. 있는 그대로 증상을 받아들이고 가능한 한 마음속에서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네."

결국 3개월째에 지도교수에게 상담하러 찾아갔습니다.
"언어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도저히 공부를 계속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다른 전공도 아니고 정신과의인데 말을 이해하지 못하면 일을 어떻게 해 나가겠습니까. 더 큰 폐를 끼치기 전에 그만 일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은 언어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네. 넌버벌 커뮤니케이션이라고, 언어에 의존하지 않는 의사소통 방법도 있으니까 조금만 더 힘내 보게나."
그리고는 이렇게 격려까지 덧붙여 주었습니다.
"자네에 대해 아무도 불평하는 사람이 없다네. 자네는 아주 잘하고 있는 걸세."

그 후부터는 좌절하는 시간조차 아끼며 더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영어 공부는 당연히 최선을 다했고, 다양한 커뮤니케이션 방법들을 통해 환자들과 공감할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다행히 시간이 지날수록 언어의 벽이 낮아지고 상대가 하는 말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언어에만 의존하지 않는 대화가 큰 신뢰감을 주고 서로의 마음을 통하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이 바로 ‘넌버벌 커뮤니케이션non-verbal communication’입니다. 치매 당사자와 관계를 맺어 나갈 때는 넌버벌 커뮤니케이션이 유창한 말보다 더 도움이 됩니다.

비언어적 교감에 대해 마음으로 절실히 깨닫게 해준 미국 생활에 늘 감사한 마음입니다.

그리고 누구 앞에서든 내 의견을 분명히 말하는 태도를 배울 수 있었던 것도 귀중한 경험이었습니다. 이러한 대화 방식을 직접 체험했던 일은 그 이후의 제 인생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두피 위에 놓인 전극과 뇌파계에 의해 뇌의 전위 변화가 시시각각 기록됐는데, 뇌의 작용을 눈으로 보니 흥분과 전율이 느껴졌습니다.

제가 서른한 살, 아내 미즈코는 스물한 살이었습니다. 아내는 무사시노 음악대학 피아노과에 재학 중인 학생이었는데 사실 처음 만난 것은 그보다 훨씬 전으로, 아내가 아직 초등학생일 때였습니다.

한동네에 살았던 우리는 두 사람 다 그리스도교 신자였기 때문에 교회의 일요학교에서 매주 인사를 나눴습니다. 어느 날 일요학교에서 신이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이야기가 화제에 올랐는데 어린 미즈코가 한참동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신과 눈을 맞출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요. 목이 아프도록 하늘을 쳐다보는 그 모습이 무척이나 사랑스러워서 귀여운 아이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때는 그 아이가 장래에 제 아내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결혼식을 올린 후, 전 먼저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고 아내는 반년쯤 뒤에 대학을 졸업하고 뒤따라 왔습니다. 아내가 미국에 도착한 날 바라보던 금문교는 정말이지 예쁘고 멋있었습니다.

아내는 야무지고 성실하며 명랑한 사람입니다. 가끔 무서울 때도 있습니다. 가계를 맡아 전권을 장악하고 있으니까요. 게다가 아내는 저의 모든 동선을 꿰뚫고 있습니다. 제가 슬쩍 찻집이나 이발소로 외출이라도 하면 어떻게 알았는지 바로 찾으러 옵니다. 이웃들이 아내에게 이런저런 정보를 알려 주는 것이겠지요.

어쨌든 제가 지금 존재하는 것은 모두 아내 덕분입니다. 저에게는 말할 수 없이 고마운 사람이지요. 만약에 아내가 먼저 저세상으로 떠난다면 하늘이 무너지는 것이나 다름없는 큰일입니다. 그것만큼은 어떻게든지 정말, 제가 먼저 가고 싶습니다.

치매에 걸리면 한 가지 일에 집중하기도 어렵고, 여러 가지 일에 동시에 주의를 기울이기도 어렵습니다. 특히 요리나 가사는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하는 고도의 작업이기 때문에 치매 상태가 되면 이 일들을 해내기가 어려워집니다. 조림요리를 하면서 생선을 굽기란 쉽지 않습니다.

기억했다가 나중에 다시 떠올릴 수 있는지를 묻는 ‘지연 재생’은 대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질문 중 하나입니다. 특히 이것은 알츠하이머형 치매에 특이하게 나타나는 징후로 봅니다.

알고 있는 채소를 가능한 한 많이 말해 보라는 질문은 언어의 유창성을 보는 질문으로 치매인 사람도 웬만하면 다섯 개까지는 너끈히 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질문은 다섯 개까지 말한 후 몇 개를 더 말할 수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매 검사를 실시할 때 반드시 주의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부탁하는’ 자세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이 높은 점수를 받을 수도 있고, 한편으로는 인지기능이 정상이어도 기력이 떨어졌을 때는 낮은 점수가 나오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테스트를 받은 두 사람의 점수가 같은 경우에도 각자 틀린 항목이 다르기 때문에 대답 내용을 면밀히 살펴봐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치매는 ‘일상생활의 장애’이므로 가족이나 간병인 등 평소에 본인을 잘 아는 사람이 치매 당사자의 생활 모습을 주의 깊게 살펴서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고백컨대, 명령하는 느낌이 강하고 일에는 굉장히 엄격해서 솔직히 저도 처음에는 무섭고 약간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의국장을 맡아 하던 때라 거리를 두기는커녕 신후쿠 교수와 가장 가까이에서 일을 해야만 했고, 특히 의국 직원들과의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하느라 마치 그림자처럼 교수의 곁에 바짝 붙어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병원에 올 때 외출복을 입고 점잖은 차림새로 옵니다. 그래서 다른 모습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집에 가 보니 병원에 온 사람과 전혀 다른 모습의 낯선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 농가에서는 치매 당사자가 외양간 옆에 있는 헛간에 갇혀서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리보전을 하고 누워 있는 게 아니라 원기가 왕성했습니다. 그런 광경을 다른 집에서 몇 번이나 더 보았습니다.

치매 당사자가 몸져누운 채 혼자 방치되어 있고 간병하는 사람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는 가정도 있었습니다. 옆에는 주먹밥이 놓여 있을 뿐이었지요. 개중에는 땀을 줄줄 흘리며 누워 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방에는 난로가 켜져 있었기에 이 더운 방에서 그대로 자다가는 탈수증에 걸릴 염려가 있다고 알려 주었지만 가족들은 감기에 걸리면 안 된다며 치매 당사자를 담요로 꼭꼭 덮어 주었습니다.

치매 당사자가 혼자서 집에 있는 가정이 있었는데, 그는 마당을 어정버정 걸어다니며 일하러 간 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곁에는 점심 도시락과 귤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지요. 또 어떤 가정에서는 제가 방문하자 보호자가 저를 붙잡고는 "선생님, 어떻게 좀 해 주세요. 보시다시피 이 지경입니다" 하며 매달린 적도 있었습니다.

이 경험이 있었기에 나중에 재택 케어나 개별 돌봄(한 사람 한 사람의 상태를 면밀히 살펴보고 맞춤 케어를 하는 일)의 중요성을 더욱 깊이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쓸모없는 사람’ 또는 ‘집안의 수치’로 여겨져 집안에서 방치되거나 다른 방에 격리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가족이 더 이상 집에서 보살필 수 없게 되면 정신과병원이나 노인병원에 의탁했습니다. 하지만 의료상의 치유는 기대할 수 없었기에 침대 위에서 손이나 허리가 묶인 채 잠을 잘 뿐이었지요. 격리와 수용과 구속, 그런 시대였습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당시는 여전히 가족이 치매에 걸려도 남들에게 말하지 못했고, 특히나 이웃에게는 절대로 털어놓지 못하는 상황이 보편적이었기 때문에 치매 당사자는 물론 가족들도 상당히 힘들었을 겁니다.

후생노동성 내에 ‘치매성 노인대책 추진본부’가 설치된 것은 1986년도였습니다.

"후생노동성이 치매에 대한 대책을 의식한 것은 1972년, 아리요시 사와코의 소설 《황홀한 사람》이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국민들은 치매가 심각한 문제임을 인식했고 그러한 의식은 관공서도 마찬가지였지요. 그 무렵 도쿄도는 미노베 료키치 도지사가 가장 활발히 일할 때였는데 노인복지대책의 내용을 충실하게 하려는 움직임이 일종의 유행처럼 번지던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치매 당사자에 대한 대책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면서도 달리 손쓸 방법이 없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치매를 잘 알지 못했던 것이지요.

1973년에 성 마리안나 의대 교수가 되고 나서 국제회의와 해외에서 개최하는 학회에 참석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일하느라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적어졌지만 그래도 가족간의 연대감을 유지하고 싶어서 아이들의 생일에는 ‘생일 축하한다!’라고 적은 카드를, 다소 늦어지는 경우가 있더라도 항공편으로 보내곤 했습니다. 그런 저에게 당시 열세 살이던 큰딸이 만화 일러스트가 그려진 편지 한 장을 주었습니다. 펼쳐 보니 ‘ 힘내 아빠! 이겨 내 아빠! 포기하지 마 아빠! 끝까지 해내는 거야 아빠! 화이팅! 아빠’ 이렇게 쓰여 있더군요. 어찌나 기쁜지 기운이 났습니다.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물론 편지글 맨 마지막에는 ‘선물 잊지 마~’라는 말도 빠지지 않았지만요.

첫 국제회의 개최는 일본 정신의학 역사에서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 뜻깊은 순간이 실현된 것은 돈도 의료기술도 아닌, 한 사람 한 사람의 흔들리지 않는 의지와 노력 덕분이었습니다.

인연과 운 그리고 결단의 중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던 경험이었습니다.

2000년 4월부터 연금보험과 의료보험에 이어 공적 사회보험제도로서 ‘개호보험제도’가 시작된 일입니다.

개호보험제도는 혼자 일상생활을 꾸려 나갈 수 없는 65세 이상 노인들에게 간병이나 재활에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해 주는 보험입니다. 40세 이상이 되면 개호보험에 자동 가입되며 보험료는 소득에 따라 차등 납부합니다.

40세~64세 국민이라도 개호보험에서 지정한 특정 질환으로 인해 간병이 필요한 경우 혜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1908년 일본정신의학의 권위자 구레 슈조가 ‘미칠 광狂’이라는 글자를 피하자는 관점에서 ‘치매’라는 용어를 제창하여 정착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치癡’라는 글자에도 ‘어리석음, 바보’라는 뜻이 들어 있고 ‘매?’에도 ‘멍하다, 넋이 나가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어 모욕적인 표현이기는 마찬가지라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일본 정부에서는 2004년 ‘치매’라는 명칭을 변경하기로 했습니다.

치매를 대신할 용어를 선정할 때는 일반인이 이해하기 쉽고 불쾌감이나 모멸감이 느껴지지 않는 용어를 찾는 데 가장 역점을 두었습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기획은 치매에 걸린 당사자가 실명으로 직접 단상에 올라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한 일이었습니다. 대단한 일이지요. 격리와 수용, 구속의 시대에서 벗어나 마침내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치매 당사자의 목소리를 전하는 데 앞장섰던 오스트레일리아의 크리스틴 브라이든도 남편 폴 브라이든과 함께 참석해 "우리에 관한 일을 우리가 없는 데서 정하지 말아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정부 고관이었던 크리스틴 씨는 1995년 46세 때 치매 진단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살아갈 의지를 놓아 버릴 정도로 절망했지만, 가족들의 도움으로 자신의 병을 받아들이고 치매 당사자들을 위한 활동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치매에 걸리더라도 사람은 존중받아야 하며 존엄성을 유지할 가치가 있다"고 호소하여 세상의 인식을 바꿨습니다.

인지기능은 뇌 표면에 있고 부모의 가르침이나 학교 교육, 사회에서 받은 교육 등 오랜 세월에 걸쳐 인풋을 집대성합니다. 이 ‘인지뇌’ 밑에 희로애락의 ‘감정뇌’가 있고, 그 아래에는 인간의 핵심이 되는 그 사람의 자신다움, 즉 인격과 개성이 결집된 뇌가 있습니다. 알츠하이머병은 가장 위에 있는 ‘인지뇌’가 기능을 잃고 잇달아 ‘감정뇌’가 파괴되어 가는 겁니다.

두 번째 책을 쓸 무렵에는 걱정과 두려움을 내려놓고 지금의 삶에 집중하는 쪽으로 생각을 바꿉니다. ‘나는 가장 나다운 나로 돌아오는 여정에 오른 거다’ 하고 생각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게도 ‘저를 지지해 주세요’라고 말하고 다녔습니다.

저는 어떤 병에 걸렸든 아픈 사람에게는 신체적인 케어만큼 정신적인 케어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가장 그 사람다운 모습, 그 사람의 존재 자체를 지지하는 사고와 행동이야말로 진정한 정신적인 케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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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문제의식을 아이들 개인이 겪는 문제와 연결하여 이야기로 엮어 내는 솜씨가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는 그는 문학도 어린이도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스스로를 돌아보며 어설픈 지도를 들고 희미한 불빛에 의지해서 조심스럽게 한 걸음 한 걸음 어린이에게 다가가는 초심을 잃지 않으려 애쓴다.

"스텝이 엉키면 그게 탱고예요!"
영화 『여인의 향기』의 명대사는 그야말로 사실무근 혹세무민이다. 스텝이 엉키면, 그건 그냥 몸부림이다.

안타깝게도 스텝을 익힌다고 우아하게 탱고를 출 수 있는 건 아니다. 다만 꾸준한 유산소 운동은 기초 체력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장담할 수 있을 뿐.

판타지문학의 대가 어슐러 K. 르 귄도 스텝에 대해 말한 바 있다. "기술이 예술을 가능하게 한다." 소설가 데니스 루헤인은 『운명의 날』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기술이란 노동을 사랑할 때 일어나는 기적"이라고.

발바닥에 땀 나도록 스텝을 익히면 예술이 가능할……지도 몰라요. 스텝이 예술을 가능하게 할…… 수도 있어요.

예술은 스텝에서 시작된다. 일단 조명도 드레스도 파트너도 없이 운동복 차림으로 슬로 퀵퀵 슬로.
이것은 스텝에 관한 책이다.

태양계를 넘어 우주의 비밀에 다가가게 되었다. 그것은 태초로부터 품어 온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과연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주에 그 답이 있었다. 우리는 별의 후손이다. 이는 관찰과 추론으로 밝혀낸 객관적 사실이다.

아기들이 잠투정을 하는 것은 잠과 죽음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다시 깨어난다는 확신을 하지 못한다는 거다. 모른다는 것은 어둠이요 공포다.

이번 생엔 도저히 채울 수 없는 그 어떤 결핍과 그것으로부터 자라난 욕망.
그 자리에 이야기가 생겨났다.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의 주인공 ‘삐삐로타 델리카테사 윈도셰이드 맥크렐민트 에프레임즈 도우터 롱스타킹’은 어떤가? 삐삐는 허구의 인물이다. 한마디로 삐삐라는 존재 자체가 거짓말이다. 하지만 뭐 어떤가? "콩고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 한 명도 없"고 그곳에서는 "다들 하루 종일 거짓말만" 한다. 이야기 세상이 바로 그런 곳이다.

그러나 삐삐는 또한 진실이다. 남자 어른 하나쯤 한 손으로 번쩍 들 만큼 힘이 세고, 길에다 뿌려도 좋을 만큼 돈이 많고, 어른들의 고리타분한 잔소리 따위 가뿐하게 되받아치고, 그런 자신을 좋아하는 토미와 아니카 그리고 원숭이 닐슨 씨와 커다란 말 한 마리쯤 갖고 싶은 마음, 그건 어린이의 진실이다(사실 나도 간절히 바란다).

삐삐의 언행 또한 마찬가지다. 이집트에선 누구나 뒤로 걷지만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삐삐의 말은 마땅히 그러해야 할 진실을 담고 있다.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도 좋지만 우리가 꿈꾸는 현실을 그려 보는 건 어떨까? 반드시 현실의 테두리 안에서만 움직일 필요는 없지 않나?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아니, 순응하고 순종한다. 그렇다고 이야기 속 인물까지 그럴 필요는 없다. 세상 어딘가에는 온몸으로 꿈을 말하는 사람도 있다.

자신만의 꿈으로 눈동자가 빛나는 사람.

개미는 붉어진 눈길을 딴 데로 돌린 채 슬그머니 문을 열고 베짱이를 안으로 들일지도 모른다. ‘그럼 뭐 이리 들어와서 그 시라는 걸 또 지어 보든가 말든가…….’ 중얼거리면서.

누군가의 진실을 통해 보는 다른 세상. 습관이 되어 버린 일상에서 낯선 얼굴을 발견하고, 유일한 정답이던 사실에서 다양한 진실을 발견하는 놀라움. 이야기 덕분에 세상은 별빛처럼 다채롭고 바다처럼 깊어진다. 그 시작에 신화가 있다면, 그 현재에는 어린이문학이라는 별난 장르가 있다.

예술의 그 어떤 장르도 수용자를 중심으로 장르를 규정하지 않는다. 음악에도 미술에도 영화에도 어린이를 위한 작품이 있지만, 별도의 장르로 구분하지 않는다. 그런데 문학에만 유독 ‘어린이’가 붙는 장르가 따로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동화를 두고 ‘어린이부터 읽는’ 장르라고 주장하는데, 글쎄, 그러면 김치는 ‘한국 사람부터’ 먹는 음식인가? 아무런 의미 없는 수사다.

동화는 어린이를 위한, 그러니까 ‘수신’의 장르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다. ‘너에게 전하는’ 이야기다.
소설은 동화와 다르다. 소설은 수신이 아닌 발신의 장르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다.

일찍이 움베르토 에코는 『장미의 이름』 도입부가 어렵다는 평에 대해 일부러 그렇게 썼다면서, "소설로 들어간다는 것은 산을 오르는 것이며, 산을 오르려면 호흡법을 배우고, 행보를 익혀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동화는 다르다. 작가의 표현보다 독자에게 ‘전달’하는 데 무게 중심을 둔다. 물론 소설가도 독자에게 이야기를 전하고, 동화작가도 자신을 표현한다. 다만 창작의 무게 중심이 다르다는 얘기다. 소설이 어렵게 느껴지면 독자는 스스로를 의심한다. 에코 선생님, 제가 부족합니다. 그런데 동화가 어렵게 느껴지면 독자는 어린이든 어른이든 작가를 의심한다. 뭔 말인지 알아듣게 좀 해 봐봐봐.

동화는 어린이 독자에게 가닿아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작품의 가치를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이게 과연 동화냐는 소리나 듣기 십상이다. 흔히들 그러지 않는가. 이 동화는 어린이들이 좋아해요 혹은 안 좋아해요.

어른과 마찬가지로, 어린이도 한 덩어리로 묶어 내기 어렵다. 독자로서의 어린이도 그렇다. 연령별로, 성별로, 지역별로, 상황별로, 저마다 다르다.

그렇다면 어린이 독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맞춤 창작을 하라는 뜻일까? 빙고! 정답입니다. 바로 그래야 한다. 물론 맞춤형 수제 책을 출간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창작의 과정에서는 단 한 사람의 어린이 독자를 바라보아야 한다.

급하게 지어낸 거짓말처럼 불안정해지기도 한다.

소재는 열다섯 살 이 모 양과 맞겠는데, 주제는 아홉 살 김 모 군이 공감할 만하고, 서술문은 신문 연재소설을 즐기는 아저씨 취향, 대화문은 아침 드라마에 등장하는 아줌마 말투다. 이걸 가지고 나름대로 이리저리 모난 데를 두들겨 놓으면, 이야기는 낮에도 밤에도 속하지 못한 우화 속 박쥐 꼴이 되어 홀로 메아리친다. 뻔해요, 뻔해요, 뻔해요…….

초점에 따라 이야기의 맥락도 달라진다. 상대가 이해할 수 있게끔, 나에게 공감할 수 있게끔. 그에 따라 이야기의 성격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다.

여기 사는 김영수 어린이, 저기 사는 이영희 어린이, 그중 특정한 어린이를 독자로 삼아 이야기해야 한다.

대상에 따라 전혀 다른 귀신 이야기를 해야 한다.
그런데 그냥 뭉뚱그려 ‘어린이’라고만 생각하면 애매한 이야기가 된다.

그러므로 창작의 과정에서 고려해야 하는 것은 책이 나왔을 때 읽게 될 실제독자가 아닌 내포독자, 즉 작가가 임의로 설정한 독자다.

내포독자는 단지 독자의 수신에만 도움이 되는 게 아니다. 작가의 발신, 즉 동화의 기준점이 되어 준다. 작품의 성패와 수준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솔직히 말해서 낯 뜨거운 동화가 (꽤) 많다. 그게 어린이의 눈높이라는 듯 유치하고 천박한 동화도 있고, 허술하기 짝이 없는 구성으로 판타지를 자처하는 동화도 있다. 인물들은 너무나 간단히 상처받고 분노하고, 그만큼 간단히 반성하고 화해한다. 인물이 아니라 종이 인형 같다. 그런 작품을 보면 작가에게 묻고 싶어진다.
당신은 이 이야기를 진심으로 믿나요?

그런 작품을 내미는 건 어린이 독자를 허술하게 대하는 것이다. 어른이 보기엔 시시하지만, 애들은 이런 것도 좋아할걸! 싸구려 재료에 설탕을 입힌 불량 식품을 내미는 거나 다름없다. 애들인데, 뭐. 애들은 이런 것도 잘 먹는데, 뭐. 애들은 이런 것도 재미있다고 읽을걸! ‘독자’가 아니라 어린이, 심지어 애들, 애들 책.

어린이 독자에 대한 존중감이 없다면, 부디 딴 일을 알아보면 좋겠다. 이 분야는 딱히 돈도 안 되고(진심입니다), 이름나기도 어렵고(진심이라니까요), 다만 어린이 독자가 이야기를 들어 준다는 커다란 기쁨이 있을 뿐이니.

그 한 사람의 어린이 마음을 움직이는 이야기를 써야 한다. 그 한 사람의 내포독자는 작품의 기준점이 되어 줄 것이다. 작가가 길을 잃지 않도록 북극성처럼 한자리에서 반짝반짝.

나는 현서가 사실은 좀 어려운데도 아닌 척하면서 읽어 낼 정도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그게 또 문학의 재미가 아닌가. 허세와 허영.

내포독자로 삼을 만한 현실의 아이가 떠오르지 않는다면 어린 시절의 나를 내포독자로 삼아도 좋다.

혹은 이야기 속 인물도 괜찮다. 어디서든 내 이야기를 들어 줄 소중한 독자님을 책상 앞에 모셔 와야 한다.

단 한 사람을 위한 이야기니, 단 하나밖에 없는 이야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다.

그런데 습작 중이거나 신인인 경우, 아직 자신만의 내포독자를 찾지 못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작품마다 다양한 어린이를 호명해 보면서 딸깍, 비밀의 숲으로 들어가는 자물쇠가 풀리는 순간을 찾아야 한다. 자신과 통하는 내포독자를 발견하는 때, 그리하여 나만의 목소리를 찾는 때.

나의 내포독자에게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가.
이것은 ‘누구의 이야기’를 할 것이냐는 질문과 같다.

춘향은 요즘 말로 ‘조선판 걸 크러시’다. 처음부터 바라는 바가 뚜렷하다. 자존을 높이 세우고 강인한 의지로 고난을 돌파해 마침내 뜻을 이룬다. 이몽룡이 암행어사 출두로 춘향을 구하지 않았냐고? 그건 그 시대의 현실적인 개연성에 따른 결말일 뿐, 돌이켜 보시라. 이몽룡이 떠날 때도 춘향은, 도련님과 함께라면 첩살이도 좋겠어요 운운하지 않는다. 변학도가 기생의 딸로서는 안락한 혜택을 약속했을 텐데도 춘향은 흔들리지 않는다. 이몽룡이 거지꼴로 돌아왔을 때조차 춘향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당당한 자리가 아니라면 차라리 죽음을 택한다. 그 결과가 암행어사 출두에 이은 행복한 결말이다.

서사 이론에서는 이러한 주인공을 ‘문제적 개인’이라고 한다. 문제적 개인이란, 시대와 불화하는 인물이다. 혁명가로 시대에 맞서는 인물을 뜻하는 게 아니다. 시대/정답/주류 혹은 기존의 질서와 모순된 욕망을 품은 인물이다. 시대/정답/주류/질서와의 갈등이 내재된 인물이다. 의지적으로 시대/정답/주류/질서에 맞선다기보다, 존재론적으로 그러한 개인이다. 존재 자체가 시대/정답/주류/질서와의 갈등을 내포한 것이다.

주인공의 욕망은 세계를 구원하는 것일 수도, 생일잔치 초대장을 짝에게 전하는 일일 수도 있다. 생일잔치 초대장의 경우에 주인공은 소심한 성격이라는 제 안의 ‘질서’와 갈등을 빚는다.

오카 슈조 단편 「거짓말이 가득」의 주인공 류우는 ‘정직하고 싶다’는 욕망을 갖고 있다. 그런데 현실은 그리 간단치 않다. 곰곰이 따져 보니 1년이면 무려 1,000번이 넘는 거짓말을 해야만 한다. 어른들은 거짓말이 나쁘다고 말하면서도 스스로 거짓말을 일삼고, 아이들이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조장한다. 류우의 갈등은 어린이는 물론 어른인 우리도 종종 느끼는 고민이다. 말하자면 류우의 욕망은 세간의 도덕률과 갈등을 일으킨다. 문제적 개인이다. 좋은 주인공이다.

류우는 전형성을 가진 인물이다. 거짓말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지만 거짓말을 하지 않을 배짱은 없는, 그러니까 지구의 70퍼센트를 차지하는 바다만큼 많은, 소심한 우리. 그러면서도 개성을 확보하고 있다. 류우는 정정당당하게 맞붙는 성격은 아니지만, 조용히 결심을 지킨다. 왕따를 주도하는 친구 앞에 부르르 떨쳐 일어나진 못하지만, 거짓말로 은밀하게 피해자를 돕는다.

전형성은 인물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고, 개성은 인물의 매력을 높인다.

여기에 소녀만의 개성적인 면모가 더해지면, 공감도가 높으면서 매력 넘치는 주인공이 탄생한다.

욕망을 가로막는 걸림돌도 그러하다. 걸림돌은 어떤 세력일 수도, 어떤 사람일 수도, 어떤 상황일 수도, 자신의 성격이나 마음일 수도 있다.

반드시 거창한 욕망, 무시무시한 걸림돌일 필요는 없다. 이야기에 걸맞은 욕망, 걸맞은 걸림돌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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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는 끝없는 노력이다. 만족 없는 욕망이다. 영화 없는 시사회, 절정 없는 섹스다. 의지는 스카치위스키 두 잔으로 충분할 때 세 번째 잔을 주문하게 만든다. 의지는 머릿속을 긁어대는 소음이다. 가끔 약해질 때가 있긴 하지만, 보통은 스카치위스키 네 잔을 마신 후에도 절대 침묵하지 않는 소음이다.

상황은 갈수록 나빠진다. 의지는 결국 자기 자신을 해친다. 쇼펜하우어는 말한다. "결국 의지는 자신을 먹어치우며 살아가야 하는데, 의지 외에는 아무것도 없고 의지는 굶주려 있기 때문이다."

절망하지 마시게. 어둠의 철학자가 말한다. 우리는 "세상을 떨쳐냄"으로써 의지라는 블랙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 번째는 금욕적인 삶을 살면서 때때로 며칠씩 굶고, 몇 시간 동안 명상을 하고, 성적 순결을 지키는 것이다. 나는 두 번째로 넘어가겠다. 두 번째 방법은 예술이다. 훨씬 낫다. 쇼펜하우어는 예술이 즐겁기만 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예술은 우리를 해방시킨다. 예술은 의지라는 끊임없는 분투와 고통으로부터의 일시적 유예를 제공한다.

이런 미적 순간에 우리는 고통을 느끼지 않지만 마찬가지로 행복도 느끼지 않는다. 행복과 슬픔 사이의 구분은 사라진다. 세상을 떨쳐내는 동시에 거짓 이분법도 떨쳐낸 것이다. 우리는 예술의 대상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쇼펜하우어는 이를 "맑은 세계의 눈"이라고 칭한다.

나는 이렇게 말한다. "쇼펜하우어?" 아니, 말하기보다는 묻는다. 마치 저 이름 자체가 형이상학적 질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자가 으스스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염세주의 철학자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안 좋아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침울한 독일인과 행복한 독일인을 구분하기란 쉽지 않다. 분명히 얼굴 근육과 눈의 움직임에 미묘한 차이가 있겠지만, 그러한 차이는 나 같은 외국인의 이해력 너머에 있다.

그의 장밋빛 얼굴을 보니 거나하게 취한 아기 천사가 떠오른다.

쇼펜하우어는 비판받는 것보다 무시당하는 것이 더 가혹한 운명임을 보여주는 살아 있는 증거였다. 거의 평생 동안 그의 책은 읽히지 않았고 그의 생각은 사랑받지 못했다. 다른 참가자 없이 덴마크 철학상에 단독 공모했을 때조차 수상에 실패했다. 그는 죽음을 겨우 몇 년 앞두고서야 약간의 인정이나마 받을 수 있었다.

어머니 요한나 쇼펜하우어는 문학적·사회적 포부가 대단했고, 어린아이를 키우는 것은 그녀에게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본인이 직접 말했듯이 곧 자신의 "새 인형을 갖고 노는 것"4에 싫증이 났고, 쇼펜하우어의 어린 시절 내내 그를 무시하다가 분노하기를 반복했다. 훗날 쇼펜하우어는 요한나가 "매우 나쁜 어머니"였다고 썼다.

쇼펜하우어의 부족한 사회성은 아버지에게 좌절감을 안겼다. 한 편지에서 그는 경멸하듯 말한다. "네가 다른 사람을 상냥하게 대하는 법을 배우면 얼마나 좋겠니."6
쇼펜하우어는 끝까지 그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그는 만나는 거의 모든 사람을 밀어냈다. 원하면 매력적인 사람처럼 굴 수 있었지만 그런 때는 드물었다.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고 잠시 괴테와 교제했을 때를 제외하면 진정한 친구도 없었다. 하지만 아트만(산스크리트어로 자아라는 뜻이다)이라는 이름의 푸들만은 사랑했다.

쇼펜하우어는 다른 동물인 고슴도치의 도움을 받아 인간관계를 설명한다. 추운 겨울날 한 무리의 고슴도치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자. 고슴도치들은 얼어 죽지 않으려고 서로 가까이 붙어 서서 옆 친구의 체온으로 몸을 덥힌다. 하지만 너무 가까이 붙으면 가시에 찔리고 만다. 쇼펜하우어는 고슴도치들이 "두 악마 사이를 오가며" 붙고 떨어지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서로를 견딜 수 있는 가장 적절한 거리"를 발견한다고 말한다.
오늘날 고슴도치의 딜레마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딜레마는 우리 인간의 딜레마이기도 하다.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타인을 필요로 하지만 타인은 우리를 해칠 수 있다. 관계는 끊임없는 궤도 수정을 요하며, 매우 노련한 조종사조차 가끔씩 가시에 찔린다.

쇼펜하우어는 모차르트를 좋아했다. 하지만 로시니를 흠모해서 이 이탈리아 작곡가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눈알을 까뒤집을 정도로 좋아했다. 쇼펜하우어는 로시니의 모든 음악을 플루트로 연주할 수 있도록 편곡했다.

쇼펜하우어가 매우 즐겁게 플루트를 연주했다는 사실은 그의 팬이었다가 비판자로 변한 프리드리히 니체가 그의 염세주의에 의문을 품게 했다. 매일 그렇게 즐거워하며, 그렇게 사랑을 담아 플루트를 연주한 사람이 어떻게 염세주의자일 수 있을까?

이 세계는 실제로 고통이자 엄청난 오류이지만, 그 고통이 일시적으로 유예될 때가 있다. 짧은 즐거움의 순간들.
예술보다 더 즐거운 것은 없다. 예술,좋은 예술은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고, 쇼펜하우어는 생각했다.

체리 한 그릇을 그린 정물화 앞에서 느껴지는 반응이 배고픔뿐이라면 그 작품을 그린 예술가는 목표를 이루지 못한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음악 외의 다른 예술은 그림자를 이야기할 뿐이라고 말한다. 음악은 본질을, 물자체를 이야기하고, 그러므로 "모든 삶과 존재의 가장 내밀한 본성을 표현"한다. 천국의 이미지, 심지어 세속화된 천국의 이미지 안에 그림과 조각상은 포함될 수도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그곳에 음악이 있으리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언젠가 쇼펜하우어는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음악은 존재할 것이라고 말했다.

음악은 다른 예술과 달리 개인적이다. 가장 좋아하는 그림은 없을 수 있지만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아마 다들 있을 것이다.

윌리엄 스타이런은 자신의 우울증을 회고한 저서 《보이는 어둠》에서 자살을 고민하다 마치 날아오르는 듯한 브람스의 음악을 들었던 일화를 들려준다. "모든 음악에, 사실상 모든 기쁨에 몇 달간 아무 반응 없이 무감각했었으나, 이 음악이 비수처럼 내 심장에 꽂혔고, 추억이 물밀듯 밀려들면서 이 집에서 있었던 모든 즐거운 일들이 떠올랐다. 온 방을 뛰어다니던 어린애들, 축제, 사랑과 일."7
음악에는 치료 효과가 있다.

음악이 들리면 즐기기는 하지만, 좋은 스카치위스키나 좋은 가방만큼 즐기지는 않는다. 나는 소리와 말을 정말 좋아하기 때문에 이처럼 내가 음악을 잘 감상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늘 이상하게 느껴진다.

NPR에서 즐겨 하는 오래된 농담이 있다.
"왜 라디오가 텔레비전보다 더 낫죠?"
"눈에 보이는 게 더 나으니까요."

입말은 살아 있고, 친밀하다. 누군가가 말하는 것을 들으면 그 사람을 알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NPR과 팟캐스트, 오디오북이 그렇게 인기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어머니가 이메일을 거부하고 매주 월요일에 꼭 전화 통화를 고집하는 것이다.

"전부 어려운 질문이네." 존이 이렇게 쓰고는 전혀 어렵지 않다는 듯 바로 대답하기 시작한다. 존은 음악에 대한 지식이 즐거움을 배가시켜준다고 말한다. "지식이 없었다면 얻지 못했을 어떤 깨달음을 줄 수도 있고, 음의 아름다움에만 사로잡혀서 음악을 심미적 경험으로만 바라보지 않도록 도와줄 수도 있어."

존은 설명을 이어간다. 음악의 종류가 다르면 듣는 방법도 달라져야 한다. 바그너는 쉽다. "바그너의 음악은 마약의 효과가 밀려드는 것과 비슷할 정도로 감각적"이다. 베토벤과 말러, 브람스는 좀 더 까다롭다. "저 사람이 내게 무엇을 전달하고자 하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해. 바그너는무언가에 관해서 말을 해. 베토벤과 말러, 브람스는 그냥 말을 하고. 그게 차이점이야."

쇼펜하우어는 딴 생각에 대해 깊이 사색했다. 우리는 실리적이고 계산적인 관점으로만 세상을 본다고, 쇼펜하우어는 말했다.

음악과는 이와 다른 관계, 덜 계산적인 관계를 맺어야 한다. 사심 없는 관점에서 음악을 경험해야 한다.

쇼펜하우어가 내게 말한다. 음악은 감정을 전달하지 않는다. 음악은 감정의 본질을, 내용 없는 그릇을 전달한다. 음악을 들을 때 우리는 구체적인 슬픔이나 구체적인 즐거움이 아닌 슬픔이라는 감정 자체와 즐거움이라는 감정 자체를 느낀다.

슬픔 자체는 고통스럽지 않다.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은무언가에 관한슬픔이다. 그래서 우리가 신파 영화를 보거나 레너드 코헨의 음악을 듣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다.

나는 슬픔을 삼키지 않은 채, 또는 슬픔에 삼켜지지 않은 채 슬픔을 경험할 수 있다. 그 씁쓸함을 음미할 수 있다.

나도 쇼펜하우어처럼 우울하지만 그렇다고 염세주의자는 아니다.

우리는 광각의 세상에서 망원 렌즈로 찍은 사진 같은 삶을 살아간다. 전체적인 그림은 전혀 볼 수 없다.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건강한 반응은, 중국의 농부처럼 ‘아마도 철학’을 취하는 것이다.

영국 정치인 토머스 매콜리Thomas Macaulay는 모든 인도와 아라비아 문헌의 가치는 "괜찮은 유럽 도서관에 있는 선반 하나의 가치 정도"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쇼펜하우어는 명상을 하지 않았다. 세속적 즐거움을 단념하지도 않았다. 고급 요리와 값비싼 옷을 즐겼고 평생 왕성한 성생활을 하며 "생식기관은 세상의 진정한 중심"이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서구 철학이라는 천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동양의 실이 엮여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쇼펜하우어를 연구한 학자인 브라이언 매기는 "저서를 읽을 때 쇼펜하우어처럼 손에 닿을 듯, 목소리가 귀에 들릴 듯 가까이 느껴지는"11 철학자는 없다고 말한다.

우리 모두는 내면에 약간의 쇼펜하우어가 있다. 우리 모두가 상처 입은 사람들이다. 상처의 크기와 형태가 다를 뿐이다.

쇼펜하우어는 쉽게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지만(한 전기 작가는 그를 "고약한 작품"12이라 칭한다) 쉽게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이다. 예술과 음악의 애호가였던 쇼펜하우어는 가장 심오하고도 아름다운 미학 이론을 전개했고 여러 예술가와 작가에게 수 세대에 걸쳐 영향을 주었다. 톨스토이와 바그너는 자기 서재에 쇼펜하우어의 초상화를 걸어두었다. 아르헨티나 작가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쇼펜하우어를 원전으로 읽으려고 독일어를 배웠다. 여러 코미디언도 쇼펜하우어를 사랑한다. 이로써 유머 뒤에는 암울함이 도사린다는 의혹이 사실임이 드러난 셈이다.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면 이 세계도 알 수 없다. 이 사실은 내게 믿을 수 없을 만큼 명백하다. 왜 그토록 많은 철학자가, 다른 방면으로는 똑똑한 작자들이, 이 사실을 놓치는 걸까? 내 생각에 그 이유 중 하나는 외부를 살피는 것이 더 쉽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환한 불빛 아래서 자기 열쇠를 찾는 술주정뱅이나 마찬가지다.

쇼펜하우어는 달랐다. 그는 가장 어두운 곳을 살폈다. 쇼펜하우어의 비관적 세계관이나 암울한 형이상학에 동의하지 않을 순 있지만, 그의 철학이 어중간하다고 비판할 순 없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 영웅적인 철학자다.

그는 소음에 대한 내성이 그 사람의 지능과 정확히 반비례한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어느 집 마당에서 아무도 조치를 취하지 않은 채로 개가 몇 시간이나 짖는 소리를 들으면 그 집에 사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된다."

Journal>에 실린 한 연구에 따르면 소음 공해는 "불안, 스트레스, 신경과민, 구역질, 두통, 정서 불안, 호전성, 성기능 장애, 기분 변화, 인간관계에서의 갈등 증가, 노이로제, 히스테리, 정신증"으로 이어질 수 있다.14 또 다른 연구에서는 이륙하고 착륙하는 비행기 소음이,심지어 푹 잠들어 있을 때에도, 혈압을 치솟게 하고 심장을 뛰게 하며 스트레스 호르몬을 분비시킨다는 사실이 발견됐다.

"가장 최근에 쓰인 것이 늘 더 정확하다는 생각, 나중에 쓰인 것이 전에 쓰인 것보다 더 개선된 것이라는 생각, 모든 변화는 곧 진보라는 생각보다 더 큰 오산은 없다."

쇼펜하우어가 말한 배고픈 독자들처럼 우리 역시 새로운 것을 좋은 것으로,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쇼펜하우어는 사람들이 자기 생각과 함께 머무르지 않고 너무 자주 책 앞으로 달려간다고 말했다. "책은 자기 생각이 고갈되었을 때만 읽어야 한다."

우리는 데이터를 정보로 착각하고, 정보를 지식으로, 지식을 지혜로 착각한다.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경향을 염려했다. 그가 눈 돌리는 곳마다 사람들은 정보를 통찰로 착각하며 앞 다투어 달려들었다.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썼다. "정보는 그저 통찰로 향하는수단일 뿐이며 정보 그 자체에는 거의 아무 가치도 없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나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자 한다. 이런 과도한 양의 데이터(사실상 소음)는 가치가 없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부정적이며, 통찰의 가능성을 없앤다. 소음에 정신이 팔린 사람은 음악을 듣지 못한다.

내 내면의 목소리 역시 뒤죽박죽 산만하다는 것을 깨닫고 깜짝 놀란다. 쇼펜하우어가 옳았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으로 머리를 가득 채우면 그들의 생각이 내 생각을 밀어낸다. 내가 초대하지도 않은 그 목소리들을 쫓아내겠다고 다짐한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의지처럼, 인터넷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방법은 두 가지다. 금욕적인 삶을 살거나, 미학적인 삶을 살거나. 명상을 하거나, 음악을 듣거나.
나는 음악을 선택한다. 물론 로시니의 음악이다.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고 스카치위스키 한 잔을 따른다. 싱글몰트 위스키를 마시며 두 눈을 감고 음악을 듣는다. 멜로디에 귀를 기울인다. 달라이라마가 뉴스를 듣듯이, 사심은 없지만 무관심하지는 않게. 주의는 기울이되 반응은 없이. 마음을 달래주는 따뜻한 목욕물처럼 음악이 나를 적시게 둔다. 말 없는 소리. 내용 없는 감정. 소음 없는 신호.
나는 깨닫는다. 이 세상에서의 일시적 유예가 아닌, 더욱 풍성한 다른 세상으로의 침잠, 바로 이것이 쇼펜하우어가 음악 안에서 본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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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도 인간 같은 소리를 낸다. 기관차는 코를 컹컹대고 쌕쌕거리고 가끔은, 트림을 한다. 일반 열차는 징징대고 꽥 내지르고 시끄럽게 항변한다.
독일 철도회사인 도이치반은 이런 소리들을 덮어버린다.

기차 안의 모든 것이 신중함을 속삭인다. 조용한 분위기에 나무 패널을 두른 열차 내부와 스티로폼이 아닌 진짜 머그컵에 내어주는 커피까지.

사실 음의 높이는 변하지 않았다. 이는 도플러 효과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청각적 오해다. 기차의 움직임은 잘 속는 나의 뇌와 힘을 합쳐 마치 경적 소리의 높이가 변한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나는 현실을 오해했다.
만약 인생 전체가 이러하다면? 만약 이 세상 자체가 환상이라면? 약 2400년 전 플라톤이 정확히 같은 질문을 던졌다. ‘동굴의 비유’를 통해 플라톤은 동굴 안에서 벽 쪽으로 묶여 있는 죄수들을 상상해보라고 말한다. 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동굴 안에 있었으며,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에 서로를, 심지어 자기 자신도 쳐다볼 수 없다. 이들이 볼 수 있는 것이라곤 동굴 벽에 비친 자기 그림자뿐이다. 이들은 자신이 그림자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림자는 이들이 아는 유일한 현실이다.
플라톤은 철학이 그림자의 세상에서 벗어나 그 근원, 즉 빛을 발견하게 도와준다고 말한다. 우리가 그 빛을 늘 보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가끔 우리는 빛을 듣는다.

예상치 못한 고요를 느끼며 잠에서 깬다. 오랜 기차 여행으로 피곤한지라 마르쿠스 스타일로 이불 속에 더 머무르고 싶다. 하지만 어떻게든 의지를 발휘해 몸을 꺼낸 뒤 아침을 먹으러 나선다. 루소처럼 한 발 한 발 집중하며 걷는다. 주중인데도 프랑크푸르트의 거리는 텅 비어 있다. 즉시 호텔로 후퇴해 소크라테스처럼 질문을 던진다.

유럽인은 공휴일에 진지하다.

보통 신경외과 수술 또는 결혼식에서나 보일 법한 집중력으로 섬세하게 커피를 내려준다. 우유를 부탁하자 바리스타는 입을 앙 다물더니 정교하게 로스팅되고, 산미가 적어 부드럽고, 완벽하게 균형 잡힌 신이 내린 음료에 우유를 넣는 것은 세상에 있는 모든 좋고 아름다운 것에 대한 모욕이라고(물론 조심스럽게) 말한다.
아, 그렇죠. 내가 말한다. 절대 안 그럴게요.

"삶은 끔찍한 사건이야. 나는 이러한 삶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살기로 결심했다네."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는 시간이 흘러도 누그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심해지며 절망의 블랙홀이 되었다.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썼다. "오늘은 사정이 나쁘고, 하루하루 갈수록 더 나빠질 것이며, 종국엔 최악이 도래할 것이다." 모든 사람이 "전면적이고, 불가피하고,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을 향해 달려 나가고 있다. 나는 책을 덮고 한숨을 쉰다. 긴 하루가 될 것 같다. 수마트라 커피를 한 잔 더 주문하고 다시 책을 펼친다.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한다. "삶은 삶을 가장 덜 인식할 때 가장 행복하다."

세계는 하나다.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돕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 손가락의 통증을 느끼듯 타인의 고통을 느낀다. 낯선 것이 아닌, 자신의 일부로서.

듣기는 쇼펜하우어에게 중요한 문제였다. 예를 들면 쇼펜하우어가 "심장의 보편 언어"라고 칭한 음악 듣기가 그랬다.

이 세상의 소음을 넘어 자신의 직감 듣기. 지혜가 어디에 도사리고 있을지 알 수 없으므로 외국어로 말하는 다른 목소리 듣기. 그리고 물론, 고통받는 이의 목소리 듣기. 인간 혐오와 심술궂은 성격에도 불구하고, 쇼펜하우어는 연민을 가치 있게 여겼다. 비록 같은 인간보다는 동물에게 연민을 더 많이 표하긴 했지만.

듣기는 연민의 행위, 사랑의 행위다. 귀를 빌려주는 것은 곧 마음을 빌려주는 것이다. 잘 듣는 것은 잘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기술이며, 다른 기술과 마찬가지로 습득 가능하다.

쇼펜하우어의 강점은 우울함이 아니라 우울을 설명하기 위해 쌓아 올린 철학적 체계, 고통의 형이상학이었다.

책의 첫 문장부터 상당히 특별하다. "세계는 내가 만들어낸 생각이다."

우리 모두가 저마다 자기 정신에서 현실을 구성한다는 의미다. 쇼펜하우어의 세계는 그의 생각이고, 우리의 세계는 우리의 생각이다.

쇼펜하우어는 관념론자였다. 철학적 의미에서 관념론자Idealist는 이상ideal이 높은 사람을 의미하지 않는다. 관념론자는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이 세계 자체가 아니라 정신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믿는 사람을 뜻한다. 물리적 대상은 우리가 그것을 인식할 때에만 존재한다.세계는 내가 만들어낸 생각이다.

"우리는 영화관을 떠날 수 없다. 영화관 바깥에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영화는 우리의 현실이다. 아무도 스크린을 보지 않을 때 영사기의 불빛은 꺼지지만 영화는 영사기에서 계속 돌아가고 있다."1

중력만큼 유순하지는 않지만. 쇼펜하우어는 의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의지의 욕망은 끝이 없으며 요구는 고갈될 줄을 모른다. 모든 욕망이 새로운 욕망을 낳는다. 그 갈망을 가라앉히거나 그 요구에 끝을 맺거나 그 심장의 끝없는 나락을 채우기엔 세상의 그 어떤 만족도 충분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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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의 상태를 조사하기 위해 CTComputed Tomography(컴퓨터 단층촬영)나 뇌의 형상을 조사하는 화상 검사 장치인 MRImagnetic resonance imaging, 뇌의 혈류와 대사를 검사하는 SPECTsingle photon emission CT(단일광자 방사형 컴퓨터 단층촬영), PETpositron emission tomography(양전자 방사 단층촬영) 등의 검사도 실시합니다. 필요에 따라 뇌파 검사를 하기도 하고 뇌 주위를 보호하고 있는 뇌척수액을 채취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검사 결과를 놓고 종합적으로 판단해서 진단 결과를 고지합니다.

치매에 걸리는 가장 큰 위험인자는 노화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치매 유병률이 훨씬 높아진다는 말이지요. 70대 초반 연령대에서는 치매 유병률이 3~4% 정도지만 80대 후반이 되면 40%를 넘어서고 90대 이상이 되면 60%가 넘습니다. 또한 80대가 지나면 여성의 유병률이 남성보다 현저하게 높아집니다. 이는 성호르몬이나 우울증 경향의 차이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정설은 아닙니다. 이에 관해서는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합니다.

정상도 아니고 치매도 아닌 중간 상태로,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지만 인지기능이 저하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방치하면 알츠하이머병이나 다른 유형의 치매로 발전할 위험성이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상태가 더 이상 악화되지 않고 증세가 호전되기도 합니다.

피터슨 박사는 일주일에 총 150분 동안 유산소 운동을 하라고 권합니다. 30분씩 5일을 해도 되고 50분씩 3일을 해도 됩니다. 활기차게 걷기, 가벼운 조깅처럼 약간 땀을 흘릴 정도의 운동을 적어도 주 2회 이상 규칙적으로 하면 기억력과 사고력이 향상될 수 있습니다.

혈관성 치매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고혈압, 고지혈증, 당뇨병, 운동 부족, 고칼로리 식사, 과도한 염분 섭취와 알코올 섭취, 흡연 등을 반드시 주의해야 합니다.

치매는 고령이 된 후 걸리는 경우가 많긴 하지만 40세 전후에 발병하는 사례도 있습니다. 학계에서는 65세 미만에서 발생하는 치매를 ‘초로기 치매’라고 합니다.

이 가이드라인에는 ①운동 ②금연 ③영양 관리 ④금주 ⑤인지기능 트레이닝 ⑥사회 참여 ⑦체중 관리 ⑧고혈압 관리 ⑨당뇨병 관리 ⑩고지혈증 관리 ⑪우울증 관리 ⑫청력 손실 예방으로 구성된 총 12가지 권장 사항이 담겨 있는데, 각 항목별로 권장 정도를 표시했습니다.

식생활에서는 생선을 비롯해 견과류와 올리브유, 커피가 치매 예방에 효과적입니다. 한편 비타민B와 비타민E, 불포화지방산 등의 건강보조 식품은 치매의 위험을 낮추는 효과가 검증되지 않았기 때문에 권장 항목에서 제외됐습니다.

간병비와 의료비 등 치매에 드는 사회적 비용은 2015년 기준으로 전 세계에서 8180억 달러(약 910조 원)가 쓰이고 있다고 하는데요, 이는 세계 GDP의 약 1%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비용도 2030년에는 연간 2조 달러(약 2200조 원)가 될 것으로 추계하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말하고 싶은 점은 치매에 걸려도 ‘삶은 계속된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태어난 순간부터 연속되는 시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이어져 있는 같은 존재입니다. 치매에 걸렸다고 해서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 바뀌지는 않습니다. 또한 치매는 비정상적인 상태만 계속되는 게 아닙니다. 평소처럼 하루하루가 쭉 이어집니다.

치매의 증상과 상태는 일률적이지도, 고착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항상 변동합니다.

사람에 따라서 치매 유형이 다르고 증상도 다양하기 때문에 모두 저와 같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전문의인 저 자신마저도 치매는 한번 걸리면 상태가 바뀌지 않고 고착화되거나 나빠진다고만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좋아지기도 하고 나빠지기도 하면서 마치 그러데이션처럼 변화가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지요.

치매 당사자에게도 다른 사람의 말이 다 들립니다. 자신의 험담을 듣거나 비웃음받을 때의 불쾌한 감정은 가슴 깊이 생채기를 냅니다. 설령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라고 해도 느낄 수 있습니다. 외국인도 욕은 알아듣고 갓난아이도 엄마가 화가 났다는 건 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말할 때는 주의를 기울여 주세요. 치매 당사자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자코 있는 것은 못 알아들어서가 아닙니다.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하고 멸시받을 때의 슬픔과 고통이 얼마나 큰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누구나 알 것입니다.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또는 직장이나 가정 등 자신이 속한 커뮤니티에서 크든 작든 경험했을 테니까요. 치매 당사자도 똑같습니다. 괴로운 경험을 인지할 수 있고 고통과 슬픔도 똑같이 느낍니다.

치매 당사자와 관련된 어떤 사안을 결정할 때 우리들을 빼놓고서 결정하지 마세요. 아무것도 모를 거라고 치부하고 따돌리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치매 당사자를 대할 때는 우선 상대가 하는 말을 귀담아들어 주겠다는 마음을 꼭 되새겨 주세요.

"이렇게 하세요", "이렇게 하는 게 좋아요" 하고 혼자 이야기를 주도하며 뭐든지 결정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당황한 치매 당사자는 혼란스러워서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못합니다

"오늘은 무얼 하고 싶으세요?" 하는 식으로 물어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오늘은 무엇을 하고 싶지 않은가요?" 하는 질문도 해 주세요.

하지만 몸이든 마음이든 아픈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시간을 내어 주는 일입니다. 들어 준다는 것은 기다린다는 의미지요. 그리고 기다린다는 것은 상대에게 자신의 ‘시간을 내어 주는’ 일입니다.

치매는 당사자도 몹시 불편하고 답답해서 견뎌 내야 하는 일이므로, 주위 사람들이 진득하게 기다려 주고 차분히 대해 주면 불안감을 가라앉히고 안심할 수 있습니다.

대화를 할 때는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게, 상대와 1미터 정도의 거리를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눈높이도 중요합니다. 위에서 내려다보거나 아래에서 올려다보지 말고 똑같은 높이에서 눈과 눈을 맞추는 게 좋습니다.
치매에 걸리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가 되는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지만 되풀이해 강조하건대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은 살아 있습니다. 불쾌한 일을 당하면 상처받고, 칭찬을 들으면 더없이 기쁘지요. 무엇보다 치매 당사자도 자신과 똑같은 ‘한 사람의 인간’이며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유일무이하고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 주세요.

생활환경은 최대한 간소하고 단순하게 하는 편이 좋습니다.

치매 당사자는 여러 가지를 동시에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한꺼번에 많은 이야기를 들으면 혼란스러워서 더 쉽게 피로해지거든요. 같은 말을 전할 때도 될 수 있으면 간략하고 쉽게 한 가지씩 알려 주세요. 말하는 사람이 얼마나 마음을 써 주느냐에 따라 상대가 느끼고 받아들이는 정도의 차이는 매우 큽니다.

치매에 걸린 사람을 단지 ‘다 해 줘야 하는 사람’으로 여겨 모든 역할을 빼앗는 일이 없도록 유념해야 합니다.

작든 크든 그 사람이 잘하는 일이라면 부탁하기도 쉽고 상대도 맡기에 부담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는, 반드시 칭찬하는 것을 잊지 마세요.

치매 당사자를 대하는 자세를 생각할 때 ‘웃음’도 빠뜨릴 수 없습니다.

부부란 가정에서는 거리낌 없이 서로의 감정을 드러내기 때문에 무뚝뚝하게 대할 때도 있고 짜증도 내기 마련입니다. 내심 말처럼 그렇게 내내 웃고만 지낼 수는 없을 거라 여기면서 살펴보았더니 그들 부부는 정말로 줄곧 웃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들은 생활 속에서 웃음을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웃다 보면 그다지 재미있는 일이 아니어도 어느새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치매에 걸려 괴로운 마음이 끊임없이 밀려올 때는 특히 웃음이 중요합니다. 그러니 치매 당사자를 대할 때는 웃음을 잃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전 세계를 통틀어 보아도 ‘나’라는 인간과 똑같이 살아오고 똑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세상에 나 한 사람 외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존엄한 가치가 생겨나는 것이지요.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존엄한 존재입니다. 치매인 사람도 그 옆에 있는 사람도, 모르는 사람도 잘 아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모두 존엄성을 지닌 존재입니다.

당시 의사였던 숙부가 추천해 준, 세균학자 노구치 히데요의 전기를 읽고서 의사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치매에 걸렸다고 해서 그 사람의 역사와 존엄성이 사라지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건강하든 아프든 치매에 걸렸든 사람은 모두 ‘사람’으로 존중받아야 합니다. 이러한 사고관을 학문적으로 연구해 널리 알린 인물이 바로 톰 킷우드Tom Kitwood입니다.

인간 중심 케어는 치매 환자의 인권과 개별성을 존중하는 돌봄 방식입니다. 치매 당사자가 하는 말을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라는 뜻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인격과 감정을 존중하고 당사자의 입장이 되어서 돌봄을 실천하자는 의미입니다.

자연과학과 심리학을 공부한 그는 환자가 아닌 인간의 삶에 주목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밥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지금 있는 곳은 어딘지 알 수 없게 된다면 얼마나 당황스럽고 두려울 것인가. 내가 그런 상황이라면 어떨까, 어떤 도움을 필요로 할 것인가 생각하며 당사자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진정 도움이 되는 치료를 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상당히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인간 중심 케어’는 여전히 힘든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두 다르다’, ‘사람은 누구나 소중하다’, ‘인간 중심의 케어를 실천한다’ 이런 말을 하기는 쉬워도 실천하기는 무척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치매 당사자를 마주할 때는 반드시 이 말을 기억해 주세요. 인간 중심 케어는 정말 중요한 개념입니다.

공원을 걷고 있던 어린아이가 넘어져 울고 있자 어디선가 네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한달음에 달려왔습니다. 넘어진 어린아이를 일으켜 세워 주려는가 보다 싶었는데 여자아이는 어린아이 옆에 자신도 배를 깔고 누워 그 아이를 보며 방긋 웃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울고 있던 어린아이도 따라 웃었습니다. 잠시 후 여자아이가 "일어나자" 하고 말하자 어린아이는 "응" 하며 일어났고 두 아이는 손을 잡고 걸어갔습니다.

저는 이 여자아이가 ‘인간 중심 케어’의 근본을 잘 보여 준다고 생각합니다.

알고 한 행동은 아니었겠지만, 그 행동은 돌봄을 필요로 하는 사람과 눈높이를 맞추는 인간 중심 케어의 시작입니다. 뿐만 아니라 한동안 함께 엎드려 있다가 적당한 기회를 살펴 스스로 일어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지요. 자신의 힘으로 일어났다는 사실에 어린아이는 분명 기뻤을 겁니다.

여자아이가 보여 준, 상대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이런 태도와 행동이 사회 전체로도 확산되면 좋겠다고 늘 염원하고 있습니다.

당연한 이치이지만, 상대의 입장이 되어 보면 지금까지 몰랐던 많은 것들을 느끼고 알게 되는 법입니다. 제가 특히 깊은 인상을 받았던 일은 데이 서비스에 가서 받은 입욕 서비스였습니다. 직원이 욕실에서 목욕을 시켜 주니 스스로 씻은 듯 개운하고 기분이 좋아 마치 왕이라도 된 듯했습니다.

이용자가 돌아간 뒤에는 회의를 열어 돌봄에 관해 면밀히 검토하고 논의하기도 했지요. 이렇게 이용자와 진지하게 소통하는 모습을 보면서 데이 서비스는 굉장한 조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케어 제도는 이분들의 노력을 바탕으로 이루어졌음을 실감했습니다.

환자 본인이나 가족들에게 이런 서비스가 제공되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어쩌면 의사보다 더 필요합니다. 치매 당사자가 되고서야 절실히 느꼈습니다.

복지 시설에 단기간 입소해서 목욕, 배설, 식사 등의 돌봄이나 일상생활에 필요한 보살핌을 받는 ‘단기입소 생활 돌봄’과 의료기관에 단기간 입소해서 간호와 의학적인 관리하에 입욕, 배설, 식사 등의 돌봄과 기능 훈련을 받을 수 있는 ‘단기입소 요양 간병’입니다. 그리고 개호보험은 적용되지 않지만 유료 노인요양원에서도 단기 체험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데이 서비스는 환자가 된 기분을 떨치기 힘듭니다. 지루하기도 해서 가고 싶지 않을 때도 있지만 그럴 때는 ‘내가 가서 아내가 조금이라도 편해진다면’ 하고 마음을 고쳐먹곤 합니다.

치매 당사자를 만날 때는 ‘속이지 않겠다’는 마음을 가지라고 꼭 당부하고 싶습니다.

거짓말로 속여서 검사를 받게 하는 사례가 많은데, 전 속이는 것에는 반대합니다. 저는 한 번도 그렇게 조언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속이면 상대는 화가 나서 이번에는 나를 속이려 들 것입니다.

‘어차피 상대는 치매인데 속인다고 뭘 알겠어?’ 하고 생각하기 쉽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뭔가 이상한 느낌도 들고 상대가 자신을 존중해 주지 않는다는 것쯤은 치매에 걸린 사람도 느낄 수 있으니까요. 되풀이해 강조하지만, 치매라고 해서 색안경을 끼고 보지 말고 평범하게 대해 주길 바랍니다.

저는 치매 당사자를 진찰할 때 항상 당사자와 가족이 함께 병원에 오도록 했습니다. 가족하고만 이야기를 나누는 사례도 있는 모양이지만 저는, 자신 모르게 가족과 의사가 똘똘 뭉쳐 자신을 입원시킬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치매 당사자가 쓸데없는 걱정을 하거나 깊은 고민에 빠지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한번은 치매에 걸린 남편과 함께 병원을 찾은 부인에게 "많이 힘드시죠?" 하고 말을 건넸더니 부인이 이렇게 대답하며 웃었습니다.
"우리 집 양반이 원래 말수가 적었는데 요즘은 자꾸 같은 걸 또 물어봐요. 그래도 같은 대답만 하면 되니까 힘들진 않답니다. 부부간에 대화가 늘었다고 생각하니 치매도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아요."
그 대답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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