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도 인간 같은 소리를 낸다. 기관차는 코를 컹컹대고 쌕쌕거리고 가끔은, 트림을 한다. 일반 열차는 징징대고 꽥 내지르고 시끄럽게 항변한다.
독일 철도회사인 도이치반은 이런 소리들을 덮어버린다.

기차 안의 모든 것이 신중함을 속삭인다. 조용한 분위기에 나무 패널을 두른 열차 내부와 스티로폼이 아닌 진짜 머그컵에 내어주는 커피까지.

사실 음의 높이는 변하지 않았다. 이는 도플러 효과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청각적 오해다. 기차의 움직임은 잘 속는 나의 뇌와 힘을 합쳐 마치 경적 소리의 높이가 변한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나는 현실을 오해했다.
만약 인생 전체가 이러하다면? 만약 이 세상 자체가 환상이라면? 약 2400년 전 플라톤이 정확히 같은 질문을 던졌다. ‘동굴의 비유’를 통해 플라톤은 동굴 안에서 벽 쪽으로 묶여 있는 죄수들을 상상해보라고 말한다. 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동굴 안에 있었으며,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에 서로를, 심지어 자기 자신도 쳐다볼 수 없다. 이들이 볼 수 있는 것이라곤 동굴 벽에 비친 자기 그림자뿐이다. 이들은 자신이 그림자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림자는 이들이 아는 유일한 현실이다.
플라톤은 철학이 그림자의 세상에서 벗어나 그 근원, 즉 빛을 발견하게 도와준다고 말한다. 우리가 그 빛을 늘 보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가끔 우리는 빛을 듣는다.

예상치 못한 고요를 느끼며 잠에서 깬다. 오랜 기차 여행으로 피곤한지라 마르쿠스 스타일로 이불 속에 더 머무르고 싶다. 하지만 어떻게든 의지를 발휘해 몸을 꺼낸 뒤 아침을 먹으러 나선다. 루소처럼 한 발 한 발 집중하며 걷는다. 주중인데도 프랑크푸르트의 거리는 텅 비어 있다. 즉시 호텔로 후퇴해 소크라테스처럼 질문을 던진다.

유럽인은 공휴일에 진지하다.

보통 신경외과 수술 또는 결혼식에서나 보일 법한 집중력으로 섬세하게 커피를 내려준다. 우유를 부탁하자 바리스타는 입을 앙 다물더니 정교하게 로스팅되고, 산미가 적어 부드럽고, 완벽하게 균형 잡힌 신이 내린 음료에 우유를 넣는 것은 세상에 있는 모든 좋고 아름다운 것에 대한 모욕이라고(물론 조심스럽게) 말한다.
아, 그렇죠. 내가 말한다. 절대 안 그럴게요.

"삶은 끔찍한 사건이야. 나는 이러한 삶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살기로 결심했다네."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는 시간이 흘러도 누그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심해지며 절망의 블랙홀이 되었다.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썼다. "오늘은 사정이 나쁘고, 하루하루 갈수록 더 나빠질 것이며, 종국엔 최악이 도래할 것이다." 모든 사람이 "전면적이고, 불가피하고,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을 향해 달려 나가고 있다. 나는 책을 덮고 한숨을 쉰다. 긴 하루가 될 것 같다. 수마트라 커피를 한 잔 더 주문하고 다시 책을 펼친다.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한다. "삶은 삶을 가장 덜 인식할 때 가장 행복하다."

세계는 하나다.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돕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 손가락의 통증을 느끼듯 타인의 고통을 느낀다. 낯선 것이 아닌, 자신의 일부로서.

듣기는 쇼펜하우어에게 중요한 문제였다. 예를 들면 쇼펜하우어가 "심장의 보편 언어"라고 칭한 음악 듣기가 그랬다.

이 세상의 소음을 넘어 자신의 직감 듣기. 지혜가 어디에 도사리고 있을지 알 수 없으므로 외국어로 말하는 다른 목소리 듣기. 그리고 물론, 고통받는 이의 목소리 듣기. 인간 혐오와 심술궂은 성격에도 불구하고, 쇼펜하우어는 연민을 가치 있게 여겼다. 비록 같은 인간보다는 동물에게 연민을 더 많이 표하긴 했지만.

듣기는 연민의 행위, 사랑의 행위다. 귀를 빌려주는 것은 곧 마음을 빌려주는 것이다. 잘 듣는 것은 잘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기술이며, 다른 기술과 마찬가지로 습득 가능하다.

쇼펜하우어의 강점은 우울함이 아니라 우울을 설명하기 위해 쌓아 올린 철학적 체계, 고통의 형이상학이었다.

책의 첫 문장부터 상당히 특별하다. "세계는 내가 만들어낸 생각이다."

우리 모두가 저마다 자기 정신에서 현실을 구성한다는 의미다. 쇼펜하우어의 세계는 그의 생각이고, 우리의 세계는 우리의 생각이다.

쇼펜하우어는 관념론자였다. 철학적 의미에서 관념론자Idealist는 이상ideal이 높은 사람을 의미하지 않는다. 관념론자는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이 세계 자체가 아니라 정신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믿는 사람을 뜻한다. 물리적 대상은 우리가 그것을 인식할 때에만 존재한다.세계는 내가 만들어낸 생각이다.

"우리는 영화관을 떠날 수 없다. 영화관 바깥에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영화는 우리의 현실이다. 아무도 스크린을 보지 않을 때 영사기의 불빛은 꺼지지만 영화는 영사기에서 계속 돌아가고 있다."1

중력만큼 유순하지는 않지만. 쇼펜하우어는 의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의지의 욕망은 끝이 없으며 요구는 고갈될 줄을 모른다. 모든 욕망이 새로운 욕망을 낳는다. 그 갈망을 가라앉히거나 그 요구에 끝을 맺거나 그 심장의 끝없는 나락을 채우기엔 세상의 그 어떤 만족도 충분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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