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문제의식을 아이들 개인이 겪는 문제와 연결하여 이야기로 엮어 내는 솜씨가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는 그는 문학도 어린이도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스스로를 돌아보며 어설픈 지도를 들고 희미한 불빛에 의지해서 조심스럽게 한 걸음 한 걸음 어린이에게 다가가는 초심을 잃지 않으려 애쓴다.

"스텝이 엉키면 그게 탱고예요!"
영화 『여인의 향기』의 명대사는 그야말로 사실무근 혹세무민이다. 스텝이 엉키면, 그건 그냥 몸부림이다.

안타깝게도 스텝을 익힌다고 우아하게 탱고를 출 수 있는 건 아니다. 다만 꾸준한 유산소 운동은 기초 체력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장담할 수 있을 뿐.

판타지문학의 대가 어슐러 K. 르 귄도 스텝에 대해 말한 바 있다. "기술이 예술을 가능하게 한다." 소설가 데니스 루헤인은 『운명의 날』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기술이란 노동을 사랑할 때 일어나는 기적"이라고.

발바닥에 땀 나도록 스텝을 익히면 예술이 가능할……지도 몰라요. 스텝이 예술을 가능하게 할…… 수도 있어요.

예술은 스텝에서 시작된다. 일단 조명도 드레스도 파트너도 없이 운동복 차림으로 슬로 퀵퀵 슬로.
이것은 스텝에 관한 책이다.

태양계를 넘어 우주의 비밀에 다가가게 되었다. 그것은 태초로부터 품어 온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과연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주에 그 답이 있었다. 우리는 별의 후손이다. 이는 관찰과 추론으로 밝혀낸 객관적 사실이다.

아기들이 잠투정을 하는 것은 잠과 죽음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다시 깨어난다는 확신을 하지 못한다는 거다. 모른다는 것은 어둠이요 공포다.

이번 생엔 도저히 채울 수 없는 그 어떤 결핍과 그것으로부터 자라난 욕망.
그 자리에 이야기가 생겨났다.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의 주인공 ‘삐삐로타 델리카테사 윈도셰이드 맥크렐민트 에프레임즈 도우터 롱스타킹’은 어떤가? 삐삐는 허구의 인물이다. 한마디로 삐삐라는 존재 자체가 거짓말이다. 하지만 뭐 어떤가? "콩고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 한 명도 없"고 그곳에서는 "다들 하루 종일 거짓말만" 한다. 이야기 세상이 바로 그런 곳이다.

그러나 삐삐는 또한 진실이다. 남자 어른 하나쯤 한 손으로 번쩍 들 만큼 힘이 세고, 길에다 뿌려도 좋을 만큼 돈이 많고, 어른들의 고리타분한 잔소리 따위 가뿐하게 되받아치고, 그런 자신을 좋아하는 토미와 아니카 그리고 원숭이 닐슨 씨와 커다란 말 한 마리쯤 갖고 싶은 마음, 그건 어린이의 진실이다(사실 나도 간절히 바란다).

삐삐의 언행 또한 마찬가지다. 이집트에선 누구나 뒤로 걷지만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삐삐의 말은 마땅히 그러해야 할 진실을 담고 있다.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도 좋지만 우리가 꿈꾸는 현실을 그려 보는 건 어떨까? 반드시 현실의 테두리 안에서만 움직일 필요는 없지 않나?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아니, 순응하고 순종한다. 그렇다고 이야기 속 인물까지 그럴 필요는 없다. 세상 어딘가에는 온몸으로 꿈을 말하는 사람도 있다.

자신만의 꿈으로 눈동자가 빛나는 사람.

개미는 붉어진 눈길을 딴 데로 돌린 채 슬그머니 문을 열고 베짱이를 안으로 들일지도 모른다. ‘그럼 뭐 이리 들어와서 그 시라는 걸 또 지어 보든가 말든가…….’ 중얼거리면서.

누군가의 진실을 통해 보는 다른 세상. 습관이 되어 버린 일상에서 낯선 얼굴을 발견하고, 유일한 정답이던 사실에서 다양한 진실을 발견하는 놀라움. 이야기 덕분에 세상은 별빛처럼 다채롭고 바다처럼 깊어진다. 그 시작에 신화가 있다면, 그 현재에는 어린이문학이라는 별난 장르가 있다.

예술의 그 어떤 장르도 수용자를 중심으로 장르를 규정하지 않는다. 음악에도 미술에도 영화에도 어린이를 위한 작품이 있지만, 별도의 장르로 구분하지 않는다. 그런데 문학에만 유독 ‘어린이’가 붙는 장르가 따로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동화를 두고 ‘어린이부터 읽는’ 장르라고 주장하는데, 글쎄, 그러면 김치는 ‘한국 사람부터’ 먹는 음식인가? 아무런 의미 없는 수사다.

동화는 어린이를 위한, 그러니까 ‘수신’의 장르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다. ‘너에게 전하는’ 이야기다.
소설은 동화와 다르다. 소설은 수신이 아닌 발신의 장르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다.

일찍이 움베르토 에코는 『장미의 이름』 도입부가 어렵다는 평에 대해 일부러 그렇게 썼다면서, "소설로 들어간다는 것은 산을 오르는 것이며, 산을 오르려면 호흡법을 배우고, 행보를 익혀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동화는 다르다. 작가의 표현보다 독자에게 ‘전달’하는 데 무게 중심을 둔다. 물론 소설가도 독자에게 이야기를 전하고, 동화작가도 자신을 표현한다. 다만 창작의 무게 중심이 다르다는 얘기다. 소설이 어렵게 느껴지면 독자는 스스로를 의심한다. 에코 선생님, 제가 부족합니다. 그런데 동화가 어렵게 느껴지면 독자는 어린이든 어른이든 작가를 의심한다. 뭔 말인지 알아듣게 좀 해 봐봐봐.

동화는 어린이 독자에게 가닿아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작품의 가치를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이게 과연 동화냐는 소리나 듣기 십상이다. 흔히들 그러지 않는가. 이 동화는 어린이들이 좋아해요 혹은 안 좋아해요.

어른과 마찬가지로, 어린이도 한 덩어리로 묶어 내기 어렵다. 독자로서의 어린이도 그렇다. 연령별로, 성별로, 지역별로, 상황별로, 저마다 다르다.

그렇다면 어린이 독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맞춤 창작을 하라는 뜻일까? 빙고! 정답입니다. 바로 그래야 한다. 물론 맞춤형 수제 책을 출간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창작의 과정에서는 단 한 사람의 어린이 독자를 바라보아야 한다.

급하게 지어낸 거짓말처럼 불안정해지기도 한다.

소재는 열다섯 살 이 모 양과 맞겠는데, 주제는 아홉 살 김 모 군이 공감할 만하고, 서술문은 신문 연재소설을 즐기는 아저씨 취향, 대화문은 아침 드라마에 등장하는 아줌마 말투다. 이걸 가지고 나름대로 이리저리 모난 데를 두들겨 놓으면, 이야기는 낮에도 밤에도 속하지 못한 우화 속 박쥐 꼴이 되어 홀로 메아리친다. 뻔해요, 뻔해요, 뻔해요…….

초점에 따라 이야기의 맥락도 달라진다. 상대가 이해할 수 있게끔, 나에게 공감할 수 있게끔. 그에 따라 이야기의 성격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다.

여기 사는 김영수 어린이, 저기 사는 이영희 어린이, 그중 특정한 어린이를 독자로 삼아 이야기해야 한다.

대상에 따라 전혀 다른 귀신 이야기를 해야 한다.
그런데 그냥 뭉뚱그려 ‘어린이’라고만 생각하면 애매한 이야기가 된다.

그러므로 창작의 과정에서 고려해야 하는 것은 책이 나왔을 때 읽게 될 실제독자가 아닌 내포독자, 즉 작가가 임의로 설정한 독자다.

내포독자는 단지 독자의 수신에만 도움이 되는 게 아니다. 작가의 발신, 즉 동화의 기준점이 되어 준다. 작품의 성패와 수준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솔직히 말해서 낯 뜨거운 동화가 (꽤) 많다. 그게 어린이의 눈높이라는 듯 유치하고 천박한 동화도 있고, 허술하기 짝이 없는 구성으로 판타지를 자처하는 동화도 있다. 인물들은 너무나 간단히 상처받고 분노하고, 그만큼 간단히 반성하고 화해한다. 인물이 아니라 종이 인형 같다. 그런 작품을 보면 작가에게 묻고 싶어진다.
당신은 이 이야기를 진심으로 믿나요?

그런 작품을 내미는 건 어린이 독자를 허술하게 대하는 것이다. 어른이 보기엔 시시하지만, 애들은 이런 것도 좋아할걸! 싸구려 재료에 설탕을 입힌 불량 식품을 내미는 거나 다름없다. 애들인데, 뭐. 애들은 이런 것도 잘 먹는데, 뭐. 애들은 이런 것도 재미있다고 읽을걸! ‘독자’가 아니라 어린이, 심지어 애들, 애들 책.

어린이 독자에 대한 존중감이 없다면, 부디 딴 일을 알아보면 좋겠다. 이 분야는 딱히 돈도 안 되고(진심입니다), 이름나기도 어렵고(진심이라니까요), 다만 어린이 독자가 이야기를 들어 준다는 커다란 기쁨이 있을 뿐이니.

그 한 사람의 어린이 마음을 움직이는 이야기를 써야 한다. 그 한 사람의 내포독자는 작품의 기준점이 되어 줄 것이다. 작가가 길을 잃지 않도록 북극성처럼 한자리에서 반짝반짝.

나는 현서가 사실은 좀 어려운데도 아닌 척하면서 읽어 낼 정도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그게 또 문학의 재미가 아닌가. 허세와 허영.

내포독자로 삼을 만한 현실의 아이가 떠오르지 않는다면 어린 시절의 나를 내포독자로 삼아도 좋다.

혹은 이야기 속 인물도 괜찮다. 어디서든 내 이야기를 들어 줄 소중한 독자님을 책상 앞에 모셔 와야 한다.

단 한 사람을 위한 이야기니, 단 하나밖에 없는 이야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다.

그런데 습작 중이거나 신인인 경우, 아직 자신만의 내포독자를 찾지 못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작품마다 다양한 어린이를 호명해 보면서 딸깍, 비밀의 숲으로 들어가는 자물쇠가 풀리는 순간을 찾아야 한다. 자신과 통하는 내포독자를 발견하는 때, 그리하여 나만의 목소리를 찾는 때.

나의 내포독자에게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가.
이것은 ‘누구의 이야기’를 할 것이냐는 질문과 같다.

춘향은 요즘 말로 ‘조선판 걸 크러시’다. 처음부터 바라는 바가 뚜렷하다. 자존을 높이 세우고 강인한 의지로 고난을 돌파해 마침내 뜻을 이룬다. 이몽룡이 암행어사 출두로 춘향을 구하지 않았냐고? 그건 그 시대의 현실적인 개연성에 따른 결말일 뿐, 돌이켜 보시라. 이몽룡이 떠날 때도 춘향은, 도련님과 함께라면 첩살이도 좋겠어요 운운하지 않는다. 변학도가 기생의 딸로서는 안락한 혜택을 약속했을 텐데도 춘향은 흔들리지 않는다. 이몽룡이 거지꼴로 돌아왔을 때조차 춘향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당당한 자리가 아니라면 차라리 죽음을 택한다. 그 결과가 암행어사 출두에 이은 행복한 결말이다.

서사 이론에서는 이러한 주인공을 ‘문제적 개인’이라고 한다. 문제적 개인이란, 시대와 불화하는 인물이다. 혁명가로 시대에 맞서는 인물을 뜻하는 게 아니다. 시대/정답/주류 혹은 기존의 질서와 모순된 욕망을 품은 인물이다. 시대/정답/주류/질서와의 갈등이 내재된 인물이다. 의지적으로 시대/정답/주류/질서에 맞선다기보다, 존재론적으로 그러한 개인이다. 존재 자체가 시대/정답/주류/질서와의 갈등을 내포한 것이다.

주인공의 욕망은 세계를 구원하는 것일 수도, 생일잔치 초대장을 짝에게 전하는 일일 수도 있다. 생일잔치 초대장의 경우에 주인공은 소심한 성격이라는 제 안의 ‘질서’와 갈등을 빚는다.

오카 슈조 단편 「거짓말이 가득」의 주인공 류우는 ‘정직하고 싶다’는 욕망을 갖고 있다. 그런데 현실은 그리 간단치 않다. 곰곰이 따져 보니 1년이면 무려 1,000번이 넘는 거짓말을 해야만 한다. 어른들은 거짓말이 나쁘다고 말하면서도 스스로 거짓말을 일삼고, 아이들이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조장한다. 류우의 갈등은 어린이는 물론 어른인 우리도 종종 느끼는 고민이다. 말하자면 류우의 욕망은 세간의 도덕률과 갈등을 일으킨다. 문제적 개인이다. 좋은 주인공이다.

류우는 전형성을 가진 인물이다. 거짓말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지만 거짓말을 하지 않을 배짱은 없는, 그러니까 지구의 70퍼센트를 차지하는 바다만큼 많은, 소심한 우리. 그러면서도 개성을 확보하고 있다. 류우는 정정당당하게 맞붙는 성격은 아니지만, 조용히 결심을 지킨다. 왕따를 주도하는 친구 앞에 부르르 떨쳐 일어나진 못하지만, 거짓말로 은밀하게 피해자를 돕는다.

전형성은 인물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고, 개성은 인물의 매력을 높인다.

여기에 소녀만의 개성적인 면모가 더해지면, 공감도가 높으면서 매력 넘치는 주인공이 탄생한다.

욕망을 가로막는 걸림돌도 그러하다. 걸림돌은 어떤 세력일 수도, 어떤 사람일 수도, 어떤 상황일 수도, 자신의 성격이나 마음일 수도 있다.

반드시 거창한 욕망, 무시무시한 걸림돌일 필요는 없다. 이야기에 걸맞은 욕망, 걸맞은 걸림돌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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