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 공표한 하세가와 치매척도는 "오늘은 몇 월 며칠입니까?", "나이가 어떻게 되십니까?"와 같은 기본적인 질문에서 시작해 일반 상식 문제와 계산 문제 등 총 11개 문항이었습니다.

"하세가와 군, 치매를 검사할 때 어제와 오늘의 판단이 다르면 안 된다네. 진단 기준을 만들게나."

‘아! 어려운 숙제를 받았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치매는 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므로 눈에는 보이지 않으니까요. 그렇지만 검사자에 의해 왜곡되지 않고 치매 유무를 판별할 수 있는 보편적인 진단법은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치매 진단법이 완성된 후 누가 검사하든 거의 같은 점수가 나오자 ‘단연코 우수한 검사법’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모리타 요법은 신경과의이자 지케이 의대 교수였던 고 모리타 마사타케 박사가 불안장애 등 신경증을 치료하기 위해 1920년경 창시한 정신요법입니다. 불안과 공포를 배제하고 통제하는 게 아니라 자연스러운 감정으로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현재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실행하며 자기실현을 추구하도록 돕는 것이 목적입니다.

"공포심을 배제하려고 하니까 힘든 거야. 있는 그대로 증상을 받아들이고 가능한 한 마음속에서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네."

결국 3개월째에 지도교수에게 상담하러 찾아갔습니다.
"언어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도저히 공부를 계속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다른 전공도 아니고 정신과의인데 말을 이해하지 못하면 일을 어떻게 해 나가겠습니까. 더 큰 폐를 끼치기 전에 그만 일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은 언어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네. 넌버벌 커뮤니케이션이라고, 언어에 의존하지 않는 의사소통 방법도 있으니까 조금만 더 힘내 보게나."
그리고는 이렇게 격려까지 덧붙여 주었습니다.
"자네에 대해 아무도 불평하는 사람이 없다네. 자네는 아주 잘하고 있는 걸세."

그 후부터는 좌절하는 시간조차 아끼며 더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영어 공부는 당연히 최선을 다했고, 다양한 커뮤니케이션 방법들을 통해 환자들과 공감할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다행히 시간이 지날수록 언어의 벽이 낮아지고 상대가 하는 말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언어에만 의존하지 않는 대화가 큰 신뢰감을 주고 서로의 마음을 통하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이 바로 ‘넌버벌 커뮤니케이션non-verbal communication’입니다. 치매 당사자와 관계를 맺어 나갈 때는 넌버벌 커뮤니케이션이 유창한 말보다 더 도움이 됩니다.

비언어적 교감에 대해 마음으로 절실히 깨닫게 해준 미국 생활에 늘 감사한 마음입니다.

그리고 누구 앞에서든 내 의견을 분명히 말하는 태도를 배울 수 있었던 것도 귀중한 경험이었습니다. 이러한 대화 방식을 직접 체험했던 일은 그 이후의 제 인생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두피 위에 놓인 전극과 뇌파계에 의해 뇌의 전위 변화가 시시각각 기록됐는데, 뇌의 작용을 눈으로 보니 흥분과 전율이 느껴졌습니다.

제가 서른한 살, 아내 미즈코는 스물한 살이었습니다. 아내는 무사시노 음악대학 피아노과에 재학 중인 학생이었는데 사실 처음 만난 것은 그보다 훨씬 전으로, 아내가 아직 초등학생일 때였습니다.

한동네에 살았던 우리는 두 사람 다 그리스도교 신자였기 때문에 교회의 일요학교에서 매주 인사를 나눴습니다. 어느 날 일요학교에서 신이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이야기가 화제에 올랐는데 어린 미즈코가 한참동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신과 눈을 맞출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요. 목이 아프도록 하늘을 쳐다보는 그 모습이 무척이나 사랑스러워서 귀여운 아이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때는 그 아이가 장래에 제 아내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결혼식을 올린 후, 전 먼저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고 아내는 반년쯤 뒤에 대학을 졸업하고 뒤따라 왔습니다. 아내가 미국에 도착한 날 바라보던 금문교는 정말이지 예쁘고 멋있었습니다.

아내는 야무지고 성실하며 명랑한 사람입니다. 가끔 무서울 때도 있습니다. 가계를 맡아 전권을 장악하고 있으니까요. 게다가 아내는 저의 모든 동선을 꿰뚫고 있습니다. 제가 슬쩍 찻집이나 이발소로 외출이라도 하면 어떻게 알았는지 바로 찾으러 옵니다. 이웃들이 아내에게 이런저런 정보를 알려 주는 것이겠지요.

어쨌든 제가 지금 존재하는 것은 모두 아내 덕분입니다. 저에게는 말할 수 없이 고마운 사람이지요. 만약에 아내가 먼저 저세상으로 떠난다면 하늘이 무너지는 것이나 다름없는 큰일입니다. 그것만큼은 어떻게든지 정말, 제가 먼저 가고 싶습니다.

치매에 걸리면 한 가지 일에 집중하기도 어렵고, 여러 가지 일에 동시에 주의를 기울이기도 어렵습니다. 특히 요리나 가사는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하는 고도의 작업이기 때문에 치매 상태가 되면 이 일들을 해내기가 어려워집니다. 조림요리를 하면서 생선을 굽기란 쉽지 않습니다.

기억했다가 나중에 다시 떠올릴 수 있는지를 묻는 ‘지연 재생’은 대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질문 중 하나입니다. 특히 이것은 알츠하이머형 치매에 특이하게 나타나는 징후로 봅니다.

알고 있는 채소를 가능한 한 많이 말해 보라는 질문은 언어의 유창성을 보는 질문으로 치매인 사람도 웬만하면 다섯 개까지는 너끈히 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질문은 다섯 개까지 말한 후 몇 개를 더 말할 수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매 검사를 실시할 때 반드시 주의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부탁하는’ 자세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이 높은 점수를 받을 수도 있고, 한편으로는 인지기능이 정상이어도 기력이 떨어졌을 때는 낮은 점수가 나오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테스트를 받은 두 사람의 점수가 같은 경우에도 각자 틀린 항목이 다르기 때문에 대답 내용을 면밀히 살펴봐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치매는 ‘일상생활의 장애’이므로 가족이나 간병인 등 평소에 본인을 잘 아는 사람이 치매 당사자의 생활 모습을 주의 깊게 살펴서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고백컨대, 명령하는 느낌이 강하고 일에는 굉장히 엄격해서 솔직히 저도 처음에는 무섭고 약간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의국장을 맡아 하던 때라 거리를 두기는커녕 신후쿠 교수와 가장 가까이에서 일을 해야만 했고, 특히 의국 직원들과의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하느라 마치 그림자처럼 교수의 곁에 바짝 붙어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병원에 올 때 외출복을 입고 점잖은 차림새로 옵니다. 그래서 다른 모습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집에 가 보니 병원에 온 사람과 전혀 다른 모습의 낯선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 농가에서는 치매 당사자가 외양간 옆에 있는 헛간에 갇혀서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리보전을 하고 누워 있는 게 아니라 원기가 왕성했습니다. 그런 광경을 다른 집에서 몇 번이나 더 보았습니다.

치매 당사자가 몸져누운 채 혼자 방치되어 있고 간병하는 사람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는 가정도 있었습니다. 옆에는 주먹밥이 놓여 있을 뿐이었지요. 개중에는 땀을 줄줄 흘리며 누워 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방에는 난로가 켜져 있었기에 이 더운 방에서 그대로 자다가는 탈수증에 걸릴 염려가 있다고 알려 주었지만 가족들은 감기에 걸리면 안 된다며 치매 당사자를 담요로 꼭꼭 덮어 주었습니다.

치매 당사자가 혼자서 집에 있는 가정이 있었는데, 그는 마당을 어정버정 걸어다니며 일하러 간 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곁에는 점심 도시락과 귤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지요. 또 어떤 가정에서는 제가 방문하자 보호자가 저를 붙잡고는 "선생님, 어떻게 좀 해 주세요. 보시다시피 이 지경입니다" 하며 매달린 적도 있었습니다.

이 경험이 있었기에 나중에 재택 케어나 개별 돌봄(한 사람 한 사람의 상태를 면밀히 살펴보고 맞춤 케어를 하는 일)의 중요성을 더욱 깊이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쓸모없는 사람’ 또는 ‘집안의 수치’로 여겨져 집안에서 방치되거나 다른 방에 격리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가족이 더 이상 집에서 보살필 수 없게 되면 정신과병원이나 노인병원에 의탁했습니다. 하지만 의료상의 치유는 기대할 수 없었기에 침대 위에서 손이나 허리가 묶인 채 잠을 잘 뿐이었지요. 격리와 수용과 구속, 그런 시대였습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당시는 여전히 가족이 치매에 걸려도 남들에게 말하지 못했고, 특히나 이웃에게는 절대로 털어놓지 못하는 상황이 보편적이었기 때문에 치매 당사자는 물론 가족들도 상당히 힘들었을 겁니다.

후생노동성 내에 ‘치매성 노인대책 추진본부’가 설치된 것은 1986년도였습니다.

"후생노동성이 치매에 대한 대책을 의식한 것은 1972년, 아리요시 사와코의 소설 《황홀한 사람》이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국민들은 치매가 심각한 문제임을 인식했고 그러한 의식은 관공서도 마찬가지였지요. 그 무렵 도쿄도는 미노베 료키치 도지사가 가장 활발히 일할 때였는데 노인복지대책의 내용을 충실하게 하려는 움직임이 일종의 유행처럼 번지던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치매 당사자에 대한 대책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면서도 달리 손쓸 방법이 없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치매를 잘 알지 못했던 것이지요.

1973년에 성 마리안나 의대 교수가 되고 나서 국제회의와 해외에서 개최하는 학회에 참석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일하느라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적어졌지만 그래도 가족간의 연대감을 유지하고 싶어서 아이들의 생일에는 ‘생일 축하한다!’라고 적은 카드를, 다소 늦어지는 경우가 있더라도 항공편으로 보내곤 했습니다. 그런 저에게 당시 열세 살이던 큰딸이 만화 일러스트가 그려진 편지 한 장을 주었습니다. 펼쳐 보니 ‘ 힘내 아빠! 이겨 내 아빠! 포기하지 마 아빠! 끝까지 해내는 거야 아빠! 화이팅! 아빠’ 이렇게 쓰여 있더군요. 어찌나 기쁜지 기운이 났습니다.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물론 편지글 맨 마지막에는 ‘선물 잊지 마~’라는 말도 빠지지 않았지만요.

첫 국제회의 개최는 일본 정신의학 역사에서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 뜻깊은 순간이 실현된 것은 돈도 의료기술도 아닌, 한 사람 한 사람의 흔들리지 않는 의지와 노력 덕분이었습니다.

인연과 운 그리고 결단의 중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던 경험이었습니다.

2000년 4월부터 연금보험과 의료보험에 이어 공적 사회보험제도로서 ‘개호보험제도’가 시작된 일입니다.

개호보험제도는 혼자 일상생활을 꾸려 나갈 수 없는 65세 이상 노인들에게 간병이나 재활에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해 주는 보험입니다. 40세 이상이 되면 개호보험에 자동 가입되며 보험료는 소득에 따라 차등 납부합니다.

40세~64세 국민이라도 개호보험에서 지정한 특정 질환으로 인해 간병이 필요한 경우 혜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1908년 일본정신의학의 권위자 구레 슈조가 ‘미칠 광狂’이라는 글자를 피하자는 관점에서 ‘치매’라는 용어를 제창하여 정착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치癡’라는 글자에도 ‘어리석음, 바보’라는 뜻이 들어 있고 ‘매?’에도 ‘멍하다, 넋이 나가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어 모욕적인 표현이기는 마찬가지라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일본 정부에서는 2004년 ‘치매’라는 명칭을 변경하기로 했습니다.

치매를 대신할 용어를 선정할 때는 일반인이 이해하기 쉽고 불쾌감이나 모멸감이 느껴지지 않는 용어를 찾는 데 가장 역점을 두었습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기획은 치매에 걸린 당사자가 실명으로 직접 단상에 올라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한 일이었습니다. 대단한 일이지요. 격리와 수용, 구속의 시대에서 벗어나 마침내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치매 당사자의 목소리를 전하는 데 앞장섰던 오스트레일리아의 크리스틴 브라이든도 남편 폴 브라이든과 함께 참석해 "우리에 관한 일을 우리가 없는 데서 정하지 말아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정부 고관이었던 크리스틴 씨는 1995년 46세 때 치매 진단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살아갈 의지를 놓아 버릴 정도로 절망했지만, 가족들의 도움으로 자신의 병을 받아들이고 치매 당사자들을 위한 활동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치매에 걸리더라도 사람은 존중받아야 하며 존엄성을 유지할 가치가 있다"고 호소하여 세상의 인식을 바꿨습니다.

인지기능은 뇌 표면에 있고 부모의 가르침이나 학교 교육, 사회에서 받은 교육 등 오랜 세월에 걸쳐 인풋을 집대성합니다. 이 ‘인지뇌’ 밑에 희로애락의 ‘감정뇌’가 있고, 그 아래에는 인간의 핵심이 되는 그 사람의 자신다움, 즉 인격과 개성이 결집된 뇌가 있습니다. 알츠하이머병은 가장 위에 있는 ‘인지뇌’가 기능을 잃고 잇달아 ‘감정뇌’가 파괴되어 가는 겁니다.

두 번째 책을 쓸 무렵에는 걱정과 두려움을 내려놓고 지금의 삶에 집중하는 쪽으로 생각을 바꿉니다. ‘나는 가장 나다운 나로 돌아오는 여정에 오른 거다’ 하고 생각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게도 ‘저를 지지해 주세요’라고 말하고 다녔습니다.

저는 어떤 병에 걸렸든 아픈 사람에게는 신체적인 케어만큼 정신적인 케어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가장 그 사람다운 모습, 그 사람의 존재 자체를 지지하는 사고와 행동이야말로 진정한 정신적인 케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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