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는 끝없는 노력이다. 만족 없는 욕망이다. 영화 없는 시사회, 절정 없는 섹스다. 의지는 스카치위스키 두 잔으로 충분할 때 세 번째 잔을 주문하게 만든다. 의지는 머릿속을 긁어대는 소음이다. 가끔 약해질 때가 있긴 하지만, 보통은 스카치위스키 네 잔을 마신 후에도 절대 침묵하지 않는 소음이다.

상황은 갈수록 나빠진다. 의지는 결국 자기 자신을 해친다. 쇼펜하우어는 말한다. "결국 의지는 자신을 먹어치우며 살아가야 하는데, 의지 외에는 아무것도 없고 의지는 굶주려 있기 때문이다."

절망하지 마시게. 어둠의 철학자가 말한다. 우리는 "세상을 떨쳐냄"으로써 의지라는 블랙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 번째는 금욕적인 삶을 살면서 때때로 며칠씩 굶고, 몇 시간 동안 명상을 하고, 성적 순결을 지키는 것이다. 나는 두 번째로 넘어가겠다. 두 번째 방법은 예술이다. 훨씬 낫다. 쇼펜하우어는 예술이 즐겁기만 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예술은 우리를 해방시킨다. 예술은 의지라는 끊임없는 분투와 고통으로부터의 일시적 유예를 제공한다.

이런 미적 순간에 우리는 고통을 느끼지 않지만 마찬가지로 행복도 느끼지 않는다. 행복과 슬픔 사이의 구분은 사라진다. 세상을 떨쳐내는 동시에 거짓 이분법도 떨쳐낸 것이다. 우리는 예술의 대상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쇼펜하우어는 이를 "맑은 세계의 눈"이라고 칭한다.

나는 이렇게 말한다. "쇼펜하우어?" 아니, 말하기보다는 묻는다. 마치 저 이름 자체가 형이상학적 질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자가 으스스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염세주의 철학자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안 좋아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침울한 독일인과 행복한 독일인을 구분하기란 쉽지 않다. 분명히 얼굴 근육과 눈의 움직임에 미묘한 차이가 있겠지만, 그러한 차이는 나 같은 외국인의 이해력 너머에 있다.

그의 장밋빛 얼굴을 보니 거나하게 취한 아기 천사가 떠오른다.

쇼펜하우어는 비판받는 것보다 무시당하는 것이 더 가혹한 운명임을 보여주는 살아 있는 증거였다. 거의 평생 동안 그의 책은 읽히지 않았고 그의 생각은 사랑받지 못했다. 다른 참가자 없이 덴마크 철학상에 단독 공모했을 때조차 수상에 실패했다. 그는 죽음을 겨우 몇 년 앞두고서야 약간의 인정이나마 받을 수 있었다.

어머니 요한나 쇼펜하우어는 문학적·사회적 포부가 대단했고, 어린아이를 키우는 것은 그녀에게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본인이 직접 말했듯이 곧 자신의 "새 인형을 갖고 노는 것"4에 싫증이 났고, 쇼펜하우어의 어린 시절 내내 그를 무시하다가 분노하기를 반복했다. 훗날 쇼펜하우어는 요한나가 "매우 나쁜 어머니"였다고 썼다.

쇼펜하우어의 부족한 사회성은 아버지에게 좌절감을 안겼다. 한 편지에서 그는 경멸하듯 말한다. "네가 다른 사람을 상냥하게 대하는 법을 배우면 얼마나 좋겠니."6
쇼펜하우어는 끝까지 그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그는 만나는 거의 모든 사람을 밀어냈다. 원하면 매력적인 사람처럼 굴 수 있었지만 그런 때는 드물었다.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고 잠시 괴테와 교제했을 때를 제외하면 진정한 친구도 없었다. 하지만 아트만(산스크리트어로 자아라는 뜻이다)이라는 이름의 푸들만은 사랑했다.

쇼펜하우어는 다른 동물인 고슴도치의 도움을 받아 인간관계를 설명한다. 추운 겨울날 한 무리의 고슴도치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자. 고슴도치들은 얼어 죽지 않으려고 서로 가까이 붙어 서서 옆 친구의 체온으로 몸을 덥힌다. 하지만 너무 가까이 붙으면 가시에 찔리고 만다. 쇼펜하우어는 고슴도치들이 "두 악마 사이를 오가며" 붙고 떨어지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서로를 견딜 수 있는 가장 적절한 거리"를 발견한다고 말한다.
오늘날 고슴도치의 딜레마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딜레마는 우리 인간의 딜레마이기도 하다.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타인을 필요로 하지만 타인은 우리를 해칠 수 있다. 관계는 끊임없는 궤도 수정을 요하며, 매우 노련한 조종사조차 가끔씩 가시에 찔린다.

쇼펜하우어는 모차르트를 좋아했다. 하지만 로시니를 흠모해서 이 이탈리아 작곡가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눈알을 까뒤집을 정도로 좋아했다. 쇼펜하우어는 로시니의 모든 음악을 플루트로 연주할 수 있도록 편곡했다.

쇼펜하우어가 매우 즐겁게 플루트를 연주했다는 사실은 그의 팬이었다가 비판자로 변한 프리드리히 니체가 그의 염세주의에 의문을 품게 했다. 매일 그렇게 즐거워하며, 그렇게 사랑을 담아 플루트를 연주한 사람이 어떻게 염세주의자일 수 있을까?

이 세계는 실제로 고통이자 엄청난 오류이지만, 그 고통이 일시적으로 유예될 때가 있다. 짧은 즐거움의 순간들.
예술보다 더 즐거운 것은 없다. 예술,좋은 예술은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고, 쇼펜하우어는 생각했다.

체리 한 그릇을 그린 정물화 앞에서 느껴지는 반응이 배고픔뿐이라면 그 작품을 그린 예술가는 목표를 이루지 못한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음악 외의 다른 예술은 그림자를 이야기할 뿐이라고 말한다. 음악은 본질을, 물자체를 이야기하고, 그러므로 "모든 삶과 존재의 가장 내밀한 본성을 표현"한다. 천국의 이미지, 심지어 세속화된 천국의 이미지 안에 그림과 조각상은 포함될 수도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그곳에 음악이 있으리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언젠가 쇼펜하우어는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음악은 존재할 것이라고 말했다.

음악은 다른 예술과 달리 개인적이다. 가장 좋아하는 그림은 없을 수 있지만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아마 다들 있을 것이다.

윌리엄 스타이런은 자신의 우울증을 회고한 저서 《보이는 어둠》에서 자살을 고민하다 마치 날아오르는 듯한 브람스의 음악을 들었던 일화를 들려준다. "모든 음악에, 사실상 모든 기쁨에 몇 달간 아무 반응 없이 무감각했었으나, 이 음악이 비수처럼 내 심장에 꽂혔고, 추억이 물밀듯 밀려들면서 이 집에서 있었던 모든 즐거운 일들이 떠올랐다. 온 방을 뛰어다니던 어린애들, 축제, 사랑과 일."7
음악에는 치료 효과가 있다.

음악이 들리면 즐기기는 하지만, 좋은 스카치위스키나 좋은 가방만큼 즐기지는 않는다. 나는 소리와 말을 정말 좋아하기 때문에 이처럼 내가 음악을 잘 감상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늘 이상하게 느껴진다.

NPR에서 즐겨 하는 오래된 농담이 있다.
"왜 라디오가 텔레비전보다 더 낫죠?"
"눈에 보이는 게 더 나으니까요."

입말은 살아 있고, 친밀하다. 누군가가 말하는 것을 들으면 그 사람을 알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NPR과 팟캐스트, 오디오북이 그렇게 인기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어머니가 이메일을 거부하고 매주 월요일에 꼭 전화 통화를 고집하는 것이다.

"전부 어려운 질문이네." 존이 이렇게 쓰고는 전혀 어렵지 않다는 듯 바로 대답하기 시작한다. 존은 음악에 대한 지식이 즐거움을 배가시켜준다고 말한다. "지식이 없었다면 얻지 못했을 어떤 깨달음을 줄 수도 있고, 음의 아름다움에만 사로잡혀서 음악을 심미적 경험으로만 바라보지 않도록 도와줄 수도 있어."

존은 설명을 이어간다. 음악의 종류가 다르면 듣는 방법도 달라져야 한다. 바그너는 쉽다. "바그너의 음악은 마약의 효과가 밀려드는 것과 비슷할 정도로 감각적"이다. 베토벤과 말러, 브람스는 좀 더 까다롭다. "저 사람이 내게 무엇을 전달하고자 하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해. 바그너는무언가에 관해서 말을 해. 베토벤과 말러, 브람스는 그냥 말을 하고. 그게 차이점이야."

쇼펜하우어는 딴 생각에 대해 깊이 사색했다. 우리는 실리적이고 계산적인 관점으로만 세상을 본다고, 쇼펜하우어는 말했다.

음악과는 이와 다른 관계, 덜 계산적인 관계를 맺어야 한다. 사심 없는 관점에서 음악을 경험해야 한다.

쇼펜하우어가 내게 말한다. 음악은 감정을 전달하지 않는다. 음악은 감정의 본질을, 내용 없는 그릇을 전달한다. 음악을 들을 때 우리는 구체적인 슬픔이나 구체적인 즐거움이 아닌 슬픔이라는 감정 자체와 즐거움이라는 감정 자체를 느낀다.

슬픔 자체는 고통스럽지 않다.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은무언가에 관한슬픔이다. 그래서 우리가 신파 영화를 보거나 레너드 코헨의 음악을 듣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다.

나는 슬픔을 삼키지 않은 채, 또는 슬픔에 삼켜지지 않은 채 슬픔을 경험할 수 있다. 그 씁쓸함을 음미할 수 있다.

나도 쇼펜하우어처럼 우울하지만 그렇다고 염세주의자는 아니다.

우리는 광각의 세상에서 망원 렌즈로 찍은 사진 같은 삶을 살아간다. 전체적인 그림은 전혀 볼 수 없다.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건강한 반응은, 중국의 농부처럼 ‘아마도 철학’을 취하는 것이다.

영국 정치인 토머스 매콜리Thomas Macaulay는 모든 인도와 아라비아 문헌의 가치는 "괜찮은 유럽 도서관에 있는 선반 하나의 가치 정도"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쇼펜하우어는 명상을 하지 않았다. 세속적 즐거움을 단념하지도 않았다. 고급 요리와 값비싼 옷을 즐겼고 평생 왕성한 성생활을 하며 "생식기관은 세상의 진정한 중심"이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서구 철학이라는 천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동양의 실이 엮여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쇼펜하우어를 연구한 학자인 브라이언 매기는 "저서를 읽을 때 쇼펜하우어처럼 손에 닿을 듯, 목소리가 귀에 들릴 듯 가까이 느껴지는"11 철학자는 없다고 말한다.

우리 모두는 내면에 약간의 쇼펜하우어가 있다. 우리 모두가 상처 입은 사람들이다. 상처의 크기와 형태가 다를 뿐이다.

쇼펜하우어는 쉽게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지만(한 전기 작가는 그를 "고약한 작품"12이라 칭한다) 쉽게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이다. 예술과 음악의 애호가였던 쇼펜하우어는 가장 심오하고도 아름다운 미학 이론을 전개했고 여러 예술가와 작가에게 수 세대에 걸쳐 영향을 주었다. 톨스토이와 바그너는 자기 서재에 쇼펜하우어의 초상화를 걸어두었다. 아르헨티나 작가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쇼펜하우어를 원전으로 읽으려고 독일어를 배웠다. 여러 코미디언도 쇼펜하우어를 사랑한다. 이로써 유머 뒤에는 암울함이 도사린다는 의혹이 사실임이 드러난 셈이다.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면 이 세계도 알 수 없다. 이 사실은 내게 믿을 수 없을 만큼 명백하다. 왜 그토록 많은 철학자가, 다른 방면으로는 똑똑한 작자들이, 이 사실을 놓치는 걸까? 내 생각에 그 이유 중 하나는 외부를 살피는 것이 더 쉽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환한 불빛 아래서 자기 열쇠를 찾는 술주정뱅이나 마찬가지다.

쇼펜하우어는 달랐다. 그는 가장 어두운 곳을 살폈다. 쇼펜하우어의 비관적 세계관이나 암울한 형이상학에 동의하지 않을 순 있지만, 그의 철학이 어중간하다고 비판할 순 없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 영웅적인 철학자다.

그는 소음에 대한 내성이 그 사람의 지능과 정확히 반비례한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어느 집 마당에서 아무도 조치를 취하지 않은 채로 개가 몇 시간이나 짖는 소리를 들으면 그 집에 사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된다."

Journal>에 실린 한 연구에 따르면 소음 공해는 "불안, 스트레스, 신경과민, 구역질, 두통, 정서 불안, 호전성, 성기능 장애, 기분 변화, 인간관계에서의 갈등 증가, 노이로제, 히스테리, 정신증"으로 이어질 수 있다.14 또 다른 연구에서는 이륙하고 착륙하는 비행기 소음이,심지어 푹 잠들어 있을 때에도, 혈압을 치솟게 하고 심장을 뛰게 하며 스트레스 호르몬을 분비시킨다는 사실이 발견됐다.

"가장 최근에 쓰인 것이 늘 더 정확하다는 생각, 나중에 쓰인 것이 전에 쓰인 것보다 더 개선된 것이라는 생각, 모든 변화는 곧 진보라는 생각보다 더 큰 오산은 없다."

쇼펜하우어가 말한 배고픈 독자들처럼 우리 역시 새로운 것을 좋은 것으로,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쇼펜하우어는 사람들이 자기 생각과 함께 머무르지 않고 너무 자주 책 앞으로 달려간다고 말했다. "책은 자기 생각이 고갈되었을 때만 읽어야 한다."

우리는 데이터를 정보로 착각하고, 정보를 지식으로, 지식을 지혜로 착각한다.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경향을 염려했다. 그가 눈 돌리는 곳마다 사람들은 정보를 통찰로 착각하며 앞 다투어 달려들었다.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썼다. "정보는 그저 통찰로 향하는수단일 뿐이며 정보 그 자체에는 거의 아무 가치도 없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나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자 한다. 이런 과도한 양의 데이터(사실상 소음)는 가치가 없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부정적이며, 통찰의 가능성을 없앤다. 소음에 정신이 팔린 사람은 음악을 듣지 못한다.

내 내면의 목소리 역시 뒤죽박죽 산만하다는 것을 깨닫고 깜짝 놀란다. 쇼펜하우어가 옳았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으로 머리를 가득 채우면 그들의 생각이 내 생각을 밀어낸다. 내가 초대하지도 않은 그 목소리들을 쫓아내겠다고 다짐한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의지처럼, 인터넷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방법은 두 가지다. 금욕적인 삶을 살거나, 미학적인 삶을 살거나. 명상을 하거나, 음악을 듣거나.
나는 음악을 선택한다. 물론 로시니의 음악이다.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고 스카치위스키 한 잔을 따른다. 싱글몰트 위스키를 마시며 두 눈을 감고 음악을 듣는다. 멜로디에 귀를 기울인다. 달라이라마가 뉴스를 듣듯이, 사심은 없지만 무관심하지는 않게. 주의는 기울이되 반응은 없이. 마음을 달래주는 따뜻한 목욕물처럼 음악이 나를 적시게 둔다. 말 없는 소리. 내용 없는 감정. 소음 없는 신호.
나는 깨닫는다. 이 세상에서의 일시적 유예가 아닌, 더욱 풍성한 다른 세상으로의 침잠, 바로 이것이 쇼펜하우어가 음악 안에서 본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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