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나 여성 작가가 현실을 풍자한답시고 엄마를 머리 빈 속물로 설정해 놓고 마음껏 조롱하는 작품을 읽으면 실망과 분노를 넘어 깊은 슬픔을 느낀다. 우린 왜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는 걸까.

자식에게 엄마나 아빠는 결국 부정하고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 마땅히 죽여 없애고 승리를 거두어야만 한다. 그것이 부친 살해 신화에 담긴 성장의 본질이다.

모성과의 대결을 다루고 싶다면, 좀 더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고작 학습지나 학원으로 모성을 이야기할 작정인가?

사실 가족이란 아무런 계획도 합의도 고민도 없이, 우연하게 만난 조합이다. 말썽이 없을 수가 없다.

가부장의 요구는 뭔가 그럴싸해 보이는, 막 훌륭하고 막 정의롭고 막 고진감래할 것만 같은 어떤 일이다. 그런데 생각이 짧은 여자와 아이는 어리석게도 눈앞의 이익이나 제 한 몸만 챙기다가, 지혜로운 가부장의 인도로 깨달음에 이르러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는 것이다. 앗, 종교인가?
정말로 종교인 까닭인지, 동화 속에서는 부부 사이에 남편은 반말, 아내는 높임말을 쓰고는 한다.

심지어 일본어는 존대 표현이 확실한 언어인데도, 원서에서 부부가 동등한 말법을 쓰는데 굳이 한국어로는 아내가 존대하도록 번역해 놓은 경우도 있다.

설사 그 아버지의 판단이 옳다고 해도 다른 사람에게 가치관을 강요하는 것은 과연 정당한 행동일까? (난 반댈세.)

햇빛을 향해 자라나는 덩굴처럼, 자식은 안간힘을 다해 부모의 그늘과 반대 방향으로 자란다. 그래야 억세고 푸른 줄기로 자라날 것이다. 부모의 마음은 쓸쓸하지만, 이는 축하할 일이다. 아이는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다.

아이는 부모에게 맞서는 게 자연스럽고 옳고 건강하다. (아아, 괴롭다!) 동화는 그런 아이의 내면을 살피고 발견하고 드러내고, 나아가 응원해야 한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라고 박수를 쳐야 한다. 그것이 어른의 일이요, 동화의 일이다.

『Story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의 저자 로버트 맥키는, 인물의 진정한 성격은 선택의 순간에 드러난다고 말한 바 있다. 인물이 했던 말, 일상적인 행동은 진정한 성격을 드러내지 못한다. 극적인 순간에 내리는 선택만이 인물의 진정한 면모를 드러낸다는 얘기다.

엄마를 한심한 속물로 만들어 버린다.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와 함께 이야기도…… 망한다.

당신의 소중한 이야기에 함께할 사람들을 존중하기 바란다.

세상 어디에도 주인공을 위한 도구가 되어도 좋은 사람은 없다.

소설책 열 권짜리 사연은 제아무리 길다 해도 이야기의 프롤로그다.

절정에 이르면 운명을 건 선택을 해야 한다. 빨간선을 자를까, 파란선을 자를까? 야구부를 그만둘 것인가, 계속할 것인가?

심리적 개연성이 확보되었기 때문이다.

주인공을 당장 움직이게 하는 폭탄이어야 하고, 이야기의 크기에 맞는 타이머여야 한다.

동구는 야구를 계속할 수 있을 것인가?
보찬 씨의 녹색 장부는 어디로 갔을까?
라면 한 줄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수 있을 것인가?
이렇게 이야기를 일관되게 끌고 갈 극적 질문에 따라 주인공을 계속 궁지에 몰아야 한다. 주인공의 선택지를 조금씩 좁혀 나가야 한다.

어린이들은 본래 부모에게 불만이 많은 법이다.

극적 질문이 인물의 운명을 완전히 결정짓는 것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우리네 인생에 어디 마침표가 있던가.

「검은 고양이」의 작가 에드거 앨런 포는 단편소설에 대해 다섯 가지 원칙을 제시한 바 있다. 짧은 분량, 압축성, 현실성, 인상적인 결말 그리고 단일성이다.

단일성이란 시작부터 끝까지 사건이나 행위가 일관성 있게 진행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사연을 구구절절 늘어놓는다고 이야기가 되는 건 아니다. 욕망과 걸림돌의 갈등이 클수록 극적인 이야기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이야기의 기초 공사, 노둣돌이다. 이야기는 그로부터 생겨난 구체적인 사건이다. 갈등이 시작되고 고조되고 마침내 도발적인 사건으로 인해 갈등은 형체를 드러낸다.

당신은 누구의 이야기를 하려는가? 그 인물은 무엇을 욕망하고 무엇에 좌절하는가? 그러한 갈등을 밖으로 터트리는 폭탄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이제 그 이야기를 어떻게 들려줄 계획인가?

하고 싶은 하나의 이야기라 하더라도, 관련하여 일어난 일 모두를 말할 필요는 없다.

연애담의 가장 큰 특징은 당사자만 재미있다는 사실.

사과나무까지 가는 도중에 겪는 모든 일을 다 끄집어내면 안 된다. 세 친구의 우정을 훼방하는 요소들만 딱딱 집어내면 된다.

스토리가 ‘일어난 일’이라면, 플롯은 ‘일어난 일을 작가가 들려주는 방식’이다. 플롯은 단순한 이야기를 서사로 만들어 준다.

월급도 퇴직금도 사대보험 지원도 없는 작가가 유일하게 가진 건 저작권이다. 내키는 대로 하셔도 된다는 뜻. 물론, 그 결과도 온전히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뜻.

이렇게 플롯을 설정하고 시작한다는 건,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찍고 출발하는 것과 같다.

플롯이 전혀 없는 작품은 존재하지 않는다. 플롯이 두드러진 작품과 그렇지 않은 작품 또는 독특한 플롯과 전형적인 플롯이 있을 따름이다.

각각의 질문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가 되어 줄 사건들(만)을 일정한 원칙에 따라 배열하는 거다.

관계없는 장면은 과감히 생략하고, 의미심장한 장면은 강조한다.

고전을 재구성하는 기쁨이자 의미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플롯에 대한 이해다. 지금 하는 이야기가 어떤 플롯을 가졌는지, 즉 어떤 원칙으로 사건을 엮을 것인지 확고하게 정하고 일관되게 밀고 나가야 한다.
그런 작전도 없이 무턱대고 떠오르는 대로 이야기를 쓴다면…… 처음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스텝이 엉키면 뭐다? 몸부림!

많은 사람이 조상을 탓한다. (당연하다. 여태 차린 제삿밥이 얼만데.) 나는 아무래도 재능이 없는 게 아닐까? (네, 맞습니다. 아마도 그럴 가능성이 높아요.)

이야기의 방향이 뚜렷한데도 달려 나가지 못하는 이유는 앞이 깜깜한 까닭이다.

내가 뭘 찾는지도 모르는 채 현장에 가서 경기와 훈련을 지켜보고, 야구하는 아이를 둔 부모들의 블로그나 온라인 커뮤니티를 뒤지고, 야구를 다룬 온갖 책과 영화와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조금씩 그 세계의 일상에 대해 알아 갔다.

나는 서화영의 집에 배롱나무를 심고 싶었다. 내 눈에는 가장 요염한 나무인 데다, 철원에 흔치 않은 나무이기 때문이다. 확인해 보니 철원은 배롱나무의 북방한계선이었다.

자료 조사에 품을 들이는 만큼 구도가 뚜렷해지고 건물이 탄탄해졌다.

알아야 쓸 수 있었다.

사람마다 문장력은 천차만별이다. 누구도 최고의 문장을 쓸 수 있다고 자신할 순 없다. 하지만 최선을 쓸 수는 있다.

자기가 만든 인물의 나이조차 정확히 모르는 작가들도 많다.

대체 당신의 주인공이 사는 그곳은 어디란 말인가? 거기가 어딘지도 모르면서, 거기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는가? 거기서 일생을 보낸 아이에 대해 대체 뭘 안단 말인가? 그런 것도 모르면서 그 아이에 대해 대체 뭘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원고를 보면 놀라다 못해 감탄하게 된다. 패기가 대단하시네요.

왜 이혼했나요? 성격 차이? 왜 가난한가요? 무능력? 이래서는 도무지 이야기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나아간다 해도 빤한 장면을 그릴 수밖에 없다. 왜? 아는 게 없으니까.

그 사람들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 행간에서 실감이 뚝뚝 묻어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어설프게 이혼은 나쁘다는 훈계를 하려고 아이를 앞세우고 있는 건 아닐까? 결정적으로 이혼이라는 어른들 문제의 책임을 왜 아이에게 떠넘기는가?

아이들은 문제를 자기 탓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내가 공부를 못해서 엄마 아빠가 싸우나? 같은.

앞서 예술은 주관적 진실이라 말한 바 있다. 객관적 사실을 전하는 게 아니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을 전하지 않을 뿐, 사실이 필요 없는 건 아니다.

사실 속에서 진실이 힘을 얻는다. 사실이 진실을 만들어 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걸림돌은 인물의 욕망과 뚜렷하게 대립할수록 좋다. 그래야 갈등의 실체가 명확해지고 사건도 뚜렷한 궤적으로 전개된다. 이야기가 흥미진진해진다.

주인공의 욕망은 내포독자의 공감을 사는 것이어야 한다. 납득할 만한 내적 갈등 없이, 온전히 나쁘기만 한 욕망은 곤란하다.

『천사를 미워해도 되나요?』의 아이들 역시 별로 착하지 않다. 작가 최나미는 ‘작가의 말’에서 대놓고 말한다. "별로 착하지 않은 아이들을 또다시 세상으로 내보냅니다."라고. 남의 차를 몰래 망가뜨리고, 친구를 은근히 깔보고, 착한 친구를 미워하고,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하는 아이들. 그런데도 어쩐지 그 아이들에게 끌린다. 조용히 응원하게 된다. 그 아이들의 잘못은 나쁘기보다…… 못났다. 한심한 구석이 많다. 그래서 내가 아는 누구 같고, 바로 나 자신 같기도 하다.

못난 주인공은 괜찮다. 자신의 못난 부분을 솔직히 드러내는 건 친구를 사귀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다들 속으로 자신을 좀 못났다 여기지 않는가. 스스로가 한심하기도 하고 딱하기도 하고, 스스로를 챙겨 주어야겠다 싶기도 하고. 이렇게 독자가 공감할 만한 ‘못난 구석’이 있다는 건 주인공에게 좋은 일이다.

못난 주인공이 모처럼 품은 욕망이 걸림돌에 가로막힐 때, 어쩐지 응원해 주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만약 그 못난 모습이, 그 욕망이 나와 닮았다면 더욱. 그 걸림돌이 나를 힘들게 하던 바로 그것과 닮았다면 더더욱.

문제적 개인이란 문제가 많은 사람, 문제가 심각한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다. 주인공을 문제투성이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불행의 구렁텅이에 빠트려서는 안 된다. 부모의 이혼이면 충분한 고민거리인데, 양육자는 무책임하고 성격이 나쁘며 집안은 가난하고 학교에서는 외톨이에 공부도 못하고 가까운 친구에게 배신당하고 반지하에 살며 옷에서 냄새까지 날…… 필요는 없다. 심지어 엄마 아빠 모두 도망치고 폐지를 줍다 허리를 다친 할머니나 할아버지랑 단둘이 살기도 한다. 아아! 이렇게나 박복하고 기구할 필요는 없다. 정말이지 이래서는 안 된다.

네로와 파트라슈의 죽음에 그토록 눈물을 쏟게 되는 건, 네로가 가지가지로 불행한 탓이 아니다. 할아버지는 폭언과 폭행을 일삼았고, 아로아는 네로를 왕따시켰으며, 마을 사람들은 마주치기만 하면 네로에게 천박한 폭언을 일삼았다면, 그랬다면 『플랜더스의 개』가 더 슬펐을까?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랬다면 우리가 그 이야기를 이토록 아름답게 간직하지 못했을 것이다.

무작정 팔자 사나운 인물이어서는 안 된다.

독자로 하여금 인물을 동정하게 만들지 말라. 어른이나 어린이나, 사람의 마음이 그렇지 않은가. 동정의 대상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동정은 끝끝내 동정일 따름이다. 내 이야기의 주인공을 한낱 동정의 대상으로 만들지 않기 바란다.

작가는 인물의 태도를 스케치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인물의 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발견하고 해석하고 그려 내야 한다.

그때껏 상대를 꺼려하고 무시하다가, 뒤늦게 혼자 반성하고 혼자 친구를 자처한다. 그런 관계가 과연 친구일까?

장애아동의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 관계에서 의사 결정권을 가진 인물로 설정되지 않은 것이다. 애초에 도움을 받고 싶었는지 아닌지, 그간의 일에도 불구하고 너그러이 용서할 의향이 있는지 없는지, 그동안의 일을 학교 폭력 위원회에 신고하고 싶은 건 아닌지 등 장애아동의 의사를 무시한 채 철저하게 비장애아동의 입장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장애아동은 비장애아동의 각성과 성장을 위한 도구로 보인다. 철저히 대상화되어 있다.

누군가 나를 불러서 마주 앉았더니 상대가 "보아하니 너 참 불쌍하니까 내가 친구가 되어 줄게." 한다면?
어째서 장애아동이 그런 동정에 감격할 거라 생각하는가? 어째서 장애아동은 사람에 대한 취향도 없이 친구라면 그저 좋아서 넙죽 손잡을 거라 생각하는가? 어째서 장애아동은 용서와 복수 사이에서 갈등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가?

유난히 의지 있고 능력 있는 장애아동을 칭찬하는 것은 문학의 일이 아니다. 관공서라면 또 모를까. 문학은, 그렇지 않은 다수의 못난이들에게 괜찮다고 말해 주는 일이다. 남보다 소심해도, 남과 조금 달라도 괜찮다고.

친구가 없는 아이는 다른 아이들이 받아 주면 감지덕지해야 하는가? 그 아이가 이미 다른 친구들을 싫어하고 있을 수도 있지 않는가? 최소한 그런 의문조차 없이 왕따를 당한 아이를 대상화하고 있다. 왕따를 주도하지는 않았으나, 사실상 가담했던 보통의(정확히 말하자면 다수의) 인물이 막판에 피해자에게 도움을 주었다는 이유로 자기 합리화, 자기만족에 빠진다. 비겁하고 야비하다. 이런 설정은 어린이 인물이나 어린이 독자보다, 그런 이야기를 쓰거나 아이들에게 권하는 어른들의 욕망이 아닐까? 불의에 침묵한 자신을 변명하고 용서하기 위해 피해자를 도구로 삼는 것이다.

실수와 잘못을 반복하는 게 인생이다. 그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그걸 잘못이라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때야말로 진짜 잘못된 일들이 생겨날 수 있다.

약자를 마냥 순진한 존재로, 달리 말하면 아무 욕망 없는 존재로 그려서는 안 된다. 그건 약자를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태도다. 동등한 존재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잇속도 따질 줄 모르고, 다른 사람의 악의를 읽을 줄도 모르고, 어른인데 어른의 마음은 모르고 아이의 마음만 알고, 아무런 욕망도 없고. 세상에 그런 사람은 없다. 강아지도 그러지는 않는다. 한국말을 못 해도 마음속 계산기는 똑똑할 수 있고, 지적인 능력이 떨어져도 일상에서는 약삭빠를 수 있다. 장애가 있어도 나서기 좋아할 수 있고, 가난해도 낭만과 사치를 욕망할 수 있다.

심지어 약자가 얼마나 순수한지 혹은 어리숙한지를 우스꽝스럽게 그린 작품들도 있는데, 대단한 무지요 오만이다.

강자가 약자를 우스꽝스럽게 그린다면? 그건 풍자가 아니라 조롱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누군가의 아픔에 대해 함부로 아는 척해서는 안 된다고 단호하게 얘기한다.

능력 없고 민폐를 끼치지만 묘하게 사랑스러운 인물(은 없습니다).

아이를 버리고 떠난 엄마는 나쁘지 않냐고?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말밖에 못 한다면 문학이 아닌 종교 활동이 적성에 맞겠다는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다.

자기 연민에 빠져 집 나간 엄마를 원망하고 그리워하는 동화는 이제 그만. 소설도, 시도, 동시도. 아니, 사람도.

화장이 짙고(접니다) 명품백과 보석으로 치장한(그러고 싶긴 합니다) 여자들은 주로 강아지를 버린다.

유기 동물과 노인에 대한 상투적 이미지를 끌어다 상투적인 이야기를 쓴 거다. 이미 그런 동화가 널렸다는 걸 몰랐을까? 알았다면 뻔뻔한 거고, 몰랐다면 무능력하고 게으른 거다.

최근에 나온 작품은 오히려 시대를 역행하며 엄마들을 싸잡아 비난하고 공격하고 조롱한다. 이쯤 되면 조리돌림에 가깝지 않나 싶다.

많은 동화에서 엄마들은 전업주부이고 속물이다. 돈을 밝히고 보석이나 명품을 좋아하고 이웃집과 생활을 비교하는 게 엄마들의 유일한 가치관이다. 그런 저열한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아이를 괴롭히고 남편을 들볶는다. 자기 주관도, 의지도 없다. 그에 비해 아빠들은 직장에 다니며 아이에게 너그럽고 자기 주관으로 판단하는데, 극성맞은 아내를 이겨 먹을 수가 없어 아이 문제에서 한발 물러나 있다. ‘여보, 거 벌써부터 성적에 그렇게 연연할 필요 있겠소?’ ‘어머, 여보! 모르는 소리 말아요! 옆집 애는 학원을 몇 개나 다니는 줄 알아요? 그런데 우리 애는…….’ 부끄러워 차마 더 쓸 수가 없다. 설마 이렇게까지 쓸까? 과연 그 정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치매에 걸리자 건망증이 심해져 제가 한 일이 확실히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주위 사람들에게 제 상태를(너무 빨리) 알리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앞에 나설 때는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마음속으로 ‘나는 괜찮아, 아무렇지 않아’ 하고 되뇌면서 스스로 정말 그 말을 믿어 버렸습니다. 그러자 나 자신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나름 괜찮은 행동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거짓말이긴 하지만 남에게 해를 입히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에게는 의지를 다지게 해 주니, 그러한 노력을 한다는 건 오히려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바로 자동차 운전입니다. 운전만은 절대로 하지 않아야 합니다.

처음에 타던 차종은 도요타 마크II였고 그 다음은 벤츠였습니다. 평소 사치를 하지 않는 제가 ‘이것만은’ 하는 심정으로 원하는 자동차를 말했더니 아내도 그때만큼은 두말 않고 찬성해 주었습니다.

지금은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은 걸어가는데 자꾸 넘어지는 일이 많아져서 가급적 택시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2017년 3월에 시행된 개정 도로교통법에서는 75세 이상인 자가 면허를 갱신할 때는 인지기능 검사를 받아 ‘치매 우려’가 있다고 판정되면 의무적으로 의사의 진단을 받아야 합니다. 그전까지는 치매 우려가 있다고 판정되어도 위반 사실이나 사고 이력이 없으면 그대로 운전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생각만 해도 무서운 일이었지요. 그러나 지금은 검사도 의무화되었고, 의사가 치매라고 진단을 내리면 운전면허는 자동 취소 또는 정지됩니다.

경찰청에 따르면, 2018년 한 해 동안 인지기능 검사를 받은 75세 이상의 고령 운전자 216만 5349명 가운데 2.5%에 해당하는 5만 4786명이 ‘치매 우려’ 판정을 받았다고 합니다. ‘인지기능 저하 우려’인 경우를 합하면 약 27%가 인지기능의 쇠퇴로 밝혀졌습니다.

저처럼 고령 운전자에 의한 사고가 자주 발생한다는 사실을 인식해 스스로 운전면허증을 반납하는 사람도 증가하고 있습니다. 다만, 버스나 전철 등의 공공 교통기관이 적은 지역에서는 운전을 하지 않고는 장 볼 때나 통원 치료를 다닐 때 등 일상생활에 지장이 생길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자동차를 운전하지 않고도 생활하기에 불편하지 않은 지역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시급합니다.

어릴 때부터 치매에 대해 올바른 지식을 알려 주고 이해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는 일은 중요합니다.

《할아버지가 나를 못 알아봐요Grandpa doesn’t know it’s me》라는 오래된 책이었는데, 일본에서는 《잊지 않을게요, 할아버지》라는 제목으로 1990년에 출간되었습니다.

‘가족과의 따뜻한 교류야말로 치매 노인에게 반드시 필요한 영양분입니다’라는 취지의 서문을 쓰기도 했습니다.

옛날에 우리 가족이 살던 집 근처에 아내의 부모님이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 아내와 저 그리고 둘째 딸이 식사를 하러 갔는데 알츠하이머형 치매에 걸린 장인어른이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여러분은 누구시지요? 누군지 알 수가 없어서 곤혹스럽습니다."
너무 불안해하는 그 모습에 ‘이렇게까지 증상이 심해진 건가?’ 하고 아내와 저는 충격을 받아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치매에 대해 연구하던 저였지만, 당장 가족의 그런 모습을 보니 순간 머리가 하얘졌습니다. 어떻게 할까,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당황해서 답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뜻밖에도 딸아이가 외할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할아버지, 우리를 못 알아보시는 것 같은데 우리가 할아버지를 잘 알고 있으니까 괜찮아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장인어른은 손녀딸의 말을 듣고 무척 안심하시는 듯했습니다.

이럴 때 "왜 못 알아보세요?", "대체 왜 그러시는 거예요? 정신 차리세요" 같은 말을 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상대는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지고 불안한 마음만 커질 뿐입니다.

게다가 치매에 걸리면 주변 사람들은 돌연 지금까지와는 다른 사람을 대하듯이 나무라거나 아이 취급을 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당사자는 자신이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는 예나 지금이나 연속되어 있습니다.

실수를 저지르거나 잘못하는 일은 늘어나겠지만, 치매가 아닌 사람들도 실수는 늘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치매에 걸린 사람을 무조건 이상행동을 하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나무라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지역 전체가 잘 살펴봐 주고 도움이 필요할 때는 손을 내밀어 주는 것. 서로를 소중히 여기고 따뜻한 마음으로 인연을 쌓으면서 안정감을 나누는 것이 바로 지역 케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말하고 싶습니다.

수요회는 대략 13년 동안 운영하다 그 막을 내렸습니다. 그즈음에는 행정 조치도 제법 시행되어 저로서는 어느 정도 제 역할을 끝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악전고투하면서도 데이케어를 시작했던 덕분에 치매 당사자와 가족들의 고민과 괴로움, 슬픔 그리고 희망을 함께 나눌 수 있었습니다. 진찰실 안에서만 일할 때는 전혀 알 수 없었던 깨달음이었고 그때로부터 정말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저는 주치의로서 그를 마주했지만 당시는 치매에 관한 약도 없었던 때라 진료를 하는 내내 의사로서 부끄럽고 깊은 무력감이 덮쳐왔습니다. 결국 그분은 교회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갔고, 그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 지역의 전문의에게 소견서를 써 주는 정도밖에 없었습니다.

"내게는 멜로디가 없다. 화음이 없다."
"그 아름다운 마음의 울림은 이제 영원히 느낄 수 없는 것인가."
"여러 멜로디가 뒤섞여 미칠 것만 같다."

그의 메모에는 비통한 울부짖음과 고통스러운 마음의 신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그 기록을 읽고 저는 말을 잃었습니다. 치매 당사자의 마음을 내가 정말 이해했던 걸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치매는 낫지 않습니다. 그래서 의사들 가운데서도 치매를 전공으로 선택하면 상당히 별난 사람으로 취급받습니다.

의사란 환자를 낫게 해야만 의미와 가치가 빛나는 세계입니다. 대부분의 의사는 노년의학과 치매 의료를 외면했습니다.

의사는 진단만 내리면 되는 게 아닙니다. 가능하면 치료 수단을 마련해서 "함께 해봅시다" 하고 환자에게 말할 수 있어야 진정한 진료라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이 의사로서의 본분을 다하는 일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뇌내에는 아세틸콜린acetylcholine이라는 각성 작용과 활성화 작용을 하는 중요한 신경전달물질이 있습니다. 이 아세틸콜린을 만드는 세포가 알츠하이머형 치매의 뇌내에서는 감소합니다.

아세틸콜린 분해를 억제함으로써 아세틸콜린 감소를 막는 약제가 바로 도네페질염산염입니다. 도네페질염산염이 나온 뒤에 같은 기능을 가진 갈란타민이나 리바스티그민이 개발되었습니다. 이들 세 가지 치료제의 부작용으로는 위장 장애를 들 수 있습니다.

리바스티그민은 패치형 치료제이므로 부착한 부위의 피부 관리에도 주의해야 합니다. 또한 뇌내에는 신경세포를 흥분시키는 글루타민산glutamic acid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이 있는데 신경세포가 계속 흥분하면 신경세포가 죽기도 합니다. 글루타민산의 작용을 억제하고 신경세포가 흥분사하는 것을 막아 진행을 늦추는 약제가 바로 메만틴염산염입니다. 주된 부작용으로는 현기증을 들 수 있습니다.

저는 뇌의 신경세포가 지칠 대로 지칠 때까지 약을 쓰며 파손되는 것을 늦추기보다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편이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노화에 수반되는 치매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자신답게 살아가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혈관성 치매를 제외하고, 알츠하이머형 치매를 비롯한 치매의 대부분은 ‘아밀로이드 베타amyloid-β’나 ‘타우Tau’라고 불리는 특정 단백질이 뇌내에 비정상적으로 축적되어 신경세포가 사멸함으로써 병의 증상이 나타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따라서 이 특정 단백질이 뇌에 축적되지 않도록 하는 약제가 개발되었는데 그중에는 가능성이 보이는 약도 있긴 했지만 효과가 확실히 증명되지 않아 현재는 개발이 잇달아 중지되고 있습니다.

알츠하이머형 치매 증상이 나타난 시점에서는 이미 단백질의 축적으로 인해 뇌의 손상이 진행된 상태이므로, 수많은 신경세포가 사멸한 후에 원인 물질을 제어하려 해도 소용없다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따라서 증상이 나타나기 전에 약을 투여해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가 관건이 되고 있습니다.

톰 킷우드는 치매가 뇌에 생기는 두려운 병이라고 규정한 질환 중심의 견해를 ‘올드 컬처’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치매 당사자의 인격을 우선으로 여기고 일상생활을 유지할 수 있게 도움을 주면서 질 높은 케어를 바탕으로 치매를 새롭게 인식하는 견해를 ‘뉴 컬처’라고 불렀습니다. 또한 그는 의학 모델에 근거하는 기존의 사고관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가 쓴 책 《치매의 재인식》의 부제에도 ‘사람이 먼저다The person comes first’라는 그의 뜻이 적혀 있습니다.

톰 킷우드는 연구에서 치매 당사자를 세심히 관찰해 좋은 상태로 이끌어 주는 질 높은 케어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환자의 상태를 오히려 나빠지게 하고 당사자의 존엄성을 해치는 행위로 아이처럼 취급하거나 속이는 일, 또는 할 줄 아는 일인데도 맡기지 않고 무시하거나 다급하게 재촉하는 일들을 대표적으로 꼽았습니다.

우리는 질병이나 장애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사람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물론 적절한 진단과 치료가 중요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지요. 하지만 너무 질환 중심으로만 환자를 대하다 보면 ‘사람을 진찰한다’는 근본에서 멀어지고 맙니다. ‘올드 컬처’의 폐해를 막고 치매 의료에 ‘환자 중심’의 시점을 확고하게 뿌리내리려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 의사로서의 제 인생은 그러한 고민에 해답을 찾아나간 시행착오의 연속이었습니다.
의료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은 ‘사람이 우선이다’라는 생각을 마음에 되새겨 겸허한 자세로 진료에 임해야 할 것입니다.

학생들에게 매우 엄격했기 때문에 제가 복도를 지나갈 때면 "하세가와가 나타났다!" 하고 학생들은 서로 눈짓으로 알려 주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늘 호통을 치거나 꾸짖기만 하는 건 아니었습니다. 잘한 점이 있으면 진심으로 칭찬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 마리안나 의대는 틀림없는 저의 전쟁터였습니다. 그곳에서 저도 단련되고 실력을 쌓아 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성 마리안나 의대에 가면 그때의 일이 아련히 떠오릅니다. 대학교 건물 안에 앉아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멍하니 있을 정도입니다.

"하세가와 선생님은 당신이 말씀하시듯이 의사들 앞에서는 엄하고 무서운 존재였지만 저희 간호사나 환자들에게는 정말로 다정다감한 분이었어요. 언제나 저희의 의견을 존중해 주셨지요.

외래에서 도무지 약을 먹으려 들지 않는 환자가 있었어요. 가족들이 어쩔 줄을 몰라 하자 하세가와 선생님이 ‘식사를 하고 나면 꼭 약을 드세요. 하세가와입니다’ 하고 테이프에 녹음해서 가족에게 전달했습니다. 나중에 가족들이 하는 말이 식사를 마친 후 환자에게 그 테이프를 들려주면 고분고분 약을 먹었다고 해요. 하세가와 선생님은 환자는 물론이고 가족에게도 매우 자상하고 정성껏 대했기 때문에 모두에게 두터운 신뢰를 얻었습니다."

가장 좋아하는 음악은 베토벤의 피아노소나타 <비창>의 제2악장입니다. 아내가 피아노과 출신이어서 때때로 이 곡을 피아노로 쳐 줍니다. 무척 아름다운 곡이지요. 제가 세상을 떠날 때는 꼭 이 곡을 연주해 달라고 아내에게 부탁해 두었습니다.

치매가 진행되어도 기쁨이나 슬픔 등 희로애락의 감정은 끝까지 남아 있다고들 말합니다. 저도 치매에 걸려 실제로 겪어 보니 정말 그렇더군요. 그래서 설령 증상이 더 심해진다 해도 가능한 한 아름다운 것을 보고 듣고 느끼면서 지내고 싶습니다.

저는 책도 좋아합니다.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은 학창시절부터 좋아해서 여러 권을 소장하고 틈날 때마다 몇 번씩 다시 읽고 있습니다. 그의 인간 묘사는 정말이지 대단합니다.

책을 읽고 나면 전용 독서노트에 저자와 책 제목을 기록하고 저의 감상을 함께 적어 둡니다. 이 습관도 오랜 세월 동안 계속해 왔는데 일력을 떼는 일처럼 최근 반년간은 줄어들었습니다.
저의 서재는 책과 자료로 가득 차 있어 발 들여놓을 틈이 없는 상태입니다. 만약 지진이라도 일어난다면 근방에서 가장 위험한 구역일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가족들은 볼 때마다 정리 좀 하라고 성화를 해댑니다. 하지만 뭐라고 하든 이곳은 제가 오랫동안 싸워 온 ‘전쟁터’이므로 그리 쉽게 바꿀 수는 없습니다. 조용히 생각에 잠긴다거나 무언가 글을 쓸 때는 뒤죽박죽인 이곳이 가장 편하거든요.

"독서가인 하세가와 씨의 자택 서재에는 책이 빽빽이 들어차 있다. 정신과에 관련된 전문서적이 단연 많지만 소설, 미스터리 등 다양한 분야의 책도 있다. 오랜 세월 동안 독서노트를 적고 있으며 최근의 독서노트 표지에는 ‘독서를 최고의 친구로 삼자’라고 쓰여 있다.
승려이자 소설가인 세토우치 자쿠초와 저널리스트 이케가미 아키라가 함께 쓴 《95세까지 사는 것은 행복합니까?95?まで生きるのは幸せですか?》(2017)를 읽었을 때의 독서 노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95세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온 작가 세토우치 자쿠초에게 저널리스트인 이케가미 아키라가 ‘노후의 마음가짐’에 관해 묻는다. 풍요로운 인생 경험을 지닌 말의 무게에 감동했다. 초고령사회를 맞이한 일본에서 장수하는 것은 정말로 행복한 일일까? 나도 88세인 미수米壽를 지나, 일 년 전에는 드디어 89세를 넘기고 90세가 되었는데, 걸음이 느려지고 보폭도 좁아져 조심하지 않으면 어느새 넘어지기 일쑤다. 아직 움직일 수 있으니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으면 언제든지 응하겠지만, 이제는 일어나 걸으려고 하면 현기증이 나거나 다리가 후들거린다. 무언가를 붙잡든지 지팡이를 짚든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만 하는 상태가 되었다. 앞으로 점점 더 그런 일이 늘어나고 정도도 심해질 것이다. 쇠약해지는 나 자신과 의사의 눈으로 내 상태를 확인하는 또 다른 나 자신과의 싸움! 이 싸움이 계속될 것이다. 반년인가 10개월쯤 전에는 발밑에 아무 걸릴 게 없었는데도 앞으로 푹 꼬꾸라져 순식간에 넘어졌다. 그러고는 일어서려다가 다시 넘어졌다.

이상하다! 뇌가 지령을 내려도 팔다리의 말초신경이 말을 듣지 않는다. 신경 전달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과 또 한 사람의 자신이 충돌한다고 할까, 싸운다고 할까. 서로 대항하고 있다. 자신의 사고에 태클을 거는 것이다. 젊을 때도 그런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나를 둘러싼 모든 환경이 큰 문제가 없던 시절이어서 웃고 넘어갈 수 있었다. 지금은 무대 자체가 어두컴컴하다. 95세까지 살아가는 일은 결코 행복하다고는 할 수 없다. 싸움! 고통! 고뇌의 연속이다. 하지만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신앙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느님과 함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가엾게 여기고 무한한 자애로 돌봐주신다."

"치매에 걸리면 아무것도 모를 텐데 그럼 죽음도 두렵지 않게 되나요? 치매가 아닐 때보다 오히려 편한가요?"

"솔직히, 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중증 치매가 되어도 자신이 당하는 불쾌한 일이나 자신의 존재가 소멸하는 데 대한 두려운 마음은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렇게 대답한 이유는 불쾌감이나 두려움이 본능적인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의식 없이 누워 있다고 아무것도 모를 거라 예단하지 말아 주세요. 눈에 보이는 것은 알아보지 못한다 해도 목소리는 들을 수 있으며 말도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나중에 만약 그저 목숨만 붙어 있는 상태가 된다면 연명치료는 하지 말라는 의사를 생전에 표명하는 카드도 만들었습니다.(우리나라에서는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에서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할 수 있다.-역주)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말해 두었습니다.

장수하면 치매에 걸릴 확률이 높아지니까 제가 치매에 걸린 것도 그리 부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살아가는 동안은 조금이라도 사회나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이제는 신체마저도 부자유스러워졌지만 주변의 도움을 받아 그 바람을 이뤄 나가고 싶습니다.

저의 가장 큰 소망은 많은 분이 치매에 관해 올바른 지식을 갖는 일입니다. 아무것도 모른다고 단정짓고 방치하지 말아 주세요. 그리고 치매 당사자를 빼고서 결정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무엇을 해도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이해하고 일상생활에서 버팀목이 되어 주면 좋겠습니다.

치매에 걸린 후 새삼 깨닫게 된 게 있습니다. 체험에 온도 차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오늘 여기에 와 주었다면 그것은 제게 ‘따뜻하다’는 느낌을 줍니다. 마음은 기쁘고 함께 이야기하는 것이 마냥 즐겁지요. 그리고 헤어질 시간이 다가와 ‘안녕’ 하는 인사를 들으면 낙담합니다. 온도가 내려가는 것을 느낍니다. 사람과 만나면 온도가 올라가고 사람과 헤어져 쓸쓸함을 느끼면 내려갑니다. 그렇기에 따뜻한 체험과 따뜻한 인연을 가능한 한 많이 맺었으면 좋겠습니다.

살아가고 병들고 죽는다는 것 그리고 죽음은 단 한 번뿐이며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이 종교적인 물음을 깊이 생각하고 마음에 두지 않으면 인간은 궁지에 몰릴지도 모릅니다. 이 세상에서 아등바등 돈 버는 데만 매달리다가는 죽을 때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될 수도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빠져나올 수 없는 인간관계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이 영화가 생각난다. 교사와 학생, 상사와 부하, 연인 사이는 물론이고 혈연지간도 견딜 수 없다면 떠나면 된다. 그러나 생계든 욕망이든 자존심이든 비합리적 사고든 ‘거래’가 있다면 단절은 쉽지 않다.

문제는 가장 끊기 어려운 관계. ‘가해자’가 ‘피해자’가 욕망하는 것도 지니고 있을 때다. 운동선수와 감독, 예술가와 제자, 교수와 학생, 감독과 배우가 대표적일 것이다.

귀가 얇고 주책맞으며, 동일시의 여왕인 내게 이 영화는 당연히 나의 이야기였다!

내 인생을 좌우했고 좌우하는 사람이 두 명 있다. 둘 다 여성인데, 성격도 비슷하다. 두 사람 모두 주변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능력이 있다. 타인을 들들 볶고, 이중 메시지의 전문가들이며, 매사에 자기 위주이고 제멋대로다. 그러나 능력이 뛰어나며,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는 욕심이 끝이 없다. 아, 그 집착과 의지, 변덕도 알아주어야 한다. 가장 큰 공통점은, 나는 그 두 사람이 어서 사라지기를 바랄 정도로 미워하지만, 그들은 내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언제나 나를 사랑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주변에서 나를 평가할 때 자주 등장하는 말이 ‘지독하다’는 것인데, 그들 덕분이다. 그들을 만족시키려면(결국 나의 만족이지만) 나는 지독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분야든 ‘성공’하려면, 어릴 때부터 공부하는 몸을 만들어야 한다. 피겨 스케이팅이든 피아노든 모두 공부다. ‘김연아 선수만큼’의 절대적인 노력과 훈육이 필요하다.

"어떻게 하면 좋은 소설을 쓸 수 있나요?"라는 질문에 황석영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엉덩이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면 됩니다."

공부나 글쓰기라면 하루에 열 시간씩 앉아 있을 수 있는 자기 발로(發露)의 즐거운 의지가 있어야 한다.

이런 종류의 인간이 원하는 것은 스스로 인정할 수 있는 경지에 다다르는 것이지, 돈이나 명예가 아니다. 그것은 부수적으로 따라올 뿐이거나 무관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돈이나 명예 수준의 동력으로는 이 과정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엄마에게 칭찬을 받은 기억이 없다. 칭찬은커녕 지적도 아니고, 엄마는 무슨 기운이 그토록 남아도는지 놀라운 기세로 늘 내게 악담을 퍼부었다. 나는 엄마 말이 진리인 줄 알고 무조건 빌고 노력했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상처 극복에 걸리는 시간에 대해 완전히 다른 시각을 갖게 되었다.

나는 타인을 부러워하지 않는 편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주인공은 몹시 부러웠다. 그와 달리 나는 오랜 시간 상처받고 주저앉았다. 원한다면 최선을 다해 추구하면 된다. 엄마나 선생의 인정은 나의 행복보다 중요하지 않다.

자기를 사랑하는 감정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에게 이런 식으로 ‘도 닦으라’ 훈계하면서 사랑받는 자의 여유와 우월감을 과시하는 인간을, 나는 코피가 터지게 주먹으로 패주고 싶다.

자신이 사랑받고 있음을 간파한 자 혹은 자기가 가진 매력을 가지지 못해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권력을 휘두르는 자의 자기 도취. 대개 이런 인간들은 자기가 받는 사랑이 영원할 것처럼 오만하다.

집착과 질투가 없는 사랑은 ‘수준 높은’ 사랑이 아니라 절실하지 않은 사랑일 뿐이다

사랑은 나의 감정이 타인의 가슴으로 옮겨 가는 것인데, 어찌 마음을 비울 수 있단 말인가. 마음을 비운다면 아마 마음이 없어지는 거겠지.

타인의 사랑을 구질구질한 집착으로 몰아붙일 수 있는 자신감은, 성숙해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사랑하는 취약 상태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세련된 감정의 소유자라고 자부하는 쿨한 인간도 사랑에 빠지면 들끓는 감정의 불지옥에 빠진다.(이 주제를 다룬 명작은 마사 파인스 감독이 만든, 리브 타일러와 랠프 파인스가 나오는 〈오네긴〉이다.)

질투만큼 자발적인 고통도 없다. 질투가 어리석다는 것을 몰라서 질투를 멈추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질투에 대한 잠언이나 충고처럼 비현실적인 것도 없다.

질투가 나를 지배하지 않는 평온한 마음조차, 내 것이 될 수 없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 뒤로는 부대끼고 바닥에 패대기쳐진 것 같은 비참한 감정이 나를 찾아오면, ‘그래, 너 왔구나’ 하며 인사하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질투에 시달리는 나를 포기하고,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또 다른 내가 더는 나의 목을 조르지 않도록 무릎 꿇고 빌 수밖에 없다. 어차피 나는 ‘연적’만큼 매력적일 수 없었다. 매력에 대한 판단은 주관적이므로, 내 매력을 찾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느 시대나 인간의 삶의 조건은 불평등하기 때문에, 자기에게 결핍된 것을 소유한 타인에 대한 질투와 시기 역시 삶의 조건이 된다. 질투는 인간의 보편적인 심리이기에 질투라는 감정 자체에서 젠더를 따지기는 어렵다.

사랑과 연애는 다르다.

젊은 남자 원상은 여자 친구가 변심하자 자신을 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피해자로 규정한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지르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피해자’의 행동은 모두 정당화된다.

무서운 것은 귀신이 아니라 사람이다. 그는 관계를 떠도는 괴물이다.

질투는 자기 증오이며 자기 몰두이자 결국 자기 도취다.

성찰은 자기로부터 출발하고 자기로 돌아오는 사유지만, 질투는 질투 대상에 대한 자기 중심적 해석이기 때문에 사고의 중심이 타인에게 있다. 바로 그 의미에서 질투는 자기 중심이 없는 상태다. 따라서 질투하는 자는 자기 불행에 책임이 있다.

이처럼 질투는 자신의 결핍을 직면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도피처이다. 상대방에 대한 미움과 분노, 부러움이 나 자신을 돌보는 것과 자리를 바꾸게 된다.

사적인 영역은 유일하게 남성이 여성에게 패배할 수 있는 영역이기도 하다.

성과 사랑의 장소에서는 여성의 ‘무혈 혁명’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실연당한 남자의 분노가 어떨지 짐작할 수 있다.

머리 좋은 사람은 열심히 하는 사람을 따를 수 없고, 열심히 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능가할 수 없는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원상과 윤식의 승부는 이미 결정 난 것이었다.

사랑에 골몰하여 자아가 훼손된 자의 사랑이, 어떻게 자신의 젊음을 확인하기 위해 감정의 밀고 당김 자체를 즐기는 이의 사랑을 이기겠는가!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과의 관계를 통해서 정체성을 획득한다고 간주되므로, 남성과의 사랑은 성 역할이자 생존 수단이 된다.

여성은 살아남기 위해 사랑(《LovingtoSurvive》)한다.

남성에게 사랑은 자신의 주체성을 실현하는 수단이자 승부를 거는 게임이다.

남성이 인생에서 진정한 절망을 경험할 수 있을까? 가장 낮은 계급의 남자보다, 가장 모욕당한 남자보다, 더 타자로 존재하는 여성은 항상 남아 있다. ‘여자’는 ‘남자’를 위한 충전지다.

성연이 한국 영화에서 찾아보기 힘든 상당히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임에도, 카메라를 장악하지 못하고 두 남자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스치듯이 그려진 것은, 여성은 남자의 조건이라는 현실을 상기시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생의 모든 면에 해당하겠지만 그나마 위로는 승자 독식이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물론 승자들끼리의 교체일 뿐이겠지만.
그래도 품위 있는 인생이고 싶다. 떠나고자 악수하러 온 옛 연인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까. 패자는 승자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까. 매일매일 패배하는 나는.

슬픔이든 부정이든, 문제는 그것을 반복한다는 데 있다. 죽음이라는 현실을 떠나지 못하고, 사실 여부를 반복해서 묻는다.

1952년, 옥스퍼드 대학의 영문학 교수인 잭 루이스는 시인인 미국 여성 조이 그레셤을 만난다. 호감을 품고 주저하고 그리워하다가 다시 만나 결혼한다.

"지금 고통은 그때 행복의 일부이다.(Thepainnowispartofthehappinessthen.)" 이전의 행복을 생각하자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골백번을 돌이켜봐도, 모든 기억을 동원해도, 다른 식구들에게 물어봐도 엄마는 행복한 적이 없었다. 엄마와 함께한 나의 시간도 대부분은 고통스러웠다. 그러므로 내겐 "지금 고통"이 "그때 행복"과 교환되지 않는다.

엄마는 루게릭병(근육의 특정 부분이 마비되는 병, 근위축성측삭경화증)으로 혀와 식도가 마비되어 8개월간 굶다가 아사했다. 그 과정은 엄마에게나 내게나 끔찍한 시간이었다. 엄마도 나도 엄마가 빨리 죽기만 바랐다. 그런데 그 상담자는 내게 미치 앨봄의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을 읽으라고 했다. 나는 소리를 질렀다. "이제까지 제 이야기를 들으셨습니까? 들으셨어요? 들으셨잖아요? 그런데, 이런 책을 나더러 읽으라고요? 당신도 안 읽었지!" 그렇게 상황 파악 안 되고 공감 능력도 없으며 인권 의식이 없는 사람이 무슨 상담가라고.

모리 교수와 우리 엄마의 공통점은 루게릭이라는 병명뿐이다. 상황은 천지차이인데…….

"당신이 살아가면서 무언가 잃어 갈 것들에 대해 정녕 두려운가? 하지만 우리 삶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잃어 가는 반복 속에, 결국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니 상실이란 ‘모두 끝났다’는 의미가 아니라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사랑을 위해 사랑할 권리를 내려놓으라."

권리를 포기하고 나니 상실감 대신 엄마를 만날 날이 기다려졌다. 그 시간까지가 인생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보통’ 남자들이 좋아하는 여성은, 세상 물정에 무지한 순진무구한 여성이다. 적당히 지적이지만 남성의 언어에 도전하지 않고, 거칠고 험악한 노동 시장에 진출할 필요나 의지가 없으며, 남자에게 부담 주지 않을 만큼만 의존적인, 깨끗한 손톱과 하얀 피부를 가진 여자.

남자의 삶에서 여자와 소통하기 위해 자아를 조절하는 기간은 연애할 때 몇 개월이 유일하다(여성들은 거의 평생을 남성을 위해 자신을 조절한다).

제작자의 의도가 모두에게 일관적으로 관철되는 드라마는 없다. 성별, 나이, 지역, 계급, 성 정체성(동성애자냐 이성애자냐) 같은 수용자의 사회적 위치에 따라 텍스트는 다르게 수용된다. 즉, 아시아 각국에서 한류의 효과는 동일하지 않으며, 한 국가 안에서 한류의 영향력 역시 계층이나 성별에 따라 다르다.

그가 만든 <외출>은 <겨울연가>의 주제인 남성의 사적 영역으로의 진출과 감정 노동 참여를 넘어, 상처에 휘둘리지 않고 성장하며 사랑의 새로운 양식을 만들어 가는 성숙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부부건 애인이건, ‘정상’이건 ‘불륜’이건 관습화된 관계를 거부하고, 서로 성장하면서 외롭거나 일상이 지겨울 때 가끔 찾을 수 있는 ‘즐거운 외출’. 그러나 만남의 순간에는 최선을 다하는 사랑.

아무리 별난 개인들의 사랑이라 해도, 대개 사랑은 앞서간 이들이 해 왔던 행위의 인용과 재인용의 이어짐이다. 사랑해서 미음을 먹여주는 것도 아니고, 사랑해서 배우자의 침대 곁에 잠드는 것도 아니건만, 이런 장면은 용인받지 못한 연인에게는 그/녀와의 모든 역사를 무(無)로 돌리는 대단한 행위로 보이고 깊은 상처가 된다.

제도가 보장하는 관계 앞에서, ‘너’의 넘치는 매력과 ‘나’의 절절하고 순정한 의지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인간은 그렇게 제도 앞에 무력한 존재다.

관계라는 생물의 죽음과 생존의 모호한 시간이 지나고, 봄날 폭설이 내리자 두 사람은 "어디로 갈까요?"라며 다시 만난다. 영화는 말한다. 들어왔거든 들어온 문은 잊어라. 관계의 향방이 사랑을 구속하지 않게 하라.

마지막 장면이 영화의 모든 것을 말하는 경우가 있다. 내겐 파스칼 로지에 감독의 프랑스 영화 <마터스 : 천국을 보는 눈>(2008년)이 그랬다.

<문라이트>는 약자에 대한 동일시 없이는 감상하기 힘들다. ‘흑인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모든 장면이 아름다운 이 영화를 온전히 몸에 담을 수 없다.

내가 여성으로, 혹은 흑인으로 태어나기를 선택한 사람은 없다. 그런데 왜 나는 ‘그렇게 태어나서’ 내게 적대적인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가.

실은 둘 다 자기 중심적이고 성취 지향적이어서 ‘사랑보다 공부’가 더 실속이 있음을 아는, 관계 무능력자다. 연애 경험도 없고, 연애를 해도 견디지 못할 유형이다.

새삼스러울 것 없는 얘기지만, 우리가 본 영화는 우리의 인생과 붙어 있다. 몸으로 영화를 본다. 영화의 내용은 감독의 ‘연출 의도’가 아니라 관객의 세계관에 달려 있다. 누구나 자기의 삶만큼 보는 것이다

누군가를 우러러본다? 내 인생에 그런 인물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와이 슌지는 예외다.

이 영화는 모든 것이 끝난 후에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런 삶이 일상이라면…… 눈물과 음악 외에 무엇으로 시간을 지탱하겠는가. 하지만 이런 영화가 있기 때문에 삶을 지탱할 수 있다는 역설. 아름다운 영화는 끝난 세상을 살게 한다. 포스터를 보는 순간부터 나는 숨이 막혔다. 영화도 포스터도 갖고 싶었다.

나는 말세를 억지로 지속시키려는, 매사에 열심인 사람들에게 분노를 느낀다. 그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끝난 세상의 지옥도를 느끼지 못한다. 그들을 대신해, 세상이 끝난 이후의 모든 고통을 느껴야 하는 이들이 있다. 교실의 아이들은 서로를 이지메하고, 여학생을 골라 윤간한 후 원조 교제 시장에 내보낸다. 주인공의 단짝은 ‘악마’가 되어 학교를 지배하고 현실에서 이지메를 당하는 주인공은 온라인 공간에서 위안을 찾는다.

이 지옥에서, 여성 특히 10대 소녀들의 가치는 섹스뿐이다. 그러므로 ‘삭발한 계집애는 필요 없다’. 그녀는 그렇게 그들에게 쓸모없는 여자가 됨으로써 살아남는다

세상이 망했지만, 망한 사회도 사회다. 그런 사회에서도 사람들은 그 사회가 원하는 주체가 되려고 한다. 그래야 성원권을 얻으니까. 그래서 모든 주체는 종속된(subjected) 주체(subject)다.

이 소녀가 희망을 찾는 방식은 망한 세상의 타자가 되는 것이다.

상처의 크기는 권력의 크기이기도 하다. 상처를 강조하면 상대방의 권력도 커진다.

‘우리’는 상처받았음을 강조하는 대신에 저들의 폭력을 폭로해야 한다.

당장의 피해가 눈앞에 어른거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이 상담해 올 때 나는 이 소녀의 저항 방식을 알려준다. 피해자는 여성의 성 역할이다. 이 소녀는 피해자 역할을 거부했다.

나는 주로 글을 쓸 때 외로움을 느낀다. 다른 외로움도 있다. 도저히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타인의 ‘훌륭함’을 선망하고, 그 갈망이 몸의 변화로 느껴질 때도 외롭다.

사랑을 위해 희생하는 것은 ‘쉽다’. 그것은 동일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전엔 적대했으나 지금은 선망하게 된 타인, 나는 다가갈 수 없는 다른 세계에 사는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일은 경험하기 힘든 인간성이다.

사람은 사상, 사랑, 권력으로 변하지 않는다. 사람은 사람만이 변화시킬 수 있다.

이 작품은 타인의 삶이 나의 삶에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으며 나는 얼마만큼의 대가를 지불할 수 있는 인간인가를 질문한다.

능력이 부족해 페어플레이를 못하는 유형도 내 옆에 두지 않는다. 그런 인간은 ‘자본주의 정신’에 어긋난다.

혐인증인 나에게 ‘다른 인간’이 있음을 잊지 않게 해주고, 인간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증거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내가 더 타락하지 않도록 도와주고 격려해준다.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일은 무엇일까? 나는 억울한 일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억울한 일에는 원인이 너무 많아서 원인이 없다. 고통에는 위계도 수량도 총량도 없다. 회복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다면 원인을 찾을 것이 아니라 남은 시간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해야 한다.

고통을 견디게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분노, 저주, 복수심이라는 현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 용서마저도 가해자의 권리인 현실?을 생각하게 한다.

억울한 일로 평생을 불면의 밤과 싸우고 절망과 분노로 자신을 ‘망가뜨리는’ 이들을 종종 본다. 이들은 가해자가 처벌받지 않음을 알고 있다. "이 생에서는 해결 방법이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이다.

‘선’의 힘으로 ‘악’을 이기려 할 때, 인간은 부서지고 무너진다. 도덕적 우월감은 타락의 지름길이다

나는 잠들기 전에 언제나 조용히 되뇐다. 잠들기 위해서. 구원, 해결, 복수…… 세상에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런 것은 없습니다. 저는 이것을 받아들입니다…….

어떤 사건을 ‘처리’하고 싶다, 그 사건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 그러려면 얼마나 괴로워야 하나. 아니, 그것이 가능할까.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잘못한 것도 없는데……. 이런 생각으로 내 삶이 잠식되고 있는데 위로해주는 이는 적다. 대개 이렇게 말한다. "집착, 너의 개인적 특성, 아직도? 야, 내가 더 창피하다." 피해자는 자기 기분이나 경험보다 이런 말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사용한다.

피해자를 침묵시키고 계속 가해자에게 노출시키는 것이 실제 가족을 유지하는 일일까?

남성 연대 앞에 가족은 없다.

"당신이 도와줄 건 없고, 그간 내게 떠넘겼던 당신 짐이나 가져가."

자기 짐을 권력(젠더, 계급, 인종……)을 이용해 희생자의 어깨 위에 강제로 얹어 놓고,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한다. ‘여섯 살 소녀’에게 그 짐은 돌 갑옷과 쇠뭉치를 어깨에 걸친 듯, 몸이 휘청일 정도로 무거운 것이다. 그런데 "내가 도와주마."라니?

나는 생각만 거듭하다가 결국 두 가지 이유로 포기하는데, 하나는 실제로 귀찮고 시간이 아깝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무서워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그녀의 일생을 마무리하는 계단이다. 어릴 때 살던 집. 그녀는 깨끗한 나무 계단을 차근차근 오른다. 단정하게 접은 하얀 양말을 신었다. 내게도 익숙한 양말이다. 지금도 가끔 발목을 감싼 그런 양말을 신고 긴 치마를 입곤 하지만, 10대 내내 입었던 교복과 잘 어울리던 양말이다. 그렇게 마츠코는 하늘나라로 올라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