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나 여성 작가가 현실을 풍자한답시고 엄마를 머리 빈 속물로 설정해 놓고 마음껏 조롱하는 작품을 읽으면 실망과 분노를 넘어 깊은 슬픔을 느낀다. 우린 왜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는 걸까.

자식에게 엄마나 아빠는 결국 부정하고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 마땅히 죽여 없애고 승리를 거두어야만 한다. 그것이 부친 살해 신화에 담긴 성장의 본질이다.

모성과의 대결을 다루고 싶다면, 좀 더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고작 학습지나 학원으로 모성을 이야기할 작정인가?

사실 가족이란 아무런 계획도 합의도 고민도 없이, 우연하게 만난 조합이다. 말썽이 없을 수가 없다.

가부장의 요구는 뭔가 그럴싸해 보이는, 막 훌륭하고 막 정의롭고 막 고진감래할 것만 같은 어떤 일이다. 그런데 생각이 짧은 여자와 아이는 어리석게도 눈앞의 이익이나 제 한 몸만 챙기다가, 지혜로운 가부장의 인도로 깨달음에 이르러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는 것이다. 앗, 종교인가?
정말로 종교인 까닭인지, 동화 속에서는 부부 사이에 남편은 반말, 아내는 높임말을 쓰고는 한다.

심지어 일본어는 존대 표현이 확실한 언어인데도, 원서에서 부부가 동등한 말법을 쓰는데 굳이 한국어로는 아내가 존대하도록 번역해 놓은 경우도 있다.

설사 그 아버지의 판단이 옳다고 해도 다른 사람에게 가치관을 강요하는 것은 과연 정당한 행동일까? (난 반댈세.)

햇빛을 향해 자라나는 덩굴처럼, 자식은 안간힘을 다해 부모의 그늘과 반대 방향으로 자란다. 그래야 억세고 푸른 줄기로 자라날 것이다. 부모의 마음은 쓸쓸하지만, 이는 축하할 일이다. 아이는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다.

아이는 부모에게 맞서는 게 자연스럽고 옳고 건강하다. (아아, 괴롭다!) 동화는 그런 아이의 내면을 살피고 발견하고 드러내고, 나아가 응원해야 한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라고 박수를 쳐야 한다. 그것이 어른의 일이요, 동화의 일이다.

『Story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의 저자 로버트 맥키는, 인물의 진정한 성격은 선택의 순간에 드러난다고 말한 바 있다. 인물이 했던 말, 일상적인 행동은 진정한 성격을 드러내지 못한다. 극적인 순간에 내리는 선택만이 인물의 진정한 면모를 드러낸다는 얘기다.

엄마를 한심한 속물로 만들어 버린다.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와 함께 이야기도…… 망한다.

당신의 소중한 이야기에 함께할 사람들을 존중하기 바란다.

세상 어디에도 주인공을 위한 도구가 되어도 좋은 사람은 없다.

소설책 열 권짜리 사연은 제아무리 길다 해도 이야기의 프롤로그다.

절정에 이르면 운명을 건 선택을 해야 한다. 빨간선을 자를까, 파란선을 자를까? 야구부를 그만둘 것인가, 계속할 것인가?

심리적 개연성이 확보되었기 때문이다.

주인공을 당장 움직이게 하는 폭탄이어야 하고, 이야기의 크기에 맞는 타이머여야 한다.

동구는 야구를 계속할 수 있을 것인가?
보찬 씨의 녹색 장부는 어디로 갔을까?
라면 한 줄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수 있을 것인가?
이렇게 이야기를 일관되게 끌고 갈 극적 질문에 따라 주인공을 계속 궁지에 몰아야 한다. 주인공의 선택지를 조금씩 좁혀 나가야 한다.

어린이들은 본래 부모에게 불만이 많은 법이다.

극적 질문이 인물의 운명을 완전히 결정짓는 것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우리네 인생에 어디 마침표가 있던가.

「검은 고양이」의 작가 에드거 앨런 포는 단편소설에 대해 다섯 가지 원칙을 제시한 바 있다. 짧은 분량, 압축성, 현실성, 인상적인 결말 그리고 단일성이다.

단일성이란 시작부터 끝까지 사건이나 행위가 일관성 있게 진행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사연을 구구절절 늘어놓는다고 이야기가 되는 건 아니다. 욕망과 걸림돌의 갈등이 클수록 극적인 이야기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이야기의 기초 공사, 노둣돌이다. 이야기는 그로부터 생겨난 구체적인 사건이다. 갈등이 시작되고 고조되고 마침내 도발적인 사건으로 인해 갈등은 형체를 드러낸다.

당신은 누구의 이야기를 하려는가? 그 인물은 무엇을 욕망하고 무엇에 좌절하는가? 그러한 갈등을 밖으로 터트리는 폭탄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이제 그 이야기를 어떻게 들려줄 계획인가?

하고 싶은 하나의 이야기라 하더라도, 관련하여 일어난 일 모두를 말할 필요는 없다.

연애담의 가장 큰 특징은 당사자만 재미있다는 사실.

사과나무까지 가는 도중에 겪는 모든 일을 다 끄집어내면 안 된다. 세 친구의 우정을 훼방하는 요소들만 딱딱 집어내면 된다.

스토리가 ‘일어난 일’이라면, 플롯은 ‘일어난 일을 작가가 들려주는 방식’이다. 플롯은 단순한 이야기를 서사로 만들어 준다.

월급도 퇴직금도 사대보험 지원도 없는 작가가 유일하게 가진 건 저작권이다. 내키는 대로 하셔도 된다는 뜻. 물론, 그 결과도 온전히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뜻.

이렇게 플롯을 설정하고 시작한다는 건,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찍고 출발하는 것과 같다.

플롯이 전혀 없는 작품은 존재하지 않는다. 플롯이 두드러진 작품과 그렇지 않은 작품 또는 독특한 플롯과 전형적인 플롯이 있을 따름이다.

각각의 질문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가 되어 줄 사건들(만)을 일정한 원칙에 따라 배열하는 거다.

관계없는 장면은 과감히 생략하고, 의미심장한 장면은 강조한다.

고전을 재구성하는 기쁨이자 의미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플롯에 대한 이해다. 지금 하는 이야기가 어떤 플롯을 가졌는지, 즉 어떤 원칙으로 사건을 엮을 것인지 확고하게 정하고 일관되게 밀고 나가야 한다.
그런 작전도 없이 무턱대고 떠오르는 대로 이야기를 쓴다면…… 처음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스텝이 엉키면 뭐다? 몸부림!

많은 사람이 조상을 탓한다. (당연하다. 여태 차린 제삿밥이 얼만데.) 나는 아무래도 재능이 없는 게 아닐까? (네, 맞습니다. 아마도 그럴 가능성이 높아요.)

이야기의 방향이 뚜렷한데도 달려 나가지 못하는 이유는 앞이 깜깜한 까닭이다.

내가 뭘 찾는지도 모르는 채 현장에 가서 경기와 훈련을 지켜보고, 야구하는 아이를 둔 부모들의 블로그나 온라인 커뮤니티를 뒤지고, 야구를 다룬 온갖 책과 영화와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조금씩 그 세계의 일상에 대해 알아 갔다.

나는 서화영의 집에 배롱나무를 심고 싶었다. 내 눈에는 가장 요염한 나무인 데다, 철원에 흔치 않은 나무이기 때문이다. 확인해 보니 철원은 배롱나무의 북방한계선이었다.

자료 조사에 품을 들이는 만큼 구도가 뚜렷해지고 건물이 탄탄해졌다.

알아야 쓸 수 있었다.

사람마다 문장력은 천차만별이다. 누구도 최고의 문장을 쓸 수 있다고 자신할 순 없다. 하지만 최선을 쓸 수는 있다.

자기가 만든 인물의 나이조차 정확히 모르는 작가들도 많다.

대체 당신의 주인공이 사는 그곳은 어디란 말인가? 거기가 어딘지도 모르면서, 거기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는가? 거기서 일생을 보낸 아이에 대해 대체 뭘 안단 말인가? 그런 것도 모르면서 그 아이에 대해 대체 뭘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원고를 보면 놀라다 못해 감탄하게 된다. 패기가 대단하시네요.

왜 이혼했나요? 성격 차이? 왜 가난한가요? 무능력? 이래서는 도무지 이야기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나아간다 해도 빤한 장면을 그릴 수밖에 없다. 왜? 아는 게 없으니까.

그 사람들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 행간에서 실감이 뚝뚝 묻어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어설프게 이혼은 나쁘다는 훈계를 하려고 아이를 앞세우고 있는 건 아닐까? 결정적으로 이혼이라는 어른들 문제의 책임을 왜 아이에게 떠넘기는가?

아이들은 문제를 자기 탓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내가 공부를 못해서 엄마 아빠가 싸우나? 같은.

앞서 예술은 주관적 진실이라 말한 바 있다. 객관적 사실을 전하는 게 아니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을 전하지 않을 뿐, 사실이 필요 없는 건 아니다.

사실 속에서 진실이 힘을 얻는다. 사실이 진실을 만들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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