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져나올 수 없는 인간관계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이 영화가 생각난다. 교사와 학생, 상사와 부하, 연인 사이는 물론이고 혈연지간도 견딜 수 없다면 떠나면 된다. 그러나 생계든 욕망이든 자존심이든 비합리적 사고든 ‘거래’가 있다면 단절은 쉽지 않다.

문제는 가장 끊기 어려운 관계. ‘가해자’가 ‘피해자’가 욕망하는 것도 지니고 있을 때다. 운동선수와 감독, 예술가와 제자, 교수와 학생, 감독과 배우가 대표적일 것이다.

귀가 얇고 주책맞으며, 동일시의 여왕인 내게 이 영화는 당연히 나의 이야기였다!

내 인생을 좌우했고 좌우하는 사람이 두 명 있다. 둘 다 여성인데, 성격도 비슷하다. 두 사람 모두 주변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능력이 있다. 타인을 들들 볶고, 이중 메시지의 전문가들이며, 매사에 자기 위주이고 제멋대로다. 그러나 능력이 뛰어나며,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는 욕심이 끝이 없다. 아, 그 집착과 의지, 변덕도 알아주어야 한다. 가장 큰 공통점은, 나는 그 두 사람이 어서 사라지기를 바랄 정도로 미워하지만, 그들은 내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언제나 나를 사랑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주변에서 나를 평가할 때 자주 등장하는 말이 ‘지독하다’는 것인데, 그들 덕분이다. 그들을 만족시키려면(결국 나의 만족이지만) 나는 지독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분야든 ‘성공’하려면, 어릴 때부터 공부하는 몸을 만들어야 한다. 피겨 스케이팅이든 피아노든 모두 공부다. ‘김연아 선수만큼’의 절대적인 노력과 훈육이 필요하다.

"어떻게 하면 좋은 소설을 쓸 수 있나요?"라는 질문에 황석영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엉덩이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면 됩니다."

공부나 글쓰기라면 하루에 열 시간씩 앉아 있을 수 있는 자기 발로(發露)의 즐거운 의지가 있어야 한다.

이런 종류의 인간이 원하는 것은 스스로 인정할 수 있는 경지에 다다르는 것이지, 돈이나 명예가 아니다. 그것은 부수적으로 따라올 뿐이거나 무관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돈이나 명예 수준의 동력으로는 이 과정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엄마에게 칭찬을 받은 기억이 없다. 칭찬은커녕 지적도 아니고, 엄마는 무슨 기운이 그토록 남아도는지 놀라운 기세로 늘 내게 악담을 퍼부었다. 나는 엄마 말이 진리인 줄 알고 무조건 빌고 노력했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상처 극복에 걸리는 시간에 대해 완전히 다른 시각을 갖게 되었다.

나는 타인을 부러워하지 않는 편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주인공은 몹시 부러웠다. 그와 달리 나는 오랜 시간 상처받고 주저앉았다. 원한다면 최선을 다해 추구하면 된다. 엄마나 선생의 인정은 나의 행복보다 중요하지 않다.

자기를 사랑하는 감정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에게 이런 식으로 ‘도 닦으라’ 훈계하면서 사랑받는 자의 여유와 우월감을 과시하는 인간을, 나는 코피가 터지게 주먹으로 패주고 싶다.

자신이 사랑받고 있음을 간파한 자 혹은 자기가 가진 매력을 가지지 못해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권력을 휘두르는 자의 자기 도취. 대개 이런 인간들은 자기가 받는 사랑이 영원할 것처럼 오만하다.

집착과 질투가 없는 사랑은 ‘수준 높은’ 사랑이 아니라 절실하지 않은 사랑일 뿐이다

사랑은 나의 감정이 타인의 가슴으로 옮겨 가는 것인데, 어찌 마음을 비울 수 있단 말인가. 마음을 비운다면 아마 마음이 없어지는 거겠지.

타인의 사랑을 구질구질한 집착으로 몰아붙일 수 있는 자신감은, 성숙해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사랑하는 취약 상태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세련된 감정의 소유자라고 자부하는 쿨한 인간도 사랑에 빠지면 들끓는 감정의 불지옥에 빠진다.(이 주제를 다룬 명작은 마사 파인스 감독이 만든, 리브 타일러와 랠프 파인스가 나오는 〈오네긴〉이다.)

질투만큼 자발적인 고통도 없다. 질투가 어리석다는 것을 몰라서 질투를 멈추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질투에 대한 잠언이나 충고처럼 비현실적인 것도 없다.

질투가 나를 지배하지 않는 평온한 마음조차, 내 것이 될 수 없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 뒤로는 부대끼고 바닥에 패대기쳐진 것 같은 비참한 감정이 나를 찾아오면, ‘그래, 너 왔구나’ 하며 인사하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질투에 시달리는 나를 포기하고,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또 다른 내가 더는 나의 목을 조르지 않도록 무릎 꿇고 빌 수밖에 없다. 어차피 나는 ‘연적’만큼 매력적일 수 없었다. 매력에 대한 판단은 주관적이므로, 내 매력을 찾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느 시대나 인간의 삶의 조건은 불평등하기 때문에, 자기에게 결핍된 것을 소유한 타인에 대한 질투와 시기 역시 삶의 조건이 된다. 질투는 인간의 보편적인 심리이기에 질투라는 감정 자체에서 젠더를 따지기는 어렵다.

사랑과 연애는 다르다.

젊은 남자 원상은 여자 친구가 변심하자 자신을 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피해자로 규정한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지르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피해자’의 행동은 모두 정당화된다.

무서운 것은 귀신이 아니라 사람이다. 그는 관계를 떠도는 괴물이다.

질투는 자기 증오이며 자기 몰두이자 결국 자기 도취다.

성찰은 자기로부터 출발하고 자기로 돌아오는 사유지만, 질투는 질투 대상에 대한 자기 중심적 해석이기 때문에 사고의 중심이 타인에게 있다. 바로 그 의미에서 질투는 자기 중심이 없는 상태다. 따라서 질투하는 자는 자기 불행에 책임이 있다.

이처럼 질투는 자신의 결핍을 직면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도피처이다. 상대방에 대한 미움과 분노, 부러움이 나 자신을 돌보는 것과 자리를 바꾸게 된다.

사적인 영역은 유일하게 남성이 여성에게 패배할 수 있는 영역이기도 하다.

성과 사랑의 장소에서는 여성의 ‘무혈 혁명’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실연당한 남자의 분노가 어떨지 짐작할 수 있다.

머리 좋은 사람은 열심히 하는 사람을 따를 수 없고, 열심히 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능가할 수 없는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원상과 윤식의 승부는 이미 결정 난 것이었다.

사랑에 골몰하여 자아가 훼손된 자의 사랑이, 어떻게 자신의 젊음을 확인하기 위해 감정의 밀고 당김 자체를 즐기는 이의 사랑을 이기겠는가!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과의 관계를 통해서 정체성을 획득한다고 간주되므로, 남성과의 사랑은 성 역할이자 생존 수단이 된다.

여성은 살아남기 위해 사랑(《LovingtoSurvive》)한다.

남성에게 사랑은 자신의 주체성을 실현하는 수단이자 승부를 거는 게임이다.

남성이 인생에서 진정한 절망을 경험할 수 있을까? 가장 낮은 계급의 남자보다, 가장 모욕당한 남자보다, 더 타자로 존재하는 여성은 항상 남아 있다. ‘여자’는 ‘남자’를 위한 충전지다.

성연이 한국 영화에서 찾아보기 힘든 상당히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임에도, 카메라를 장악하지 못하고 두 남자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스치듯이 그려진 것은, 여성은 남자의 조건이라는 현실을 상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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