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모든 면에 해당하겠지만 그나마 위로는 승자 독식이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물론 승자들끼리의 교체일 뿐이겠지만.
그래도 품위 있는 인생이고 싶다. 떠나고자 악수하러 온 옛 연인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까. 패자는 승자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까. 매일매일 패배하는 나는.

슬픔이든 부정이든, 문제는 그것을 반복한다는 데 있다. 죽음이라는 현실을 떠나지 못하고, 사실 여부를 반복해서 묻는다.

1952년, 옥스퍼드 대학의 영문학 교수인 잭 루이스는 시인인 미국 여성 조이 그레셤을 만난다. 호감을 품고 주저하고 그리워하다가 다시 만나 결혼한다.

"지금 고통은 그때 행복의 일부이다.(Thepainnowispartofthehappinessthen.)" 이전의 행복을 생각하자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골백번을 돌이켜봐도, 모든 기억을 동원해도, 다른 식구들에게 물어봐도 엄마는 행복한 적이 없었다. 엄마와 함께한 나의 시간도 대부분은 고통스러웠다. 그러므로 내겐 "지금 고통"이 "그때 행복"과 교환되지 않는다.

엄마는 루게릭병(근육의 특정 부분이 마비되는 병, 근위축성측삭경화증)으로 혀와 식도가 마비되어 8개월간 굶다가 아사했다. 그 과정은 엄마에게나 내게나 끔찍한 시간이었다. 엄마도 나도 엄마가 빨리 죽기만 바랐다. 그런데 그 상담자는 내게 미치 앨봄의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을 읽으라고 했다. 나는 소리를 질렀다. "이제까지 제 이야기를 들으셨습니까? 들으셨어요? 들으셨잖아요? 그런데, 이런 책을 나더러 읽으라고요? 당신도 안 읽었지!" 그렇게 상황 파악 안 되고 공감 능력도 없으며 인권 의식이 없는 사람이 무슨 상담가라고.

모리 교수와 우리 엄마의 공통점은 루게릭이라는 병명뿐이다. 상황은 천지차이인데…….

"당신이 살아가면서 무언가 잃어 갈 것들에 대해 정녕 두려운가? 하지만 우리 삶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잃어 가는 반복 속에, 결국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니 상실이란 ‘모두 끝났다’는 의미가 아니라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사랑을 위해 사랑할 권리를 내려놓으라."

권리를 포기하고 나니 상실감 대신 엄마를 만날 날이 기다려졌다. 그 시간까지가 인생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보통’ 남자들이 좋아하는 여성은, 세상 물정에 무지한 순진무구한 여성이다. 적당히 지적이지만 남성의 언어에 도전하지 않고, 거칠고 험악한 노동 시장에 진출할 필요나 의지가 없으며, 남자에게 부담 주지 않을 만큼만 의존적인, 깨끗한 손톱과 하얀 피부를 가진 여자.

남자의 삶에서 여자와 소통하기 위해 자아를 조절하는 기간은 연애할 때 몇 개월이 유일하다(여성들은 거의 평생을 남성을 위해 자신을 조절한다).

제작자의 의도가 모두에게 일관적으로 관철되는 드라마는 없다. 성별, 나이, 지역, 계급, 성 정체성(동성애자냐 이성애자냐) 같은 수용자의 사회적 위치에 따라 텍스트는 다르게 수용된다. 즉, 아시아 각국에서 한류의 효과는 동일하지 않으며, 한 국가 안에서 한류의 영향력 역시 계층이나 성별에 따라 다르다.

그가 만든 <외출>은 <겨울연가>의 주제인 남성의 사적 영역으로의 진출과 감정 노동 참여를 넘어, 상처에 휘둘리지 않고 성장하며 사랑의 새로운 양식을 만들어 가는 성숙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부부건 애인이건, ‘정상’이건 ‘불륜’이건 관습화된 관계를 거부하고, 서로 성장하면서 외롭거나 일상이 지겨울 때 가끔 찾을 수 있는 ‘즐거운 외출’. 그러나 만남의 순간에는 최선을 다하는 사랑.

아무리 별난 개인들의 사랑이라 해도, 대개 사랑은 앞서간 이들이 해 왔던 행위의 인용과 재인용의 이어짐이다. 사랑해서 미음을 먹여주는 것도 아니고, 사랑해서 배우자의 침대 곁에 잠드는 것도 아니건만, 이런 장면은 용인받지 못한 연인에게는 그/녀와의 모든 역사를 무(無)로 돌리는 대단한 행위로 보이고 깊은 상처가 된다.

제도가 보장하는 관계 앞에서, ‘너’의 넘치는 매력과 ‘나’의 절절하고 순정한 의지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인간은 그렇게 제도 앞에 무력한 존재다.

관계라는 생물의 죽음과 생존의 모호한 시간이 지나고, 봄날 폭설이 내리자 두 사람은 "어디로 갈까요?"라며 다시 만난다. 영화는 말한다. 들어왔거든 들어온 문은 잊어라. 관계의 향방이 사랑을 구속하지 않게 하라.

마지막 장면이 영화의 모든 것을 말하는 경우가 있다. 내겐 파스칼 로지에 감독의 프랑스 영화 <마터스 : 천국을 보는 눈>(2008년)이 그랬다.

<문라이트>는 약자에 대한 동일시 없이는 감상하기 힘들다. ‘흑인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모든 장면이 아름다운 이 영화를 온전히 몸에 담을 수 없다.

내가 여성으로, 혹은 흑인으로 태어나기를 선택한 사람은 없다. 그런데 왜 나는 ‘그렇게 태어나서’ 내게 적대적인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가.

실은 둘 다 자기 중심적이고 성취 지향적이어서 ‘사랑보다 공부’가 더 실속이 있음을 아는, 관계 무능력자다. 연애 경험도 없고, 연애를 해도 견디지 못할 유형이다.

새삼스러울 것 없는 얘기지만, 우리가 본 영화는 우리의 인생과 붙어 있다. 몸으로 영화를 본다. 영화의 내용은 감독의 ‘연출 의도’가 아니라 관객의 세계관에 달려 있다. 누구나 자기의 삶만큼 보는 것이다

누군가를 우러러본다? 내 인생에 그런 인물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와이 슌지는 예외다.

이 영화는 모든 것이 끝난 후에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런 삶이 일상이라면…… 눈물과 음악 외에 무엇으로 시간을 지탱하겠는가. 하지만 이런 영화가 있기 때문에 삶을 지탱할 수 있다는 역설. 아름다운 영화는 끝난 세상을 살게 한다. 포스터를 보는 순간부터 나는 숨이 막혔다. 영화도 포스터도 갖고 싶었다.

나는 말세를 억지로 지속시키려는, 매사에 열심인 사람들에게 분노를 느낀다. 그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끝난 세상의 지옥도를 느끼지 못한다. 그들을 대신해, 세상이 끝난 이후의 모든 고통을 느껴야 하는 이들이 있다. 교실의 아이들은 서로를 이지메하고, 여학생을 골라 윤간한 후 원조 교제 시장에 내보낸다. 주인공의 단짝은 ‘악마’가 되어 학교를 지배하고 현실에서 이지메를 당하는 주인공은 온라인 공간에서 위안을 찾는다.

이 지옥에서, 여성 특히 10대 소녀들의 가치는 섹스뿐이다. 그러므로 ‘삭발한 계집애는 필요 없다’. 그녀는 그렇게 그들에게 쓸모없는 여자가 됨으로써 살아남는다

세상이 망했지만, 망한 사회도 사회다. 그런 사회에서도 사람들은 그 사회가 원하는 주체가 되려고 한다. 그래야 성원권을 얻으니까. 그래서 모든 주체는 종속된(subjected) 주체(subject)다.

이 소녀가 희망을 찾는 방식은 망한 세상의 타자가 되는 것이다.

상처의 크기는 권력의 크기이기도 하다. 상처를 강조하면 상대방의 권력도 커진다.

‘우리’는 상처받았음을 강조하는 대신에 저들의 폭력을 폭로해야 한다.

당장의 피해가 눈앞에 어른거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이 상담해 올 때 나는 이 소녀의 저항 방식을 알려준다. 피해자는 여성의 성 역할이다. 이 소녀는 피해자 역할을 거부했다.

나는 주로 글을 쓸 때 외로움을 느낀다. 다른 외로움도 있다. 도저히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타인의 ‘훌륭함’을 선망하고, 그 갈망이 몸의 변화로 느껴질 때도 외롭다.

사랑을 위해 희생하는 것은 ‘쉽다’. 그것은 동일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전엔 적대했으나 지금은 선망하게 된 타인, 나는 다가갈 수 없는 다른 세계에 사는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일은 경험하기 힘든 인간성이다.

사람은 사상, 사랑, 권력으로 변하지 않는다. 사람은 사람만이 변화시킬 수 있다.

이 작품은 타인의 삶이 나의 삶에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으며 나는 얼마만큼의 대가를 지불할 수 있는 인간인가를 질문한다.

능력이 부족해 페어플레이를 못하는 유형도 내 옆에 두지 않는다. 그런 인간은 ‘자본주의 정신’에 어긋난다.

혐인증인 나에게 ‘다른 인간’이 있음을 잊지 않게 해주고, 인간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증거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내가 더 타락하지 않도록 도와주고 격려해준다.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일은 무엇일까? 나는 억울한 일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억울한 일에는 원인이 너무 많아서 원인이 없다. 고통에는 위계도 수량도 총량도 없다. 회복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다면 원인을 찾을 것이 아니라 남은 시간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해야 한다.

고통을 견디게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분노, 저주, 복수심이라는 현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 용서마저도 가해자의 권리인 현실?을 생각하게 한다.

억울한 일로 평생을 불면의 밤과 싸우고 절망과 분노로 자신을 ‘망가뜨리는’ 이들을 종종 본다. 이들은 가해자가 처벌받지 않음을 알고 있다. "이 생에서는 해결 방법이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이다.

‘선’의 힘으로 ‘악’을 이기려 할 때, 인간은 부서지고 무너진다. 도덕적 우월감은 타락의 지름길이다

나는 잠들기 전에 언제나 조용히 되뇐다. 잠들기 위해서. 구원, 해결, 복수…… 세상에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런 것은 없습니다. 저는 이것을 받아들입니다…….

어떤 사건을 ‘처리’하고 싶다, 그 사건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 그러려면 얼마나 괴로워야 하나. 아니, 그것이 가능할까.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잘못한 것도 없는데……. 이런 생각으로 내 삶이 잠식되고 있는데 위로해주는 이는 적다. 대개 이렇게 말한다. "집착, 너의 개인적 특성, 아직도? 야, 내가 더 창피하다." 피해자는 자기 기분이나 경험보다 이런 말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사용한다.

피해자를 침묵시키고 계속 가해자에게 노출시키는 것이 실제 가족을 유지하는 일일까?

남성 연대 앞에 가족은 없다.

"당신이 도와줄 건 없고, 그간 내게 떠넘겼던 당신 짐이나 가져가."

자기 짐을 권력(젠더, 계급, 인종……)을 이용해 희생자의 어깨 위에 강제로 얹어 놓고,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한다. ‘여섯 살 소녀’에게 그 짐은 돌 갑옷과 쇠뭉치를 어깨에 걸친 듯, 몸이 휘청일 정도로 무거운 것이다. 그런데 "내가 도와주마."라니?

나는 생각만 거듭하다가 결국 두 가지 이유로 포기하는데, 하나는 실제로 귀찮고 시간이 아깝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무서워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그녀의 일생을 마무리하는 계단이다. 어릴 때 살던 집. 그녀는 깨끗한 나무 계단을 차근차근 오른다. 단정하게 접은 하얀 양말을 신었다. 내게도 익숙한 양말이다. 지금도 가끔 발목을 감싼 그런 양말을 신고 긴 치마를 입곤 하지만, 10대 내내 입었던 교복과 잘 어울리던 양말이다. 그렇게 마츠코는 하늘나라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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