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림돌은 인물의 욕망과 뚜렷하게 대립할수록 좋다. 그래야 갈등의 실체가 명확해지고 사건도 뚜렷한 궤적으로 전개된다. 이야기가 흥미진진해진다.

주인공의 욕망은 내포독자의 공감을 사는 것이어야 한다. 납득할 만한 내적 갈등 없이, 온전히 나쁘기만 한 욕망은 곤란하다.

『천사를 미워해도 되나요?』의 아이들 역시 별로 착하지 않다. 작가 최나미는 ‘작가의 말’에서 대놓고 말한다. "별로 착하지 않은 아이들을 또다시 세상으로 내보냅니다."라고. 남의 차를 몰래 망가뜨리고, 친구를 은근히 깔보고, 착한 친구를 미워하고,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하는 아이들. 그런데도 어쩐지 그 아이들에게 끌린다. 조용히 응원하게 된다. 그 아이들의 잘못은 나쁘기보다…… 못났다. 한심한 구석이 많다. 그래서 내가 아는 누구 같고, 바로 나 자신 같기도 하다.

못난 주인공은 괜찮다. 자신의 못난 부분을 솔직히 드러내는 건 친구를 사귀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다들 속으로 자신을 좀 못났다 여기지 않는가. 스스로가 한심하기도 하고 딱하기도 하고, 스스로를 챙겨 주어야겠다 싶기도 하고. 이렇게 독자가 공감할 만한 ‘못난 구석’이 있다는 건 주인공에게 좋은 일이다.

못난 주인공이 모처럼 품은 욕망이 걸림돌에 가로막힐 때, 어쩐지 응원해 주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만약 그 못난 모습이, 그 욕망이 나와 닮았다면 더욱. 그 걸림돌이 나를 힘들게 하던 바로 그것과 닮았다면 더더욱.

문제적 개인이란 문제가 많은 사람, 문제가 심각한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다. 주인공을 문제투성이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불행의 구렁텅이에 빠트려서는 안 된다. 부모의 이혼이면 충분한 고민거리인데, 양육자는 무책임하고 성격이 나쁘며 집안은 가난하고 학교에서는 외톨이에 공부도 못하고 가까운 친구에게 배신당하고 반지하에 살며 옷에서 냄새까지 날…… 필요는 없다. 심지어 엄마 아빠 모두 도망치고 폐지를 줍다 허리를 다친 할머니나 할아버지랑 단둘이 살기도 한다. 아아! 이렇게나 박복하고 기구할 필요는 없다. 정말이지 이래서는 안 된다.

네로와 파트라슈의 죽음에 그토록 눈물을 쏟게 되는 건, 네로가 가지가지로 불행한 탓이 아니다. 할아버지는 폭언과 폭행을 일삼았고, 아로아는 네로를 왕따시켰으며, 마을 사람들은 마주치기만 하면 네로에게 천박한 폭언을 일삼았다면, 그랬다면 『플랜더스의 개』가 더 슬펐을까?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랬다면 우리가 그 이야기를 이토록 아름답게 간직하지 못했을 것이다.

무작정 팔자 사나운 인물이어서는 안 된다.

독자로 하여금 인물을 동정하게 만들지 말라. 어른이나 어린이나, 사람의 마음이 그렇지 않은가. 동정의 대상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동정은 끝끝내 동정일 따름이다. 내 이야기의 주인공을 한낱 동정의 대상으로 만들지 않기 바란다.

작가는 인물의 태도를 스케치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인물의 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발견하고 해석하고 그려 내야 한다.

그때껏 상대를 꺼려하고 무시하다가, 뒤늦게 혼자 반성하고 혼자 친구를 자처한다. 그런 관계가 과연 친구일까?

장애아동의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 관계에서 의사 결정권을 가진 인물로 설정되지 않은 것이다. 애초에 도움을 받고 싶었는지 아닌지, 그간의 일에도 불구하고 너그러이 용서할 의향이 있는지 없는지, 그동안의 일을 학교 폭력 위원회에 신고하고 싶은 건 아닌지 등 장애아동의 의사를 무시한 채 철저하게 비장애아동의 입장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장애아동은 비장애아동의 각성과 성장을 위한 도구로 보인다. 철저히 대상화되어 있다.

누군가 나를 불러서 마주 앉았더니 상대가 "보아하니 너 참 불쌍하니까 내가 친구가 되어 줄게." 한다면?
어째서 장애아동이 그런 동정에 감격할 거라 생각하는가? 어째서 장애아동은 사람에 대한 취향도 없이 친구라면 그저 좋아서 넙죽 손잡을 거라 생각하는가? 어째서 장애아동은 용서와 복수 사이에서 갈등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가?

유난히 의지 있고 능력 있는 장애아동을 칭찬하는 것은 문학의 일이 아니다. 관공서라면 또 모를까. 문학은, 그렇지 않은 다수의 못난이들에게 괜찮다고 말해 주는 일이다. 남보다 소심해도, 남과 조금 달라도 괜찮다고.

친구가 없는 아이는 다른 아이들이 받아 주면 감지덕지해야 하는가? 그 아이가 이미 다른 친구들을 싫어하고 있을 수도 있지 않는가? 최소한 그런 의문조차 없이 왕따를 당한 아이를 대상화하고 있다. 왕따를 주도하지는 않았으나, 사실상 가담했던 보통의(정확히 말하자면 다수의) 인물이 막판에 피해자에게 도움을 주었다는 이유로 자기 합리화, 자기만족에 빠진다. 비겁하고 야비하다. 이런 설정은 어린이 인물이나 어린이 독자보다, 그런 이야기를 쓰거나 아이들에게 권하는 어른들의 욕망이 아닐까? 불의에 침묵한 자신을 변명하고 용서하기 위해 피해자를 도구로 삼는 것이다.

실수와 잘못을 반복하는 게 인생이다. 그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그걸 잘못이라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때야말로 진짜 잘못된 일들이 생겨날 수 있다.

약자를 마냥 순진한 존재로, 달리 말하면 아무 욕망 없는 존재로 그려서는 안 된다. 그건 약자를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태도다. 동등한 존재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잇속도 따질 줄 모르고, 다른 사람의 악의를 읽을 줄도 모르고, 어른인데 어른의 마음은 모르고 아이의 마음만 알고, 아무런 욕망도 없고. 세상에 그런 사람은 없다. 강아지도 그러지는 않는다. 한국말을 못 해도 마음속 계산기는 똑똑할 수 있고, 지적인 능력이 떨어져도 일상에서는 약삭빠를 수 있다. 장애가 있어도 나서기 좋아할 수 있고, 가난해도 낭만과 사치를 욕망할 수 있다.

심지어 약자가 얼마나 순수한지 혹은 어리숙한지를 우스꽝스럽게 그린 작품들도 있는데, 대단한 무지요 오만이다.

강자가 약자를 우스꽝스럽게 그린다면? 그건 풍자가 아니라 조롱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누군가의 아픔에 대해 함부로 아는 척해서는 안 된다고 단호하게 얘기한다.

능력 없고 민폐를 끼치지만 묘하게 사랑스러운 인물(은 없습니다).

아이를 버리고 떠난 엄마는 나쁘지 않냐고?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말밖에 못 한다면 문학이 아닌 종교 활동이 적성에 맞겠다는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다.

자기 연민에 빠져 집 나간 엄마를 원망하고 그리워하는 동화는 이제 그만. 소설도, 시도, 동시도. 아니, 사람도.

화장이 짙고(접니다) 명품백과 보석으로 치장한(그러고 싶긴 합니다) 여자들은 주로 강아지를 버린다.

유기 동물과 노인에 대한 상투적 이미지를 끌어다 상투적인 이야기를 쓴 거다. 이미 그런 동화가 널렸다는 걸 몰랐을까? 알았다면 뻔뻔한 거고, 몰랐다면 무능력하고 게으른 거다.

최근에 나온 작품은 오히려 시대를 역행하며 엄마들을 싸잡아 비난하고 공격하고 조롱한다. 이쯤 되면 조리돌림에 가깝지 않나 싶다.

많은 동화에서 엄마들은 전업주부이고 속물이다. 돈을 밝히고 보석이나 명품을 좋아하고 이웃집과 생활을 비교하는 게 엄마들의 유일한 가치관이다. 그런 저열한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아이를 괴롭히고 남편을 들볶는다. 자기 주관도, 의지도 없다. 그에 비해 아빠들은 직장에 다니며 아이에게 너그럽고 자기 주관으로 판단하는데, 극성맞은 아내를 이겨 먹을 수가 없어 아이 문제에서 한발 물러나 있다. ‘여보, 거 벌써부터 성적에 그렇게 연연할 필요 있겠소?’ ‘어머, 여보! 모르는 소리 말아요! 옆집 애는 학원을 몇 개나 다니는 줄 알아요? 그런데 우리 애는…….’ 부끄러워 차마 더 쓸 수가 없다. 설마 이렇게까지 쓸까? 과연 그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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