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년은 영리한 거짓말쟁이로, 죽자 살자 다른 이의 환심을 사고 싶어 하는 외로운 아이였다.-15쪽
할머니는 인생을 사람이 여행해야 하는길이라고 생각하셨다. 광활한 지역을 지나가는 비교적 쉬운 길로, 출발지로부터 일정 거리만큼 떨어진 지점에 여느 집처럼 평범한 불빛 아래 목적지가 기다리고 있는...(중략)
할아버지는 나이가 들어서도 이런 것들을 하나도 갖추지 못했고 할머니는 사람이 변한다는 생각을 믿지 않으셨다.(중략)
할아버지의 죽음에서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부분은 그것이 할머니에게 일종의 배신처럼 여겨진다는 점이었다.-17쪽
훌륭한 아내였던 만큼이나 훌륭한 과부가 되셨다.-18쪽
엄마 또한 그 후로 딸들의 머리카락 냄새와 보들보들한 촉감과 숨소리와 무뚝뚝한 태도로 그토록 분명하게 의식했던 적이 없었다. 그것은 그녀에게 기묘한 만족감을 주었다.-19쪽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엄마가 느닷없이 사라져 버릴까 두려워서가 아니라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사라지고 나서야 엄마의 존재를 의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중략)
그녀는 사랑이란 소유했다고 해도 결코 누그러지지 않는 것과 비슷한 종류의 갈망이라고 결론을 내렸다.-20 쪽
눈을 떼자마자 당장 보고 싶어지는 것은 말 할 것도 없고 보고 있는 그 순간에도 보고 싶은 것이 바로 해마였다.(중략)
그런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딸들은 성공의 가능성이나 인정받는 일, 혹/은 성적 향상 따위의 골치 아픈 문제들에서 자유로워졌다. 그들은 장래를 생각할 이유나 유감스러워할 까닭이 조금도 없었다. 그들의 삶은 물렛가락에서 벖어난 실타래처럼 기울어진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제멋대로 굴러갔다. 아침 식사때, 저녁 식사 때, 라일락이 피는 때, 사과가 열리는 때와 더불어...만일 천국이라는 것이 재난과 성가신 일들을 깨끗이 떨쳐 버린 이런 세상이라면, 만일 불멸이라는 것이 균형잡힌채 정지된 이런 생활이라면, 또 만일 깨끗이 씻긴 이런 세상과 낭비 없는 이런 삶을 그들 본래의 자연스러운 본성으로 돌아간 세상과 삶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이 5년간의 평온한 삶 덕분에 할머니가 절대로 잊히지 않을 것 같았던 사건을 잊었다는 것은 하나도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21/22쪽
모든 충격이 다 사라질 때까지 시간과 공기와 햇빛 속에 충격의 파문이 굽이치다가 시간과 공간과 햇빛이 도로 잔잔해지면서 아무것도 흔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기울어지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열차와 마찬가지로 재난도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뒤를 이어 찾아온 평온이 그전보다 더 편온한 것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런 것처럼 보였다. 소중한 일상의 삶이 물 위에 비친 그림자처럼 아무런 상처 없이 치료되었다.-25쪽
바람이 미처 다 날려 보내/지 못한 따스함이 햇살 속에 스민 날이었다.-25/26쪽
이제 할머니는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당신 자식이나 여느집 자식들의 매정함을 탓하지 않았다.-29쪽
딸들에 대한 할머니의 사랑은 지극하면서도 공평했고, 그들을 다루는 당신의 태도는 너그러우면서도 절대적이었다. 할머니는 햇빛처럼 변함이 없었고 또한 햇빛처럼 주목을 끌지 않았다.(중략)
할머니는 당신에게 친절하게 굴도록 딸들을 가르 친 적이 없었다.-30쪽
엄마가 자기 입으로 직접 말하고 싶지 않은 일들을 간접적으로 듣기를 원하지 않으셨는지도 모르고... -31쪽
그러면서 현재가 이미 지나가 버린 채 결과만 남았다는 것을 깨닫고 한층 더 주의를 기울이는 동시에 좌절감을 느끼셨던 것 같다.(중략)
할머니는 신발을 하얗게 빨고 머리를 땋고 닭고기를 튀기고 침구를 정리하고 나서, 문득 자식들이 하나 같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어떻게 자신이 그런 일을 알 수 있었을까? 알머니는 신발을 하얗게 빨고 머리를 땋고 침구를 정리해 놓았다. 마치 그런 일상적인 일들을 다시 행하면 일상적인 삶이 돌아오기라도 한다는 듯이.-37쪽
따라서 할머니가 마음이 산란하거나 멍해 보였던 것도, 사실은 덜 중요한 것을 가려낼 원칙 하나 가지지 못한 채 너무 많은 것을 자각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할머니의 자각이 결코 줄어들 수 없었기 떄문이라는 생각도 드는데, 이는 이 재난이 취한 형태가 낯익은 것들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다.-38쪽
할머니는 연로하셨다. 어떤 부분도 넘치지 않게 타고난 분이었기에 나이가 들면서 진행된 할머니의 노화 정도는 다소 놀라왔다.(중략)
할머니는 인간으로서의 위엄이 점점 사라지면서 원숭이로 변해 가는 것 같았다. 누썹에서 덩굴손 같은 털이 자랐고, 입/술과 턱에도 굵고 흰 터럭이 돋았다. 옛날에 입던 옷을 입으면 가슴 부분이 횅하니 헐렁거렸고 끝자락이 바락을 쓸고 다녔다. 과거에 쓰던 모자도 할머니의 눈을 덮은 채 아래오 흘러내렸다. 이따금 손으로 할머니의 입을 가린 채 웃는 할머니를 보면, 눈은 감겨 있고, 어깨는 흔들렸다.-39/40쪽
릴리와 노너 할머니는 그날이 그날인 양 변함없이 되풀이되는 습관에 젖은 익숙한 샹활을 좋아했던 것 같다. 그런데 핑거본에서는 그렇게 지낼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모든 인간관계가 다 새로울 수밖에 없었기에 고독한 것보다 더 못마땅했다.-46/47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