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도 내가 찾으려고 했던 페이퍼를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는데 오늘도 전영애 선생의 책 <꿈꾸고 사랑했네 해처럼 맑게>을 읽으며 예전에 내가 올렸던 글이 있어서 찾으려고 했더니 역시 찾을 수가 없다. 나름 태그를 잘 사용한 줄 알았는데 아직도 부족한가 보다. 


어쨌든 오늘 내가 읽은 부분은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이

근심에 찬 여러 밤을

울며 밤을 지새워보지 않은 이

그대들을 알지 못하리, 천상의 힘들이여


예전에 엔 군이 볼티모어에서 (바로 작년에 있었던 일이네) 아르바이트로 가가호호를 하면서 pesticide 서비스를 판매하는 일을 했었다. 3개월 동안. 매일 몇 십 마일을 걸어서 모든 집을 노크하고 다녀도 문을 열어주기는커녕 어떤 집은 개를 내보내서 쫓아내는 집도 있다고 했다. 차도 없이 회사에서 어떤 길에 내려주면 데리러 올 때까지 배고파서 꼬르륵거리는 배를 움켜쥐고 세일즈를 하려고 했던 아이. 돈이 없지는 않았지만 목표(트럭을 사려는)가 있기 때문에 돈을 가급적이면 안 사용하려고 했다고 한다. 


어쨌든 그곳은 비도 자주 오는 곳이라서 비를 맞으며 빵을 먹기도 자주 했다는데, 비가 오는 어느 날 자기가 왜 다른 친구들처럼 집에서 편안한 일을 안 하고, 더구나 집하고 완전 반대인 곳에 와서 이 고생을 하고 있나? 뭐 그런 생각이 들면서 비를 피한다고 웅크리며 빵을 먹는데 눈물이 나더라고 했다. 사실 엔 군은 그 일을 할 필요도 없었고 그 일을 했다고 해서 돈을 엄청 많이 번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 나쁜 회사가 순진한 젊은이들을 이런 식으로 이용해 먹는 것인지 모르지만, 이 회사에서 아이들 각자를 개인 사업자로 등록을 해서 더 많은 세금을 내게 된 것이다. 엔 군은 팀에서 가장 많이 판매한 사람이 될 정도로 열심히 일했지만 결국엔 그만큼 세금도 엄청 많이 냈다. 


어쨌든 나는 언제나 괴테의 저 구절을 보면 내가 보지 않았지만 상상이 가는 엔 군의 모습이 떠오른다. 회사에서 준 회사 티셔츠를 입고 회사 로고가 적힌 모자를 쓰고서 잘 못 먹어 살이 속 빠져 고생하는 모습인데 손에는 비와 눈물로 범벅이가 되어 먹기도 힘들어 보이는 빵을 들고 있는 모습. 언젠가 내 꿈에 나타났던 모습, 악몽이라 다행이었지만. 


나도 그런 빵을 먹어봤다. 하지만 나라는 인간은 참 단순하고 머리가 나빠서 그런가 잘 기억이 안 난다. 전영애 선생처럼 어려웠던 일들이 생생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데 그건 아무래도 내 어려웠던 일이 그분과 비교도 안 되기 때문이겠지. 아니면 내 기억의 매커니즘은 너무 잘 운영이 되어서 (내 입장에) 안 좋은 기억을 차단하는 능력이 있을지도 모르고.


자기가 공부 잘 한 것을 이렇게 겸손하게 말하시는 분은 처음 봤다. 그분의 글을 읽고 넘 부끄러웠고, 조그만 일도 떠벌리는 내가 더 부끄러웠나? 눈물이 났다.

감옥에 앉아 있는 사람들도 있는데, 저도 어딘가에 앉아는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서관에 쭈그리고 앉았고, 그러다보니 졸업 때 그만 성적이 너무 좋아 요란한 상을 받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게다가 학과를 빛냈다고 큰 특전까지 받았지요. 조교 보조가 되어 저녁에 학과 사무실을 지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도서관에서 쭈그리고 앉아서 공부한다고 다 졸업식에 요란한 상을 받거나 학과를 빛내고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똑똑한" 여자가 어디서 용인되는 시절이 아니었지요. 더욱 답답한 것은, 똑똑하지도 못하면서, 똑똑한 여자 취급을 안 받으려는 노력까지 끝없이 기울여야 하는 상황들이었습니다.


똑똑한 여자가 용인되지 않는 시절인데 똑똑한 여자 취급 안 받으려고 노력해도 똑똑한 것은 감출 수 있는 것이 아니지. 기본도 없이 어떻게 살림하다가 시험 봐서 붙는다는 것 자체가. 정말 머리도 좋으신데다 노력도 엄청 하시는 분인 것 같다. 이런 분을 어찌 이겨! ㅎㅎㅎ 그러니 군대 갔다 돌아온 그 조교는 남자라서 전영애 선생의 조교자리를 뺏을 순 있어도 시험에서 이길 순 없었던 것이리라.


어쨌든 내일 아침 6시에 일하러 가야 해서 글을 길게 쓸 수 없지만, 전영애 선생의 글을 읽으며 반성도 하게 되고, 새로운 다짐도 하게 되고, 아들도 생각나고, 감정이 막 춤을 추는 것 같다.


엔 군은 그렇게 비와 눈물에 젖은 빵을 먹어서 그런가 아이가 단단해졌다. 뭘 하든 나는 그 아이가 어려운 고비가 와도 잘 넘길 거라고 믿는다. 이제는 예쁜 여자친구가 생겨서 행복해하면서 학교 공부를 열심히 하는 엔 군이 대견하다. 나는 나대로 어려운 시기를 겪긴 했지만, 내가 겪어야 하는 어려운 시기는 아직 남아있는 것 같다. 슬기롭게, 진득하게 받아들이자. 약은 생각으로 어떻게 넘기거나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넘기려는 생각은 하지 말자고 다시 다짐해 본다.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강하고 멋진 사람일지도 모르니까.


어떤 책들은 이렇게 딱 필요한 시기에 만나게 된다. 기적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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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2-10-18 17: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영애 선생님 볼수록 대단하신 분 같아요. 누구에게나 그런 고생스러운 순간들이 있겠죠. 눈물젖은 빵! 그런 경험들이 피와 살이 된다고 해도 때론 그것을 외면하고 싶을텐데 결국 그 상황을 감내하고 받아들여야 넘어설 수 있는 것 같아요.
신형철 신간이 나왔네요. 전작을 잘 읽었는데 이번엔 어떨지 궁금합니다. 몇몇 분들이 읽어주시겠죠?^^;

라로 2022-10-19 11:11   좋아요 1 | URL
정말 대단하신 분이에요. 머리가 좋고 대단한 집념과 뭐 그런 것도 그렇지만, 저는 이분의 우직함이 젤로 좋아요. 순수하고 꾸밈없는 모습도 그렇고요,, 예전에 곽아람의 <공부의 위로>인가 읽었을 때 교양수업 들은 이야기 나오는데 지금 되집어 보니까 전영애 교수님의 수업을 곽아람씨가 들었던 거 아닌가? 싶어요,, 앞뒤가 맞는다고나 할까요? 그때 그 부분 읽으면서 엄청 부러웟거든요. ㅎㅎㅎ
암튼, 너무 멋지게 표현하셨어요,, 감내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며 안 되는 것이 있는 것 같죠!^^
신형철은 사놓기만 하고 읽지 않은 책의 작가인데,, 이제 읽어야 할 것 같아요.^^;

mini74 2022-10-18 19: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진짜 대견하고 멋집니다. 그런데 왜 제눈엔 ㅎㅎ 예쁜 여자친구가 생겨서…. 가 눈에 쏙 들어오지요. ㅎㅎ 멋진 젊은이 엔군 축하축하 *^^*

라로 2022-10-19 11:12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 예쁜 여자친구 생겨서가 사실은 포인트거든요!!ㅋㅋㅋㅋ 제 글이 성공한 거죠!!^^;;;

햇살과함께 2022-10-18 19: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pesticide가 뭔가 찾아봤네요 ㅎㅎ
진짜 살충제?!
자녀분들이 다들 라로님 닮았나봐요~

라로 2022-10-19 11:15   좋아요 2 | URL
살충제로 많이 쓰이지만 살충제를 파는 회사는 아니고 방역회사(?)라고 하나요? 소독하고 방역해주는 회사의 서비스를 파는 거였어요,, 저희 엔 군처럼 순진한 아이들이 많았는지 여름마다 그거 한다고 하는 애들이 엄청 많다네요,,, 저희는 반대하고 싶었지만 해봐야 딴소리 안 하고 부모 말이 옳다는 거 알 것 같아서 그냥 하게 했어요. 그랬더니 저런 얘기를 해주더라구요. 그래서 이번 여름방학엔 그 메니져가 제 아들 다시 일하러 오면 얼마를 더 준다고 꼬셨는데도 안 가더라구요. 경험으로 아니라는 것을 배운거죠.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