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몬 드 보부아르의 책 <모든 사람은 혼자다>를 아직도 읽고 있다.














쓰면서 읽다 보니 진도가 엄청 느린데 또 그만큼 충실하게 읽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더구나 책이 얇아서 곧 끝나겠다는 아쉬움까지 남겨주니 책 읽기가 전혀 지루하지 않다. 내용도 좋다. 이 책은 의식의 흐름으로 글을 쓴 것은 아닐 텐데, 읽다 보면 그런 느낌이 든다. 


오늘 필사한 부분은 [타인]편인데 이게 또 밑줄을 엄청 긋게 만드네. (근데 이 책은 밑줄 안 긋고 그냥 포스트잇 붙이며 읽고 있다는, 그러니까 포스트잇 엄청 붙이게 만드네임.ㅋ)


거울에 비친 나를 바라보며 내 개인사를 아무리 말해 보아도 소용없다. 나는 결코 나를 하나의 충만한 객체로서 파악하지 못한다. 나는 나 자신 속에서 바로 나 자신인 저 공허를 느낀다. 나는 나 자신이 즉자적으로 존재하지 않음을 느낀다. 바로 그 때문에 어떠한 자기예찬도 진실로 불가능하다. 나는 나를 나 자신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젊었을 때 내 친구들은 그 빛나는 독창성으로 나를 눈부시게 했고, 나는 아무런 개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에 항상 슬퍼하였다.

p.87


보부아르 같은 사람도 젊어서는 자신을 남과 비교하면서 저런 생각을 했다니, 내가 그런 생각을 여전히 하고 있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구나,,라는 깨닮음.


내가 생각하기에 타인은 이 훌륭하고 접근하기 어려운 성격을 어렵지 않게 가지고 있다. 그런데 내 마음 한가운데에는 공허만 있다. 나에게 있어서 타인은 세계 속에 있는 하나의 대상이고 하나의 충만성이다. (중략) 타인은 그저 거기, 자신 속에 웅크려 있는 채, 무한 앞에서 열려 있는 채, 내 앞에 있을 뿐이다. 그런데 만일 타인이 나의 행위들을 바라본다면, 나의 행위들 또한 그의 눈에는 무한히 크게 보이지 않을까?

p.88


여기서 무릎을 탁 친다. (아파,ㅜ)

다른 사람이 나에게 타인이듯, 나 역시 다른 사람에겐 타인!! 이미 알고 있는 당연한 사실도 새롭게 느껴지게 하는, 아니 새롭게 느끼는 나는 바본가?ㅋ


어린아이는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쓰고 나면 곧 부모에게 보이려고 뛰어간다. 그는 부모의 칭찬을 받고 싶어 한다. 그림은 그것을 보는 하나의 눈을 요구한다. 즉 누군가에게 이 구불구불한 선들이 배도 되고 말도 되어야 한다. 그러면 기적이 일어난다. 아이는 색을 범벅으로 칠한 그 종이를 자랑스럽게 들여다본다. 그때부터 거기에는 진짜 배가 있고 진짜 말이 있게 된다. 만일 혼자였다면 이런 엉성한 선들에 감히 확신을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p.88-89


어려서부터 우리에게 타인이 필요한 이유이겠지. 어떤 타인은 기적을 가져다 주기도 하지만, 또 어떤 타인은 지옥을 줄 수도 있다는 것을 역시 잊으면 안 되는데도 나는 또 얼마나 자주 잊어버리는가? 내 문제는 늘 타인이 나에게 기적을 가져다 주길 바라는데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기적을 가져다 주는 타인은 사실 거의 없다. 그래서 내가 먼저 타인에게 기적을 가져다 줘야 하는 것인가?


때때로 우리는 타인의 도움 없이 우리의 존재를 완성하려 한다. 나는 들판을 걸어간다. 풀을 꺾고, 발로 차고, 언덕에 오른다. 이 모든 것을 아무런 증인 없이 한다. 그러나 누구라도 평생 이러한 고독에 만족할 수는 없다. 산책을 끝내자마자 나는 친구들에게 그 산책 이야기를 하고 싶어진다. 칸타울레 왕은 왕비의 미모가 만인의 눈에 아름답게 비치기를 원했다. 소로는 몇 년 동안 숲 속에서 혼자 살았지만, 그러나 숲에서 나와 <월든>을 썼다. 그리고 알랭 제르보는 <혼자서 대서양을 횡단하고>를 썼다. 성녀 테레사조차도 <마음속의 성서>를 썼고. 생 장 드 라 크루아는 송가를 지었다.

p.89


그래서 우리는 쓰는 거구나. 알라딘에 글을 올리는 내 자신을 가끔은 이해할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타인의 눈을 요구하기 때문인 것이었구나. 내가 겪은 일이 타인의 눈을 통해서 진짜가 되어 지는 과정인 것인가? 악, 갑자기 어려워짐.ㅋㅋㅋ


그러나 내가 바라는 것은 추월되지 않는 목적, 참으로 목적인 목적을 선택하는 일이다. 그 자체로 응고되어 있는 사물은 나를 정지시키시에 충분치 않다고 한다면, 그런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바로 타인이 아닐까?

p.90

그렇다면 나는, 또 우리는 타인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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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책읽기 2021-07-07 00:1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라로님. 고마워요. 덕에 보부아르 눈동냥했어요. 재밌군요. 철학자로군요. 깨닫는 라로님 짱 귀여우심^

라로 2021-07-07 01:30   좋아요 2 | URL
철학책 잘 안 읽게 되던데 이 책은 제목도 그렇고 얇고, 좋으네요. 근데 정말 너무 얇다는요,,, 그래서 추천은 못 하겠어요.ㅠㅠ

새파랑 2021-07-07 07: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릎을 너무 쎄게 치셨나봐요^^ 글이 너무 좋네요. 이 책 읽어봐야겠어요. 문장이 너무 좋네요 ㅜㅜ

라로 2021-07-07 10:46   좋아요 2 | URL
이 책 넘 얇아서 좀 추천하기가 그렇긴 하지만(가격 대비 얇아요.^^;;) 저는 두꺼운 철학책 뭔 소리 하는 줄 모르면서 읽는 것 보다는 알뜰한 철학책 같아서 좋아요. 새파랑님도 좋아하실 것 같은 느낌적 느낌은 듭니다요.^^

syo 2021-07-07 11:1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좋죠? 저도 밑줄 긋다가 책에 색칠함....

그레이스 2021-07-07 11:40   좋아요 3 | URL
맞아요
다 긋게 되는 경우가 있죠?^^

라로 2021-07-07 21:09   좋아요 1 | URL
좋아요!! 정말 포스티잇 아까워 하면서도 계속 붙이고 있;;;

그레이스 2021-07-07 11: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결혼한 독신녀라는 부제가 재밌네요
시몬느 보부아르, 글을 참 잘 쓰는것 같아요
생각도 명료하고.

라로 2021-07-07 21:11   좋아요 1 | URL
결혼한 독신녀라는 부제가 그녀에겐 어울리죠!!^^
저는 그녀의 글을 본격적으로 읽은 것이 이책이 처음이에요.
단편적으로 그녀의 글을 읽기는 했는데, 참 좋네요.

난티나무 2021-07-07 14: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달라서 한참을 찾았네요. 원제랑 늠 달라요. 부제는 좀 맘에 안 들고요. 못 읽어도 원서로 사야겠다 찜해 놓은 책인데 얼른 사야 겠어요.^^

라로 2021-07-07 21:14   좋아요 0 | URL
불어 제목은 뭐에요??? 결혼한 독신녀,, 맘에 안 드세요??^^ 책이 무척 얇아요. 저는 불어는 알파벳 어떻게 발음하는지도 모르니까 뭐라 말씀드리기 뭣 하지만, 한국어에 비해 긴가요? 짧은 가요?? 영어랑 비교하면 더 짧은가요?? 긴가요?? 무튼 무지 얇은 책입니다요, 쿨럭. 사실 저도 번역이 좀 막히긴 했어요. ‘지양‘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는데 여기 ‘지양‘이라는 단어가 내가 아는 그 단어 맞아? 그런데 왜 여기 있지?? 그런 순간이 몇 번 있었어요. 불어하시는 난티님 넘 멋져요!!! 델프 비2 실력이면 이런 책은 무리겠죠??(제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난티나무 2021-07-08 04:59   좋아요 0 | URL
원제는 Pyrrhus et Cinéas 이고요. 프랑스판 실물은 아직 못 봤지만 가격으로 봐선 얇을 것 같구요.ㅎ
부제는 ‘사르트르의 애인’과 뭐가 다른지 모르겠어서요. 단어들 특히 여자라는 범주에 보부아르를 가두는 거잖아요. 후려치기. 그래서 싫어요. ㅎㅎㅎ
불어 한다고 말하기 참 부끄러운 실력이라…ㅠㅠ 그런데 델프 비2면 잘 하는 실력 아닌가유 ㅋㅋㅋ 암튼 <제2의성> 못 읽겠더라고요. 어려워 ㅠㅠㅠㅠㅠㅠ

라로 2021-07-08 16:16   좋아요 0 | URL
제목이 정말 완전 딴판이네요!!!!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번역본은 그래서 때론 위험할 수가 있어요. 진짜 이 원어 제목에서는 저 부제가 나올리가 없을 듯 싶어요. 넘 심했다. 그래도 사르트르의 애인보다는 낫다는 생각이에요. 어쨌든 깊이 생각할수록 마음에 안 드는 부제이긴 하지만요. 델프 비면 잘하는 실력인가유? 지 딸이 델프 비라고 혀서 어떤 실력인지 궁금했시유.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