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의 즐거움 롤랑 바르트 전집 12
롤랑 바르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동문선 / 199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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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의 책은 동문선에서 문예신서를 통해, 그리고 롤랑 바르트 전집을 통해 접할 수 있다. 롤랑 바르트의 이 책 텍스트의 즐거움은 "텍스트의 즐거움"과 "강의", 그리고 스티븐 히스와의 "대담"등이 엮여있으며, 각 인터뷰에서 발췌하여 엮은 롤랑 바르트의 주요어 20개에 대한 이야기들이 실려있다. 

 "텍스트의 즐거움은 내 육체가 그 자신의 고유한 상념을 쫓아가는 바로 그 순간이다. 왜냐하면 내 육체와 나는 동일한 상념을 가지고 있지 않기에."라는 롤랑 바르트의 텍스트에 대한 주관, 그리고 텍스트의 즐거움 - 곧 텍스트를 즐기기에 대한 긴 화두에 대한 이야기들이 이 책에 나타나 있다.

읽혀지는 것과 읽혀지지 않는 것의 리듬텍스트는 그 자체로써 유희하며 독자는 그 텍스트를 가지고 유희하며 그것을 재생산할 실천을 추구하는데서 두번째로 유희를 하는, 그가 텍스트를 바라보는 방법에 대하여 몇가지의 이야기들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어쨌거나 롤랑 바르트이건 그레마스이건 데리다이건, 미셀 푸코나 레비 스트로스나 그들의 기호학은 마치 다 말장난에 불과한 것 같기도 하다. 롤랑 바르트가 지식인은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역사의 찌꺼기라고 하는 것처럼 그저 그들의 피나는 연구는 언어에 관심을 가진 인류의 한 역사의 부스러기 쯤 된다는 것. 그렇다면 그 부스러기와 찌꺼기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하고 줄 긋고 있는 나는 역사의 쓰레기를 쫒아다니는 바퀴벌레정도 될려는지. 

 인류의 역사는 모두 권력의 투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진짜라면, 권력에 대항하여 싸우기, 그리고 그 권력이 가장 깊게 깃든 곳이 언어와 언어체(랑그)라는 그의 주장, 다시 말해, 반동적인 것도 진보적인 것도 아닌 다만 파시스트적인, 말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말하게끔 강요하는 그 권력에 대한 도전들의 찌꺼기, 그리고 그 도전들의 찌꺼기를 추종하는 지식인 흠모 집단. 뭐 그런 것들로 구성된 게 역사와 인류가 아닌지. 

 학부때, 문학선생이 그런 말을 했었다.

문학은 沒有用의 것이라고. 소용이 없는 것이 문학이다. 文學은, 글에 관한 것들이다. 곧 모든 지식의 바탕이다라고 한다면, 그 선생의 이론과 롤랑 바르트는 어느 한 선에서 닿아있다. 

 아이를 낳은지 백일도 되지 않았고 매일 매일 미역을 불리고 미역국을 끓이고 아이의 기저귀 값이 비싸다는 것을 고민하고 있는 내가 도데체 왜 이런 책을 읽고 있는가에 대해서 적당히 둘러댈 그 어떤 변명도 찾지 못했다. 굳이 왜? 라고 묻는다면, 그냥? 이라고밖에 대답할 수 없는 이유.

사람은 가끔 그렇게 엉뚱하고 비실용적인 짓들을 한다.

어쩌면 언어와 언어체에 대해서 지지부지하게 평생을 매달린 롤랑바르트를 비롯한 일단의 지식인들 역시, 나만큼 엉뚱하고 비실용적인 짓을 ─ 평생토록 하셨을 뿐 어닐까. 

 세상 어딘가에, 비슷한 이유로 나같이 비실용적이며 어울리지 않는 짓을 할 나같은 바퀴벌레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2006. 5. 11.

 

PS. 기호학 서적은 그리 어렵지 않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한 문장을 여러번 읽을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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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27 19: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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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
롤랑 바르트 지음, 이상빈 옮김 / 강 / 199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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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기호학 공부를 좀 해보겠다고 "깝쭉"거리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니까, 그 때는 정말 그야말로 "깝쭉"거리기만 했던 시절이라, 민예총이나 한겨레 문화센터에서 하던 기호학이나 문화비평에 관한 강의를 한 두 개 정도 들으면서 - 요즘은 그런 강좌가 많지 않은 듯 하다 - 피해갈 수 없는 도서 충동구매로 발동을 걸던 것이었는데, 기호학에 대한 기본 개론서를 세 권 정도 읽고, 롤랑 바르트를 시작하려고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와 "텍스트의 즐거움"을 사놓고, 이도흠교수의 책을 한 권 준비하고.. 뭐 그러고 있었다. 

 그러나 기호학이라는 것은 매우 매력적인 학문이긴 하지만 언어학적 접근으로 시작하여 일단 언어학에 대한 기본적인 개인적 사념을 정리하지 않으면 중도에 포기하기 쉬워지는 학문이라고나 할까. 그러니까..책을 읽다가도 중간에 막혀버리는, 그런 점이 있었다. 물론 책을 그냥 읽어대면 그만이겠지만, 그 떄는 어쩌면 좀 더 의무적으로 공부하는 의미로 책을 대하려 했었는지도 모르겠다. 

 기호학이라는 것은 간단히 말해,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언어적인 수단이 일종의 기호이며, 그 기호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고민해보는 학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데, (감히 내가 정의내리는 것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문화비평과 매우 근접한 학문이라는 것은 기억한다. 

 어느 날 갑자기 그러고 싶을 때가 있다. 머리가 빠개지도록 난해한 글을 읽고 싶은 것이다.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말장난임에 분명한 문장때문에 머리속에서 마구 도표를 그려가면서 정리를 하느라 뇌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그런 글들. 

 이 책은 기호학자이며, 언어학자이고, 또한 언어의 유희를 즐겼던 학자 - 저 표지의 멋진 인상을 가진 - 롤랑 바르트의 낙서장이다.

물론 옮긴 이의 말에는 이 책은 자전적 에세이 겸 평전과도 같으며, 그의 후기사고를 총체적으로 통합 혹은 연장시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하였지만, 내가 보기엔, 그의 짧은 단상들을 도처에 메모해 놓은 것을 모아서 책으로 만든, 그의 메모장, 낙서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책의 질이 떨어진다고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을 표현하는 글은, 꼭 정자세를 하고 써내려간 정갈한 원고만이 그 사람을 표현할 수 있는 기호는 아니다. 어쩌면 롤랑 바르트는 자기 자신을 가장 진솔하고 가장 잘 표현된 것이 짧게 적어놓은 메모글들임을 세상에 알려주고 싶었던 것일게다.

책의 시작은 그의 추억이 담겨있는 사진 몇 장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에 얽힌 이야기들을 적는다. 그리고 책은 내내 짧은 제목과 그에 대한 그의 단상으로 이어지는데, 그 모든 단상엔 당연히 그의 흔적이 남아있으므로 롤랑의 사상과 학문등이 고스란히 표현되고 있다. 언어의 유희, 기호학의 표현 - 그 진수를 정확히 간파한 현명한 학자의 고상한 유머라고 할까. 

 이 책은 롤랑 바르트의 아주 진솔한 생각들을 담고 있으므로, 이 책을 기점으로 그의 정갈한 글들에 진입할 수 있다.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인 것처럼 이 책을 종착점으로 삼는 사람도 있겠지만, 뭐 어쩌겠는가. 멋모르고 먼저 읽어버린 것을. 

 메모. 일기. 낙서.

그 모든 것들이 기호가 되어 표현하고 있는 우리 자신은 어떤 모습일지.

롤랑 바르트의 롤랑 바르트는 매력적인 평전임에 틀림없다.

 

2006. 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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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네 시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남주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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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원제인 Les Catilinaires 는 프랑스어로 키케로는 《카틸리나 탄핵 연설 In Catilinam》편들을 가리키며 보통 명사화하여 논박, 야유등을 뜻한다고 한다.

 

프랑스에서 주목받는다는 아멜리 노통브. 물론 그녀가 진짜로 주목받고 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간혹 번역되는 책들중에 현지에서 전혀 유명세를 타지 못하지만 정말 좋은 작가이거나, 혹은 유명하나 좋은 작가에는 들지 못하거나, 아니면 한 때 전성기를 누렸던 반짝 작가들은 경우도 있지만, 아멜리 노통브는 그러거나 말거나 예전에 읽었던 그녀의 아주 짧은 소설 《불쏘시개》의 느낌이 좋아서 또 다른 책을 선뜻 고를 수 있게 하는 힘이 있는 작가다.

 

이 책의 내용은 책의 표지 삽화가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많지 않은 사람이 나오는 소설. 주인공은 4명이다. 4명은 자아와 타자로 대체되어 편을 가르게 되는데, 주인공 내외와 이웃집 내외가 처음엔 그 대결구도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이웃집 내외의 부인은 그 대결구도에서 살짝 삐껴 나와 있다. 그리고 그 대결구도는 주인공 내외가 나 - 부인의 구도로 변형되고 이웃집 내외의 남자가 구도에서 빠져버리고 나 - 부인 & 이웃집 부인 등의 구조로 변형된다.

길다란 식탁을 가운데에 놓고 그려진 자아와 타자, 우리와 그들, 이라는 개념으로 그려진 잘 그려진 삽화가 소설의 전체적인 맥락을 표시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비만, 게으름,  침묵, 그리고 외로움에 대한 인간존재의 허무함과 나약함, 무력함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비만이라는 것은 게으름과 탐욕이 잘 조화되어 나타날 수 있는 증상이며, 그로 인한 후유증은 반복되는 게으름과 반복되는 탐욕, 그리고 무기력함과 타자와의 단절, 사회로부터의 격리까지, 어마어마한 파장을 매우 오랫동안 길게 끌고 갈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 가장 쉽게 발생할 수 있는 질병인 비만은 질병이 아닌 듯 하지만 그 영향력은 그 어떤 질병보다도 대단한데, 이건 단순한 습관으로 인해 그럴 수도 있지, 라고 쉽게 무시했다가 나중엔 사회생활에 문제가 발생할 만큼 외적으로도 내적으로도 변화를 몰고 오기 때문이다. 스스로도, 그리고 타인들과의 교류에 있어서도 문제가 발생하는 이 문제에 대해서 저자는 어떤 키 포인트를 찾아낸 듯 했다.

 

주인공 내외가 이사를 하게 된 곳은 이웃이라곤 있어도 없을 듯한 조용한 마을의 아름다운 집.

그리고 거기서 우연치 않게 맞딱뜨리게 된 이웃집 내외. 별로 필요하지도 않았던 예상밖의 이웃.

이 소통 단절이 충분히 예상되는 배경에서 조금 더 그들의 격리되고 거리감을 둘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비만이라는 일종의 현상이었다. 그 현상으로 주인공들은 끝까지 소통에 성공하지 못한다. 마지막에 물론 주인공의 부인과 이웃집 부인이 소통을 시작하는 듯 하지만, 예리하게 관찰한다면 그것은 소통이 아니라, 종(種)의 구별을 전제로 한 자비로움정도임을 파악할 수 있다.

 

그래서 결론이 살빼자인가?

 

인간과 인간, 소통이 단절되면 어떤 결과가 따라올 수 있는지, 그리고 그 단절된 소통사이에서 어떤 내적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곱씹어 볼 수 있는 여지를 남겨주는 좋은 작품. 소통단절에서 시작된 그들의 야유, 그들의 논박에 대해서. 아니, 우리들의 논박과 우리들의 야유에 대해서. 내가 들을 야유와 내가 할 야유에 대해서.

 

그녀의 다음 작품(내가 읽을)이 기대된다.

 

2006. 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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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3부작 Mr. Know 세계문학 17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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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든지, 기대하지 않고, 줄거리를 모른 상태에서 즐기는 이야기거리가 재미있다.

영화도 그렇듯이, 책도 그러하겠지만.

간혹 책이라는 것은 뒤통수를 치는 반전이나, 뉴욕 3부작 같은 작품을 만나면 처음부터 되돌려 다시 읽어야 하는 난감한 문제가 펼쳐지기도 한다. 뉴욕 3부작은 그렇게 고리처럼 엮여있는 3편의 중편소설이다.

 

물론 제목에는 폴 오스터 장편소설이라고 적혀있다.

어떻게 보면 이 책은 한 편의 긴 장편소설일 수도 있고, 어떻게 보면 3편의 중편소설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말하자면 3편의 중편소설이 독립된 이야기를 가지고 있고, 그 3편의 유기적인 결합으로 인하여 1편의 장편소설이 또 다시 탄생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1편 / 유리의 도시 , 2편 / 유령들, 3편 / 잠겨있는 방, 으로 이어진 이야기들은 탐정소설의 형식을 빌리고 있다. 형식을 빌렸다는 이야기는 탐정, 쫒는 사람, 쫒기는 사람과 미스테리한 사건이 등장한다는 것뿐, 탐정소설의 심리적이거나 심각한 알리바이등까지 빌려왔다는 것은 아니다.

 

첫 작품 유리의 도시를 읽고 나서 나는 매우 실망하였고, 이런 젠장. 폴 오스터는 간혹 별루인 경우가 있어. 라고 읖조리며 빨리 읽어치워야겠다 하고 두번째 소설로 진입했다. 두번째 유령들 역시 너무나 추상적인 등장인물들의 이름 - 블루, 블랙, 화이트, 브라운 등 - 때문에 기기묘묘한 분위기를 풍기더니 3번째 잠겨있는 방의 짜임새 있는 스토리에서야 결국 작가가 이 세편의 소설을 통해서 말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서, 등장인물들의 앞에 두 소설과 중첩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결국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책을 덮지 못하고 다시 앞으로 돌아가 책장을 앞뒤로 넘겨가며 퍼즐맞추기처럼 맞추게 된다.

 

이 책이 말하는《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곳》에 대한 이야기는 보들레르의 Il me semble que je serais toujours bien laou je ne suis pas. 다른 말로 하자면 : 나는 내가 지금 있는 곳이 아닌 곳에서라면 언제나 행복할 것 같다. 좀더 의미에 맞게 해석한다면 : 어디든 지금 내가 있지 않은 곳이 내가 나 자신인 곳이다. 또는 아주 대담무쌍하게 옮기면 : 어디든 다른 세상 밖이기만 하다면. 에 대하여 말하고 싶어하는 것이며, 〈글을 쓰고 싶지 안다는 생각을 하면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 없다.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 글을 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할 수 없다〉는 스피노자의 말을 빌려 "글쓰기는 오랫동안 나를 사로잡았던 병이지만 이제 나는 그 병에서 회복되었다네"라고 말하고 싶은 폴 오스터 자신의 이야기를 돈키호테의 세르반테스처럼 스스로를 투영시키는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폴 오스터는 분명히 쉽게 쓰는 작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신병이 난 것처럼 신들린 듯 한 번 펜을 잡으면 미친듯이 속도전으로 써내려가는 작가.

평생 글쓰기의 열병을 앓으면서 그 글쓰기의 병에서 회복되고 싶어하는 작가가 아닐런지. 빵굽는 타자기가 그의 초년병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는 과정이었다면 뉴욕 3부작은 그의 작가 중기, 인생의 화두를 극복하려는 안간힘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어쩌면 그의 분산된 뉴욕 배경의 소설들을 통해 21세기 뉴욕의 세르반테스가 되고 싶은 지도 모르겠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으시는 분들은 이 책의 맨 앞 부분부터 인물의 이름 하나 놓치지 말고 꼼꼼히 읽어보시면 알게 되실 듯.

 

폴 오스터의 힘은, 읽는 것의 즐거움을 누리게 한다는 매우 쉽고 간단한 원리에 있다.

아, 물론 첫번째 이야기인 "유리의 도시"를 읽고 빨리 읽어치워야지 했던 나의 판단은 대단한 오판이었음은 강조하지 않아도 될 듯.

 

2006. 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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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들은 왜?
미다스 데커스 지음, 이옥용 옮김 / 영림카디널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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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다스 데커스 - 1946년생으로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저명한 생물학자, 네덜란드외에 유럽에서도 사랑받는 작가, 대표저서로 《시간의 이빨》이 있음 

 
이 책을 읽다보면 다시 앞날개나 뒷날개 쪽을 펼쳐서 저자가 뭐하는 사람인가를 찾게 된다.

가끔 그런 책들이 있다. 기발하거나, 독특하거나. 어떤 학술을 펼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에세이를 적고 있는데 그게 너무 신선해서 뭐하는 작자가 쓴 책인가.. 하고 궁금증을 유발하는 글솜씨. 바로 이 책이 그런 류이다. 

 생물학자인 미다스 데커스가 한 꼭지당 2-3페이지 정도의 짧은 산문들을 썼고 그 산문들을 묶어 펴낸 책인데, 동물과 인간 / 애인 / 가금 / 곤충 그리고 그 밖에 기어다니는 것들 / 인간과 동물 이라는 다섯개의 카테고리로 글이 나뉘어 있다.

물론 주 테마는 동물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얘기하는 포유류, 양서류, 파충류 등만이 아니고 곤충과 조류까지 포함한 ─ 그리고 궁극적으로 인간을 얘기하는 그런 글들을 모아놓았는데, 작가의 사고방식의 독특함과 시선의 신선함이 상쾌할 정도이다. 말하자면, 나무늘보에게 배우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방식에 대한 것, 보노보의 특성을 들어 가족모임에 초청하면 즐거울 것이라는 발칙한 상상, 인간의 남성도 몸속에 생명체를 품을 수 있다는 촌충이야기 (우리가 종종 하기도 하는 이야기), 고양이 문화가 발전했던 이집트가 고대 문명중 가장 성숙했던 것이 틀림없다는 우격다짐식 논리까지 , 읽다보면 아, 이 양반 독특한 걸. 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가끔 그 신선한 아이디어들이 너무 앞서가서 글을 읽다보면 엥? 이게 뭔 소리였지? 하고 다시 저자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 글을 다시 되돌려 읽어야 하는 문제점까지 발생하는 신선한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생물학자인 저자의 특색에 맞게 그는 등장하는 모든 동물들의 특징을 아주 잘 파악하고 있으며, 그런 특징들을 가지고 소재를 삼아 명쾌한 글들을 만들어내고 즐거운 상상을 하게 해주는 것이다.

더불어서 즐거운 세상이라는 것은 이 지구상에 사람이라는 종족만이 사는 것이 아니라 동물과 식물 곤충과 조류까지 모두 함께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도출하게 만드는, 훌륭한 글들이 아닌가 싶다. 

 톡톡튀는 아이디어를 더 이상 세스고딘의 경영지침서에서 찾기 지쳤다면, 미다스 데커스의 새로운 동물우화에 빠져서 혼자 킥킥대는 즐거움을 느껴보시길.

 

2006. 4.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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