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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이다. 대체 이 땅 위를 흐르는 시간은 왜이리도 참혹한지. 세월호 말고는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 4월을 지나, 늘 죄인 된 심정으로 맞는 5월을 지났더니 무고한 사람들에 대한 살육이 온 땅을 휩쓸고 지나갔던 6월이 되었다.


5월에는 한 강 소설가님의 소년이 온다를 다 읽고, 한 강 소설가님이 나오신 문학동네 채널1과 창비 라디오 책다방의 팟캐스트를 들었다. 채널1에서 신형철평론가님이 '광주의 5월이 모독당하는 현실'에 대해 언급하실 때, 라디오 책다방에서 김두식 교수가 '나는 민주화가 되면 그 때 권력을 잡던 그들이 더이상 정치판에 머무를 수 없을 줄 알았다, 그들이 더이상 자기 얘기를 큰 목소리로 못 할 줄 알았다, 그들 대신 새로운 야당이 생기고 새로운 여당이 생길 줄 알았다'라는 내용의 이야기를 하실 때 숨이 막힐 듯 갑갑해져서 중지 버튼을 누르고 잠시 쉬었다.


이 달에는 어떤 책을, 어떤 마음으로 책을 읽게 될까. 재작년 12월처럼 모든 게 점점 더 나빠질 뿐이라는 사실을 또다시 경험하고 잔뜩 웅크린 마음으로 읽게 되진 않을까. 찌푸려 있던 미간을 억지로 펴며, 눈길이 간 책들을 꼽아 본다.




지난 달에 소년이 온다를 읽으며, 작년 5월에 읽던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 가 떠올랐다. 뭐야? 또 광주야? 광주에 대한 책 많잖아. 광주 얘기를 아직도 해야 해? 라는 말들을 들을 때마다 참담한 기분이 든다. 용산에서, 대추리에서, 강정에서, 끊임없이 광주가 반복된다. 세월호 역시 어쩌면 광주의 어떤 모습일지도. 어떻게 얘기하지 않을 수 있냐? 고 되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치 유태인들이 아우슈비츠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하고 또 하는 것처럼. 거기서 생존한 이들이 거기서의 경험을 계속 말하고, 거기서 생존한 이들의 후손들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삶을 복원하려 노력하는 것처럼. 이 책의 저자인 프리모 레비 역시 아우슈비츠가 잊혀지지 않게 만든 생존자들 중 한 명이다. 죽기 1년 전에 쓴, 유서 같은 책이라는 책 소개 때문에 더 읽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라는 제목을 보고 세월호가 생각나 오싹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이 달에 가장 읽고 싶은 책.



죽음에 대한 책을 자주 고르게 되는 건 지금 내 곁에 죽음이 자리잡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겠지. 이번 달에는 죽음에 대한 책을 세 권이나 골랐다. 줄리언 반스의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상실 수업, 신현림 씨의 천 개의 바람이 되어.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경험한 후에 자신의 애도를 제대로 표현하고 허무의 늪에서 빠져나와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는 방법을 조금은 알려주지 않을까. 100%의 정답을 주지야 못하겠지만 사소한 조언이라도 얻어 보고 싶다.



마지막 책은 마츠모토 세이초의 검은 수첩. 지난 달에 재미있게 읽었던 북스피어의 박람강기 시리즈에서 신작이 나왔다. 마츠모토 세이초의 책을 작년부터 조금씩 조금씩 읽고 있는 중이라 그의 에세이에도 관심이 간다. 총 5장으로 이루어져 있던데, '추리소설의 매력'이라는 부제의 1장과 '추리소설의 발상'이라는 부제의 2장이 가장 궁금하다. 특히 1장의 '왜 추리소설을 읽는 여성 독자가 늘었을까', '추리소설은 원래부터 내용이 이상하다', '추리소설의 수법에 관해 장래에 남은 문제' 같은 글은 제목만으로도 재미있어 보인다.




이 페이퍼를 쓰고 있는 순간, 평소보다 더 막막한 기분이 드는 건 며칠 후에 있을 지방선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정치평론가' 혹은 '여론조사 전문가'라는 명찰을 단 사람들이 이런저런 매체를 통해 내놓는 전망을 보고 있노라면 역시 희망이란 이 나라에 부재함을 새삼스레 절감하게 되니까. 그 와중에 오늘은 빨간 점퍼를 입은 정치인들이 '도와주세요'라는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하더라(물론 그들과 멀지 않은 곳에 그들의 보좌관들이 두눈을 부라리며 버티고 서 있었겠지만). 기가 막혀 헛웃음이 픽픽 나온다.


선거권을 가진 이래 항상 같았다. 부정적인 전망 속에 최악을 준비하며 차악을 기대해 왔다. 이번에는 어떨까. 얼마나 더 나빠질까. 조금 덜 나빠질까? 모르겠다. 확실한 건 이제 3일도 안 남았다는 사실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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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문득 어른이 되었습니다 - 마스다 미리 산문집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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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부탁합니다!


삶에 찾아온 큰 변화를 예상보다 쉽게 받아들이고는 계획보다 많이 아파하던 작년 2월 즈음. 조원희 씨가 진행하던 EBS 북카페를 팟캐스트로 듣고 있는데 시인 김소연 씨가 '마스다 미리'라는 만화가를 추천했다(그때의 방송 주소는 http://bit.ly/1qM3uWA). 김소연 씨가 읊어준 책 제목은 마음에 안 들었지만(하필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였고, 그에 대한 내 대답은 '그냥 그러고 살아도 별 불편 없으면 괜찮은 거지 그런 걸 누구한테 뭐하러 물어봐-_-'였다ㅋ) 만화니까 큰 부담 없이 읽을 수 있겠다 싶었고, 김소연 씨가 추천하는 책들이 대부분 마음에 들었으므로 더 생각하지 않고 주to the 문.


처음으로 주문했던 알라딘의 '마스다 미리 여자공감 3종세트' 제 1차본ㅋㅋㅋ 이렇게 알라딘은 나를 삥뜯기 시작하고…


결과는 뭐…마스다 미리 언니의 노예가 되었다-_- '흠 제목도 별로였는데 그림도 크게 예쁘진 않군'하며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끝날 때 보니까 내가 울고 있는거다? 대단한 말도 아닌데 되게 위안이 되는 거다?? 특출난 데도 없고 롤모델로 삼을 구석도 전혀 없는데 수짱이 엄청 좋은거다??? 맨 마지막에 주말엔 숲으로를 읽을 때는 페이지 넘기는 게 너무 아까운 거다???? 그때부터 나는 미리 언니의 책을 여기저기 선물하기 시작했고 새 책이 나올 때마다 가을의 다람쥐처럼 사모으기 시작, 이봄에서 주시는 온갖 이벤트 물품을 획득하였다하하하. 당연히 어느날 문득 어른이 되었습니다도 나오자마자 수짱 파우치와 노트패드를 받고야 말겠어!!!!!!!!!라며 주to the문.


언젠가 세트로 쓰고 말리라, 수짱 에코백&파우치. 사실 틴케이스는 세 개, 노트패드는 두 개 있어욬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이 먹는 이야기, 미래의 나에게…


마스다 미리의 책을 읽을 때마다 '어쩌면 이렇게 제목을 잘붙임?ㅠㅠ'하며 감탄한다. 이번 책도 마찬가지. '아, 난 어른 되기 싫어!' "에이, 제가 무슨 어른이에요?" "야, 어른 같이 그러지 마라!!" 등등의 말을 내뱉으며 살다가 어느 날 문득 거울을 보면 낯선 어른 하나가 서 있는 걸 발견하게 되지 않나? 그렇게 어른이 되어 버렸고 심지어 지금은 내가 어른이라는 사실을 대부분 담담하게, 때로는 부끄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나에게 이 책은 아, 그래, 이렇게 어른이 되어 버린 거였어, 그리고 앞으로 더 어른이 되어야 해…라는 생각을 새삼 하게 해 주었다. 내 것이기도 하고, 몇 년 안에 닥칠 상황이기도 하고, 수십 년 후에 만날 미래이기도 한 이야기들.


한 세대 정도 위인 여성들의 에세이를 읽다 보면 '아 왜이렇게 뭔가 의미를 주려고 해…;;;' 싶어 불편해질 때가 있다. '여성으로 살려면 이런 게 필요하니까 빈둥대지 말고 열심히 해!' 라든지, '교양 있는 여성이라면 이 정도는 해 줘야지?' 라든지, '혼자 사는 여성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에 사로잡히지 말고 열심히 연애하고 즐겁게 친구 만나고 충분히 문화 생활 하고 직장에서 제 역할 해내고 자신만의 시간도 가지고 미주알고주알…' 같은 잔소리들-_- 하지만 미리 언니의 글은 그렇지 않다는 게 가장 좋았다. 나이 차이는 좀 나지만 귀여운(!) 아는 언니와 마주앉아, '어제 난 이랬고 저랬고 그랬는데 너도 그랬어? 이야 신기하다!!' 같은 얘기를 주고받는 기분? 


그러니 누군가에게는 이 책이 사소하고 쓸데없는 얘기들로 꽉찬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에 사소하고 쓸데없는 것이 없다면 인생이 얼마나 재미 없겠는가. 내 삶이 중요하고 쓸데 있는 것으로만 이루어져 있다면? 으으으…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 꾸밈 없음이라고 생각한다. 특별히 있어 보이는 이야기를 하려 하지도 않고, 교훈 같은 걸 마지막에 집어넣지도 않는 것이야말로 큰 장점이라고. 그냥 '언젠가 43세가 될 여성'에게 '43세를 미리 살아 본, 일러스트레이터 일을 하는 여성'이 자신의 하루하루를 꾸밈 없이 들려주고 있다는 느낌. 작은 그릇에 소담하게 담은 하얀 쌀밥 같았달까. 몸에 좋으라고 이런저런 잡곡 많이 넣은 밥도, 기름친 볶음밥도, 밥알끼리 형태를 잃고 다 붙어버린 죽도 아닌.



애정을 담은 한마디가 잔뜩 쌓여 있다고!


엄마의 따뜻한 쌀밥 앞에서 '이건 너무 평범해서 싫어!'라고 말할 수 없는 건, 쌀을 밥으로 만들기 위해 엄마가 기울인 사랑이 그 속에 들어 있다는 걸 누구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소한 이야기로 가득찬 책 속에도, 삶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한마디들이 가득 들어 있다. 일상적이지만 유쾌하고 따듯한, 그래서 괜히 뭉클해지는.


"축하합니다! 많이 드세요, 물론 오늘의 메인은 40세 생일입니다! 결혼은 몇 번이고 할 수 있지만, 40대에 돌입하는 것은 단 한 번!"

이러고 화제는 다시 나이 먹는 얘기로.

"요즘 말이에요, 갑자기 흰머리가 늘었어요."

"어머나, 나도 안 보이는 데는 꽤 났을 지도 몰라요."

어째서 매번 만날 대마다 이런 얘기로 꽃을 피우는 걸까?

분명 나이 들어가는 자신이 새로워서라고 생각한다. 새로 나온 장난감을 손에 넣은 아이처럼 이제 젊은이가 아닌 '새로운 자신'을 얘기하며 노는 게 아닐까.

- p.129, <나이 먹는 이야기> 중


친척집에서 열이 났을 때 차가운 수건을 이마에 올려주던 아주머니의 파 냄새 나던 손, 자전거를 타다 굴러서 울고 있을 떄 도와준 마침 지나가던 언니의 다정한 목소리. 아버지나 엄마뿐만이 아니라 많은 바깥세상 사람들이 어린 내게 마음을 써주었다. 그런 많은 '애정이 담긴 한마디'의 힘이 어른이 된 내게는 가득차 있다. 그래서 나는 괜찮다! 뭐가 괜찮은지는 모르겠지만…

-pp.148-149, <애정이 담긴 한마디> 중 


수짱 시리즈를 순서대로 늘어놓고 수짱이 나이 먹는 모습을 따라 읽으며, '삶이 계속된다는 것'에 대해 생각했던 그 시간이, 이 책을 읽는 시간에도 이어진다. 나이를 먹는다는 게 한편으론 분명 부담스럽고 괴롭고 힘든 일이지만, 또 다른 한편으론 '삶을 계속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감사한 일'이라는 걸 새삼 느낄 수 있게 한다. 


초등학교 때 쉬는 시간./ 여자아이들끼리 집에서 갖고 온 예쁜 색종이를 서로 교환하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 어른이 된 지금도 그런 짓을 하며 즐기고 있다.


20대 때는 건방진 소리를 하면 재미있어 해주는 어른들이 많았다. …나이가 한참 연상인 '업계 사람들이 빈정거리듯 말하면,/ "자신은 있습니다! 제 눈에는 미래라는 글자가 반짝반짝 빛나 보입니다!"

아이고, 뻔뻔스럽게 잘도 그런 소리를…….


새해가 되면 나는 또 무의미한 얘기를 할 테지. 하지만 내년에도 역시 누군가와 중요한 얘기를 할 수 있는 일년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생각한다.


어른 역할이란 뭔가 시시하다. 그러나 내 차례이니 해야 한다.


중간중간 들어 있는 마스다 미리의 그림은 이 유쾌함과 따뜻함을 확 증폭시킨다. 내 몸 속에 차곡차곡 쌓여 있을 남들의' 애정을 담은 한마디'를 떠올리며 가슴벅차 하다가도, 나도 수짱이 나오는 영화를 보고 싶어!! 라고 부러워할 수 있게 한다.




눈을 뜨면 또 미지의 하루, 잔뜩 있습니다!


조금 걱정되는 건, 마스다 미리의 '신간'이 요즘 너무 자주 보인다는 거다. 이 출판사 저 출판사에서 쉬지 않고 와르르. 이번 책의 날개에 있는 지은이 소개의 내용처럼 '마스다 미리가 수많은 공감만화와 에세이로 많은 사랑을 받으며 일본뿐만 아니라 국내 3-40대 여성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니겠지만, 너무 흔하게 소비된다는 기분에 좀 찝찝하기도 하다. '3-40대 여성이나 좋아할 그렇고 그런 이야기'처럼 타입화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고.


마스다 미리와 수짱을 아끼는 독자의 마음으로, 부디 마스다 미리의 책이 유행처럼 소비되지 않기를 소망한다. 한때 좀 팔리다 휙 사그라드는 책이 아니라, 오래 읽히고 깊이 남는 친구 같은 책이 되길 바란다. 아직 읽지 못한 마스다 미리의 작품들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잔뜩 쌓여 있는 미지의 하루처럼, 앞으로 만나게 될 미리 언니의 책들도 잔뜩 쌓여 있기를!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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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 박람강기 프로젝트 3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안현주 옮김 / 북스피어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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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자신(만)의 탐정이 있다.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내 인생 최초의 탐정 역시 셜록이었다. 아빠가 매달 사다 주시던 보물섬의 '셜록 홈즈 만화'에서 처음 그를 만났다. 바스커빌가의 개보다는 붉은 머리 연맹과 얼룩끈의 비밀이 재미있었다. 이후 친구네 집에서 어린이용 셜록 홈즈 시리즈를 발굴! 신나게 읽었다. 친구는 뤼팽을 추천했지만(그때는 '루팡'이었지) 왠지 우아한 뤼팽보다는 뭔가 신경질스러운 셜록이 좋았다. 그러다 두 번째 탐정을 만난 것이 초등학교 5학년 때. 네 살 위인 사촌언니가 읽던 해문출판사의 애거서 크리스티 시리즈 속 마플 아주머니에게 매혹되었다. 셜록이나 포와로처럼 잘난 척 하지도 않고, 말하는 것도 하는 행동도 탐정같지 않게 수더분한 것이 이색적이었다. 한동안 또 신나게 마플 여사가 나오는 해문출판사의 빨간책을 모았더랬다. 언제까지? 필립 말로를 알기 전까지…

2006년 겨울, 침대 위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빅 슬립과 하이 윈도와 안녕 내사랑…을 순서대로 읽으며, 나는 필립 말로에게 완전히 매료당했다. 아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빅 슬립의 첫 장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내가 그에게 속수무책으로 빠질 것임을 확신했다. 이토록 강하고 정의롭고 무뚝뚝하고 늠름하면서도 섬세하고 따뜻하고 착하고 수줍은 남자라니. 반해버리기에 완벽한 조건이었다. 더불어 이렇게 멋진 인물을 만들어내신 레이먼드 챈들러 선생님(!!)을 사모하게 되었다. 그 겨울 내내는 물론이고 지금도 필립 말로가 툭툭 던져대는 '막말'을 읽을 때마다 육성으로 빵빵 터지는 나이니, 챈들러 선생님이 쓴 편지들을 (다른 곳도 아닌) 북스피어에서 책으로 엮어 낸다는 소식에 가슴이 얼마나 쿵쾅쿵쾅 역시나 신나게 뛰던지 두말하면 잔소리.



때로는 소리 없이, 자주 소리 내어, 낄낄낄.

책을 만드는 동안 많이 신났고 때때로 짜릿했다는 편집자의 후기를 가장 먼저 읽었다. 낄낄 웃었다. 이 책의 전반적인 내용과 레이먼드 챈들러라는 인간에 대한 번역자의 짤막한 소개를 그 다음에 읽었다. 챈들러의 불평 섞인 자기 소개가 실려 있었다.


"사람들은 도대체 왜 이력 따위를 원하는 걸까요? 그게 왜 중요해요? 그리고 왜 작가가 한 인간으로서 자신을 논해야만 합니까? 그저 지루할 뿐인 것을. 나는 일리노이 주의 시카고에서, 너무 오래전이라 아무도 몰랐으면 좋겠다 싶은 언젠가 태어났습니다." (1950년 11월 10일, 챈들러가 자신의 이력을 알려 달라는 출판사 측에 보낸 편지)


또다시 낄낄 웃었다. 두근두근 가슴이 뛰는 걸 더불어 느꼈다. 넘겨 본 목차는 다섯 장이었다. 1장은 문학에 대한 챈들러의 생각을, 2장은 다른 작가들에 대한 챈들러의 평가를, 3장은 할리우드에서 챈들러가 겪고 느낀 것들을 다른 이들에게 편지로 적어내려간 것. 그리고 4장은 필립 말로, 5장은 그의 일상에 대한 편지들이었다. 순서대로 읽으면서 빅 슬립을 처음 읽었을 때처럼 읽다가 웃다가 진지해졌다가 또다시 웃다가 금세 또 진지해졌다가를 반복했다. 어쩌면 더했을지도 모른다. 필립 말로라는 허구의 남자가 허구의 이야기를 이끌어 가던 것보다, 레이먼드 챈들러라는 실존 인물이 자기 주변 사람에게 편지로 주저리주저리 속내를 털어놓으며 툴툴대는 게 훨씬 더 솔직한 내용이었을 테니까.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잘났든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엄청난 말들을 톡톡 내뱉는 남자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내용의 묵직함과 표현의 가벼움이 어찌나 조화로운지, 경탄스러울 지경이었다. 말도 못하게 차갑고 무뚝뚝하고 인정사정 없으며 짓궂기까지 해 도저히 웃지 않고는 못 배기겠더라. 예를 들면 뭐 이런 거?


스스로 평론가라고 부르며 거들먹거리는 트집쟁이들


그 사람(제임스 케인)은 내가 싫어하는 모든 요소를 다 지닌 작가예요. '얌체'이자, 기름때 낀 작업복을 입은 프루스트이자, 보는 사람 없는 널빤지 울타리 앞에 분필 하나를 들고 선 지저분한 꼬마예요. 그런 사람은 문학계의 쓰레기입니다.


(히치콕에게 쓴 편지에서) 당신의 길고도 성공적인 경력에서 단 한번만이라도 정상적이고 탄탄한 이야기를 각본에 넣기를, 그리고 흥미로운 카메라 연출이라는 명목으로 그 타당성을 조금이라도 훼손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영화란 대체로 그 이상주의조차 거대한 거짓에 불과한, 타락한 공동체의 산물입니다. 그 허세, 가짜 열정, 끝없는 음주, 돈을 둘러싼 끝없는 분쟁, 전능하신 에이전트, 거들먹거리는 거물들(그리고 일을 벌여 놓고는 거두지 못하는 그들의 전형적인 무능함, 반짝거리는 황금을 몽땅 잃고, 사실은 원래부터 그랬지만 자기들만 몰랐던 '아무것도 아닌' 상태가 되지 않을까 하는 끝없는 두려움, 헐뜯는 기술, 그 빌어먹을 개판이 이 세계를 갉아먹어요.



결코 패배하지 않는, 정의로운 감상주의자

그의 이런 돌직구가 불편하거나 거슬리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말은 이래도 마음은 안 그런 사람'이라는 게 단어들 사이사이에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4장과 5장이 특히 더 흥미로웠나 보다. 1장부터 3장까지의 내용에서 '작가로서의 레이먼드 챈들러'가 읽혔다면, 4, 5장에서는 '인간 레이먼드 챈들러'가 더 부각된다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필립 말로가 감정적으로 미성숙할지도 모른다고 편지를 쓴 독자에게 '도대체 너는 어쩌다 그런 생각을 갖게 됐니'라는 뉘앙스(물론 저런 문장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ㅋ)의 답장을 조목조목 이유까지 들어가며 써 주고, 독자가 상상(혹은 창조?)해낸 말로의 취향과 일상과 과거와 주변 상황들에 대해 답변을 달아 줄뿐만 아니라 자기의 소설에 반영하기까지 하는 소설가라니. 이렇게 마음 약한 소설가가 또 있을까. 실제로는 4장을 통해 진짜 필립 말로에 대해 알게 된 것이 거의 없었지만, 이 친절함 때문에 4장 전체가 참으로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사소한 일상적 행위들을 편안하게 나열-심지어 그 편지의 제목은 '나의 주부 생활'이다!!!-하거나, 고양이에 대해 얘기하거나, 자기가 어떤 사람을 좋아하고 어떤 것을 좋아하고 어떤 세계를 좋아하는지 구구절절 설명하거나, 아내 시시의 죽음 전후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자신의 모습을 수줍게 고백하는 5장은 더더욱 인상적이었다. 맨손으로 비엔나 롤을 부러뜨릴 수 있을 만큼 거친 남자의 거만한 껍질 속에 들어 있는, 부드럽고 따뜻한 속살(!)을 슬쩍 본 기분이랄까. 이런 바게트 같은 남자ㅋㅋㅋㅋㅋㅋ 알고보면 챈들러는 츤데레였던건가ㅋㅋㅋㅋ

 



고마워요, 레이먼드 챈들러.

강하고 차갑지만 생각보다 훨씬 연민 넘치는 남자, 의외로 겸손하고 생각 깊은 남자, 악마적 가학성을 끔찍히도 싫어하고 사랑에 모든 걸 걸려고 하는 남자, 그래서 필립 말로가 그러하듯이, 믿을 수 있는 사람. 타락한 사회에서 괜찮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투쟁하는 정직한 사람이자 외롭고 가난하고 위험하고 동정심이 강하며 어떤 불편한 사람에 의해 어떤 불편한 시간에 깨어나 어떤 불편한 일을 하게 되는 것을 운명으로 타고난 인간. 결코 패배하지 않는, 강한 남자이면서 어쩔 수 없는 감상주의자. 실제의 챈들러가 완벽히 저런 인간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내가 이제까지 상상해 왔던 그의 모습과 이 책을 통해 만난 그의 모습은 꽤 유사했다. 반갑고 기뻤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필립 말로 시리즈를 다시 읽고 있다. 그저께 빅 슬립을 새삼 펼쳐들었는데 여전히 말로는 매력적이었다. 근 한 달 동안 소리내어 웃을 일도 별로 없었는데, 말로 덕분에 또다시 자주 소리내어 웃을 수 있었다. 예측된 패배가 기다리고 있어도 두려움 없이 뛰어들 수 있는 용기와 의지를 잃지 말아야겠다고 새삼 다짐해본다. 고마워요, 필립 말로. 고마워요, 레이먼드 챈들러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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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책도 음악도 몸 속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던 4월이었다. 몇 시간째 같은 내용을 반복하고 있는 주제에 뻔뻔하게도 '속보'란 이름을 붙이고 있는 TV 뉴스와 실제로 취재를 하고 쓴 건지 아님 보도자료 받아 CTRL+V 한 건지 분간이 안 되는 느낌의 인터넷 뉴스에 질려 이런저런 팟캐스트와 한겨레21을 반복해 듣고 읽고 듣고 읽었다. 그 사이에 봄은 짙어지고, 날은 따뜻해지고, 사람들은 웃고, 시간은 흐르고, 5월은 왔다. 이 5월에 나는 어떤 책을 읽어야 할까. 솔루션스의 Nothing's Wrong을 들으며 페이퍼를 쓴다.


이번달 페이퍼를 쓰기 위해 4월 신간 에세이 리스트를 보다가 깨달았다. 아, 이번 달의 에세이 한 권은 이미 결정된 것과 다름없구나. 그러니까 <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방황>을 굳이 페이퍼에 올릴 필요는 없겠다. 난 그 책 말고 다른 책들을 골라야지-라고. 다행히 다른 책들 중에서도 읽고 싶은 책들이 눈에 띄었는데, 읽고 싶은 책들의 리스트를 정리하면서 또 한 번 깨달았다. 아, 이 책들은 왠지 한 권도 안 뽑힐 것 같아. 그러니 나중에 사 읽거나 빌려 읽어야지-라고.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출판사가 몇 곳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양철북이고 그 중 또 하나가 한겨레출판이다. 여기서 나오는 책이라면 재미는 없을지 몰라도(혹은 덜할지 몰라도) 분명 뭔가 의미 있는 법이지! 라고 머리와 몸이 세팅되어 있다. 가볍고 소소한 이야기 대신 조금은 무거운 이야기가 눈에 들어오는 지금, 5월에 읽고 싶은 에세이로 내가 가장 먼저 고른 것이 바로 양철북과 한겨레출판의 책이다. <도대체 학교가 뭐길래!>와 <열세살 여공의 삶>. 


'저기 산이 있어 오르듯이' 함께 '살아가야 할' 아이들이 삶의 공간에서 토해냈을 이야기. 도대체 학교는 왜 이러냐고, 세상은 왜 이러냐고, 괴로움과 섞어냈을 한숨들. 아이들을 보호와 통제의 대상으로만 보면서 함부로 여기는 이 '나라'가 사실은 그 아이들을 제대로 보호하지도 통제하지도 못하는 곳이라는 사실이 명약관화해진 5월, 읽고 싶은 책 두 권이다.




은행나무에서 '위대한 생각'이라는 이름으로 논픽션 시리즈를 펴냈다. 문학/철학/예술 등 다양한 분야의 거장들이 남긴 저술들을 소개하는 시리즈라는데, 첫 다섯 권으로 마르셀 프루스트, 샤를 보들레르, 에밀 졸라, 찰스 디킨스, 랄프 에머슨의 글이 책으로 묶였다. 그 중 가장 읽고 싶은 두 권이 찰스 디킨스의 책과 에밀 졸라의 책이다. 저널리스트 디킨스의 눈에 비친 영국의 밤 거리엔 어떤 죄악들이 넘치고 있었을까. 반유대주의의의 광풍이 몰아치던 19세기 유럽에서 국가 안보를 앞세우며 진실을 덮으려는 권력과 마녀사냥에 혈안이 된 언론에 맞섰던 에밀 졸라는 펜으로 싸우겠다는 결심을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21세기 한국의 모습을 저 두 권에서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책 소개 정보 중 <전진하는 진실>의 한 구절은, 마치, 지금 이 땅의 사람들에게 에밀 졸라가 들려주는 말 같다.



악의적인 무리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때가 되면 진실은 어김없이 한 걸음씩 전진하게 될 것이다. 

진실은 모든 장애물을 무너뜨릴 수 있는 힘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그 앞을 가로막거나,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진실을 땅속에 묻어 놓아 보라. 

그러면 진실은 그 속에서 힘을 축적하면서 때를 기다리다가 다시 땅 위로 솟아오르는 날, 

강력한 폭발로 주위의 모든 것을 휩쓸어 가게 될 것이다. 

- 에밀 졸라, <전진하는 진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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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기 신간평가단이 되어 처음으로 쓰는 마이페이퍼. 특별히 좋은 페이퍼나 리뷰를 쓰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육개월 더 기회가 생겨 감사할 따름이다. 신간평가단을 마칠 때 느끼는 아쉬움을 이번엔 조금 더 줄일 수 있게, 더 충실하고 성실한 리뷰를 써봐야겠다고 새삼 마음먹는다. 게다가 이번엔 희망자도 엄청 많았다던데 나따위가…사실 에세이 신간평가단 모집글에 일등으로 댓글을 쓴 게 나이긴 하다ㅋㅋㅋㅋㅋ 가장 먼저 달려왔다는 걸 높이 쳐 주신건가. 여하튼 또다시 감사합니돠. 


두 달만에 쓰는 마이페이퍼고, 3월엔 딴 때보다 많은 책이 나왔을 것 같아 뭘 써야 되나 눈을 비비며 신간 목록을 확인했는데, 의외로 읽고 싶은 책들이 눈에 확확 들어와서!!!!!! 별 고민 없이 기쁜 마음으로 책을 골랐다. 3할 7푼 8리 정도를 치고 있는 타자가 13:3 정도로 팀이 리드하는 상황에서 패전처리를 하기 위해 올라온 투수의 실투를 장외로 넘겨버린 후 유유히 다이아몬드를 돌며 '우우 공이 수박만하게 보였어'라고 휘파람 불 때의 기분과 비슷하달까. 아 참으로 장황하구나ㅋㅋㅋㅋㅋㅋㅋㅋㅋ


첫 마이페이퍼에서 꼽은 책들은 한 번도 뽑히지 않았던 전적을 가지고 있는 터라 조금은 불안하지만, 진짜로 다 안 뽑히면 사서 읽을 테다. 그만큼 마음에 드는 2014년 3월의 '새로 나온 에세이들'은!!!!!! +_+



이 두 권이 가장 읽고 싶은 이 달의 에세이 두 권이다. 정말 좋아하는 장 자크 상뻬의 그림과 정말 애정하는 필립 말로의 창조자 챈들러의 글을 만날 수 있는 두 권, <상뻬의 어린 시절><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 책의 내용이 어떤 것일지, 책의 분위기가 어떨지, 책 표지만 봐도 느낌이 퐝퐝 온다. 상뻬의 어린 시절을 읽고 나면 저 소년처럼 날아가고 싶을 것 같고, 챈들러의 책을 읽고 나면 파이프를 입에 물고 '챈들러 스타일'에 대해 고민하는 챈들러처럼 나도 글을 쓰고 싶어질 것 같다. 


상뻬의 책에는 그가 그린 그림 200여점이 수록되어 있다고 한다. 20점도 100점도 120점도 아닌 200점이라니!! 이것 하나만으로도 이 책을 읽고 싶은 이유는 충분하다. 또 챈들러 책의 목차는 어찌나 매력적인지. '나는 제임스 케인이 싫어요', '로스 맥도널드의 허세', '존 딕슨 카를 읽을 수 없는 이유' 등 정말 제목만 봐도 짜릿짜릿한 문장들이 나열되어 있다. 게다가 제 4장은 아예 챕터 제목이 '필립 말로'던데(소제목은 세상에나 '필립 말로의 양심' '필립 말로의 정의' '필립 말로의 인생' '필립 말로의 성숙' '필립 말로의 운명'!!!!!), 아이고 두근두근해라. 제목만 봐도 설레어 견딜 수가 없다ㅠㅠㅠㅠㅠㅠ



 


그 다음으로 꼽는 두 권의 에세이. 위의 두 권만큼은 아니지만 역시나 끌리는 책 둘. <줄리언>은 마음산책에서 나온 책이라 우선 끌렸는데, 어머나 지은이가 주홍글씨를 쓴 호손이랑 폴 오스터네? 둘이 같이 책을 쓰다니 말이 돼? 어머나어머나 호손의 일기와 호손에 대한 폴 오스터의 글이 함께 실려 있다고? 어머나어머나어머나 이건 리스트에 넣어야 해! 하고 마이페이퍼로 직행ㅋㅋ <잃어버린 고양이를 찾아서>는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제목' 때문에 '그냥 뻔한 고양이 애호가 아녀?'하고 의심했으나 고양이를 통해 사람의 마음과 삶을 읽어낸다는 책 설명에 혹하였고 무엇보다 책 속에 있다는 이 구절이 마음에 들어 꼽아 본다 : 고양이도 당신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러나 고양이는 벽도 똑같이 지그시 바라본다.



이 중 한 권이라도 뽑힐 수 있을 것인가…둥둥둥둥…떨리는 마음으로 14기 신간평가단 첫 선정도서 발표일을 기다려야겠다. 아마 그때는 지금보다 더 나른한 날씨가 내 무릎 곁에 앉아 있겠지?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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