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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셋 파크
폴 오스터 지음, 송은주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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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테레사 라이트한테 꽤나 고생스럽게 살게 될 거라고 하잖아. (p.128)

폴 오스터의 소설을 있는대로 찾아 읽던 때가 있었다. 스무살 즈음, 도서관에 갔다가 늘 대출 중이던 <달의 궁전>이 웬일로 서가에 꽂혀 있는 걸 발견하고 빌려 왔더랬다. 도대체 폴 오스터가 뭐라고 이렇게 다들 폴 오스터 타령이야? 라는 기분으로 침대 위에 벌렁 누워 책장을 펼쳤는데, 이십 페이지쯤을 넘겼을 때 이 소설은 이따위 자세로 읽을 만한 책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는 행여 누가 훔쳐갈지도 모른다는 듯 온몸을 웅크리고 앉아 페이지가 뚫어져라 쳐다보며 읽었다. 페이지가 꿀떡, 꿀떡, 넘어갔다. 진짜 꿀떡, 이 넘어가듯이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삼키는 침이 달았다.


다른 책을 읽었다. <뉴욕 3부작>을 읽었고, <우연의 음악>, <스퀴즈 플레이>, <공중 곡예사>, <환상의 책>을 읽었다. <빨간 공책>을 읽고 나서 우연히 그 책과 비슷하게 생긴(!) 공책을 발견해 구입하고는 낙서장으로 쓰기도 했다. 또 뭘 읽었더라? 몇 권 더 읽은 것 같은데, 기억이 잘 안 난다. 뭘 읽어도 <달의 궁전>만 못하다는 생각에, 언제부턴가 그의 책을 읽기가 재미없어진 탓이다. 뭘 읽어도 <달의 궁전>만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랬던가. 


사실 위에 나열한 책들의 줄거리도 또렷하게 기억이 잘 안 난다.  머릿속에 내용이 다 섞여 있다. 왜 이런 건지 그동안 잘 몰랐었는데, 이번에 <선셋 파크>를 읽으면서 그 이유를 짐작하게 됐다. 폴 오스터의 소설 속 주인공들이 내게는 다 비슷비슷해 보였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름이나 직업이나 묘사된 외양은 다를지언정 결국 같은 길로 향하는 인물들 같다는 느낌이랄까. 잘 살아가는 것 같아 보여도, 잘 이겨내는 것 같아 보여도, 끝내 인간은 인생의 내리막길로 쭉 미끄러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걸 맨 마지막 페이지에서 절절히 느껴야 한다는 게, 그때의 내게는 버거운 일이었나보다.


그래서일까. <선셋 파크>를 읽는다는 것 자체가, 내게는 하나의 모험이었다.




세뇨르 헬러가 이렇게 대단한 찬사에 어울릴 만한 인물일지는 시간이 가면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p.100)

아주 오랜만에 폴 오스터의 소설을 붙잡고, 원서보다 더 매력적인 표지를 잠시 구경하고(특히 마음에 드는 건 뒷표지에 그려진 거위의 표정! '네 인생도 미끄럼틀 위에 있어'라는 듯한 표정!!), 역자 이름이 있어야 할 자리에 '황보석'이 없다는 것에 잠시 실망하고, 송은주 씨가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을 번역하신 분임을 떠올리고, 다시 기대감을 부풀린 후, 드디어 페이지를 넘겼다. 신기하게도 <달의 궁전>을 읽을 때처럼, 페이지가 꿀떡, 꿀떡, 넘어갔다. 아아, 재미있다 재미있어, 라고 중얼중얼거리며 읽었다. 중간 중간 기억해두고 싶은 문장이 있는 페이지에 포스트잇을 붙였는데, 책을 다 읽고 보니 붙인 포스트잇이 스무 개도 넘었다.


스물 여덟. 한국의 청년이라면 취업 걱정에 토익 준비에 대기업에 이력서를 내니 공기업이 최고니 공무원밖에 없니 하며 혼란에 빠져 있을 지도 모르는 나이. 미래에 대한 준비와 설계가 당연히 되어 있어야 한다고 여겨지는 나이. 젊을을 불태워라 열정과 자신감을 가져라 세상에 나의 가치를 증명해라 따위의 이야기를 조언이랍시고 들어야 하는 나이. 하지만 햇살 가득한 플로리다에서 살아가는 이 소설의 주인공 마일스 헬러는, 스물 여덟 살임에도 불구하고, 앞일은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여기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버려진 것들의 사진을 찍는다. 최소한의 욕망만을 가지고 살려 한다.


처음부터 그의 삶이 이러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형의 죽음 이후, 형을 자신이 죽였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 이후, 부모가 자신으로 인해 슬퍼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 이후, 마일스는 이제까지의 생에 흥미를 잃었고 자신이 살아가야 할 미래가 없음을 느꼈다. 부모의 생각처럼 그는 자신이 미래가 없는 아이가 되었다는 깨달음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동시에 과거를 버린 아이가 된 것일지도. 


그 때문에 마일스가 버려진 물건의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물건을 버린다는 것은, 그 물건에 얽힌 시간들을 함께 버린다는 것일 테고, 마일스 역시 그 물건들처럼 잠시 버려진 존재로 자신을 정체화하고 있었을 테니까. 자신 때문에 슬퍼하고 있는 부모로부터, 버려진 존재로. 실제로 부모가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든 말든, 그렇게 스스로를 버려진 존재로 만든다는 것이, 보비의 죽음이 자신의 어깨에 얹어 놓은 죄의식에 깔아뭉개지지 않고 오늘이라는 짐을 지고가면서 삶을 근근이 이어갈 수 있는 방법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유일한 방법.



이제 최악의 일들은 다 지나갔다. (p.319)

살아 있으나 죽은 것 같이 느껴지는 존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라사와 나오키의 <몬스터>에서 요한은 자신의 존재를 지우려면 자신에 대한 기억을 없애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곧 기억하는 사람들의 존재를 없앤다는 것이다. 내 머릿속에서뿐만 아니라, 실재 그 자체를. 그래서 그는 자신과 관계된 사람들을 하나씩 죽여나간다. 그러나 마일스는 과거를 완전히 지우려 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는 자신이 발붙이고 서 있던 과거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마일스 헬러'의 삶으로부터 잠시 떠나 있을 뿐, '마일스 헬러'라는 존재 자체를 완전히 폐기하지는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전히 아버지와 어머니를 사랑하고 새어머니를 걱정하며, 어린 시절의 친구들 중 한 명인 네이선과의 연락을 계속 유지하면서 과거와 연결된 끈을 쥐고 있기에. 가족과 자신을 단절시키고 있기는 하지만, 뉴욕에서 가족과 함께 있든 플로리다에서 폐가 처리를 하고 있든 그는 어쨌든 마일스인 것이다. 지적인 호기심이 많고, 책 읽기를 좋아하고, 말장난하기를 좋아하는, 마일스 헬러. 


따라서 그는 애초부터 미래가 없는 아이일 수 없었다. 미래가 있다는 건 무슨 뜻일까. 기대하고, 약속하고, 계획하고, 꿈을 꾼다는 것 아닐까.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돌아갈 곳이 있고, 과거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미래는 '분명히 있다'. 게다가 필라라는, 매력적인 여인의 연인이 되면서 그는 분명히 미래가 있는 사람이 되어 버린다. 필라가 열 여덟살이 되는 5월 23일(바로 오늘!!), 그녀와 결혼하겠다는 것이 그의 미래 아니겠는가.


어찌 보면 당연하게도, 마일스는 과거의 마일스로 돌아가기 위한 수순을 천천히 밟는다. 뉴욕으로 돌아가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거나 지속하고-심지어 사람들은 마일스를 좋아한다!-, 필라가 가야 할 대학을 행복하게 고르고, 어머니를 만나고, 아버지를 만나고, 살 곳을 알아보러 다닐 계획을 품고, 새 집을 구할 때까지 함께 지내도 좋다는 아버지의 제안을 받아 놓는다. 이렇게만 흘러 가면 해피엔딩이다. 마일스는 곧, 마일스의 미래가 될 것이다.



그는 아버지를 실망시켰고, 필라를 실망시켰고, 모든 사람을 실망시켰다. (p.328)

그러나 결말은 또다시 수렁이다. 아버지와 필라와 모든 사람이 마일스에게 실제로 실망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마일스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마치 거짓말을 하고 부모 곁을 떠나던 그 때, 실제로 부모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마일스에게 중요하지 않았던 것처럼.


첫 번째 수렁 때문에 과거를 버리려 했던 마일스는, 두 번째 수렁 때문에 장담했던 미래를 잃는다. 최악의 상황은 다 지나갔다고 믿었지만, 그것은 마일스의 생각일 뿐이었다.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별 문제 없이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제까지 잘못해 온 것에 책임을 지고 몇 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필라와 함께 살 수 없을 것이다. 필라가 그를 버릴지도 모른다. 필라와 함께 도망가서 산다 해도, 둘이 꿈꾸던 뉴욕에서의 생활 따위는 먼지처럼 날아가버릴 것이다. 그리고 그는 생각한다.


미래가 없을 때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는 것이 가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지금부터 어떤 것에도 희망을 갖지 말고 지금 이 순간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 지금 여기 있지만 곧 사라지는 순간,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지금만을 위해 살자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p.328)



우리는 세월이 흘러갈수록 더 강해지는 것이 아니다. (p.285)

마일스는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폴 오스터를 한창 즐겨 읽던 10여년 전이라면, 이 결말을 보고 허탈함에 혀를 끌끌 찼을 것이다. 이 책을 읽는 시간이 재미있고 즐거웠더라도 '이따위 결말을 보자고 신나게 읽어온 건 아니라고!!!'하면서 하드커버를 북북 찢어버리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꾹꾹 눌렀을 것 같다. 하지만 <선셋 파크>를 다 읽고 나서 든 생각은, 마일스의 삶이 행복해졌나 불행해졌나 추측해 보는 것이 쓸데없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연필로 윤곽을 잡고, 디테일을 하나씩 추가하면서, 하나의 스케치를 대충 마쳐놓는 바로 그 순간. 누군가 심술궂게 연필 자국을 손가락으로 뭉개 버린다. 디테일이 망가진다. 윤곽이 무너진다. 어쩌면 스케치라는 존재 그 자체가 사라져버리는지도 모른다. 그런 스케치가, 인간의 미래 아닐까.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의 일들을 우리는 마치 이미 다 벌어진 일들처럼 얘기한다. 나는 뭐가 될 거라는 둥, 어디를 갈 거라는 둥, 뭘 먹고 뭘 사고 뭘 입고 뭘 읽을 거라는 둥, 이건 수익성이 높고 저건 안전성이 높다는 둥. 지금 이 순간, 내 삶이 끝날지도 모르는데.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은 나의 현재이자 끊임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과거이며, 곧이어 다가오는 미래인데, 마치 현재와 과거와 미래가 무처럼 뚝뚝 잘려 분리될 수 있다는 둥.


그게 아니라는 걸, 인간은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걸, 삶이란 그토록 자비로운 표정으로 인간에게 계획 가능한 행복 따위를 선물해 주지 않는다는 걸, 지금 이 순간 살아있다는 것은 이 순간의 고통을 견디고 있다는 것이고 그로 인해 더 약해져 간다는 것이고 그로 인해 아파해야만 한다는 것과 다름없다는 걸, 폴 오스터는 얘기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러니까, 예상치 못했던 불행이 나에게 끊임없이 찾아오는 건, 내가 특별히 불행한 시기를 보내고 있거나 나 개인의 불행이 워낙 특이해서가 아니다. 그냥, 그게 내 삶이고, 네 삶도 그렇고, 다른 어떤 이의 삶도 모두 다 그런 것이기 때문인 거다.



우리를 구해 줄 테니까. (p.65)

그래서 더더욱, 이렇게 고통스러운 내가 할 수 있는 건, 지금 이 순간에 대한 희망 외에는 그 무엇도 갖지 않는 것. 지금 여기 있지만 곧 사라지는 순간,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지금만을 위해 사는 것. 마일스가 맨 마지막 장에서 스스로에게 되뇌었듯이, 나 역시 되뇌어 본다. 벌어지지 않은 일을 걱정하지도, 일어나지 않은 일을 장담하지도 않겠다고. 이미 다 끝나 버린 일에 목매지도 않겠다고. 그저 지금의 순간에 집중하고 몰입하겠다고. 마일스의 말에 귀 기울일 때 필라가 보여준 몰입의 눈빛 때문에, 마일스가 필라와 함께 있을 때 그녀가 온전히 그 자리에 있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처럼. 나 역시, 내 자리에, 지금 이 순간 온전히 있게 된다면, 그걸로 충분하겠다.





+ 사족

1. 마일스 이외의 인물들도 매력있었는데. 특히 나는 메리-리가 좋았다. 특히 마일스에게 신경질을 낸 후, 한순간에 극에서 극으로 바뀌면서 '아이고 맙소사, 내가 정말 못된 년처럼 굴었구나, 그렇지 않니?'라고 묻는 부분은 끌리도록 매력적이었다!


2. 네이선이 바이(혹은 게이?)였다는 것, 소설 전체를 보자면 사소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나에게는 꽤 인상적인 반전이었다.


3. 폴 오스터 소설을 보면서 '아 이 사람도 여자 심리 묘사는 참 못하네…'라고 자주 생각했었던 것 같은데, 이 책에선 그런 느낌이 많이 안 들었다. 앨렌이나 앨리스, 윌라와 필라, 메리-리 모두 여성이라기보다는 그냥 보편적인 인간의 한 종류처럼 그려졌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 오히려 헬러의 시각이나 모리스의 시각에서 여성 인물들에 대해 애기하는 부분들이 더 흥미로웠다. 알 듯 모를 듯, 이도 저도 아닌 것 같은.


4. 야구 얘기는 역시 재미있었다. 샌디 '코팩스'를 '쿠팩스'라고 번역했더라면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긴 한다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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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열심히 쓴 마이페이퍼를 날리고 허탈함에 빠져 다시 쓰는 걸 잊고 있었다. 졸지에 마지막 마이페이퍼가 이틀이나 늦었네ㅠㅠ 슬픈 마음으로 허겁지겁 다시 올리는 12기 신간평가단으로서의 마지막 마이페이퍼. 4월의 신간 소설 중 눈에 띈 책들!



우선 야마다 에이미의 타이니 스토리. <공주님>을 통해 야마다 에이미를 처음 알았으니, 거의 10여년째 그녀의 책을 읽어 오고 있는 중이다. 솔직히 맨 처음에는 그녀의 소설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공주님>이 처음 나왔을 무렵 내 주위에는 이상하게도 야마다 에이미 찬양이 넘쳐흘렀다. 마치 야마다 에이미를 좋아하지 않으면 좀 촌스러운 사람인 것 같이 취급받는 듯한 느낌이었달까. 그런 분위기가 나는 싫었다. <공주님>도 '뭐 그냥 그렇구만' 하면서 읽었더랬다. 하지만 <나는 공부를 못해>와 <방과 후의 음표>가 마음에 들었었고, <슈거 앤 스파이스>는 참 재미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어머 세상에 야마다 에이미를 좋아하지 않다니!'라는 사람들과도 점점 안 만나게 되었고-_- 조금은 편안하게 그녀의 소설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타이니 스토리는 그녀의 데뷔 25주년 작품이다. 세상에 스물 한 가지의 이야기가 들어있으니 소설 하나 하나가 꽤 짧을 것 같다. '거장 재즈 뮤지션의 잼 세션처럼 책장을 넘기는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는다'는 민음사의 책 소개 문구는 굉장히 마음에 안 들지만(저 문구 때문에 책을 안 읽는 사람이 생길 것 같다는 기분까지 든달까-_-) 그래도 야마다 에이미의 책을 꾸준히 출판해주신 민음사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첫 번째로 꼽는다. 가장 호기심이 이는 소설의 제목은 역시나 '클리토리스에 버터를(정말 야마다 에이미 답다ㅋㅋㅋㅋㅋㅋㅋ)' 그리고 '420, 그리고 라이트벌브'.


두 번째로 꼽은 책은 회색 세상에서. 작가의 이름도 잘 모르지만, 출판사가 문학동네라는 점과 시베리아 강제노동수용소의 실상을 그린 작품이라는 점에서 리스트에 올려 두었다. 문학과지성사/문학동네/창비의 책은 웬만해선 믿고 읽는 편인 데다가 최근에 시베리아 강제노동수용소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언제 관련된 책을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던 터라. 작가인 루타 서페티스의 할아버지와 친척들이 실제로 겪은 체험이 이 소설의 바탕이 된 것 같은데, 참, 인간의 삶이란 얼마나 잔인하면서도 무시무시한 것인지.


세 번째로 꼽은 세 권의 책은 한국 여성 소설가의 책들. 김 숨과 공선옥, 배수아의 신간이다. 


배수아는 야마다 에이미보다 더 오랫동안 읽어 오고 있는 작가고, 대학생 시절 가장 좋아하는 작가를 꼽아야 할 때 망설임 없이 이름을 댔던 소설가다. 그녀의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와, 바람인형과, 부주의한 사랑과, 철수와, 그사람의 첫사랑과, 붉은 손 클럽과, 나는 이제 네가 지겨워와, 이바나와, 동물원 킨트를, 나는 경전처럼 읽고 읽고 또 읽었더랬다. 예전에는 열광하는 마음이 아주 약간 섞인 흥분 상태로 그녀의 소설을 읽었다면, 지금은 그보다 차분하게 그리고 상당히 편안하게 그녀의 책을 뒤적인다. 출판사는 마음에 안 들지만(ㅈㅇㄱㅁㅇ은 그다지 선호하는 출판사가 아니다ㅠㅠ 물론 시공사와 동서문화사가 갑이지만ㅋㅋㅋㅋㅋㅋ) 그래도 배수아인걸. 당연히 읽어줘야 한다.


공선옥 역시 참 꽤 오래 읽어 왔다. 어릴 적엔 <수수밭으로 오세요>나 <멋진 한 세상> 속의 인물들을 따라 가는 게 너무 아파서, 그녀의 책에 쉽게 손을 대지 못했는데 <나는 죽지 않겠다>부터 그녀의 책을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이번 신간에 대해 동아일보에서 엄청 우스운 서평을 써놨던데(무자비한 개발 횡포를 비판하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았던 작가가 그립다면서 공선옥의 경직성을 비판하고 '슬픔은 작가가 쥐어짜는 게 아니라 작품의 행간을 통해 독자에게 스며드는 것이 아닐까'라고 충고까지 해서 어찌나 어이없던지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쌰랍동아일보-_-) 공선옥씨는 당연히 이따위 서평에 눈도 깜짝 안했으리라 믿는다. 5월에 1980년 5월의 광주를 다룬 책은 의무감으로라도 읽어야 한다.


김 숨의 책은 생각보다 많이 못 읽어 왔다. 이번 책에 대해 이런저런 신문들에서 쓴 서평들을 보니 꽤 예민한 소재를 김 숨다운 '불편함'으로 다루고 있는 듯한 느낌이던데 흥미롭겠다는 생각이 든다. 김 숨이니까, 뻔하디 뻔한 TV 드라마 식의 '지독한 시월드 대 지만 잘난 며느리' 간 대립으로 이야기를 풀고 있을 리 만무하다는 믿음을 가져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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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수꾼들]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밀수꾼들
발따사르 뽀르셀 지음, 조구호 옮김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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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탄다는 행위에 대해 생각한다. 움직이지 않고 단단히 내 발 아래 존재해 주는 뭍. 뭍 위에 발바닥을 디디고 산다는 것이 고정되고 안정된 것에 대한 지향이나 희망을 의미한다면, 내가 밟고 살던 땅을 떠나는 것은 불안을 온몸으로 끌어안겠다는 것일 테다.  내 몸이 끊임없이 휘청거리도록 허락하고 배멀미에 시달려야 하는 일상에 내던져지는 배 위의 삶.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라면, 그래서 많은 것을 지켜야 하는 사람이라면, 쉽게 선택할 수 없는 길이다.


그건 배 위의 삶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뭍 위에선 가진 것이나 지킬 것이 많지 않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일지도 모른다. 움켜쥔 것을 쉽게 놓을 수 있을수록, 아예 움켜쥔 것 자체가 적을수록, 배를 타겠다는 선택을 쉽게 내릴 수 있다는 것.


<밀수꾼들>을 처음 읽을 때,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질 거라고 생각했다. 육지에서의 삶을 놓을 수밖에 없는 경험을 해 본 사람들이 떠밀려 선택한 배 위에서의 또다른 삶. 땅을 떠난 그들이 몰입해야만 했던 배와 바다와 다른 세계. 어쩌면 나도, 그들처럼 떠밀려서라도, 지금의 삶이 아닌 다른 삶을 선택하고 싶은 걸까. 그들이 몸으로 겪어냈던 배 위에서의 삶과 그들의 눈을 빌려 그려낸 바다의 모습을 만날 때면 왠지 벅찬 기분이 들었다.


아침은 현기증이 날 정도로 밝아왔다. 불그스레하게 물들었던 푸른 바다는 이미 활활 타오르는 붉은 막으로 변해 있었고 그 표면에는 반짝반짝 빛나는 점들이 콕콕 찌르는 듯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눈부실 만큼 붉게 물든 하늘이 바다에 푸르스름한 오렌지빛으로 투영되고 있었다. 서쪽으로는 날씨가 맑고 차분했으며 바다는 호수 물처럼 푸르고 잔잔했다. 농밀한 물이 옥빛으로 빛났다. 연한 푸른색 막이 하늘을 덮고 있는 것 같았다. 곧 해가 떠오르리라. 상큼하고 건조한 바람 한 줄기가 불어왔다. (183-184쪽)


손에 잡힐 것 같은 축축한 어둠이었다. 하늘 쪽을 바라보니 저 위, 끝없이 높은 절벽 위로 동굴의 입구가 보였고 그 위로 톡톡 튈 것 같은 별들이 빽빽하게 들어 차 있는 푸르스름한 하늘이 전개되고 있었다. 동굴 위에서부터 귀뚜라미 소리가 하늘에 깔린 별처럼 빽뺵하게 들려왔다. (270쪽)


파도가 선체에 부딪쳐 산산이 부서져 파편이 갑판까지 세게 튀겼다. 파도가 일정한 높이로 규칙적으로 밀려왔으며 배는 전후좌우로 움깆이며 파도를 비스듬히 가르고 있었다. 바람이 약간 수그러들긴 했으나 아직도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쌩쌩 불어내려오고 있었다. (349쪽)


세차게 엉켜돌아가는 역사의 조류가 어떻게든 이어져야만 하는 개인의 삶에 만들어낸 온갖 상흔들. 삶의 굴곡들을 생생하게 보여주기 위해, 그들이 배에 오르기 전의 과거는 배 위에서의 현재와 교차되며 조명된다. 레오나르, 쁘루덴시, 마르꼬, 요렝-까발, 비센 바랄...의 삶에 조금 더 감정이입할 수 있었다면, 조금 더 공감할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텐데. 스페인 역사와 그쪽 지리에 대한 지식이 너무 짧다 보니 충분치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밀수꾼으로 살아야만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좀더 긴장감 넘치게 펼쳐졌다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그들의 비극을 더 잘 이해하지 못했다는 데 대한 안타까움이 더 크다.


스페인 내전에 대한 책이라도 좀더 읽어보고, 여유롭게 다시 책을 읽어보고 싶다. 좀더 정성스럽게, 배 위의 그들에 대한 연민을 잃지 않고.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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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아이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욱 옮김 / 북스피어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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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소중히 여겼던 추억.

무언가를 좋아했던 추억.

사람은 그런 기억들에 의해 지켜지며 살아간다. 

그런 기억이 없는 사람들은 서글프리만큼 간단하게 검은 손을 등에 짊어지게 된다. 

(74쪽, '지요코' 중)



...<눈의 아이>에 실린 다섯 편의 단편을 다 읽고 내 머리 속에 가장 먼저 떠올랐던 건, 결국 이 이야기들은 검은 손을 등에 짊어진 사람과 짊어지지 않은 사람에 대한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눈의 아이'나 '성흔'의 서술자가 검은 손을 등에 짊어진 사람이라면, '장난감'의 구미코나 '지요코'의 서술자는 짊어지지 않은 사람이겠지, 당연히. '돌베개'의 아사코와 이시자키가 좀 헷갈리긴 하는데, 안 짊어진 사람에 가깝겠지? 결말을 보면 말이다.



과거에 대한 집착과 과거를 기억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데도, 많은 사람들은 발작적으로 과거에 얽매이는 건 나쁜 거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맨날 옛날 얘기, 좋았던 때 얘기, 다 빛바랜 케케묵고 먼지묻은 얘기 끌어안고 사는 게 무슨 의미 있냐고 시니컬한 표정으로 묻는다. 또 어떤 사람들은 진취적이고 능동적이며 사회와 시대가 원하는 인물이 되기 위해서는 과거, 오래된 것, 철없던 시절에 낭비하고 소비했던 것에 집착하지 말고 앞날, 새로운 것, 실용적이고 생산적인 그 무엇을 추구해야 한다고 눈을 빛낸다. 과거에 이랬네 저랬네 하는 사람 치고 현재를 의미 있게 사는 사람 없으니 잊을 건 빨리 다 잊고 새로운 걸음을 준비해야 한다고 자못 비장하게 주먹을 불끈 쥐는 사람들도 많다.


부분적으론 맞는 말이다. 고루하고 융통성 없어 생각과 사상이 낡아빠진 사람들을 보면 나 역시 답답하고 짜증스러우니까. 이 순간의 나를 딱딱하고 획일적인 인간으로 만드는 낡은 것은, 잊혀져야 할 것들과 동의어일 테다.


그렇지만, 지금 내가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시간은 흘러가니까, 결국 나의 현재란 아까 전 나의 미래일 뿐이고, 그런 의미에서 나의 과거란 '바로 지금'이 아닌, 내가 살아온 모든 순간이라고 한다면, 그 모든 순간이 잊혀져야 할 건 아니지 않나. 심지어 내게 올지 안올지도 모르는 미래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가치와 의미를 위해 버려야 할 것은 더더욱 아니고.



결국 지금을 살아가는 나를 지탱해 주는 건, 앞으로 올지 안올지도 모르며 좋아질지 나빠질지 장담할 수도 없는 미래보다는 무언가를 아끼고 사랑했던 과거의 기억, 그 따뜻했던 순간에 대한 추억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그런 기억이나 추억을 많이 만들기 위해서 사람은 현재를 열심히 신나게 살아가야 하는 것 아닐까. 그리고 그런 기억이나 추억이 내 삶에 더 많이 생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불투명한 미래의 무게로 힘들고 지치려고 할 때 나를 잡아주는 희망, 일, 테고.


'눈의 아이'의 '나'에게도, '성흔'의 '나'에게도, '지요코' 속 인물들이 가진 지요코가, 건담이, 곰 인형이 있었다면 다른 삶을 살 수 있지 않았을까. 검은 손에 휩싸여 내 세계의 법칙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고도 아무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괴물이 되는 일은 안 일어나지 않았을까. 무언가를 사랑하고, 아끼고, 소중히 보살피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그 무언가에게 '내가 잘 해 주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잘 되는' 건 그 무언가가 아닌 우리 자신이 되어가니까.


그래서, 누구나 마음 속에 지요코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있다.


그 지요코가 더 나를 잘 지켜줄 수 있게, 나 역시 내 세계의 접점들을 잘 보살피고 소중히 다루어야겠다는 생각을 새삼 해 봤다. 검은 손에 휩싸이지 않게. 누군가의 지요코를, 쉽게, 아무 생각 없이 해치지 않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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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이다. 오늘은 식목일. 식목일이 휴일에서 빠진 뒤로는 '어 오늘이 식목일이었네...'가 되어 버렸지만 그래도 엄연히 청명/한식/향토예비군의 날과 함께 달력에 표시되어 있는, 나무 심는 날. 왠지 싱그러운 샛초록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하루다. 이 정도가 되어야 아, 3월이 진짜 다 갔구나, 싶다.


피곤하고 정신없이 바빴던 3월과 헤어졌으니, 이제는 봄처럼 따뜻해지고 조금은 나른해지는 날들이 펼쳐지려나. 물론 삶이란 늘 기대를 비웃고 찾아오는 하루하루의 연속이므로 그럴 리 없이 계속 바쁘고 계속 빡빡하고 계속 피곤하겠지만. 조금은 더 여유로워지기를 희망하며 4월에 읽고 싶은 책들은, 다음과 같다 :)





1. 선셋 파크

책 소개를 읽지 않고 작가 이름만 본 채 고르게 되는 책이 있다. 폴 오스터도 그런 작가 중 한 명. 그의 책을 대충 대여섯 정도 읽었던 것 같다. 그 중 페이보릿은 달의 궁전. 십 년이 뭐야, 십이년쯤 전에 읽은 것 같다. 선셋 파크를 통해 나의 페이보릿이 바뀔 수 있을까? 궁금하다. 폴 오스터의 작품을 열심히 찾아 읽던 때도 있었는데…한동안 또 잊고 살았네. 오랜만에 읽어보고 싶다. 제목도 마음에 들고, 표지도 마음에 들고, 열린책들은 기본적으로 신뢰가 가는 출판사이기도 하고. 


2. 주말

폴 오스터처럼, 베른하르트 슐링크 역시 이름만 보고 작품을 골라도 크게 실망하지 않게 되는 작가이다. 나와는 약간 다른 시각/관점으로 세계와 사물을 바라보는 사람이라고 느껴져서, 그의 작품을 읽고 나면 머리가 복잡해지기도 한다. 안타까운 건 시공사에서 그의 책이 앞으로 출간될 예정인 것 같다는 건데…아아아. 리브로와 시공사를 싫어하고 시공사에서 나오는 책은 절대 구입하지 않는지라 참…… 솔직히 시공사에서 괜찮은 책이 나오면 늘 짜증이 난다. 전두환 꺼져-_-


3. 아이언 하우스

사실 이 책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모르는 작가, 낯선 번역자, 특별한 느낌 없는 출판사, 별로 맘에 안 드는 표지, 팍 와닿지 않는 줄거리…이 정도면 눈에 안들어오는 책이라 하기에 충분한지라. 그런데 검색을 하다가 리뷰들이 너무 좋아서! 아니 도대체 얼마나 재미있기에 이렇게 리뷰들이 좋은거야? 하는 생각에 호기심이 들어 버렸다. 만약 이 책이 3월의 신간으로 뽑혔는데 재미 없으면 좀 화날 것 같다ㅎ


4. 주석 달린 드라큘라

이런 책은, 뭐랄까, 존재 자체가 존재의 가치가 된달까. 읽지 않고 소장만 해도 마음이 뿌듯해질 것 같은 기분. 드라큘라라는 이야기 자체도 매력적이지만 이 '책'이 '책'으로서 갖는 의미도 충분한 거다. 마치 가구처럼ㅋㅋㅋ


5. 문라이트 마일

…사실 3월의 신간소설로 가장 꼽고 싶었던 책은 이거다, 문라이트 마일. 데니스 루헤인이라니, 켄지라니, 제나로라니, 켄지&제나로라니!!!!!!! 세상에 (현재까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립탐정 듀오란 말이다!!!!! 게다가 <가라, 아이야, 가라>의 속편이라니!!!!!!!! 아만다가 또 실종되다니!!!!!!!!! 어떻게 이 책을 안 읽을 수 있냔 말이다!!!!!!!!!!!!!!!! 근데 정말 속상하게도 이 책이 2월에 나왔다는 걸 3월이 되어서야 깨달아 버렸으니, 오호 통재라ㅠㅠㅠㅠㅠㅠㅠ 이 책이 3월의 신간소설로 절대, 절대, 절대!! 뽑힐 수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지만, 페이퍼에 켄지&제나로 시리즈를 넣지 않는다는 게 너무 참을 수 없어서!!!! 굳이 절대 뽑히지 않을 책을 집어넣고 싶었다. 문라이트 마일, 이건 알라딘에서 안 줘도 사서 읽습니다, 켄지&제나로, 빨리 만나요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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