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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우익 근대사 완전정복
이영채.한홍구 지음 / 창비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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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대학 시절, 내가 다니던 학교에는 '발전사회학'이라는 과목이 있었다. 사회학과 수업이었는데, 그당시 필수 과목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 내 주변에는 사회학과 전공자들이 매우 많았었는데-정작 나는 사회학과와 아무 관련 없는 사람이었지만-다들 이 수업을 들으러 가기 싫어했다. 수업이 끝나고 나면 지친 얼굴이거나 질린 얼굴이거나 짜증이 난 얼굴이거나 화가 난 얼굴로 돌아왔다. 물론 수업을 듣는 것은 보통 지치는 일이지만, 그런 '지친 얼굴'과는 사뭇 다른 느낌의, 회의감에 가득 찬 표정들로 돌아오던 주변 사람들 얼굴이 지금도 떠오른다.


처음 수강신청을 할 때부터 이 수업을 듣기 싫어하기에,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수업 이름만 보고 물어봤었다. "발전사회학이 뭐야? 사회학의 발전 뭐 이런거야? 아니면 뭐 사회가 발전되는 과정 같은 거야?" 어찌보면 참 무식한 질문이지만 '발전'이라는 말이 수업 이름에 들어간다는 것조차 생경하게 느꼈던 나는 이 정도의 질문밖에 할 수 없었다. 그때 함께 있던 세 사람 중, 한 사람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 사회가 발전됐다는 거야. 일제강점기에서 사회가 발전됐다, 이걸 공부하는 과목 같은 거야." 


응?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2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데다가, 중등학교 때까지 역사시간마다 '일제는 우리 민족을 괴롭히고 수탈하고 못살게 굴었다'라는 배움만 반복적으로 들어왔던 내게 저 설명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에서 사회가 발전했다면 당연히 일본사회가 발전한 걸텐데 그걸 사회학과에서 왜 배우지? 눈알을 굴리다가 다시 물었다. 식민지근대화론 같은 거야? 뭐 그렇게 볼 수도 있지. 그러면 식민지근대화론이 틀리다는 걸 배우는 거야? 아니지 그 반대지. 응? 일제강점기에서 조선이 발전했다는 거라니까. 응?


물론 그것이 발전사회학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지금은 안다. 하지만 어쨌든 그당시 내 주위 사람들이 들었던 발전사회학 '수업'은 그걸 공부하는 시간이 맞았고, 그래서 내 주변 사람들은 매번 스트레스를 받아 돌아오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내가 한국의 '우익'을 간접적으로나마 처음 만난 때가 아닐까 싶다. 지금은 당연히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저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들도 많고, 실리적인 목적 때문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는 걸 알고 있다만, 그때의 내게는 '일제강점기 하에서 조선 사회가 발전됐다'는 개념 자체가 너무 낯설고 놀라운 것이었다. 그 정도로 나는 일본에 대해, 일본의 '지배층'에 대해, 그들의 생각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그뿐만인가. 떠올려 보면 광복절 날마다 야스쿠니 신사의 이름을 들어놓고도, 그곳에 일본 정치인이 참배하는 건 '엄청 나쁜 일'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왜 나쁜지, 왜 그곳에 가는 게 문제가 되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치인들은 왜 그곳을 광복절에 찾는 것인지 아주 오랫동안 몰랐다. 그냥 맹목적으로 나쁘다고 외워버렸다. 그건 하면 안되는 건데 일본인들이 하고 있으니 하지 말라고 해야 하는 것인가보다 했다. 그 이상의 관심을 더 두지 않았다. 이렇게나 무지하고 관심이 없었다.


지금은-최소한 그때보다는 더 알고 있다. 이런저런 방송을 찾아 듣기도 하고, 영화를 보기도 하고, 책을 보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년같이 반일 감정이 휘몰아치던 때, 일본 전체를 적으로 간주하고 혐오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당연한 일처럼 여겨져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음에도, '왜' 그러면 안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일본 전체'가 아니라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에 대해 잘 설명할 수 있으려면 더 알아야 했고, 더 배워야 했다. 


이 책은 그 배움에 매우 큰 도움을 주었다.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한일관계의 문제들을 '문재인 정부와 아베 내각이 사이가 나쁘기 때문' 같은 식으로 이해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걸 너무 잘 알려준다. 이 문제들은 종전부터, 어쩌면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면서부터, 아니 어쩌면 메이지 유신에 성공한 일본이 대륙으로의 진출을 꿈꾸면서부터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는 걸,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좀더 또렷하게 알 수 있었다. 


특히 많은 도움이 됐던 건 야스쿠니 신사를 다룬 2장의 내용과 재일조선인들의 삶에 대해 다룬 7장의 내용이었다. 하나는 일본 우익들이 어떻게 평화헌법을 집어치우고 자신들이 바라는 '보수국가'로 나아가고 싶어하는지에 대한 내용이고 다른 하나는 종전 이후에도 일본에서 계속 살아온 '조선인'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왔느냐에 대한 내용이니, 그 둘이 매우 다른 내용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이 둘이 모두다 집단을 위한 개인의 희생은 당연한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의 폭력성이 빚어낸 결과로 보였다. 고귀한 희생을 치른 것으로 포장되어 신격화되고 있는 야스쿠니 안의 사람들, 고귀한 희생을 요구하던 사회로 인해 고향도 국적도 가족도 잃어야만 했던 재일조선인들, 이 둘은 일그러진 군국주의가 빚어낸 비극의 양면 같다고 생각했다.


한홍구선생의 강의를 책으로 옮긴 것들이 보통 그렇듯이, 가독성이 높고 술술 잘 읽힌다. 하지만 '글자'를 걸리는 데 읽는 시간은 짧을지라도 그 글자의 '의미'를 되새기는 데 걸리는 시간은 꽤 오래 걸릴 거라고 생각한다. 역사를 기억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알아온 역사란 어쩌면 '내가 살아온 나라의 역사'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상대의 역사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지조차 못하는데, 무엇을 기억해서 어떻게 현재의 거울로 삼을 수 있겠는가. 


나는 이 책을 자주 읽고, 책 맨 뒤에 실려 있는 '더 깊은 공부를 위한 자료'들도 찾아 읽고, 주변의 친구들에게도 자주 권할 생각이다. 그렇지 않으면 개인의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그들'이 역사의 전면에서 세상의 방향을 거꾸로 흘러가게 할지도 모르니까. 그래서는 안 되니까.




영화 '주전장', '김복동', 그리고 팟캐스트 '그것이 알기 싫다'에서 2019년에 방송된 일본 관련 방송들과 함께 읽고 보고 들으면 훨씬 더 이해가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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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읽다, 쓰다 - 세계문학 읽기 길잡이
김연경 지음 / 민음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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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대한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책 감상에 대한 책'은 더더욱 그랬다. 남이 쓴 책 감상문을 읽을 시간에 그가 읽은 그 책을 그냥 읽는 게 낫지 않나? 하고 생각했었다. 뭐, 한 달에 책을 열 권 이상 읽던 때의 이야기다.

몇 살 이상이 되면서부터 앞으로 내가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 이제까지 책을 읽을 수 있었던 시간들보다 짧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책을 읽는 데도 건강이 필요하다는 느낌이 강해지면서부터는 더 그랬다. 자연스럽게 예전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책에 대한 책'들에 관심이 갔다. 특히 고전을 소개해주는 책을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교양인이라면 이 정도는 읽었어야 한다는' 이른바 필독서들 명단을 훑을 때면 어린 시절부터 소설만 편독해온 것이 조금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했다(고 말은 하지만 여전히 소설을 편독하고 있다;). 하지만 요즘도 '누구나 한 번쯤은 읽었을 고전 문학 리스트' 따위를 훑다가 못 읽어본 책들이 너무 많이 보이는 걸 깨닫고, 와 나는 평생 이거 못 읽고 죽겠구나 하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러던 중 좋은 기회로 김연경 씨가 쓰신 『살다, 읽다, 쓰다-세계 문학 읽기 길잡이』를 읽게 되었다.

『살다, 읽다, 쓰다』는 책 제목 그대로 세계 문학 작품 중 고전의 반열에 꼽혀 여전히 '살아 있는' 것 같은 책들을 '읽고', '쓴' 글들이 엮여 있다. 줄거리나 중심 인물, 작가에 대한 설명을 요약해 열거하는 정보 전달 위주의 글이라기보다는 성실하고 꼼꼼한 독자가 공들여 읽은 작품의 의미를 당대와 현재의 관점에서 두루 살펴본 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의 글은 작가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되고 있었는데, 인간의 삶에 대한 연민과 작가에 대한 애정이 함께 느껴지는 부분들이 자주 보여 인상 깊었다. 예를 들면 체호프에 대한 부분.


동시대인들은 그를 아끼긴 했어도 톨스토이와 같은 '위대한 작가'로는 여기지 않았다. 그를 대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은 훗날의 문학사이다. 인간과 세계의 '작음'을 '위'가 아니라 그저 '밖'에서 그려 낸 '겸손함'이야말로 그의 천재성의 근거가 아니었나 싶다. 순박한 시골 청년과 예민한 인텔리겐치아가 공존하는 미남형 얼굴, 스물네 살에 처음 각혈을 하고서 평생 골골대다가 모스크바예술극장의 배우와 결혼한 지 3년만에 장결핵으로 사망한, 애달프고도 항망한 삶 역시 그의 문학의 일부가 되었다. (중략) 아들을 잃은 자신의 슬픔만으로도 버거운데 이제 막 아내의 불륜 사실을 알고서 분노하는 남자의 푸념을 들어주어야 하는 시골 의사(「적들」), 기강 확립을 내세워 주변 사람들을 괴롭히다가 관 속에 들어가서야 평온을 얻는 희랍어 교사 벨리코프(「상자 속의 인간」), 천재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정신 분열증을 앓다가 피를 토하고 죽는 학자 코브린(「검은 수사」)……진부하고도 황망한 상황 속에서 갈팡질팡하다가 급기야 엎어지는 그들이 매력적인 것은 어설프고 촌스럽기 때문이다. 체호프가 바로 그런 매력을 지닌 작가이다. (182-183쪽. 이 글을 읽고 으음 그런가 체호프가 그런 얼굴이었나…싶어 새삼스럽게 체호프 사진을 검색해봤음. 아니 원래 이렇게 잘생긴 사람이었나 싶어 깜짝 놀랐다ㅋㅋㅋㅋㅋㅋㅋㅋ 내 기억 속 체호프는 안경과 수염뿐이었는데…내 기억 도대체 무슨 쓸모????)


책 전체가 360쪽 정도니까 그렇게 두껍지 않은 편인데, 담겨 있는 책 얘기들은 생각보다 꽤 많다. 한 편의 글이 보통 5페이지 정도, 부담스럽지 않게 읽을 수 있는 분량이라 가능했던 것 같다. 총 7장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읽기 전에는 5장과 6장이 제일 재미있을 것 같았고, 다 읽고 난 후에는 2장과 3장의 작품들을 다시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5장과 6장이 덜 재미있었던 건 아닌데 2장과 3장의 테마가 나에게 더 와닿았나 보다. 수많은 정보들이 오가는 사회에서 시급히 섭취(!)해야 할 지식도 많은데, 실제로 일어난 일도 아닌 문학을, 그저 상상의 산물에 불과한 소설을 굳이 읽어야 하느냐는 질문에 부딪힌다는 느낌이 최근 몇 년 간 많이 들었기 때문인 듯하다. 




한동안 나는 왜 문학을 읽어야 하는가, 왜 소설을 읽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고민했었다. '나는 이제 소설 안 읽어. 너무 뻔하거나 너무 말도 안 돼. 더 못 읽겠어.'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을 여럿 만나기도 했다. 내가 소설을 읽는 이유가 죽을 때까지 경험할 수 없는 일들을 소설을 통해 겪어 봄으로써 타인의 삶을 더 잘 이해하고 인간에 대해 더 잘 이해하는 내가 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라면, 그냥 그 시간에 소설을 읽지 말고 인간에 대해 다룬 과학책이나 철학책, 우리 사회의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룬 사회과학책을 더 읽는 게 낫지 않나 하는 생각도 진지하게 해 봤다.

하지만 지금은 그 고민에서 매우 자유로워졌는데, 나를 자유롭게 해 준 '나의 답'을 이 책에서도 만날 수 있었다. 아래와 같은 부분에서. 

죄악을 비껴 가려는 인간의 처절한 몸부림, 그것을 무참히 조롱하는 야비한 운명의 테러, 그럴수록 더욱더 거세지난 앎과 자유를 향한 열망, 끝으로 크나큰 죄악 앞에서 행해진 잔혹한 자기 단죄……. 인간 삶의 이 비극적인 아이러니 앞에서 연민과 고통을, 나아가 카타르시스를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다. (53쪽)

과학이 이토록 발전했음에도 자연의 힘, 탄생과 죽음의 신비 앞에서 우리는 여전히 전율한다. 때문에 자연-신과 인간이 한데 어우러져 생명의 기운을 한껏 뽐내는 『변신 이야기』 역시 여전히 재미있게 읽힌다. (58쪽) 

그러니까 내가 찾은 답이 바로 저것이었던 것이다. 다른 책을 통해서도 인간의 삶과 인간에 대한 이해를 분명히 얻을 수 있고, 인간 삶의 비극적인 아이러니에 대한 지식을 구할 수 있겠지만, 소설이 나에게 주는 것만큼의 연민과 고통과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는 건 쉽지 않다는 것. 과학이 발전하고 사회가 체계화되며 조직화되었지만, 많은 정보를 쌓아야겠지만, 나에게 더 즐거움을 주는 건 신비로운 이야기인 것. 그 앞에서 나는 전율하는 것. 삶을 고통의 동의어라 여기기에 '살아야 하는 시간들'을 조금이나마 덜 고통스럽게 만들고 싶다고 생각하는 나에게, 가장 손쉽게 재미를 취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지금으로서는 여전히 소설을 읽는 것인 듯하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내내 '이 책을 읽은 뒤 꼭 읽어야 할 책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했었다. 『변신 이야기』에 대한 글을 읽으며 중학생 때까지 그리스 로마 신화를 매우 좋아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라 다시 읽고 싶어졌고, 삶의 아이러니에 집중하면서 『오이디푸스』와 『리어 왕』을 다시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모든 것을 파괴할 뿐 정복하지 않는 고래여, 나는 너를 향해 돌진하고 끝까지 너와 맞붙어 싸우리라. 지옥 한복판에서라도 너를 향해 작살을 던지고, 가눌 수 없는 증오를 담아 내 마지막 숨을 너에게 뱉어 주마.라는 구절이 너무 인상 깊어서 『모비 딕』에 다시 도전해봐야 하나 고민했고, 역시 사람이라면(!)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읽어야 하는 건가 싶어 또 고민 중이다. 어렸을 때 재미있게 읽었다는 기억만 남아 있는 『아Q정전』, 『안나 카레니나』, 『달과 6펜스』도 더 나이 먹기 전에 다시 읽어봐야겠다 싶다.

사실 나는 세계 문학, 그중에서도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세계 문학 '고전'을 진득하게 읽을 수 있는 시기란 역시 10대 시절이라고 생각해 왔었다. 페이지 사이사이에 숨어 있는 다디단 과실을 탐욕스럽게 받아먹을 수 있는 나이, 이미 굳어진 눈과 제한된 사고로부터 그나마 조금 더 자유로운 나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집중력이 짧아지는 것 같기도 하고. 어렸을 때는 책 한 권 붙잡고 있으면 한두시간이 훌쩍 지나갔는데, 요즘은 30분간 책을 쉬지 않고 읽는 것도 쉽지 않아졌다. (쓰다 보니 자꾸 슬퍼진다????) 나 역시 10대 시절에 세계 문학 '고전'을 가장 많이, 가장 열심히 읽었다. 도스토예프스키도, 톨스토이도, 샬럿 브론테와 에밀리 브론테도, 카뮈도, 카프카도, 셰익스피어도, 고골도, 발자크도, 에밀 졸라도, 찰스 디킨스도, 헤밍웨이도, 찰스 디킨스도, O. 헨리도, 모두 10대에 재미있게 읽었던 작가들이다.

하지만 학교와 학원을 오가느라 정신 없이 바쁜 데다가 스마트폰에 하루 종일 시선을 두고 있는 게 너무 당연한 일상이 되어 버린 요즘 10대들을 생각해 보면, 그들에게 이 '고전'을 진득하게 읽는 건 쉽지 않은 일이겠구나 싶다. 그리고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며 곰곰이 짚어 보니, 나 역시 20대 이후에 읽었던 책이나 10대 때 읽고 재미있어서 20대 이후에도 여러 번 찾아 읽었던 책들을 훨씬 더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더라. 『오만과 편견』도 그렇고, 『제인 에어』도 그렇고, 『폭풍의 언덕』, 『체호프 단편선』, 『허클베리 핀의 모험』, 『필경사 바틀비』, 『이방인』, 『장미의 이름』도 마찬가지. 그러고 보면 고전이란 그저 유명한 작품이나 오래된 작품보다는 한 번 완독한 후에도 계속 찾아 읽게 되는 작품, 다시 읽을 때마다 이전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재미를 만날 수 있게 해 주는 작품에 붙여주어야 할 이름표가 아닌가 싶다. 내게는 이 위에 나열한 그 책들이 아마 '나의 고전'이겠지. 

부디 이 마음가짐이 행동으로 이어져서 올해가 가기 전 이 책 속에 언급된 고전 작품 중 세 권이라도 읽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랄 뿐첫 번째 책을 뭘로 하지…『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과 『안나 카레니나』는 너무 두꺼워서 첫 번째 책으로 삼기 힘들 것 같은데…그만 고민하고 내일 도서관에서 『오이디푸스 왕』을 빌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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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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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책의 뒷표지에는 '억압적인 가부장제 속에서 침묵하던 한 고등학생 소녀가 드넓은 세계와 주체적인 자아를 찾아 나서는 정신적 독립기'라는 설명이 쓰여 있다. 책을 다 읽은 지금, 나는 이게 완전히 틀린 설명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저 문장만 보면 억압 속에서 고통스러워하던 킴발리가 엄청난 자각을 이루어서 굉장히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인간이 되는 이야기같다는 느낌이 들지 않나 하고 생각하긴 한다.


인간이란 쉽게 변하지 않는다. 한 번에 완전히 변모하는 인간, 같은 얘기야말로 정말 비현실적이다. 그리고 나는 이 책이 '드넓은 세계로 달려나가 주체적인 인간으로 바로선 여성'의 이야기라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오히려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이 되고 싶은지 생각조차 해본 적 없던 여성이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자기 스스로를 이해하게 되면서 겪는 혼란과 갈등을 굉장히 현실적으로 그린 소설이라고 느꼈다. 그리고 그런 부분이 이 소설의 매력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 혼란과 갈등의 흐름을 따라가는 건 결코 쉽지 않았다. 첫 번째 이유는 킴발리의 아버지인 유진의 행위가 지극히 폭력적이었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가장 먼저 떠올렸던 개념은 가스라이팅이었다. 


생리통을 경감시켜주는 약을 먹으려고 미사 십 분 전에 콘플레이크를 먹었다는 이유로 가죽 벨트를 풀어 킴발리를 때리고 나서 "왜 죄악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거야?" "왜 죄악을 좋아하는 거야?"라고 묻는 아버지를 볼 때는 너무 화가 났는데, 이 다음 장면에서는 화도 나지 않았다. 그냥 머리가 멍해져서, 책을 잠시 내려놓았었다.

 

아버지가 오빠와 나를 홱 끌어안았다. "많이 아팠니? 살갗이 터졌니?" 아버지가 우리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나는 등이 욱신거렸지만 아니라고, 아프지 않다고 말했다. 죄악을 좋아하는 것에 대해 얘기하며 고개를 흔드는 아버지는 마치 뭔가에, 떨쳐 낼 수 없는 뭔가에 짓눌린 듯한 모습이었다. (132쪽)


이 아버지는 정말로 이게 사랑이며 헌신이라고 믿고 있는 거구나. 너희를 때리는 게 고통스럽지만 그래도 나는 너희를 사랑하니까 때릴 수 밖에 없다고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있구나. 이래야 너희가 죄악에 사로잡히지 않고, 완벽한 존재가 되어 천국에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구나. 그 생각에 자기 자신도 억압되어 있는데, 그래서 자기 자신도 그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는데도, 그래도 저걸 감당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짓누르고 있는 거구나…소름이 끼쳤다. 

 

더 끔찍한 장면은 고모네 집에 다녀온 킴발리가 할아버지와 함께 있었다는 이유로 아버지가 킴발리를 벌하는 부분이었다. 카톨릭 교도가 아닌 '자신의 아버지'와 '자신의 딸'이 '자신의 동생' 집에서 함께 지냈다고, 그리고 그 사실을 딸이 자신에게 정확히 알려주지 않았다고, 너는 죄악으로 걸어 들어간 거라며 딸을 비난하는 아버지. 그리고는 딸에게 끓인 물을 붓는 아버지…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끔찍했지만, 그 상황에서도 아버지에게 "네, 아버지."라는 대답을 들려주고 싶어하는 킴발리를 봐야 한다는 건 더 무시무시했다. 그리고 이 점이 내가 이 책을 읽기 힘들어했던, 가장 결정적인 이유였다.

 

"너 할아버지가 은수카에 오는 거 알고 있었지?" 아버지가 이보어로 물었다. 
"네 아버지."
"그런데 나에게 전화해서 그 사실을 알려 줬던가, 그보?" 
"아뇨."
"이교도와 한집에서 자게 될 것도 알았지?" 
"네, 아버지."
"그러니까 죄악을 똑똑히 보고도 걸어 들어갔단 말이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버지."

"킴발리, 너는 귀한 아이야. (중략) 너는 맹렬하게 완벽을 추구해야 한다. 죄악을 보고도 걸어 들어가선 안 돼." 아버지가 주전자를 욕조 안으로 가져오더니 내 발을 향해 기울였다. 그러고는 마치 실험을 하면서 어던 결과가 나오는지 보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 내 발에 뜨거운 물을 천천히 부었다. 아버지는 이제 울고 있었다. 눈물이 얼굴을 줄줄 흘러내렸다. 나는 수증기를 먼저 보고 그다음에 물을 봤다. 주전자에서 나온 물이 거의 슬로 모션으로 포물선을 그리며 내 발을 향해 흐르는 것을 지켜봤다. 닿았을 때의 통증이 너무나 순연한 극열이라 일순간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비명을 질렀다. 
"이게 네가 죄악으로 걸어 들어갈 때 스스로에게 하는 짓이다. 발을 데는 거야." 아버지가 말했다.
아버지의 말이 옳았기 때문에 "네, 아버지."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발의 열기가 순식간에 여러 갈래의 극심한 고통이 되어 머리와 입술과 눈으로 올라왔다. 아버지는 넓적한 한 손으로 나를 안은 채 다른 손으로 조심스럽게 물을 부었다. (239-240쪽)


아버지의 폭력을 직접적으로 당하는 킴발리와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하고 기쁘게 해 주고 싶어하는 킴발리가 동일한 사람이라는 것. 이 점이 독자로서의 나를 혼란스럽고 슬프게 만들어서, 책을 읽는 내내 나는 킴발리를 마냥 좋아하지도 못했다. 킴발리가 자신이 학대당하고 있음을 빨리 깨닫고 아버지로부터 도망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요원해 보였다. 


그런데 가스라이팅은 보통 정신적 폭력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굳이 물리적인 폭력을 쓰지 않아도 될 정도로 피조종자의 조종자에 대한 지배력이 강력하고 흔들림 없는 상황에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그러나 유진은 킴발리와 자자뿐만 아니라 베아트리스에게도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폭력을 계속 사용했으니까 가스라이팅으로 그의 행위가 완전히 설명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그루밍 수법을 이용한 학대인가 생각했는데, 그렇다고 유진의 가학적 행위가 그에게 기쁨이나 즐거움을 준 것 같지도 않다. 자식과 아내에게 폭력을 가하는 가부장들이 모두 다 그렇다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지만, 최소한 이 책의 유진은 때리는 자신과 때려야 하는 자신을 별로 좋아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인간은 도대체 왜 이러는 거지…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너는 이 모든 특권을 누리는 만큼 뭔가를 해야만 해. 하느님이 너에게 많은 것을 주셨으니 기대하시는 것 또한 많단 말이다. 하느님은 완벽을 기대하셔.” (64쪽)   


 문장을 읽고서야 조금 이해가 갔다. 어쩌면 유진은 스스로를 신처럼 생각했던 게 아닐까. 신에 대한 믿음을 중시하며 신의 이름을 앞세우다보니 신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는 데 점점 익숙해져 결국은 자기 자신을 신이라고 생각하게 된 사람. 그래서 신 앞에 인간이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한다고 믿었듯이, 자신이 지배하는 이들도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한다고 믿었던 사람. 구약 성경 속의 신이 사랑하는 백성들이 신을 위한 삶을 살 수 있게 하려고 불을 내리고 질병을 내리고 홍수를 내렸듯이, 자신도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들이 자신을 위한 삶을 살게 하려면 가죽 벨트를 휘두를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 킴발리에게 신이 주었다는 특권도, 신이 기대하신다는 완벽도, 사실은 자신이 준 것이며 자신이 기대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끝까지 외면하면서 온 가족을 망가뜨렸겠지. 자신도 망가뜨리고. 그렇다면 이 책의 구성이 신들 부수기-마음으로 이야기하기-신들의 파편-다른 침묵으로 되어 있는 것도 이해가 된다. 


내가 알던 세계가 이 세계의 전부가 아니었다는 걸 깨닫는 것, 그래서 나의 지평과 인식이 확장되어가는 것은 분명 감사한 경험이지만 행복한 경험만은 아니다. 자각 이전의 세계는 완전히 잘못됐었던 것 같고 그 세계에서 살아가던 나는 아무 생각 없는 무지렁이였던 것 같아서 과거의 나를 증오하게 되기도 하고 과거의 세계로부터 완전히 빠져나오겠다며 불가능한 몸부림을 치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책을 읽는 동안엔 킴발리를 마냥 좋아하지 못했던 나는, 책을 다 읽은 후에야 킴발리를 좋아하게 됐다. 킴발리는 솔직하고 진심이고 현실적이었으니까. 내게 없던 언어를 찾아가기에 새 세계의 문법에 결코 익숙할 수 없는 자신을 그냥 그대로 보여주었으니까. 킴발리가 유진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여러 번 표현했고, 마지막 장에 이를 때까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토로했다는 이유로 '야 너를 그렇게 학대한 사람한테 그런 마음을 갖다니 미친 거 아니냐????'라며 그녀를 손가락질하는 거야말로 편협하고 얕은 이해라고 생각한다. 양육자 혹은 보호자에 대한 양가적 감정이야말로 인간의 보편적인 것 아니겠는가. 

 

아버지 때문에 겪어야 했던 침묵에서 벗어난 현재를 기뻐하고, "네가 원하는 건 뭐든 할 수 있어, 킴발리."라고 말해주는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되고, 아버지가 나오는 꿈을 늘 악몽으로 끝내게 되는 킴발리와 '그래도' 아버지를 위해 미사를 드리고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킴발리가 동일한 사람이라는 사실이야말로, 진실이다. 그리고 이런 진실을 맞닥뜨리기 위해서 나는 소설을 읽는 것이라고, 오늘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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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냥한 사람
윤성희 지음 / 창비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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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윤성희소설가님의 소설을 좋아한다. 맨 처음에 읽었던 건 거기, 당신이었다. 십년도 더 전이다. 제일 앞에 실려 있는 유턴지점에 보물지도를 묻다부터 마음에 들었다. 봉자네 분식점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마지막 소설이 잘 가, 또 보자였던 것도 좋았다. 다음 책이 나오면 또 찾아 읽게 되겠구나 싶었다. 그 후에 감기 구경꾼들 웃는 동안이 순서대로 나왔고, 베개를 베다 첫 문장까지 나왔다. 모두 나오자마자 샀다. 늘 또 보는구나, 하는 기분이었다.



2상냥한 사람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서 생각했다. 상냥한 사람의 이야기일까 상냥하고 싶었던 사람의 이야기일까 결코 상냥해지지 못했던 사람의 이야기일까. 문득 '상냥한'이 무슨 뜻인지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 페이지를 열었다. '성질이 싹싹하고 부드럽다.'라는 뜻풀이를 확인하고는 음 역시 나랑은 거리가 먼 형용사 맞군, 하고서 표지를 펼쳤다.

 



3소설은 아역배우 출신인 형민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형민뿐만 아니라 형민의 어머니와 아버지, 아내와 딸, 직장 동료들, 형민이 출연했던 TV 토크쇼의 진행자, 형민이 출근할 때 들르는 회사 근처 포장마차에서 샌드위치를 파는 부부 아들의 친구, 형민이 사는 아파트 할머니들, 형민이 들른 휴게소에서 만난 남성 등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직조되어 있다.

 

모든 사람들에게 극적인 사건들이 있고 자기 나름의 입장이 있다. 형민은 아내와 이혼하고 딸과 떨어져 지낸다. 형민의 딸 하영은 친구를 사귀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학교에서 벌어진 따돌림의 방관자로 지목됐다. 직장 동료들은 횡령을 했고 차도에 뛰어들었고 아르바이트생을 다치게 했고 잘못된 일을 못본 척했다. 포장마차에서 샌드위치를 팔던 부부는 사고를 당했다. 형민은 어머니를 잃었고 아내와 사별했고 TV 토크쇼의 진행자는 자살했으며 하영이 외면했던 친구는 자살 기도를 했다. 강차장의 아들도 강차장을 도둑으로 몰았던 문방구 주인도 죽었다. 하지만 이런 사연들과 함께 나와야 할 것 같은, 억울하고 분하고 속상하고 고통스럽고 절망스러운 감정들은, 문장 사이에서 스윽, 하고 지나간다. 형민의 아내가 교통 사고로 입원해 있다가 결국 죽는 내용은 이런 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형민은 버스를 타고 아내는 택시를 탔다. 그리고 그 택시는 사거리에서 신호위반을 하다 트럭을 박았다. 형민의 아내는 응급실에서 일주일을 버텼다. 아내의 귀에 대고 형민은 늘 똑같은 말을 했다. "어서 일어나자. 그러면 내일 풍경이 다르게 보일 거야." (177쪽)

 

어떻게 보면 굉장히 건조한데, 그 건조함 때문에 더 많은 소리와 장면과 냄새를 상상하게 되는 이런 서술. 그래서 건조하다기보다는 담담하다고 느껴지는 말투. 울고 불면서 해야 할 것 같은 이야기를 조그맣게 속삭이듯이 전달하는 목소리를 따라가고 있다 보면, 큰 목소리로 말하는 것조차 꺼려하는 서술자가 눈 앞에 그려진다. 내가 할 이야기도 중요하지만 내 이야기를 들을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주는, 정말이지 이 책의 제목처럼 상냥한 서술자.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고맙다는 기분이 들었다. 소설 속의 수많은 슬픈 이야기들이 자극적으로 진열되어 있지 않고, 신파로 흘러가지 않아서. 어디선가 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들려주는 서술자의 목소리에서 지긋지긋한 삶의 누추한 주름들을 '그래도 아름답게 보아주는' 소설가님의 시선이 느껴져서.



4. 몇몇 장면에서는 지난 소설집인 베개를 베다의 흔적이 느껴지기도 했다. 하영이 같은 학교 친구의 따돌림을 방관하는 에피소드나 형민이 아내와 이혼한 후에도 만나서 낮술을 마시고 방송에 나간다고 새 양말을 신는 장면, 형민과 강차장이 할머니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강차장이 등교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내용 같은 거. 베개를 베다를 읽을 때 기억에 남았던 부분들이라 그런 것 같다. 베개를 베다에 실린 여러 소설들의 특정한 장면들이 상냥한 사람에서 다시 재생된 것 같은 느낌. 지루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산다는 것 자체가 이미 겪은 것의 반복인 경우도 많으니까. 태어나서 처음 겪는 일들로만 이루어진 하루 같은 건 없으니까.

 

서술자만 상냥한 게 아니라 등장하는 인물들도 대부분 상냥해서, 여운이 남는 에피소드들이 꽤 많았다. 하지만 와 이거 진짜 내 얘기다 같은 건 별로 없었는데, 그건 에피소드들이 비현실적이어서가 아니라 내가 상냥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소설이란 내가 나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을 주지만 내가 타인을 이해하는 데 훨씬 더 많은 도움을 주는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후자로 인해 전자가 가능해지지 않을까 하고 짐작하기도 하고) 전혀 아쉽거나 서운하지 않았다. 오히려 상냥한 사람들의 섬세한 말들과 행동들로 인해 내가 위로를 받는 느낌이었다. 아주 오래 전 했던 말을 계속 떠올리면서 후회하고 또 후회해서 걷고 또 걸으면서도 잠들지 못하는 '친구'의 무릎에 오른손을 올려놓고 토닥토닥 두드려주는 할머니와 악몽을 꾼 아이의 가슴을 토닥여주며 괜찮다고 말해주는 엄마의 모습을 상상하니 왠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5. 정작 나를 가장 심란하게 했던 인물은 강차장이었다. 이런 문장들을 읽을 때가 그랬다.

 

이십대 시절 강차장은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는데, 등교하는 아이들을 보니 그런 생각을 했던 자신이 치기 어리게 느껴졌다. 선생님은 될 수 없겠지만 뒤늦게 공부를 하고 싶은 생각마저 들기도 했다. (262-263쪽)

 

유쾌한 사람, 나는 그 말이 좋았어. 그런데 다리가 부러져 산속에서 구급대원들을 기다리는 동안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이제 마냥 유쾌한 사람으로 살 수는 없겠구나. 다리를 잃은 아르바이트생은 매일 회사 앞에서 시위를 했고, 그 아이를 친 후배 녀석은 출산 중 한 아이를 잃었지. 그때도 나는 우리 딸들하고 영화도 보고, 제주도 여행도 갔다 오고, 맛집도 찾아다니고… (278-279쪽)

 

나도 그랬다. 이십대 시절,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누가 나로 인해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게 싫었다. 정확하게는 두렵고 무서웠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직업을 갖게 되고, 그 삶을 살게 되면서, 그 때의 내가 얼마나 치기 어렸는지 깨달았다.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받고 싶지 않다는 말은 사실 나 자신이 누군가로 인해 영향을 받고 싶지 않다는 거였고, 더 정확히는 누군가 깊이 있는 관계를 맺으면서 상처를 주고받고 갈등을 겪어나가는 것 자체가 두렵고 무서웠기 때문이라는 걸. 


여전히 나는 관계에 서툴고 사람들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한다. 내 곁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도 지금 잠깐 있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진심을 다하려고 애쓴다. 지금이 아니면 이들을 만날 시간이 없을 수도 있으니까. 내가 만나는 이들이 나에게 주는 영향은 분명히 있고, 그중에는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지만 좋은 것이 아주 조금이라도 있으면 괜찮다고 생각하고, 그렇다면 나는 이들이 준 좋은 것보다 더 좋은 것을 그들에게 주고 싶다. 형민을 만난 아이처럼, 아이가 만난 형민처럼.

 




6. 아픈 할머니를 먼저 꼭 안아주는 마음, 그걸 잘 해내는 사람.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일에도 사과하는 마음, 그 마음을 전하기 위해 지렁이 젤리를 기꺼이 내어주는 사람. 처음 만나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마음, 그랬다가 아이가 머리를 만졌다고 화를 내면 쪼끄만 게 어른한테 버릇없다고 혼을 내는 게 아니라 아이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할 수 있는 사람. 이런 마음이라면 괜찮지 않나, 하고 생각한다. 이 팍팍한 세상에서 어깨를 겯고 살아가기에는 말이다.

 

그 마음을 상냥함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나는 상냥한 사람이 되고 싶어진다. 아주 특출난 삶이 아니더라도, 어중간하고 어정쩡한 삶이라도, 때로는 불쾌함과 후회를 견뎌야 하는 삶이라도, 이런 상냥함이라면 상처로 좍좍 갈라진 삶의 틈새들에 바를 수 있는 연고 역할 정도는 해 줄 수 있을 거니까. 그리고 이런 상냥함을 잔뜩 만날 수 있는 이 책을 여러 번 읽고 싶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슬픔이 더이상 없는 것만 같을 때, 지금의 슬픔만으로도 내가 꽉 찬 것 같을 때, 상냥한 마음을 주고받는 상냥한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쉬어가고 싶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슬픔의 그릇을 조금이나마 키우기 위해서는 타인의 슬픔을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이 먼저 있어야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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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의 마음
김금희 지음 / 창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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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제 자라섬 포크페스티벌에 다녀왔다. 나의 메인ㅋ인 승열오라버니의 순서를 기다리며 앞 공연들을 보던 중 문득 이 책 생각이 났다. 동물원 아저씨들의 말하지 못한 내 사랑을 듣던 중이었다.



말하지 못하는 내 사랑은 어디쯤 있을까 소리 없이 내 맘 말해볼까

울어보지 못한 내 사랑은 어디쯤 있을까 때론 느껴 서러워지는데

비맞은 채로 서성이는 마음의 날 불러주오 나즈막히

말없이 그대를 보면 소리 없이 걸었던 날처럼 아직은 날


가진 것 없는 마음 하나로 난 한없이 서 있소 잠들지 않은 꿈 때문일까

지나치는 사람들 모두 바람 속에 서성이고 잠들지 않은 꿈 때문일까

비맞은 채로 서성이는 마음의 날 불러주오 나즈막히

내 노래는 허공에 퍼지고 내 노래는 끝나지만 내 맘은 언제나 하나뿐


내 머릿속에는 김광석씨 목소리로 기억되어 있는 저 노래를 유준열씨 목소리로 듣는데, 나도 모르게 '사랑'과 '노래'가 '마음'으로 들렸다. 문득 경애의 마음의 경애와 상수가 떠올랐다. 책상 위에 엎드려 유령 같이 있었을 때도 강하게 움직이던 경애의 마음이,쏟아지는 악플 속에서도 자기 자신을 가지런히 하면서 초라해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던 상수의 마음이, 저 노래와 함께 느껴졌다.


말하지 못한 마음은, 풀어보지 못한 마음은, 그래서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듯 느껴지는 마음은, 그래서 허공에 퍼지고 끝나버린 것 같은 마음은, 어디도 가지 못하고 서성이면서 한없이 서 있을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애가 산주에 대한 마음을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풀어보지 못해 '언니'에게 편지를 쓸 수밖에 없었듯이. 경애가 자신에게 편지를 보냈던 그녀임을 알고 난 후의 상수가 경애의 곁에서 서성일 수밖에 없었듯이.



2. 너무 한낮의 연애를 작년에서야 읽었다. 젊은작가(라는 말 참 늘 마음에 안 든다…) 정확히는 등단한지 얼마 안 된 작가의 신간을 남들(정확히는 '비평가들')이 하도 좋다고 좋다고 하면 금방 읽고 싶지가 않아진다. 좀더 기다렸다가 좋다는 사람들(정확히는 '독자들')도 있고 안좋다는 사람들도 있을 때 읽고 싶어진다. 참 이상한 반항심이다ㅋㅋㅋㅋ 그러다 보니 1년이 지났고 이쯤이면 괜찮겠다 싶을 때 읽었다. 


기대보다 훨씬 좋았고, 표제작 아닌 소설들이 훨씬 좋았다. (하지만 제목으로선 표제작이 제일 괜찮다고 생각한다) 다음 소설을 꼭 읽고 싶었는데 우연히 김금희소설가의 신간, 그것도 장편소설!!!!!!이 창비에서 곧 출간될 예정임을 알게 되었다. 출간 전 가제본을 읽을 수 있는 서평단을 모집하고 있다는 것도.


책을 읽고 후기를 쓴 지가 워낙 오래 되었고 블로그에 포스팅하는 일도 자주 못하고 있는지라 과연 뽑힐까 반신반의하면서 응모했는데, 운이 좋게도 선정되어서 가제본을 받았다. 그리고 바로 읽기 시작했다. 이 책, 경애의 마음을.



경애라는 우리말 옆에 굳이 병기된 敬愛를 보고 '아하 이건 사람의 이름 같지만 실제로는 존경하고 사랑한다는 그 경애인가보구나'하고 확신했다. 첫장을 넘기자마자 상수라는 등장인물이 주인공 느낌을 풍기며 등장하는 걸 보고 그럼 그렇지, 상수가 누군가에게 갖거나 상수에게 누군가가 갖는 사랑과 공경의 마음이로구나! 라고 한번 더 확신했다. 그래서 경애라는 사람이 나왔을 때는 나도 모르게 조금 실망했지만ㅋ 이 경애라는 인물의 이야기를 읽고 있으려니 왜이렇게 공감이 되는지. 빠른 속도로 경애에게 빠져들었다. 경애의 마음을 더듬는 듯한 기분으로.


동시에 상수의 이름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누군가의 눈에는 속 편할 것 같은 상수의 삶에 대해서도. 변수가 없이, 예측 가능한 삶을 살아야만 했을 것 같은 상수에 대해서도. 그 때문에 더욱 자신의 삶에 변수를 만들고 싶어했을 상수의 마음에 대해서도. 그러고 보면 김금희소설가는 인물의 '이름'을 붙이는 데 많은 공을 들이나보다. 조중균씨나 필용이나 세실리아의 이름이 오래 기억에 남았던 것처럼 상수와 경애 역시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으니까.



3. 마음이 없는 상태로 살아가기를 선택하는 경애의 모습을 보며, 가슴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나도 한때 그랬다. 마음이 없는 사람처럼 살고 싶었다. 어쩌면 마음 따위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상처받지 않는 게 강한 거라 생각했고 강해지려면 상처받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 단단해지겠다는 생각으로 딱딱해졌다. 감정을 주고받지 않으려 애써 숨겼고 숨겼던 감정이 비어져나올 때면 냉소로 급히 마음의 틈을 가렸다. 힘들었으니까. 더 힘들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러면 그럴수록 더 힘들어질 뿐이라는 걸 나중에 알았다. 사람과 사람의 마음이 주고받는 순간이 없다면, 사람의 마음은 이 팍팍한 세상을 견딜 수 없다는 걸. 아무리 경애가 어둠을 만들고 싶어했어도 완벽한 어둠이란 만들어지지 않았듯이. 경애의 마음은 어쩔 수 없이 뭔가를 기다리고 있었고, 기다리는 마음은 종종 기도하는 마음이 됐고, 그 마음은 너무 강하게 움직였듯이.



간절히 기도하듯이 정지해 있던 경애의 마음에 누군가의 마음이 닿았다면, 그때의 경애에게는 얼마나 큰 기쁨이 되었을까. 갑자기 울컥했다. 



4. 등장하는 사건들은 하나같이 묵직하다. 호프집 화재 사건, 부당해고, 노조 내 성폭력, 사측의 일방적인 전보, 해외 지사에서의 부패와 비리불이 났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술값을 못 받을까봐 문을 잠가버리고 혼자 도망가는 호프집 사장이나 성폭력 사건을 문제삼는 경애를 배신자 취급하는 노조원들, 경애와 헤어지고 결혼한 후에도 자기가 필요할 때면 남의 사정 따위 생각하지 않고 찾아와 징징대는 옛 애인, 장소를 가리지 않고 성매매에 몰두하는 한국 남자들 모두 너무나 익숙해서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이놈의 나라는 왜 이모양이지 도대체…하며 계속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100인위 사건도 생각나고 씨랜드도 생각나고 세월호도 생각나고 밀양도 생각나고 MBC도 생각나고 코피노 문제도 생각나고…자꾸 속이 쓰렸다. 


하지만 저 사건들은 어디까지나 배경이거나 소재일 뿐이다. 최근 30여년 간 신문이나 뉴스를 통해 심심찮게 접할 수 있었을 사건들을 툭툭 건드려 가면서 도달하는 곳은, 결국 사람의 마음이다. 마음을 주고받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 자기의 마음만 다치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다른 사람의 마음을 다치게 하는 데는 주저하지 않는 사람들 덕분에 누군가를 할퀴고 울리고 죽이고 무기력에 빠뜨리는 곳이 되어버린 이 세상에서, 사람이 사람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은 서로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이해하고 나누려 노력하는 것임을, 이 소설은 은근하면서도 따뜻한 말투로 조곤조곤 들려준다. 그래서 나는 페이지를 술술 넘기다가도 자주 멈췄고, 누군가를 떠올렸고, 눈물을 글썽였다.



5. 누군가는 이 소설을 연애 소설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은총과 경애의, 경애와 산주의, 경애와 상수의 연애 소설이라고. 


나는 잘 모르겠다. 이성애를 기반으로 한 커플의 이야기로 굳이 읽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생각한다. 경애와 상수의 연애 이야기 같은 건 그다지 궁금하지도 않다. 그냥 경애와 상수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마음을 폐기하지 마세요. 우리는 조금 부스러지기는 했지만 파괴되지 않았습니다.라는 상수의 말처럼, 마음을 폐기하지 말고 파괴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기도했다. 그들에게 은총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어쩌면 그들이 함께 기억하는 친구의 이름이 은총인 건, 은총의 기억으로 이어진 그들이 서로에게 은총 같은 존재가 되기 때문은 아닐까 싶기도 했다. 



6. 함께 살아낸 같은 시대의 기억을 유려한 글로 그려주는 소설가가 있다는 건 큰 축복이다. 이것은 내가 받은 은총이고, 김금희소설가께 감사하다. 많이 읽히고,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와닿는 책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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