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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나지 않음, 형사
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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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설연휴를 맞아 도서관에서 야심차게 책을 왕창 빌려왔다. 그 중 첫 번째 책으로 이 책, '기억나지 않음, 형사'를 집어들었고 어제 저녁부터 오늘 아침까지 다 읽음. 뭐랄까 이게 재미있다면 재미있는데 시시하다면 좀 시시하고...약간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느낌도 나고 그렇다(아 너무 큰 스포인가). 독서 후기를 남기는 김에 그동안 읽었던 찬호께이 소설에 대해서도 좀 기록을 남겨보려고 한다.


(지금부터는 뭐 처음부터 끝까지 다 스포)




1.

기억나지 않음, 형사는 제목처럼 '기억을 잃어버린 형사' 이야기의 탈을 쓰고 있다. 즉 형사의 이야기가 아니다. '기억나지 않음'이라는 말이 약간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자신의 '진짜 기억'을 하지 못하고 자신을 '형사'라고 착각하는 인물이 서술자로 등장해 진행되는 얘기다. 즉 서술자가 사건의 진실을 찾아가는 이야기인데 그 서술자는 '형사'가 아니라 '자기가 형사인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


그렇다면 사건의 범인은...? 서술자 그 자신......??????? 이었다면 너무 뻔하고 재미없었겠지만, 다행히도 아니다. 그러면 진짜 너무 심하게 시시했을 듯ㅠㅠㅠㅠ 



2.

주인공의 이름은 옌즈청. 어린 시절 눈앞에서 아버지와 아버지의 연인이 교통사고로 죽어가는 장면을 목격했던 트라우마를 지니고 살아가는 인물이다. 너무 큰 트라우마라서 누구에게 선뜻 털어놓을 수도 없다. 자신 때문에 아버지가 죽었다는 자책감을 잊을 수도, 떨칠 수도 없다.


그런 옌즈청이 '유일하게 감정을 드러내는 대상'이자 '아버지의 그림자를 찾'을 수 있는 대상이 있다. 사고 현장에서 아버지를 구하겠다며 몸부림치던 자신을 붙잡아주었던, 그래서 결국은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었던, 린젠성이라는 남자였다. 자신보다 나이도 많고 직업도 없으며 거친 사내이지만, 자신에게 계속 관심을 보여주는 그 사람 덕분에 친구 하나 없는 옌즈청은 완전한 나락 속으로 빠지지 않는다. 다행히도.


그런데 렌진성이 한 살인사건('둥청아파트 살인사건'이라고 소설 속에서는 명시됨)의 범인으로 지목된다. 경찰에게 쫓기던 그는 교통사고를 일으키고 사망한다. 그의 죽음은 혐의를 입증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그렇게 그는 자신의 아내와 바람을 피운 남자, 그 남자의 아내, 아내가 품고 있던 아기 모두를 한꺼번에 몰살시킨 살인자로 확정된다. 사건이 일어난 2003년부터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2009년까지.


그리고 2009년 3월 15일, 옌즈청이 자신을 '둥청아파트 살인사건을 조사했던 형사 쉬유안'이라고 착각한 채 눈을 뜨면서 이 소설의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둥청아파트 살인사건이 영화화되면서 이 사건에 대해 특집 기사를 쓰기 위해 '포커스'라는 신문의 기자 루친이가 경찰서로 쉬유안 형사를 찾아오고, 자신을 쉬유안이라고 생각한 옌즈청은 하루 종일 형사 행세를 하며 루친이와 함께 둥청아파트 살인사건의 진실을 찾아다닌다. 진범을 밝혀내고 렌진성의 혐의를 벗길 때까지...뭐 줄거리는 이 정도로만 쓰고......



3.

(강력 스포) 뤼슈란의 언니인 뤼후이메이가 등장했을 때부터 좀 싸해서, 뭐여 이사람이 동생 죽였나...싶었다. 동생과 제부가 죽은 장면을 직접 목격했고 그로부터 시간이 6년밖에 안 지났는데 그 사건에 대한 인터뷰를 한다는 것부터가 이상했음. 그리고 인터뷰에서 하는 말들도 되게 미심쩍었다. 뭐 이런 말들.


"시간이 이렇게나 흘렀는걸요. 내려놓을 건 다 내려놨어요."

"그 일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었죠. 고통은 이미 충분하다고 느꼈어요. 빨리 내려놓지 않으면 악몽이 계속될 뿐이죠."

"그때 전 되도록 사건에서 멀어지고 싶었어요. 하루라도 일찍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었죠."


아니 무슨 소리야 피투성이가 된 시신을 본인이 직접 두 눈으로 목격한 때로부터 겨우 6년밖에 안 지났는데, 어떻게 '내려놓을 건 다 내려놨'고 '고통은 이미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어ㅠㅠ '하루라도 일찍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아무리 간절해도 그렇게 되지 않는 게 당연한 거 아냐ㅠㅠㅠㅠㅠㅠ 싶어서 뤼후이메이의 말들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의심이 커졌다. 그리고 죽은 동생에 대해 말하는 부분을 읽으면서 '이사람 이상하네 이상해'는 확신으로 바뀌었다.


"슈란은 어렸을 때부터 질투가 심하고 좀 제멋대로였지요. 저는 슈란과 매부가 여전히 다투고 있을까봐 걱정이 돼서 혼자 내려갔어요."


아무리 '실제로' 동생이 제멋대로였다고 해도, 죽은 동생에게 누가 저런 말을 쉽게 합니까ㅠㅠ 동생이 아닌 남한테도 고인이라면 나쁜 말 하기가 쉽지 않은데...그래서 나는 책을 읽은 지 얼마 안됐을 때부터 뤼후이메이가 진범일 거라고 생각했고 이야기가 진행되어 나갈 수록 작가가 옌즈청을 범인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어디 속을까보냐????? 하는 심정으로 계속 읽어나갔다. 그러다가 쉬유안(으로 자신을 착각한 옌즈청)이 옌즈청과 동일 인물인 것처럼 이야기가 흘러가기 시작해서 '아니 이게 웬 개소리...'하는 기분이 들었는데...



4.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인 '의미 기억'과 '일화 기억'이 나오는 부분, 그리고 옌즈청이 왜 자신을 쉬유안으로 착각했는지가 설명되는 부분을 처음 읽었을 때는 황당하다는 느낌이 강했다. 개연성 있는 얘기인 것처럼 써놨지만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고 있네-_- 싶어서 찬호께이 실망이야-_-_-라는 기분이 들려고 했다. 뤼후이메이가 자신이 범인이라는 사실을 감추려고 또다른 살인을 시도하는 장면에서 '사실은 뤼후이메이가 뤼슈란이었고 죽은 뤼슈란이 뤼후이메이임'이라고 옌즈청이 말할 때도 충격적이라기보다는 '아니 이건 또 뭐야...'라는 기분이었지 멋진 반전이라는 느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린젠성의 혐의를 벗기고 싶었던 옌즈청이 자신을 쉬유안에 동일시했듯이, 뤼슈란을 죽였다는 혐의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뤼후이메이가 자신을 뤼슈란과 동일시했던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는 실망스럽지 않았다. '자신의 정체성을 잃는 방법'으로써 자신의 문제(=범죄 사실이 밝혀지는 것)를 해결하려고 했던 범죄자의 이야기에 '자신의 정체성을 잃는 방법'으로써 범죄자를 찾아내어 자신의 문제(=범죄 사실이 밝혀지지 않는 것)를 해결해낸 '형사 아닌 형사'의 이야기를 겹쳐서 하나의 플롯을 만들어냈다는 건 매우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옌즈청이 '둥청아파트 살인사건'을 다룬 영화를 보러 가는 것으로 끝나는 결말은 좀 뻔했으나, 맨 마지막 장면을 서장의 장면과 이음으로써 '옌즈청이 그런 착각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 조금이나마 설득력을 더 부여한 건 좋았다. 시시할 뻔했던 결말이 그래도 좀 흥미로워졌달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게 일어날 법한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정도는 높지 않은 데다가(즉 개연성이 높지 않음) 핍진성은 매우 적기 때문에...너무 재밌어 꼭 읽어봐!!!! 라고 호들갑떨면서 추천할 만한 소설처럼은 느껴지지 않음. 그냥 별 세개 정도로 합시다...



5.

이 책까지 해서 찬호께이 작가의 소설을 총 네 편 읽었다. 맨 처음에 망내인을 읽었고, 그다음에 염소가 웃는 순간을 읽었고, 그다음에 13.67을 읽었고, 그다음에 기억나지 않음, 형사를 읽었는데


제일 재미있던 건 역시 13.67. 워낙 재미있다는 평이 많은 책이라 과연 뭐 얼마나 재밌길래...하는 마음으로 읽었는데 굉장히 재미있었고!!!!!!!!!! 읽는 내내 결말이 너무 궁금해서 계속 마지막 페이지를 먼저 봐버리고 싶었다ㅠㅠ 정말 안간힘을 기울여 끝까지 결말을 먼저 보지 않았고, 대신 굉장히 빠른 속도로 읽었다 빨리 결말 보고 싶어서...


기억나지 않음, 형사 읽고 나니까 13.67이 다시 읽고싶어져서 그냥 전자책을 살까...하고 알라딘에 들어가봤더니 구판이 절판되고 개정판이 나왔었네(작년에). 이 재미있는 책이 겨우 10쇄밖에 안 됐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다. 30쇄는 됐어야 할 것 같은데 거참.


다음으로 재미있었던 건 망내인. 13.67보다 덜 재미있지만 더 현실적인 얘기기도 하다. 이렇게 인터넷이 무섭다ㅠㅠ는 생각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권해주기도 했고. 7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라 언제 끝나나 싶은 순간도 없지는 않지만, 잘 읽히고 심란하고 서글프다. 책의 띠지에도 쓰여 있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흉기가 아니라 악의다'라는 문장도 참 슬프다. 김지운 감독(세상에나)이 드라마로 만든다는데 책보다 재미있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혼자 해 봄. 


제일 재미 없었던 건 역시 염소가 웃는 순간. 뭐랄까 오컬트가 얼기설기 덕지덕지 칠해진 청춘물...이라고 해야 하나. 초반부터 '그만 읽을까...'하는 생각과 '그래도 망내인 쓴 작가 책인데 조금만 더 읽어보자'하는 마음 사이에서 줄타기하며 우걱우걱 읽었고 중반 이후로는 들인 시간이 아까워서 정말 힘들게ㅠㅠ 겨우겨우 끝까지 읽었다ㅠㅠㅠㅠㅠ 다 읽고 나서의 결론은 '하 초반에 집어치웠어야 했는데...'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좀더 생생하고 이야기가 좀더 매력적이었으면 아리 애스터 영화 같은 느낌이 났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이건 뭐 에휴...넷플릭스에서 보다가 집어치운 '10대들 등장하고 오컬트 섞인 노잼 시리즈들'이 떠오르기도 하고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처럼 만들고 싶었겠지만 그보다 훨씬 재미없게 만든 온갖 '청춘호러물'들이 떠오르기도 하고...절레절레절레...그래서 염소가 웃는 순간을 읽을까 말까 하는 분이 혹시라도 계시다면

1) 웬만하면 읽지 말고

2) 시간이 엄청 많으면 읽고

3) 자신의 인내심을 시험하고 싶다면 읽고

대신 큰 기대는 절대 안하시기 바람. 혹시 모르는 일 아닌가, 기대가 적으면 재미가 있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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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장국영 -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얼마나 좋을까 그대가 여전히 함께 한다면 아무튼 시리즈 41
오유정 지음 / 코난북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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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시리즈를 간간이 계속 쭉 읽고 있다...고 써놓고 나니 음, 이런 말을 쓸 만큼 많이 읽은 건 아니잖아?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확 스쳐갔다. 그래서 각잡고 세어보니 실제로 읽은 건 세 권밖에 없다. 스릴러, 문구, 인기가요. 그럴 수밖에 없다. 나는 생각보다(?) 열정이나 애정 같은 게 별로 없어 나에게 기쁨이자 즐거움이 되는, 생각만 해도 좋은 한 가지 같은 게 많지 않다. (1초도 되지 않아 딱 떠오르는 이승열! 말고는🤔 으음🤔🤔)


아무튼 시리즈를 읽어보려고 할 때마다 위와 같은 이유로 '음 뭐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건 아닌데...'하는 마음 때문에 주저하고 관두는 나이지만, 장국영이라는 이름 앞에서는 다른 생각이 들기 전에 손이 먼저 움직였다. 제대로 본 장국영 영화는 패왕별희뿐이고 떠올릴 수 있는 장국영 노래는 A Thousand Dreams of You뿐이지만 장국영의 이름만으로 충분하니까. 그러니까, 장국영이니까.


90년대에 10대 시절의 많은 부분을 보냈던 사람들이라면 장국영에 대한 그리움을 조금씩은 가지고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내가 장국영의 팬이 아니어도, 주변에 장국영의 팬은 한둘씩 꼭 있었으니까. 그러고 보면 장국영을 싫어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장국영은 인상 자체가 호감형이고, 무표정은 너무 처연한데 웃으면 한없이 주위가 환해지고, 연기는 뭐 말할 것도 없이 잘했으니까.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소년 시절에 그를 보며 장국영을 떠올렸던 한국 사람들이 꽤 많지 않았을까 싶고, 나 역시 그랬다. 그래서 매년 4월 1일마다 장국영을 생각하고 장국영의 부고를 듣는 순간을 떠올리고 잠시 슬퍼한다. 아직도 여전히. 이 책의 저자 역시 마찬가지다.

유난히 검은색이 많이 칠해진 신문의 헤드라인. 검은 바탕에 흰 글씨로 쓴 '장국영' 세 글자가 엄청난 크기로 클로즈업됐다. 그대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울지 않아도 눈물이 저절로 흘렀다.
장 국 영.
이 이름 하나로 그해 참 많은 사람이 울었다. TV, 라디오, 잡지, 신문, 어디에서나 꺼거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의 생애가, 그의 영화가, 그의 음악이 그리고 그의 죽음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장국영이라는 이름이 가진 무게. 내가 그랬고, 많은 사람이 그랬으며, 홍콩도 중국도 이 세상 전부가 그가 떠난 뒤에 그 이름의 무게를 새삼 깨달은 듯했다. 사스의 공포로 모두가 움츠러든 그때, 꺼거의 부재는 많은 이에게 상실의 고통을 깊이 각인시켰다.


그러나 저자는 장국영이 세상을 떠난 후 얼마나 슬퍼하고 괴로워했는지에 대한 이야기에 집중하는 대신 '장국영의 죽음 이후'에도 자신의 삶이 장국영의 존재와 어떻게 이어졌는지, 이미 세상을 떠난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어떻게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지에 집중한다. 나는 이것이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장국영의 통역사가 되겠다는 마음으로 중국어 공부를 하고 중문과에 입학해서 통번역대학원까지 진학했던 저자는 통역을 해주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사라졌다는 걸 깨닫고 인생의 방향을 잃은 듯한 기분으로 취업한다. 그러다가 박사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고 장국영이 가장 좋아했던 중국 대륙의 도시였다는 상하이에서 박사 공부를 시작한다. 상하이에서 살아가는 동안 여전히 자신이 장국영과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하고, 행복해한다.

숨바꼭질을 하듯 보물찾기를 하듯, 상하이는 내게 꺼거의 흔적을 찾는 뜻밖의 즐거움을 선사해주었다. 상하이에 있는 동안 꺼거가 다녀간 많은 곳을 나도 일부러 찾아갔고, 또 무심코 돌아다녔던 곳이 알고 보니 꺼거가 다녀갔거나 꺼거와 연관된 곳인 적도 있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큰 의미 없었을 공간, 그냥 무심코 돌아다니고 말았을 곳이, 그로 인해 의미 있는 곳이 되고 소중한 곳이 되는 경험. 마술 같고 기적 같은 이런 일들이 내게도 당연히 없지 않다. 홍대를 걷다 보면 수많은 공연장들 중 좋아하는 뮤지션이 공연했던 장소가 유독 눈에 띄어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즐거워하다가 내 삶에 이런 즐거움을 주신 분들께 감사한 마음이 들어 가슴이 벅차오르곤 하니까. 일부러 시간을 내어 소중한 존재의 흔적을 찾는 것도 즐거운 일이겠지만, 의도치 않았던 순간에 끊임없이 소중한 존재를 떠올리고 발견해내면서 내 별 것 아닌 일상이 나의 소중한 존재와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는 순간의 행복함, 이것이야말로 덕질의 보람이 아닐까.


그래서 그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도, 덕질은 계속된다. 장국영이 세상을 떠난 후 비로소 그의 팬이 된 이들이 수많은 것처럼. 저자는 그들을 '후영미'라 부른다며,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후영미의 활동이 워낙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어 오히려 기존의 팬들이 '노영미'로 재명명되었다. 후영미는 중국판 위키피디아라 할 수 있는 바이두 바이커와 후둥 바이커에 표제어로 등록되어 있을 정도다.
"후영미는 매우 독특한 팬덤 문화의 일종으로 장국영이 사망한 후에 그를 좋아하게 된 팬을 지칭한다."
후영미는 미디어로 접한 장국영의 영화와 노래에 매료되어 그 가치를 재평가하고 장국영을 단순한 '스타'에서 '예술가'로 승화시키고자 한다. 전통적인 남성상에 대한 관념이 무너지면서 장국영의 다양한 매력이 더욱 주목받게 되었고, 당시의 보수적인 사회가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던 많은 작품이 새롭게 조명되었다. 이들은 그 시절 충분히 인정받지 못했던 장국영과 그의 작품이 가진 가치를 이제라도 제대로 평가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후영미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다름 아닌 '인간' 장국영이었다. 이들은 스스로를 사랑하라는 '주체적 자아의식'의 메시지를 '장국영 정신'으로 이름 짓고 이를 지속적으로 계승해야 할 가치로 받아들였다. 나아가 이러한 '장국영 정신'을 적극적으로 전파하는 '계승자'로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이를 실천해가고 있었다.

 

'아니 뭐 연예인 좋아하는 걸 이렇게 거창하게 말해?'라고 말하는 누군가도 있겠지만, 나 아닌 존재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야말로 나의 존재가 확장되는 시작점이라고 생각하는 나는 저 분석에 크게 공감했다. 특히나 덕질로 배운 가치와 의미가 인간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인간으로서의 실천에 큰 영향을 준다는 데. 이래서 스타는 가도 덕질은 남는 것. 그에 대한 기억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까진. 거참 쓰다보니 코코 생각나서 울컥하네. 


꾸준히 자신의 방식으로 누군가를 아끼며 살아가다가 문득 그를 소중히 여겨온 순간들이 내 삶의 시간들을 소중하게 만들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 그래서 결국은 그를 사랑했던 것이 나를 위한 것이었음을 배우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간 삶의 가장 큰 행복이라고 믿는 나는, 장국영에 대한 덕질의 기록을 읽으며 즐거운 한편 마음이 아팠고, '건강하게 덕질하는' 모든 사람들이 마음껏 자신의 소중한 이를 애정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나 역시, 올해도, 변함없이,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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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우익 근대사 완전정복
이영채.한홍구 지음 / 창비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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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내가 다니던 학교에는 '발전사회학'이라는 과목이 있었다. 사회학과 수업이었는데, 그당시 필수 과목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 내 주변에는 사회학과 전공자들이 매우 많았었는데-정작 나는 사회학과와 아무 관련 없는 사람이었지만-다들 이 수업을 들으러 가기 싫어했다. 수업이 끝나고 나면 지친 얼굴이거나 질린 얼굴이거나 짜증이 난 얼굴이거나 화가 난 얼굴로 돌아왔다. 물론 수업을 듣는 것은 보통 지치는 일이지만, 그런 '지친 얼굴'과는 사뭇 다른 느낌의, 회의감에 가득 찬 표정들로 돌아오던 주변 사람들 얼굴이 지금도 떠오른다.


처음 수강신청을 할 때부터 이 수업을 듣기 싫어하기에,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수업 이름만 보고 물어봤었다. "발전사회학이 뭐야? 사회학의 발전 뭐 이런거야? 아니면 뭐 사회가 발전되는 과정 같은 거야?" 어찌보면 참 무식한 질문이지만 '발전'이라는 말이 수업 이름에 들어간다는 것조차 생경하게 느꼈던 나는 이 정도의 질문밖에 할 수 없었다. 그때 함께 있던 세 사람 중, 한 사람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 사회가 발전됐다는 거야. 일제강점기에서 사회가 발전됐다, 이걸 공부하는 과목 같은 거야." 


응?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2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데다가, 중등학교 때까지 역사시간마다 '일제는 우리 민족을 괴롭히고 수탈하고 못살게 굴었다'라는 배움만 반복적으로 들어왔던 내게 저 설명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에서 사회가 발전했다면 당연히 일본사회가 발전한 걸텐데 그걸 사회학과에서 왜 배우지? 눈알을 굴리다가 다시 물었다. 식민지근대화론 같은 거야? 뭐 그렇게 볼 수도 있지. 그러면 식민지근대화론이 틀리다는 걸 배우는 거야? 아니지 그 반대지. 응? 일제강점기에서 조선이 발전했다는 거라니까. 응?


물론 그것이 발전사회학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지금은 안다. 하지만 어쨌든 그당시 내 주위 사람들이 들었던 발전사회학 '수업'은 그걸 공부하는 시간이 맞았고, 그래서 내 주변 사람들은 매번 스트레스를 받아 돌아오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내가 한국의 '우익'을 간접적으로나마 처음 만난 때가 아닐까 싶다. 지금은 당연히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저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들도 많고, 실리적인 목적 때문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는 걸 알고 있다만, 그때의 내게는 '일제강점기 하에서 조선 사회가 발전됐다'는 개념 자체가 너무 낯설고 놀라운 것이었다. 그 정도로 나는 일본에 대해, 일본의 '지배층'에 대해, 그들의 생각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그뿐만인가. 떠올려 보면 광복절 날마다 야스쿠니 신사의 이름을 들어놓고도, 그곳에 일본 정치인이 참배하는 건 '엄청 나쁜 일'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왜 나쁜지, 왜 그곳에 가는 게 문제가 되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치인들은 왜 그곳을 광복절에 찾는 것인지 아주 오랫동안 몰랐다. 그냥 맹목적으로 나쁘다고 외워버렸다. 그건 하면 안되는 건데 일본인들이 하고 있으니 하지 말라고 해야 하는 것인가보다 했다. 그 이상의 관심을 더 두지 않았다. 이렇게나 무지하고 관심이 없었다.


지금은-최소한 그때보다는 더 알고 있다. 이런저런 방송을 찾아 듣기도 하고, 영화를 보기도 하고, 책을 보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년같이 반일 감정이 휘몰아치던 때, 일본 전체를 적으로 간주하고 혐오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당연한 일처럼 여겨져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음에도, '왜' 그러면 안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일본 전체'가 아니라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에 대해 잘 설명할 수 있으려면 더 알아야 했고, 더 배워야 했다. 


이 책은 그 배움에 매우 큰 도움을 주었다.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한일관계의 문제들을 '문재인 정부와 아베 내각이 사이가 나쁘기 때문' 같은 식으로 이해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걸 너무 잘 알려준다. 이 문제들은 종전부터, 어쩌면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면서부터, 아니 어쩌면 메이지 유신에 성공한 일본이 대륙으로의 진출을 꿈꾸면서부터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는 걸,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좀더 또렷하게 알 수 있었다. 


특히 많은 도움이 됐던 건 야스쿠니 신사를 다룬 2장의 내용과 재일조선인들의 삶에 대해 다룬 7장의 내용이었다. 하나는 일본 우익들이 어떻게 평화헌법을 집어치우고 자신들이 바라는 '보수국가'로 나아가고 싶어하는지에 대한 내용이고 다른 하나는 종전 이후에도 일본에서 계속 살아온 '조선인'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왔느냐에 대한 내용이니, 그 둘이 매우 다른 내용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이 둘이 모두다 집단을 위한 개인의 희생은 당연한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의 폭력성이 빚어낸 결과로 보였다. 고귀한 희생을 치른 것으로 포장되어 신격화되고 있는 야스쿠니 안의 사람들, 고귀한 희생을 요구하던 사회로 인해 고향도 국적도 가족도 잃어야만 했던 재일조선인들, 이 둘은 일그러진 군국주의가 빚어낸 비극의 양면 같다고 생각했다.


한홍구선생의 강의를 책으로 옮긴 것들이 보통 그렇듯이, 가독성이 높고 술술 잘 읽힌다. 하지만 '글자'를 걸리는 데 읽는 시간은 짧을지라도 그 글자의 '의미'를 되새기는 데 걸리는 시간은 꽤 오래 걸릴 거라고 생각한다. 역사를 기억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알아온 역사란 어쩌면 '내가 살아온 나라의 역사'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상대의 역사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지조차 못하는데, 무엇을 기억해서 어떻게 현재의 거울로 삼을 수 있겠는가. 


나는 이 책을 자주 읽고, 책 맨 뒤에 실려 있는 '더 깊은 공부를 위한 자료'들도 찾아 읽고, 주변의 친구들에게도 자주 권할 생각이다. 그렇지 않으면 개인의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그들'이 역사의 전면에서 세상의 방향을 거꾸로 흘러가게 할지도 모르니까. 그래서는 안 되니까.




영화 '주전장', '김복동', 그리고 팟캐스트 '그것이 알기 싫다'에서 2019년에 방송된 일본 관련 방송들과 함께 읽고 보고 들으면 훨씬 더 이해가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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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읽다, 쓰다 - 세계문학 읽기 길잡이
김연경 지음 / 민음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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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대한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책 감상에 대한 책'은 더더욱 그랬다. 남이 쓴 책 감상문을 읽을 시간에 그가 읽은 그 책을 그냥 읽는 게 낫지 않나? 하고 생각했었다. 뭐, 한 달에 책을 열 권 이상 읽던 때의 이야기다.

몇 살 이상이 되면서부터 앞으로 내가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 이제까지 책을 읽을 수 있었던 시간들보다 짧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책을 읽는 데도 건강이 필요하다는 느낌이 강해지면서부터는 더 그랬다. 자연스럽게 예전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책에 대한 책'들에 관심이 갔다. 특히 고전을 소개해주는 책을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교양인이라면 이 정도는 읽었어야 한다는' 이른바 필독서들 명단을 훑을 때면 어린 시절부터 소설만 편독해온 것이 조금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했다(고 말은 하지만 여전히 소설을 편독하고 있다;). 하지만 요즘도 '누구나 한 번쯤은 읽었을 고전 문학 리스트' 따위를 훑다가 못 읽어본 책들이 너무 많이 보이는 걸 깨닫고, 와 나는 평생 이거 못 읽고 죽겠구나 하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러던 중 좋은 기회로 김연경 씨가 쓰신 『살다, 읽다, 쓰다-세계 문학 읽기 길잡이』를 읽게 되었다.

『살다, 읽다, 쓰다』는 책 제목 그대로 세계 문학 작품 중 고전의 반열에 꼽혀 여전히 '살아 있는' 것 같은 책들을 '읽고', '쓴' 글들이 엮여 있다. 줄거리나 중심 인물, 작가에 대한 설명을 요약해 열거하는 정보 전달 위주의 글이라기보다는 성실하고 꼼꼼한 독자가 공들여 읽은 작품의 의미를 당대와 현재의 관점에서 두루 살펴본 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의 글은 작가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되고 있었는데, 인간의 삶에 대한 연민과 작가에 대한 애정이 함께 느껴지는 부분들이 자주 보여 인상 깊었다. 예를 들면 체호프에 대한 부분.


동시대인들은 그를 아끼긴 했어도 톨스토이와 같은 '위대한 작가'로는 여기지 않았다. 그를 대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은 훗날의 문학사이다. 인간과 세계의 '작음'을 '위'가 아니라 그저 '밖'에서 그려 낸 '겸손함'이야말로 그의 천재성의 근거가 아니었나 싶다. 순박한 시골 청년과 예민한 인텔리겐치아가 공존하는 미남형 얼굴, 스물네 살에 처음 각혈을 하고서 평생 골골대다가 모스크바예술극장의 배우와 결혼한 지 3년만에 장결핵으로 사망한, 애달프고도 항망한 삶 역시 그의 문학의 일부가 되었다. (중략) 아들을 잃은 자신의 슬픔만으로도 버거운데 이제 막 아내의 불륜 사실을 알고서 분노하는 남자의 푸념을 들어주어야 하는 시골 의사(「적들」), 기강 확립을 내세워 주변 사람들을 괴롭히다가 관 속에 들어가서야 평온을 얻는 희랍어 교사 벨리코프(「상자 속의 인간」), 천재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정신 분열증을 앓다가 피를 토하고 죽는 학자 코브린(「검은 수사」)……진부하고도 황망한 상황 속에서 갈팡질팡하다가 급기야 엎어지는 그들이 매력적인 것은 어설프고 촌스럽기 때문이다. 체호프가 바로 그런 매력을 지닌 작가이다. (182-183쪽. 이 글을 읽고 으음 그런가 체호프가 그런 얼굴이었나…싶어 새삼스럽게 체호프 사진을 검색해봤음. 아니 원래 이렇게 잘생긴 사람이었나 싶어 깜짝 놀랐다ㅋㅋㅋㅋㅋㅋㅋㅋ 내 기억 속 체호프는 안경과 수염뿐이었는데…내 기억 도대체 무슨 쓸모????)


책 전체가 360쪽 정도니까 그렇게 두껍지 않은 편인데, 담겨 있는 책 얘기들은 생각보다 꽤 많다. 한 편의 글이 보통 5페이지 정도, 부담스럽지 않게 읽을 수 있는 분량이라 가능했던 것 같다. 총 7장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읽기 전에는 5장과 6장이 제일 재미있을 것 같았고, 다 읽고 난 후에는 2장과 3장의 작품들을 다시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5장과 6장이 덜 재미있었던 건 아닌데 2장과 3장의 테마가 나에게 더 와닿았나 보다. 수많은 정보들이 오가는 사회에서 시급히 섭취(!)해야 할 지식도 많은데, 실제로 일어난 일도 아닌 문학을, 그저 상상의 산물에 불과한 소설을 굳이 읽어야 하느냐는 질문에 부딪힌다는 느낌이 최근 몇 년 간 많이 들었기 때문인 듯하다. 




한동안 나는 왜 문학을 읽어야 하는가, 왜 소설을 읽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고민했었다. '나는 이제 소설 안 읽어. 너무 뻔하거나 너무 말도 안 돼. 더 못 읽겠어.'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을 여럿 만나기도 했다. 내가 소설을 읽는 이유가 죽을 때까지 경험할 수 없는 일들을 소설을 통해 겪어 봄으로써 타인의 삶을 더 잘 이해하고 인간에 대해 더 잘 이해하는 내가 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라면, 그냥 그 시간에 소설을 읽지 말고 인간에 대해 다룬 과학책이나 철학책, 우리 사회의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룬 사회과학책을 더 읽는 게 낫지 않나 하는 생각도 진지하게 해 봤다.

하지만 지금은 그 고민에서 매우 자유로워졌는데, 나를 자유롭게 해 준 '나의 답'을 이 책에서도 만날 수 있었다. 아래와 같은 부분에서. 

죄악을 비껴 가려는 인간의 처절한 몸부림, 그것을 무참히 조롱하는 야비한 운명의 테러, 그럴수록 더욱더 거세지난 앎과 자유를 향한 열망, 끝으로 크나큰 죄악 앞에서 행해진 잔혹한 자기 단죄……. 인간 삶의 이 비극적인 아이러니 앞에서 연민과 고통을, 나아가 카타르시스를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다. (53쪽)

과학이 이토록 발전했음에도 자연의 힘, 탄생과 죽음의 신비 앞에서 우리는 여전히 전율한다. 때문에 자연-신과 인간이 한데 어우러져 생명의 기운을 한껏 뽐내는 『변신 이야기』 역시 여전히 재미있게 읽힌다. (58쪽) 

그러니까 내가 찾은 답이 바로 저것이었던 것이다. 다른 책을 통해서도 인간의 삶과 인간에 대한 이해를 분명히 얻을 수 있고, 인간 삶의 비극적인 아이러니에 대한 지식을 구할 수 있겠지만, 소설이 나에게 주는 것만큼의 연민과 고통과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는 건 쉽지 않다는 것. 과학이 발전하고 사회가 체계화되며 조직화되었지만, 많은 정보를 쌓아야겠지만, 나에게 더 즐거움을 주는 건 신비로운 이야기인 것. 그 앞에서 나는 전율하는 것. 삶을 고통의 동의어라 여기기에 '살아야 하는 시간들'을 조금이나마 덜 고통스럽게 만들고 싶다고 생각하는 나에게, 가장 손쉽게 재미를 취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지금으로서는 여전히 소설을 읽는 것인 듯하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내내 '이 책을 읽은 뒤 꼭 읽어야 할 책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했었다. 『변신 이야기』에 대한 글을 읽으며 중학생 때까지 그리스 로마 신화를 매우 좋아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라 다시 읽고 싶어졌고, 삶의 아이러니에 집중하면서 『오이디푸스』와 『리어 왕』을 다시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모든 것을 파괴할 뿐 정복하지 않는 고래여, 나는 너를 향해 돌진하고 끝까지 너와 맞붙어 싸우리라. 지옥 한복판에서라도 너를 향해 작살을 던지고, 가눌 수 없는 증오를 담아 내 마지막 숨을 너에게 뱉어 주마.라는 구절이 너무 인상 깊어서 『모비 딕』에 다시 도전해봐야 하나 고민했고, 역시 사람이라면(!)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읽어야 하는 건가 싶어 또 고민 중이다. 어렸을 때 재미있게 읽었다는 기억만 남아 있는 『아Q정전』, 『안나 카레니나』, 『달과 6펜스』도 더 나이 먹기 전에 다시 읽어봐야겠다 싶다.

사실 나는 세계 문학, 그중에서도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세계 문학 '고전'을 진득하게 읽을 수 있는 시기란 역시 10대 시절이라고 생각해 왔었다. 페이지 사이사이에 숨어 있는 다디단 과실을 탐욕스럽게 받아먹을 수 있는 나이, 이미 굳어진 눈과 제한된 사고로부터 그나마 조금 더 자유로운 나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집중력이 짧아지는 것 같기도 하고. 어렸을 때는 책 한 권 붙잡고 있으면 한두시간이 훌쩍 지나갔는데, 요즘은 30분간 책을 쉬지 않고 읽는 것도 쉽지 않아졌다. (쓰다 보니 자꾸 슬퍼진다????) 나 역시 10대 시절에 세계 문학 '고전'을 가장 많이, 가장 열심히 읽었다. 도스토예프스키도, 톨스토이도, 샬럿 브론테와 에밀리 브론테도, 카뮈도, 카프카도, 셰익스피어도, 고골도, 발자크도, 에밀 졸라도, 찰스 디킨스도, 헤밍웨이도, 찰스 디킨스도, O. 헨리도, 모두 10대에 재미있게 읽었던 작가들이다.

하지만 학교와 학원을 오가느라 정신 없이 바쁜 데다가 스마트폰에 하루 종일 시선을 두고 있는 게 너무 당연한 일상이 되어 버린 요즘 10대들을 생각해 보면, 그들에게 이 '고전'을 진득하게 읽는 건 쉽지 않은 일이겠구나 싶다. 그리고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며 곰곰이 짚어 보니, 나 역시 20대 이후에 읽었던 책이나 10대 때 읽고 재미있어서 20대 이후에도 여러 번 찾아 읽었던 책들을 훨씬 더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더라. 『오만과 편견』도 그렇고, 『제인 에어』도 그렇고, 『폭풍의 언덕』, 『체호프 단편선』, 『허클베리 핀의 모험』, 『필경사 바틀비』, 『이방인』, 『장미의 이름』도 마찬가지. 그러고 보면 고전이란 그저 유명한 작품이나 오래된 작품보다는 한 번 완독한 후에도 계속 찾아 읽게 되는 작품, 다시 읽을 때마다 이전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재미를 만날 수 있게 해 주는 작품에 붙여주어야 할 이름표가 아닌가 싶다. 내게는 이 위에 나열한 그 책들이 아마 '나의 고전'이겠지. 

부디 이 마음가짐이 행동으로 이어져서 올해가 가기 전 이 책 속에 언급된 고전 작품 중 세 권이라도 읽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랄 뿐첫 번째 책을 뭘로 하지…『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과 『안나 카레니나』는 너무 두꺼워서 첫 번째 책으로 삼기 힘들 것 같은데…그만 고민하고 내일 도서관에서 『오이디푸스 왕』을 빌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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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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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책의 뒷표지에는 '억압적인 가부장제 속에서 침묵하던 한 고등학생 소녀가 드넓은 세계와 주체적인 자아를 찾아 나서는 정신적 독립기'라는 설명이 쓰여 있다. 책을 다 읽은 지금, 나는 이게 완전히 틀린 설명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저 문장만 보면 억압 속에서 고통스러워하던 킴발리가 엄청난 자각을 이루어서 굉장히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인간이 되는 이야기같다는 느낌이 들지 않나 하고 생각하긴 한다.


인간이란 쉽게 변하지 않는다. 한 번에 완전히 변모하는 인간, 같은 얘기야말로 정말 비현실적이다. 그리고 나는 이 책이 '드넓은 세계로 달려나가 주체적인 인간으로 바로선 여성'의 이야기라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오히려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이 되고 싶은지 생각조차 해본 적 없던 여성이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자기 스스로를 이해하게 되면서 겪는 혼란과 갈등을 굉장히 현실적으로 그린 소설이라고 느꼈다. 그리고 그런 부분이 이 소설의 매력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 혼란과 갈등의 흐름을 따라가는 건 결코 쉽지 않았다. 첫 번째 이유는 킴발리의 아버지인 유진의 행위가 지극히 폭력적이었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가장 먼저 떠올렸던 개념은 가스라이팅이었다. 


생리통을 경감시켜주는 약을 먹으려고 미사 십 분 전에 콘플레이크를 먹었다는 이유로 가죽 벨트를 풀어 킴발리를 때리고 나서 "왜 죄악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거야?" "왜 죄악을 좋아하는 거야?"라고 묻는 아버지를 볼 때는 너무 화가 났는데, 이 다음 장면에서는 화도 나지 않았다. 그냥 머리가 멍해져서, 책을 잠시 내려놓았었다.

 

아버지가 오빠와 나를 홱 끌어안았다. "많이 아팠니? 살갗이 터졌니?" 아버지가 우리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나는 등이 욱신거렸지만 아니라고, 아프지 않다고 말했다. 죄악을 좋아하는 것에 대해 얘기하며 고개를 흔드는 아버지는 마치 뭔가에, 떨쳐 낼 수 없는 뭔가에 짓눌린 듯한 모습이었다. (132쪽)


이 아버지는 정말로 이게 사랑이며 헌신이라고 믿고 있는 거구나. 너희를 때리는 게 고통스럽지만 그래도 나는 너희를 사랑하니까 때릴 수 밖에 없다고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있구나. 이래야 너희가 죄악에 사로잡히지 않고, 완벽한 존재가 되어 천국에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구나. 그 생각에 자기 자신도 억압되어 있는데, 그래서 자기 자신도 그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는데도, 그래도 저걸 감당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짓누르고 있는 거구나…소름이 끼쳤다. 

 

더 끔찍한 장면은 고모네 집에 다녀온 킴발리가 할아버지와 함께 있었다는 이유로 아버지가 킴발리를 벌하는 부분이었다. 카톨릭 교도가 아닌 '자신의 아버지'와 '자신의 딸'이 '자신의 동생' 집에서 함께 지냈다고, 그리고 그 사실을 딸이 자신에게 정확히 알려주지 않았다고, 너는 죄악으로 걸어 들어간 거라며 딸을 비난하는 아버지. 그리고는 딸에게 끓인 물을 붓는 아버지…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끔찍했지만, 그 상황에서도 아버지에게 "네, 아버지."라는 대답을 들려주고 싶어하는 킴발리를 봐야 한다는 건 더 무시무시했다. 그리고 이 점이 내가 이 책을 읽기 힘들어했던, 가장 결정적인 이유였다.

 

"너 할아버지가 은수카에 오는 거 알고 있었지?" 아버지가 이보어로 물었다. 
"네 아버지."
"그런데 나에게 전화해서 그 사실을 알려 줬던가, 그보?" 
"아뇨."
"이교도와 한집에서 자게 될 것도 알았지?" 
"네, 아버지."
"그러니까 죄악을 똑똑히 보고도 걸어 들어갔단 말이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버지."

"킴발리, 너는 귀한 아이야. (중략) 너는 맹렬하게 완벽을 추구해야 한다. 죄악을 보고도 걸어 들어가선 안 돼." 아버지가 주전자를 욕조 안으로 가져오더니 내 발을 향해 기울였다. 그러고는 마치 실험을 하면서 어던 결과가 나오는지 보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 내 발에 뜨거운 물을 천천히 부었다. 아버지는 이제 울고 있었다. 눈물이 얼굴을 줄줄 흘러내렸다. 나는 수증기를 먼저 보고 그다음에 물을 봤다. 주전자에서 나온 물이 거의 슬로 모션으로 포물선을 그리며 내 발을 향해 흐르는 것을 지켜봤다. 닿았을 때의 통증이 너무나 순연한 극열이라 일순간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비명을 질렀다. 
"이게 네가 죄악으로 걸어 들어갈 때 스스로에게 하는 짓이다. 발을 데는 거야." 아버지가 말했다.
아버지의 말이 옳았기 때문에 "네, 아버지."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발의 열기가 순식간에 여러 갈래의 극심한 고통이 되어 머리와 입술과 눈으로 올라왔다. 아버지는 넓적한 한 손으로 나를 안은 채 다른 손으로 조심스럽게 물을 부었다. (239-240쪽)


아버지의 폭력을 직접적으로 당하는 킴발리와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하고 기쁘게 해 주고 싶어하는 킴발리가 동일한 사람이라는 것. 이 점이 독자로서의 나를 혼란스럽고 슬프게 만들어서, 책을 읽는 내내 나는 킴발리를 마냥 좋아하지도 못했다. 킴발리가 자신이 학대당하고 있음을 빨리 깨닫고 아버지로부터 도망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요원해 보였다. 


그런데 가스라이팅은 보통 정신적 폭력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굳이 물리적인 폭력을 쓰지 않아도 될 정도로 피조종자의 조종자에 대한 지배력이 강력하고 흔들림 없는 상황에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그러나 유진은 킴발리와 자자뿐만 아니라 베아트리스에게도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폭력을 계속 사용했으니까 가스라이팅으로 그의 행위가 완전히 설명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그루밍 수법을 이용한 학대인가 생각했는데, 그렇다고 유진의 가학적 행위가 그에게 기쁨이나 즐거움을 준 것 같지도 않다. 자식과 아내에게 폭력을 가하는 가부장들이 모두 다 그렇다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지만, 최소한 이 책의 유진은 때리는 자신과 때려야 하는 자신을 별로 좋아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인간은 도대체 왜 이러는 거지…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너는 이 모든 특권을 누리는 만큼 뭔가를 해야만 해. 하느님이 너에게 많은 것을 주셨으니 기대하시는 것 또한 많단 말이다. 하느님은 완벽을 기대하셔.” (64쪽)   


 문장을 읽고서야 조금 이해가 갔다. 어쩌면 유진은 스스로를 신처럼 생각했던 게 아닐까. 신에 대한 믿음을 중시하며 신의 이름을 앞세우다보니 신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는 데 점점 익숙해져 결국은 자기 자신을 신이라고 생각하게 된 사람. 그래서 신 앞에 인간이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한다고 믿었듯이, 자신이 지배하는 이들도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한다고 믿었던 사람. 구약 성경 속의 신이 사랑하는 백성들이 신을 위한 삶을 살 수 있게 하려고 불을 내리고 질병을 내리고 홍수를 내렸듯이, 자신도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들이 자신을 위한 삶을 살게 하려면 가죽 벨트를 휘두를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 킴발리에게 신이 주었다는 특권도, 신이 기대하신다는 완벽도, 사실은 자신이 준 것이며 자신이 기대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끝까지 외면하면서 온 가족을 망가뜨렸겠지. 자신도 망가뜨리고. 그렇다면 이 책의 구성이 신들 부수기-마음으로 이야기하기-신들의 파편-다른 침묵으로 되어 있는 것도 이해가 된다. 


내가 알던 세계가 이 세계의 전부가 아니었다는 걸 깨닫는 것, 그래서 나의 지평과 인식이 확장되어가는 것은 분명 감사한 경험이지만 행복한 경험만은 아니다. 자각 이전의 세계는 완전히 잘못됐었던 것 같고 그 세계에서 살아가던 나는 아무 생각 없는 무지렁이였던 것 같아서 과거의 나를 증오하게 되기도 하고 과거의 세계로부터 완전히 빠져나오겠다며 불가능한 몸부림을 치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책을 읽는 동안엔 킴발리를 마냥 좋아하지 못했던 나는, 책을 다 읽은 후에야 킴발리를 좋아하게 됐다. 킴발리는 솔직하고 진심이고 현실적이었으니까. 내게 없던 언어를 찾아가기에 새 세계의 문법에 결코 익숙할 수 없는 자신을 그냥 그대로 보여주었으니까. 킴발리가 유진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여러 번 표현했고, 마지막 장에 이를 때까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토로했다는 이유로 '야 너를 그렇게 학대한 사람한테 그런 마음을 갖다니 미친 거 아니냐????'라며 그녀를 손가락질하는 거야말로 편협하고 얕은 이해라고 생각한다. 양육자 혹은 보호자에 대한 양가적 감정이야말로 인간의 보편적인 것 아니겠는가. 

 

아버지 때문에 겪어야 했던 침묵에서 벗어난 현재를 기뻐하고, "네가 원하는 건 뭐든 할 수 있어, 킴발리."라고 말해주는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되고, 아버지가 나오는 꿈을 늘 악몽으로 끝내게 되는 킴발리와 '그래도' 아버지를 위해 미사를 드리고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킴발리가 동일한 사람이라는 사실이야말로, 진실이다. 그리고 이런 진실을 맞닥뜨리기 위해서 나는 소설을 읽는 것이라고, 오늘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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