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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싫어서 오늘의 젊은 작가 7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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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면 한국이 언제는 좋았나 싶다. 한국인이라 좋았던 순간, 한국인임이 자랑스러웠던 순간, 한국에 태어난 게 축복이라 여겨졌던 순간을 기억 속에서 아무리 찾아내려 해도 찾아지지가 않는다. 올림픽이나 월드컵을 보며 한국팀 유니폼을 입은 선수를 같은 국적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응원하지도 않는다.


그래, 나한테는 애국심 같은 거 없다. 있다 해도 아마 엄청 조그마할 거다. 평소에 잘 인지되지 않는 걸 보면. 이 나라에 태어난 건 내 선택이 아니었으니, 이 나라에 태어났음을 감사하면서 이 나라를 사랑해야 할 의무 따위도 없다고 생각하며 산다. 그저 생존의 조건 혹은 환경으로 받아들이며 나라가 내게 요구하는 의무만을 이행할 뿐이다. 나라와의 관계에 최대한 감정을 섞지 않으려고는 한다. 좋은 감정이 나쁜 감정보다 훨씬 적으니까.


한국이 왜 싫냐고? 오래 고민해 대답할 것도 없다. 크롬의 주소창에 포털사이트의 이름을 넣는 것만으로도 수십개의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오늘은 7월 26일 일요일, 한국에서 두 번째로 큰 포털사이트의 메인에는 뻘과 녹조, 큰빗이끼벌레로 뒤덮여 썩어가는 낙동강에 관한 기사와 새누리당이 법인세 증대는 포퓰리즘이라며 악악댔다는 기사가 함께 떠 있다. 고개를 저으며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학부모가 여성 교사를 폭행했다는 뉴스와 공군 준위가 회식 도중 20대 여성 하사의 턱을 잡고 강제로 술을 먹였다는 뉴스가 보인다. 슬슬 머리가 지끈거려온다. 혈압을 좀 낮춰볼까 하고 연예 섹션을 클릭했다가 바로 후회한다. 언제나처럼 나열되어 있는 '누군가의 몸매' '누군가의 미모' '누군가의 뒷태' '누군가의 다리' '누군가의 가슴' '누군가의 엉덩이' 사진들…하아. 어린애부터 노인네까지 누구나 볼 수 있는 사이트가 이런 사진들로 장식되어 있는 게 당연한 일인 이 나라, 정말이지 싫다, 싫다, 싫다.


언제부터 그렇게 싫었냐고? 글쎄다, 생각이란 걸 하고 살게 된 이후로부터는 쭉 그랬던 것 같은데. 애국가를 4절까지 외워 써야 하는 시험에 '우리나라 만세'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따위를 줄줄 적어내고 100점을 맞던 어린이 시절이 지난 후, 나라가 국민을 위해 한다는 수많은 일들 중 나를 위한 건 거의 없다는 생각이 조금씩 들면서부터 쭉 이모양이었던 것 같은데.


그러다보니 당연히 내게 이런 말을 하는 사람도 수없이 많았다 ; "야, 아프리카 같은 데 안 태어난 게 어디냐." "너 인도에서 수드라 같은 걸로 태어났으면 어쩌려고 그래." "조선 시대 같은 때 태어나서 죽어라 고생해 봐야 그런 말을 안 하지." "북한에서만 태어났어도 이미 굶어 죽었어!" 운운. 아오, 내가 내 나라 싫다는데 왜이렇게 꼰대질이세요. 다른 나라나 사회나 시대에서 태어났으면 여기서 태어난 것보다 백퍼센트 불행하게 살았을 거라는 확신은 도대체 어디에서 튀어나오는 건가요. 존나 짜증나니까 그만 닥쳐주세요.


그러고 보면 계나도 나와 비슷한 경험을 꽤 많이 했던 것 같다. 이런 말을 보면 알 수 있다.


왜 한국을 떠났느냐. 두 마디로 요약하면 '한국이 싫어서'지. 세 마디로 줄이면 '여기서는 못 살겠어서.' 무턱대고 욕하진 말아 줘. 내가 태어난 나라라도 싫어할 수는 있는 거잖아. 그게 뭐 잘못됐어? 내가 지금 "한국 사람들을 죽이자. 대사관에 불을 지르자."고 선동하는 게 아니잖아. (10-11쪽)


어차피 난 여기서도 2등 시민이야. 강남 출신이고 집도 잘 살고 남자인 너는 결코 이해 못해. (61쪽)


한국이 선진국이 됐다고, 서울이 옛날이랑 몰라보게 달라졌다고 하는데, 어떤 동네, 어떤 사람들은 옛날 그대로야. 나아지는 게 없어. 내가 그냥 여기 가만히 있는다고 더 나아질 거라는 보장은 아무 데도 없어. (103쪽)


게다가 애국가 얘기까지 한다. 계나 역시 어렸을 때 애국가 가사를 외워 적으며, '대한으로 길이 보전한다는 게 무슨 뜻이지?'라고 고민해봤나 보다. 나이를 좀 먹은 후엔 애국가를 부를 때마다 '아 무슨 노래로 충성을 요구해-_-'라고 투덜대봤을 거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없어요.


애국가 가사 알지? 거기서 뭐라고 해? 하느님이 보우하는 건 내가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야. 만세를 누리는 것도 내가 아니라 대한민국이고. 나는 그 나라를 길이 보전하기 위해 있는 사람이야. 호주 국가는 안 그래. 호주 국가는 "호주 사람들이여, 기뻐하세요. 우리들은 젊고 자유로우니까요."라고 시작해. 그리고 "우리는 빛나는 남십자성 아래서 마음과 손을 모아 일한다."고, "끝없는 땅을 나눠 가진다."고 해. 가사가 비교가 안 돼. (171쪽)



하지만 나는 계나처럼 한국을 떠나지 못한다. 떠나려는 생각도 안 한다. 외국 시민권을 딴다고? 외국에서 직업을 구해 먹고 산다고? 꿈도 꿔 본 적 없다. 그래서 꼰대들의 참견질을 불러일으키고야 만다. "그렇게 이 나라가 싫으면 딴 데 가서 살아. 누가 너 붙잡냐?" "딴 나라 갈 거 아니면 좋게 좋게 생각하고 살아. 어차피 살 나라인데 좋아하고 살아야지, 싫어해서 좋을 게 뭐 있어?" 남의 삶에 자신의 오지랖을 한 번이라도 펼쳐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들은 도대체 어떤 과정을 거쳐 형성되는 걸까? 진심으로 궁금하다.


그리하여 귀를 막고 생각해 본다. 왜 나는 이곳을 못 떠나는가. 1차적으로는 영어를 못하기 때문이겠고-_- 2차적으로는 한국어 이외의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자 하는 욕망이 없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이걸로는 부족하다. 보다 본질적인 원인이 있지 않을까, 다시 생각해 본다.


내가 가진 것들을 버릴 수 없어서인가-비록 엄청나게 대단한 걸 갖고 있진 않지만, 어쨌든간 내가 쓰는 책상이 놓여져 있는 직장과 부양해야 할 가족, 몇 안 되는 친구들이 이 땅에 존재하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나는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에 어떤 의미로든 만족하고 있는 건가. 비록 이런 나라에서의 삶일지언정, 긍정하고 있는 걸까. 흠.


힌트는, 이번에도 계나의 말 속에 숨어 있었다.



내가 뭘 하겠다고 나서건 그게 성공할지 성공 안 할지는 몰라. (중략) 10년 뒤, 20년 뒤에 어떤 직업이 뜰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러니까 앞으로 전망 얘기하는 건 무의미한 거고, 내가 뭘 하고 싶으냐가 정말 중요한 거지. 돈이 안 벌려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면 좀 덜 억울할 거 아냐. (151쪽)


내가 아는 건 '무엇을'이 아니라 '어떻게' 쪽이야. 일단 난 매일매일 웃으면서 살고 싶어. (중략) 집도 안 커도 되고, 명품 백이니 뭐니 그런 건 하나도 필요 없어. (중략) 그리고 나는 당당하게 살고 싶어. 물건 팔면서, 아니면 손님 대하면서 얼마든지 고개 숙일 수 있지. 하지만 그 이상으로 내 자존심이랄까 존엄성이랄까 그런 것까지 팔고 실지는 않아. 난 내가 누구를 부리게 되거나 접대를 받는 처지가 되어도 그 사람 자존심은 배려해 줄 거야.(153쪽)


한국에서는 수도권 대학 나온 애들은 지방대 나온 애들 대접 안 해 주고, 인서울대학 나온 애들은 수도권 대학 취급 안 해 주고, SKY 나온 애들은 인서울을, 서울대 나온 애들은 연고대를 무시하잖아. 그러니까 지방대 나온 애들, 수도권 나온 애들, 인서울 나온 애들, 연고대 나온 애들이 다 재수를 하든지 한국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아마 서울대 안에서는 법대가 농대 무시하고 과학고 출신이 일반고 출신 무시하고 그러겠지. 그런데, 그 근성 못 고치면 어딜 가도 똑같아. 호주에 와서 교민이 유학생 무시하고 유학생이 워홀러 무시하는 식으로 이어져. 그 근성 고치려면 자산성 행복을 좀 버리고, 현금 흐름성 행복을 창출해야 해. (186-187쪽)


나도 계나처럼 특별히 하고 싶은 게 없다. 내가 뭘 하고 있는가보다 뭘 하고 싶으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뭘 하고 싶으냐의 '뭘'은 직업이 아니다. 좋아하는 가수의 공연 빠짐없이 가고, 좋아하는 음악 듣고 싶을 때 듣고 싶다. 많이 읽고, 많이 걷고, 많이 웃고, 많이 이야기하고 싶다. 옳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눈치 덜 보면서 최대한 당당하게 하고 싶다. 그 정도다. 그래서 '어떤 직업을 갖고 사는가'가 '장래희망'과 동일어로 여겨지는 이 나라가 싫다. 직업은 직업이고 미래는 미래고 삶은 삶이고 희망은 희망이니까. 그 넷이 다 같은 게 절대로 아니니까.


그렇지만 이 나라를 떠난다고 내가 행복해지나? 이 나라만 아니라면, 나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나? 아니다. 그렇지 않다. 유창하게 할 줄 아는 언어라고는 한국어 하나 뿐인 내가 외국에 가면 뭘 해서 먹고 살겠는가? 덩치도 작고 물리적 힘도 세지 않은데다가 아시안이고 여자인데, 범죄(직접적으로 말하자면 강간이나 절도)의 표적이 되기 딱 좋지 않나? 인종 차별은 또 얼마나 당하겠는가? 여기서의 삶이 녹록치 않은 내게, 그 어디에서의 삶이 녹록하겠는가? 더 힘들면 더 힘들지, 안 힘들 리 없다.


따지고 보면 '한국을 떠나면 행복해질 거야!'라는 말은 대통령이 바뀌면/국회가 여소야대로 바뀌면/재벌이 해체되면 나라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정치가 갑자기 깨끗해지고 경제가 확 살아날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말만큼이나 대책 없는 소리다. 나를 괴롭히는 환경적 요인이 한국이라는 국가의 특성에서 기인함은 사실이지만, 내 행복을 결정하는 가장 큰 요인은 결국 나 자신이라는 걸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


그러니까 결국 내가 한국을 떠나지 않는 이유는, 내가 계나만큼이나 현금 흐름성 행복을 충분히 누리지 않아도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인 거다. 계나처럼 나 역시 자산성 행복보다 현금 흐름성 행복을 중시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삶이란 원래 고통이라 여기는 인간이다보니 '이 나라에서 얻는 현금 흐름성 행복'으로도 삶을 지속하는 데 (아직까지는) 지독한 불편을 겪지 않는다는 것. 


그러니 나는, 한국 때문에 시시때때로 불행해져도, 너로 인해 내 행복을 저당잡히지는 않겠다고 의지를 다지며! 네가 나를 아무리 괴롭혀도 나는 별일 없이, 별다른 걱정 없이, 이렇다 할 걱정 없이 산다고 장기하처럼 목청을 높여 신나게 노래하는 수밖에 없다. 네가 싫어도 나는 꿋꿋이 잘 살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며!! 신나게 웃으며 탕탕탕 배를 두드리는 수밖에 없다. 사람대접 안 해 주는 이 나라를 저주하며 떠나는 대신,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충분히 사람대접을 해 주려고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내가 여기서 SKY 나왔다고 인서울, 수도권, 지방대 애들을 무시하면서 살아가는 벌레에 불과하다면 어느 나라를 가서 어느 직업을 갖든 간에 남을 무시하는 것에서 삶의 이유를 찾는 벌레일 뿐이니까. 


미래를 두려워하면서 행복해질 수는 없다는 계나의 말이 자꾸 생각나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가득 찬 내 현재가 조금은 가엾고 안쓰럽지만, 지금은 여기에서 벌레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다. 아직은 이럴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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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메시스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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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장을 덮고, 사전에서 nemesis의 뜻을 찾아본 후,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멍해지고 말았다. 응당 받아야 할 벌, 피할 수 없는 천벌이라. 지금 여기서 내가 할 일을 최대한 열심히 해도, 여기를 떠나 새로운 곳에서 이전과 다른 삶을 살려고 해도,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다닐 천형(天刑). 목숨이 끊어지기 이전에는 버릴 수도 놓을 수도 없는 운명. 문득 청산별곡의 '돌'이 떠올랐다. 더불어 어디다 던지는지 누가 맞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돌을 계속 맞으며 미워할 이도 사랑할 이도 없이 울고 있는 '나'도.

캔터가 바로 '나' 같은 인간이었을까. 응당 받아야 할 벌을 어깨에 짊어진 채 끊어지지 않는 목숨을 근근이 이어가는 인간. 자신의 운명을 피하려고도 바꾸려고도 하지 않고, 비참함을 자신의 것으로 온전히 끌어안은 존재. 구원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세상에서 망가진 착한 소년. 왠지 서글퍼졌다.


캔터 선생님, 아널드 메스니코프예요. 챈슬러 놀이터에서 놀던. (245쪽)
책의 40쪽 정도가 남았을 때, 그러니까 형편없는 시력 때문에 2차 대전에 참전하지 못하고 미국에 남아 있던 버키 캔터가 놀이터 감독으로 일하다가 자신이 지도하던 아이들이 폴리오로 하나둘씩 목숨을 잃자 애인인 마샤가 일하고 있는 인디언힐로 떠나 자신만 안전한 피난처로 도망쳐 왔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던 중 캠프에 폴리오가 퍼져나가자 자신이 건강한 감염 보균자인지 검사를 받으러 떠나던 때까지, 내 머릿속을 맴돌던 궁금증은 '정말 캔터가 폴리오를 퍼뜨린 걸까?'가 아니었다. 왜 이 소설의 서술자는 캔터를 '캔터 선생님'이라 부르고 있을까 하는 게 가장 신경 쓰이는 부분이었다. 마샤는 마샤고, 도널드는 도널드고, 호러스는 호러스고, 할머니는 할머니인데, 왜 캔터는 캔터가 아닌 '캔터 선생님'이지? 이 호명이 의미하는 건 도대체 뭐지? 자꾸 거슬렸다.

그래서 마지막 장을 읽자마자 무릎을 쳤다. 이 소설이 작품 밖 전지적 서술자의 시점으로 쓰인 게 아니었음을-이것이 필립 로스의 서술에 나타나는 대표적 특징임을 이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다!-바로 깨달을 수 있었으니까. 마치 작가인 듯 시치미를 떼고 캔터의 인생 전체를 송두리째 뒤엎어 놓았던 그 여름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놓던 서술자는, 마지막 장에 이르러 챈슬러 애비뉴 놀이터에서 놀던 소년들 중 한 명이었던 아널드로서 전면에 등장한다. 자기 역시 1944년 폴리오에 걸려 오랜 시간 고생했으며, 세월이 한참 흐른 1971년에야 캔터를 다시 만났다며.

캔터는 아널드와 일주일에 한 번씩 함께 점심을 먹으며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빠뜨리는 것 없이, 자기반성적인 태도로, 가슴에 묻어두었던 그 모든 것을, 전반적으로 뿌리 깊은 좌절의 분위기로.

그는 미국에서 폴리오 피해자의 가장 위대한 모범인 FDR와는 정반대로 병에 걸리면서 승리가 아니라 패배에 이르렀다. 마비와 그뒤에 온 모든 것으로 인해 그는 사나이라는 자신감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고 삶의 그쪽 면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중략) 그는 마비된 뒤로는 결혼은커녕 누구와 데이트를 한다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다고 대꾸했다. 그는 시든 팔과 시든 다리를 의사, 그리고 할머니가 살아 있을 때는 할머니 외에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가 없었다. (246-267쪽)



벌어진 일은 벌어진 거야. 내가 한 짓은 한 짓이야. (249쪽)
캔터에게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도둑인 아버지, 출산 중에 죽은 어머니, 폴리오로 인해 잃어버린 건강과 자신감, 놓아버린 연인, 아무런 죄도 잘못도 없이 폴리오로 죽은 아이들…왜 신은 이런 운명을 캔터에게 주었을까? 숨이 붙어있는 동안 내내 자신의 불행을 강화하고 확대하면서 삶의 순간 순간을 끝없이 망치는 삶을, 왜, 인간이, 살아야만 하는 걸까? 캔터의 말처럼 모든 일은 그의 죄에서 비롯해 벌어진 것이고, 벌어진 일은 이미 벌어진 일이라 고칠 수도 바꿀 수도 없으니, 아주 작은 구원도 위안도 그에게는 불가능한 걸까? 그게 당연한 걸까?

내가 얼마나 억울해해야 하는 걸까? (264쪽)

어쩌면 캔터의 말이 맞다. 이 일은 억울한 일이다. 원인과 결과를 명확히 밝히려 들어 봤자 끝끝내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유는 알 수 없는데 결과는 엄청난 파멸이니까. 그렇기에 캔터는 의미 없고, 우연이고, 터무니없고, 비극적이라는 말로는 자신의 삶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대신 좆같은 새끼와 사악한 천재가 합쳐진 하느님이 자신을 악한 존재로 형상화했다고 믿으며, 반추동물처럼 되새김질한다; 나는 절대 과거의 내가 될 수 없을 거다. 대신 평생 이런 존재로 살 거다. 나는 다시는 기쁨을 알지 못할 거다…라고.

문득 이승열의 노래 한 구절이 생각난다. WHY WE FAIL WE DON'T KNOW…그리고 현명한 마샤의 말이.

너는 늘 네 책임이 아닌 것까지 책임을 지려고 해. 끔찍한 하느님이 책임을 지거나 끔찍한 버키 캔터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는데 사실 책임은 둘 중 누구에게도 있지 않아. (261쪽)




어쩌면 그가 실제로 보이지 않는 화살이었을지도 모른다...그렇다 해도, (275-276쪽)

캔터가 모든 악의 근원일지도 모르고 모든 파괴의 시작일지도 모른다고 해도, 캔터 때문에 그의 어머니와 아이들이 죽어나갔으므로 캔터와 함께 있었다면 마샤 역시 불행 속에 죽어버렸을지도 모른다고 해도…


한때, 캔터가 아이들에게 무적의 존재였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를 통해 소년들은 남성을 배웠고, 그와 같은 남성이 되고자 꿈꾸었다. 비록 그 찬란한 시간이 짧은 순간에 불과했다 해도, 빛이 사라진 후 남은 건 그보다 훨씬 길고 지독한 암흑 뿐이었다 해도, 스물 세 살의 캔터는 분명 느긋하고, 친절하고, 공정하고, 사려 깊고, 안정적이고, 상냥하고, 정력적이고, 늠름하고, 확신에 찬 젊은 남자이자 동지이자 지도자였다-1944년 이전까지.


그 찬란한 순간이 있었으므로 캔터의 삶은 충분히 의미 있는 것이었다-고 말하는 건 너무 무책임하다. 찬란한 영광을 경험한 이후의 절망은 더더욱 파괴적이다. 그렇다고 그 찬란한 순간을 떠올리며 캔터가 남은 삶을 극복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 역시 무책임하다. 캔터의 고통은 캔터에게 절대적인 것인데, 내가 뭐라고 캔터에게 의지를 요구한단 말인가. 의지를 가장 필요로 했던 건, 당연히 캔터였을 텐데.


그래서 결국, 나는, 모르겠다. 왜 캔터가 이런 삶을 살아야 했는지, 캔터가 구원받지 못한 게 당연한 건지, 평생토록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떠올리고 또 떠올리는 게 폴리오 이후의 여생이어야만 했던 이유가 뭔지…나는 모르겠다. 누구도 모를 것이다. 이 소설을 쓴 필립 로스마저도, 모르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 해도 나는 마샤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어떤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해 삶을 누리려 했던, 순간을 적극적으로 향유하려 했던, 마샤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싶다. 그녀는 해결할 수 없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자신을 꾸짖던 캔터와 달리 사랑하는 이를 열심히 사랑하기 위해 노력했다. 남루해진 자신이 부끄러워 스스로를 버리라고 무자비하게 자신을 밀쳐내던 캔터를 향해 진짜 기형이 된 건 캔터의 몸이 아닌 마음이라고 외쳤다. 그 용기가, 노력이, 삶에 대한 애정이, 아름답고 부러워서, 마샤와 함께 했다면 캔터의 삶이 조금은 달라졌을 거라고 믿어보고 싶다. 가족이 있었기에 제 운명을 비난하는 일로부터 멀어질 수 있었던 아널드처럼, 캔터 역시 그럴 수 있었더라면 책을 덮는 내 마음이 조금은 가벼울 수 있지 않았을까.



대학 마지막 해에 아내를 만난 겁니다. 그러자 서서히 폴리오가 유일한 드라마가 아니게 되고 젖을 떼듯 제 운명을 비난하는 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저는 1944년 그곳 위퀘이크에서 한 여름에 걸쳐 벌어진 사회적 비극을 겪었지만 그것이 평생에 걸친 개인적 비극이 될 필요는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2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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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 1
장미셸 게나시아 지음, 이세욱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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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대학 시절 근현대 문학을 공부할 때, 창조니 폐허니 백조니 시문학파니 카프 등등을 나열하는 교수님의 목소리를 배경음악삼아 나는 종종 공상에 빠지곤 했다(확실히 훌륭한 학생은 아니었다). 함께 글을 쓰고 나누며 세계를 이야기하고 서로의 문학과 자신의 문학을 만들어갔을 그들. 그 곁에 관찰자로서 그들과 함께 경험과 감정을 공유했던 누군가가 분명 있지 않았을까. 만약 내가 그 관찰자로 살 수 있었다면, 얼마나 재미있었을까! 특히 내게 흥미로웠던 존재는 9인회였고 관심 깊게 들었던 건 이상과 그 친구들의 뒷이야기였다. 이상과 김기림과 이태준과 정지용과 김유정과 박태원 등등이 함께 다방에서 MJB의 미각을 향유하는 모습이나 명동 거리를 함께 걷는 모습, 농담을 툭툭 건네고 있는 장면을 상상만 해도 왠지 가슴이 두근거리곤 했다.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을 읽으면서 그런 상상을 오랜만에 다시 했다. 저쪽에서는 사르트르가 담배를 피워대며 글을 쓰고, 이쪽에서는 전직 소련 의사와 전직 소련 공군 조종사가 미간을 찌푸리며 체스를 두고, 전직 헝가리 유명 배우는 전직 자신의 매니저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그 사이를 전직 체코 외교관과 현직 경찰관이 지나가는 가운데, 소년 하나가, 호기심에 가득한 눈으로, 그들이 만들어내는 소리를 조용히 듣고 있는 장면이라…왠지, 그 시절 공상의 순간처럼, 또 가슴이 두근거렸다.


우리는 살아 있고 우리는 자유롭다. (1권, 124쪽)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은 페이지마다 각자의 개성이 넘치는 캐릭터들이 가득가득 들어 있는, 백화점 같은 책이다. 서술자인 미셸은 물론이고 미셸의 가족들, 친구들(사실 니콜라 말고는 또래 친구라 할 만한 사람이 등장하진 않지만, '발토'의 이고르와 파벨과 블라디미르와 임레와 레오니트 등등도 나는 미셸의 '친구들'이라고 생각한다. 왜 아니겠는가?)도 마찬가지다. 한 사람도 똑같은 사람이 없다. 그러면서도 '아 나 이거랑 비슷한 사람 어디선가 봤는데…'하는 느낌이 들게 만들어주는 것이 이 책의 장점이라 생각한다. 개성이 지나쳐서 너무 이상하거나, 현실감이 전혀 없거나, 누가 봐도 '헛 이거 지어낸 티 너무 남-_-'하는 사람은 잘 보이지 않으니까.

게다가 재미있다. 특히 재미있는 장면은 역시 싸움 장면인데(이게 참 어쩔 수 없는 거다),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의 멤버들끼리 흥분해서 모국어를 주고받으며 싸우는 장면이라든지 미셸네 가족이 소리소리 질러가며 싸우는 장면이라든지 프랑크와 세실이 개와 고양이처럼 싸우는 장면은 대부분 재미있었다. 그러고 보면 내가 이 책이 마음에 들기 시작했던 것도 혈연의 기적, 이를테면 다른 관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조화, 절대적인 신뢰, 본능적인 융합 따위 전혀 없는(!!!!!) 미셸의 생일 잔치 장면에서부터였다. 오, 이 작가, 유머를 아는 사람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었으니까. 예를 들면 이런 느낌.

그들이 함께 어울리는 시간은 천국이 아니면 지옥이었다. 어중간한 것은 없었다. 자기들이 떠나온 체제를 혐오하는 사람들과 인류에게 미래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 사이에 느닷없이 싸움이 벌어지곤 했다. 두세 사람이 언성을 높이는 게 신호탄이었다. 그들이 이고르가 세운 규칙을 어기고 프랑스어 대신 각자의 모국어로 말하기 시작하면, 모두가 말싸움에 끼어들었다. 무엇 때문에 언쟁을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조차 그냥 보고만 있지 않았다. 여러 언어가 뒤섞이는 그 바벨탑의 혼란은 대개 십 분이 지나도록 계속되었다.
문장을 읽는 것만으로도 굵직한 성인 남성들의 목소리가 쨍쨍 부딪치며 난장판을 되어가는 모습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듯해 나도 모르게 고개를 움찔했다. 이런 장면을 바라보면서 아무 것도 모른 척하는-물론 소년 시절의 미셸은 '정말로' 아무것도 몰랐을지 모르겠지만-미셸의 목소리가 어찌나 의뭉스럽게 느껴지던지!



내가 이야기하지 않으면, 우리가 무엇을 겪었는지 내가 말하지 않으면, 누가 그것을 알겠니? (1권, 423쪽)

하지만 당연히도, 그리고 조금은 서글프게도 이 이야기가 마냥 재미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 클럽의 멤버들은, 미셸의 설명을 빌리자면 대부분 비극적이거나 기괴한 상황에서, 대개는 외교를 위한 여행 도중에 서방으로 넘어옴으로써 고국으로 도망 난민들이었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난민에게 매우 우호적이고 난민 신청이 받아들여지는 것도 어렵지 않다고 별 생각 없이 믿어 왔었는데,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고(난민으로 인정받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던 아니었던 아니었던 거시다-_-(아무래도 이 편견의 근본 원인은 홍세화씨인듯…으잉?).


공산주의자였거나 여전히 공산주의자인 그들이 여전히 공산주의에 대해 얘기하고 공산주의에 대한 믿음이 서로 다르다는 이유로 부딪히고 부딪치는 모습이, 조금은 서글퍼 보였다.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은 사상이 용도폐기되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에게나, 고난을 감수해야만 그 사상에 대한 믿음을 지킬 수 있다면 어쩔 수 없이 고난을 선택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나, 현실이 녹록치 않은 건 마찬가지이니까.


자신들의 지나온 삶을 이야기하는 그들의 목소리에는 짙은 비애가 묻어 있었다. "사람들은 멍청해.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달라지지 않을걸."이라고 투덜거리는 임레의 목소리에조차. 클럽 멤버들에게 배척당하고 형인 이고르에게 욕을 얻어 먹으며 죽는 순간까지 용서란, 화해란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사샤의 존재는 이러한 비애감을 더욱 강화한다. 사샤가 했던 일이 존재했던 것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만드는 일이었음은 특정한 세력의 조직적인 조작이 국가를 위한 일로 정당화되고 당연시되었던 어두운 시대의 모습을 그림처럼 담아내어 마음을 더욱 무겁게 한다. 존재했던 것의 순간을 아름답게 담아내려던 미셸과 사샤가 소통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그 사진이었다는 것은, 그들의 만남이 비극으로 끝날 수 밖에 없었던 필연적 이유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다행인 건, 그들이 과거로 인한 고통을 되새김질하듯이 씹고 씹고 또 씹지는 않는다는 거였다. 그들은 살아 있다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과거를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無)로 화하고 말 것이라는 것 역시 잊지 않고 지낼 만큼의 현명함을 함께 갖춘, 낙천주의자들이기 때문이다. 이고르의 이 말처럼 : "우리가 낙천주의들이 아니라면, 누가 낙천주의자이겠소?" 물론 여전히 외롭게 떠나야 했던 사샤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지만, 그래도 사샤의 장례식에서 그들은 증오와 잘못을 마음속에 두지 말자고 다짐했으니까, 너무 슬퍼하지는 말아야겠지.



미셸,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1권, 27쪽)

아쉬운 점은, 책을 다 읽은 이후에도 '그 이후에 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하는 궁금증이 계속 남아, 뭔가 이야기가 더 이어져야만 할 것 같다는 느낌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프랑크와 세실은 어떻게 되었을까? 프랑크가 세실에게 한 말은 정말이었을까? 세실이 자신을 완전히 잊어버리게끔 거짓말을 한 건 아닐까?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 이후로 영영 갈라져 버린 걸까? 쥘리에트는 계속 말 많은 여자 어른이 되어 남들의 골치를 아프게 했을까(사실 나에게는 이 소설에서 가장 불쌍한 캐릭터가 쥘리에트이기도 하다. 누구에게도 '제대로 된 응답'을 받지 못하는 소녀라니, 얼마나 외로울까ㅠ). 사샤를 보낸 후 이고르는 어떻게 살았을까? 레오니트와 밀렌은? 마들렌은? 자키는? 빅토르는? 그 외 클럽의 또다른 인물들은? 이거 진짜 이렇게 끝나면 안되는 거 아냐? 외전이라도 있어야 하는 거 아냐?


그러나 이러한 상상은 어디까지나 독자의 몫. 나는 어디선가 새카맣게 탄 얼굴로 뙤약볕 아래에 앉아 있을 프랑크를 상상해 보고, 이고르와 레오니트와 파벨과 블라디미르와 임레가 체스판을 사이에 두고 둥그렇게 둘러 앉아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고, 택시 운전석에서 또다시 사기를 치고 있을ㅋㅋ 빅토르를 상상해 보고, 엔조 할아버지 옆에서 따박따박 말대꾸를 하고 있는 미셸의 아버지를 상상해 보고, 카미유와 손을 잡고 거리를 걸어가는 미셸을 상상해 본다. 그들이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다. 우리의 하루하루는 고통스럽지만, 그래도 어쩄든간 살아 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모두 낙천주의자이며, 우리가 낙천주의자라는 사실은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 조건임이 분명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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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감한 친구들 1
줄리언 반스 지음, 한유주 옮김 / 다산책방 / 2015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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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퇴근길에 이 책을 읽으려고 직장에 가져 갔었다. 출근길엔 신문을 읽느라 못 읽었고, 집에 갈 때 읽어야지 하고 책상 위에 올려뒀다. 다른 부서의 부장님 한 분이 우연히 이 책의 제목을 보시고 "재밌어?"라 물으시더니 얼마나 재미있는지 잠깐만 보시겠다고 하셨다. 한 시간 후, 도저히 손을 놓을 수가 없다며 빌려 가셨고, 그 주에 2권까지 독파하셨다. "나는 소설 별로야. 지어낸 얘기라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 그런가, 읽다보면 다 거짓말 같고 재미가 없어."라고 자주 말씀하시던 분이었는데!!! 그 모습을 보면서 아, 이 책, 확실히 재미가 있긴 있나보다, 그렇다면 띠지의 '읽기를 멈출 수 없는 이야기!(명조체)'가 완전한 허위과장광고카피는 아니군…하는 생각이 들었더랬다.



2. 초반부를 읽을 땐 좀 집중이 좀 덜 됐다. '아서'는 '아서 코난 도일'일 거라는 사실이 너무 당연하다보니까 아서에 대한 서술 부분을 읽을 때는 별 문제가 없었는데, 조지에 대한 서술을 읽을 때는 '이 사람은 아서와 무슨 관계가 있는 거지? 언제 만나는 거야?'라는 생각이 자꾸 들어 정신이 흐트러졌었다. 게다가 조지가 파르시라는 사실을, 샤푸르지 목사가 명백하게 짚어주기 전까지는 제대로 눈치채지 못한 터라 도대체 주변 사람들이 조지를 왜이렇게 괴롭히는 건지 이해가 안 가 답답하기도 했고. 


그러다 보니 1892년 6월 6일을 기억하라고 샤푸르지가 말하는 부분을 읽으면서 한 대 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이제까지 뭘 본 거지? 하는 생각이 들어 페이지 앞쪽을 넘겨 보니, 시드 헨쇼가 조지를 보며 새끼손가락으로 양 입꼬리를 끌어올리고 엄지로 귀를 펄럭이며 원숭이 얼굴을 한다는 내용에다가 윌리 샤프(세상에나!)가 조지에게 다가와 "넌 우리랑 어울리지 않아."라고 말하는 내용이 자그마치 23페이지에 있었다. 아, 완전히 속은 듯한 기분. 실제로는 속은 게 아니라 예민하지 못했던 스스로가 짜증스러웠던 거겠지만.


그 기분으로 다시 페이지를 슬슬 넘겨보니 모든 게 이해되는 듯한 기분이었다. 조지를 보며 비웃는 아이들, 조지 앞에서 원숭이 얼굴을 흉내내는 아이들, 침대에 누워 호주와 인도와 캐나다 등등을 대영제국과 연결하는 동맥과 정맥을 생각하는 조지, 시드니와 봄베이, 케이프타운, 혈통, 같은 단어들을 떠올리는 조지, '에들지'를 제대로 발음하지도 쓰지도 못하는 주제에 무례하고 뻔뻔하게 구는 경사 시절의 업턴 등등. 젠장. 샤푸르지의 말처럼 주님의 피조물은 모두 동등한 축복을 받지만, 그럼에도 조지가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미개한 사람들과 마주칠 수 있었던 것처럼, 나 역시 다른 독자들과 동등하게 활자로 줄리언 반스의 이야기를 읽었지만, 그가 뿌려둔 힌트의 조각들을 하나도 발견하지 못하고 스스로의 눈을 가린 채 헤매고 있었던 게다.



3. 그때부터는 페이지가 술술 넘어갔다. 아서의 삶은 아서의 삶 나름대로 흥미로웠고 조지의 삶은 또 조지의 삶 나름대로 파란만장(!)해서, 1권이 끝나가도록 둘의 접점이 보이지 않는데도 그다지 초조하지 않았다. 생각지도 못한 누명을 쓰고 재판에서 패소한 후 감옥에 갇히는 조지의 이야기를 쭉 읽어치우면서 셜록 홈즈 시리즈에서 본 것과 같은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니까 억울한 사연을 가진 사람이 홈즈에게 편지를 보내 도움을 요청하듯이, 조지가 자신의 억울함을 '셜록 홈즈의 아버지'에게 호소하고, 아서가 그 호소에 마음이 움직여 사건에 대해 알아보고, 홈즈처럼 조지를 만나고, 사실을 파헤치고, 조지의 누명을 벗겨주지 않을까…하고 대충 짐작했던 것. 다행히도 그 짐작은 거의 틀리지 않았다ㅋ


조지의 재판 이야기만큼이나 흥미로웠던 건 아서의 이야기였다. 코난 도일이 의사 출신이었고 강령회에 관심이 많았으며 셜록 홈즈 얘기로 세속적 성공을 거둔 이후에도 추리소설보다 역사소설을 더 쓰고 싶어했다는 것 정도야 알고 있었지만, 아내 투이와 애인 진 사이에서 왔다갔다했다는 것은 전혀 몰랐다. 진이 등장한 이후부터는 유명인의 스캔들을 훔쳐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읽는 내내 '으엉 이거 어떻게 되는거지'와 '아, 왠지 진이 아깝다'와 '아, 투이 좀 안됐다'와 '그러고 보면 아서도 좀 안됐다' 사이에서 갈팡질팡. 지금은 메리가 가장 안됐다 싶기도 하지만…모든 사람에게는 그 사람 나름대로의 상황과 사정이 다 있는 거니까, 다들 조금씩은 안쓰럽다고 생각한다. 역시 사랑은 타이밍인 것인가!



4.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부분은 조지가 자신이 괴롭힘을 당한 원인을 인종이라 생각하지 않는다고 매우 단호하게 밝히는 부분이었다. 파르시 이야기를 꺼내는 아버지에게 자기는 영국인이라고, 대영제국의 일원이라고, 나를 파르시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당당히 말하던 어린 조지가 그대로 어른이 되었던 것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만약 내가 조지처럼 저지르지도 않은 잘못 때문에 협박을 당하고 피해를 입는다면 어떨까. 내 행동이 문제가 아니라면 겉모습이 문제인 것이리라 여기고 자신의 외양을 추하게 여기며 괴로워하지 않았을까. 어릴 적부터 친구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고, 친한 친구 하나 없이 평생을 보내고, 제대로 연애 한 번 하지 않았던 조지의 자아는 어쩌면 이렇게 강하고 단단해졌을까.


그러다 문득 이것은 자아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는 항상 진리를 말하는 삶 속에서 길을 가야 한다."는 샤푸르지의 말을 귀에 인이 박히도록 듣는, 어린 조지가 떠올랐던 것이다. 자신의 삶을 통해 진리를 말하지 않는다면, 그 삶에서 의미를 찾을 수 없다고 생각했을 조지. 그래서 자신의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아서 앞에서도 '아서의 말은 과연 진리인가'를 계속 따지던 조지. 명백하게 참이고 진실된 그 무엇을 찾으려 애썼던 조지. 눈으로 감각할 수 없는 것들, 상상력의 영역에 있는 것들은 '보려고 들지 않았던' 조지…가 한꺼번에 와르르 머릿속을 빙빙 돌았다.


그렇다면 아서는 어떤가. 어릴 적부터 상상력이 뛰어났던 소년. 자기의 상상력을 통해 부귀와 명예를 누리고, 다른 이들의 삶을 '올바로' 돌려놓는 데 기꺼이 참여했던 유명 작가이자 저명한 인사. 논리적으로 사고하고 추론하면서 남들이 볼 수 없었던 진실을 세상에 바로 보였던 사람. 하지만 자신이 본 것을 '아는 것'이라 완벽하게 믿게 된 사람. 그래서 조지의 인종이 괴롭힘을 당하게 된 원인이라고 확신했을 사람.


나는 그 둘 사이 어디에 있는가. 나는 조지처럼 명백하고 확실한 것만을 보려고 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내가 본 것에 불과한 그 무엇을 진실이라 확신하는 사람인가. 결국 이 소설은, '본다'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인가. 우리가 보는 세상의 그 어떤 진실도 완전한 진실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것인가. 그러니 모든 것을 의심하지도, 완벽하게 자신하지도 말라는 것인가.


사실은, 잘 모르겠다. 그냥 이 이야기가 재미있었고, 특히 조지가 아서와 진의 결혼식에 참석하던 부분은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으니, 그걸로 됐다.



5. 아서만큼이나 진이 매력적이었고, 조지만큼이나 모드가 매력적이었다. '남편이 하자는 대로 따라하고 가자는 대로 따라가는 부인이 된다는 것'을 못할 것만 같던 젊은 진이 '레이디 코난 도일'로 바뀐 것도, 병약하고 보살핌 받아야 하고 모두의 걱정을 한 몸에 받던 모드가 오빠의 결정 장애를 책임지는 든든한 동반자로 자란 것도 흥미로웠다. 이 두 여인의 이야기가 아서와 조지의 이야기보다 더 재미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조금 들긴 하지만, 뭐, 이것 역시, 됐다. 아서나 조지의 세계와는 또다른 그녀들의 세계가 있다는 것 역시, 내가 볼 수 없는 세계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반증일테니.


하지만 여전히 궁금하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무엇을 본 것일까? 내가 본 것은 맞는 것일까? 다시 이 책을 읽는다면, 처음 읽었을 때와 다른 무언가가 또다시 보일까? 그렇다면 내가 이전에 읽었을 때 본 것은 뭐였던 걸까? 나는 도대체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무엇을 보았는가? 무엇을 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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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세부터 헬로라이프 스토리콜렉터 29
무라카미 류 지음, 윤성원 옮김 / 북로드 / 2015년 2월
평점 :
절판


1. 무라카미 류, 라는 이름을 들으면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장면이 둘 있다. 하나는 친구와 328번 버스 맨 뒷자리에 앉아 '교코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에 대해 흥분해서 이야기를 나누던 기억이고(친구와 내가 교코에게 꽂혔던 부분은 달랐지만, 어쨌든 둘다 '저렇게 사랑스러운 여자라니, 현실에 있을 수 없다'는 잠정적 결론에 도달하긴 했었다) 또 하나는 중앙도서관의 커튼 뒤에서 류 책을 쌓아놓고 읽다가 잠들던 기억. 둘 다 스무 살 때의 일. 눈을 그믐달 모양으로 만들며 웃던 친구의 상기된 얼굴과 들뜬 목소리, 도서관의 묵은 책 냄새와 나른하던 공기가 왜 이리도 오래 남아 있을까.


그런 이유 때문인지, 무라카미 류를 '젊은 글을 쓰는 소설가'로 인식하고 있던 내게, 이 책은 제목부터 충격이었다. 55세라고? 교코식스티나인의 무라카미 류가? 류는 핏속에서 팔딱팔딱 끓는 청춘의 기운을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때에 읽을 법한 글을 쓰는 사람 아니었나? 그런 그가, 55세의 사람들 이야기를 썼다고? 뭐지, 야마다 에이미나 다나베 세이코 같은 느낌이려나…하고 추측하다가 깨달았다. 내가 무라카미 류의 글을 얼마나 오랫동안 읽지 않았는지. 


오랫동안 한 소설가의 책을 꾸준히 읽는다는 건 참 어렵지만, 그래도 꽤 즐거운 일임에 틀림 없다. 어, 이건 예전의 거기에서 본 거랑 비슷한데, 이 사람은 그 때 그 소설에서 봤던 그 사람과 비슷하고…하며 기억을 더듬으면서 예전 책을 오랜만에 들춰볼 수도 있고, 그 과정에서 소설가와 소설이 어떻게 변해 가고 있는지를 느낄 수 있는 동시에, 그를 따라 읽는 나 역시 계속 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으니까. 예전에 꽂혔던 문장이 꽂히지 않기도 하고, 예전엔 의미 없이 넘겼던 페이지에서 멈춰버리기도 하고, 예전에도 좋다고 생각했던 문장 앞에서 '역시로구나!'하고 무릎을 치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신간보다 예전 책을 더 오래 붙잡고 있게도 된다.


그러나 나는 무라카미 류의 글을 꾸준히 찾아 읽지 못했기에, 무의식적으로 지금의 무라카미 류가 쓰는 글 대신 20년 전, 30년 전의 무라카미 류가 쓴 글을 '무라카미 류'와 동일시하고 있었던 거다. 교코식스티나인이 무라카미 류 글의 거의 전부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왔고, 실제의 그가 교코식스티나인의 무라카미 류와는 꽤 많이 변해왔을 거라는 걸 잠시 잊고 있었던 거다. 어리석게도.



2. 줄줄 넘쳐 흐르던 에너지로 가득찬 청춘들의 이야기 대신, 그의 말마따나 체력도 약해지고, 경제적으로도 만전을 기하지 못하고, 이따금씩 노쇠를 인식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이 살아가기 힘든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내야 할 것인가(후기 중)에 대해 써내려간 이 소설은-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다. 류가 후기에서 '신뢰'라는 말과 개념을 이토록 깊이 의식하며 소설을 쓴 것도 처음이라고 쓴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의 삶이 잔뜩 주름져 있다는 걸 알아채고 온 몸에서 힘이 쭉 빠져버렸을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당연히, 자신을 세상에 붙여둘 수 있는 '신뢰'였을 테니까.


다섯 편의 소설을 처음부터 차례대로 읽었는데, 하늘을 나는 꿈 다시 한 번펫로스가 꽤 슬픈 얘기였다면 결혼 상담소캠핑카, 여행 도우미가 긴장을 이완시켜 주어 소설의 배치가 잘 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더이상 남편이 필요 없어진 여자 이야기(결혼 상담소)는 정말이지 유쾌해서 계속 낄낄대며 읽었고, 삶이 걱정과 불안으로 가득 차 있을 때 어린 시절 친구를 만나게 된 남자 이야기(하늘을 나는 꿈 다시 한 번)의 마지막 장에서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축 처진 어깨를 늘어뜨린 사람들에게 보내는, 무라카미 류의 응원 같았달까.


나 역시 불안으로 가득 차 있고, 사는 게 고통스럽다. 하지만 적어도 가족이 있고 아직 살아 있지. 맛있는 물도 마실 수 있고. 그리고 살아만 있으면 언젠가 다시 하늘을 나는 꿈을 꿀 수 있을 지도 모르지. (167쪽)


은퇴 후 세일즈맨으로서의 커리어와 자신감으로 기세등등하던 토미히로가 '도대체 내 인생은 무엇이었던가?'하는 고민 앞에서 주춤거리는 이야기(캠핑카)나 정년퇴직을 하고 나서 블로그를 하느라 하루 종일 방에 틀어박혀 있는 남편의 이야기(펫로스)를 읽으면서는 나의 아버지가 떠올라 마음이 짠했다. 한낮 내내 창문 밖 공원을 바라보며 한숨조차 못 쉬고 멍하니 있던 아버지의 옆모습, 독수리 타법으로 컴퓨터 앞에서 끙끙대며 단축키 하나로 금방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고민하던 뒷모습. 그때 내 아버지도 블로그를 했었지. 


일을 그만두고 일 외의 무엇에서 자신의 가치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전전긍긍하던 아버지의 심정을, 두 딸이 졸업하고 취직할 때까지 어떻게 버틸 수 있을지 고민하던 아버지의 고뇌를 이해하기에, 나는, 너무, 어렸다. 그 철없음이 후회되고, 죄송하고, 슬프다. 하지만 나카고메 시즈코의 말처럼 인생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거라기보다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것에 더 가까울테니, 그때의 잘못을 되새김질하기 보다는 지금의 시간을 충실히 채우는 게 낫겠지. 내가 그때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음을 겸손하게 받아들이면서.


다른 삶의 방식을 발견했다고 해서 단순히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없다고 믿는 사람이 순간순간을 더욱 소중히 여기며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중략) 돈이나 건강 등에 대한 불안감은 있다. 불안투성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인생에서 가장 끔찍한 건 후회하면서 사는 것이다. 고독은 아니다. (76쪽)



3. 사실 처음 이 소설을 읽을 땐 '노년의 내 모습'을 계속 상상했더랬다. 애도 남편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예정이고, 쭉 없을 계획인지라(!) 나카고메 시즈코의 맞선 이야기를 읽으며 나도 나중에 저런 상황에 놓이면 어떻게 살아야 하지? 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나마 시즈코는 딸이라도 있지, 나는 딸 따위도 없을 텐데 하는 생각에 심란함이 더해졌고. 어쩌면 시모후사 겐이치처럼 장래의 암울한 전망을 그려 보며 죽을 날을 기다리는 게 55세 이후의 내 모습이겠거니 싶어 울적하기도 했다. 류가 그리는 일본의 지금 모습이나, 한국의 지금 모습이나, 거의 다르지 않다 싶어서.


시모후사 겐이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일본은 30년 전이나 40년 전에 비하면 월등히 풍요로워졌는데도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돈이 돌아가지 않는다. 춘계 임금 인상 투쟁에서도 대기업 노조는 경영진에게 굴복했고, 요 근래 급료가 전혀 오르지 않았다. 아니, 오르기는 커녕 실적이 부진한 가전제품 회사에는 구조 조정 바람이 불고 있다. 대기업이 그런 상황이니 중소기업 사원이나 파견 직원, 아르바이트 직원들의 비참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중략) 인구는 계속 감소하는 추세인데, 대다수 노동자들은 저임금에 허덕이며 단 20엔이든 10엔이든 저렴한 편의점 도시락을 사 먹고, 1엔이라도 싼 선술집을 찾고, 맛있는 식사도 맛있는 술도 애초에 포기하며 살아간다. (313쪽)


물론 개인적으로는, 차를 준비해놓고 작은 앉은뱅이 책상에 앉아 책을 읽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고 사는 삶도 크게 나쁘지 않다. 하지만 앞으로의 세상은 지금보다 더 쪼잔해지고 치사해지겠지. 인간의 가치를 돈보다 아래 두고 복지라는 말이 도둑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다스리는(!!) 이 나라에서, 늙어가는 내가 평안하게 살기란 쉬운 일이 아니겠지. 근데 나보다 이 세상을 오래 살아가야 하는, 더 젊고 어린 사람들이 나보다 훨씬 더 어려운 삶을 살아가리라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러니까 같이 잘 살기 위해서, 몇 개 없는 걸 두고 힘 없는 이들끼리 개싸움하지 않도록,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조금 더 넉넉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도록 '잘' 살아가야겠지. 나 늙으면 어떡하지? 힘 없고 돈 없을 때 어떻게 살지? 하는 걱정으로 벌써부터 동동거리며 치사하게 내 것만 챙기면서 살지 말고. 그래야 다시 하늘을 나는 꿈이든 캠핑카를 타고 여행하는 꿈이든 근사한 여자/남자를 만나는 꿈이든, 그게 뭐든간에 '꿈'이란 걸 꿀 수 있을 테니까.


뭘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을 땐 천천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물을 마시며.


뭔가 괴로운 일이나 안 좋은 일이 있을 때는 먼저 천천히 물을 마셔라. 그러면 일단 마음이 차분해지지. (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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