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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아이들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29
나지브 마흐푸즈 지음, 배혜경 옮김 / 민음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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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4월 17일의 기억


밤이 지나면 낮이 되듯 불의는 반드시 사라져. 우리는 우리 동네에서 압제가 멸하고 기적과도 같은 날이 훤히 밝아 오는 것을 분명 보게 될 거야. 

-우리 동네 아이들 2권, 358쪽


마지막 장을 읽은 날은 4월 17일이었다. "나도 이거 주면 안 돼?"라고 말하는 직장 동료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었던 노란리본 뱃지가 마침 다 떨어져 버린 날이었다. 좀 더 사야겠다는 생각으로 노란리본 뱃지를 만들어주시는 분의 페이스북 페이지를 찾았다. 영상 하나가 업데이트되어 있었다(http://on.fb.me/1JhCG5G). 

클릭한 영상 속에서는, 노란 옷을 입으신 여자분이, 마이크를 잡고 말씀하셨다.

저희 가족들이 항의의 뜻으로 지금 광화문, 바로 정문 앞, 그러니까 경복궁 입구 쪽에서 벌써 2박 3일째 노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경찰 병력이 대거 출동하여 저희들을 무 뽑듯이 끌어내고 있습니다. 지금 일부 가족들은 버스 위로 올라가서 시위를 하고 있고, 부모들, 그리고 부모들은 저처럼, 지금 사방으로, 여러 명이서 감싸서 끌어내고 있습니다. 거의 전쟁터와 같은 상황입니다. 여러분이 가셔서 야유라도 보내주시고,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 여러분이 얘기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여러분이 가셔서 이야기 좀 해주십쇼. 가족들이 혼자서 싸우기에는, 너무나 많은 경찰 병력이 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가셔서,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라도, 한 번 외쳐주시기 부탁드립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몇 분 후 또다른 사진 세 장이 올라왔다(http://on.fb.me/1FWq8xx). 사진 속에서는 무표정한 얼굴의 경찰 다섯 명이 파란 패딩 점퍼를 입고 빡빡머리를 한 남성 한 명을 붙잡고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었다. 얼마 전에 삭발하신 유가족 중 한 분이리라는 걸, 아무 설명 없이도 알아챌 수 있었다.

문득 우리 동네 아이들 1권에서 본 문장이 생각나 책을 뒤적였다.

"우리 구역 사람들은 끼드라의 실종과 함단이 관련되어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함무다가 말했다.
"천치 같은 놈들아, 알아듣겠어! 사람들이 끼드라를 죽인 놈이 함단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한다면, 어떻게 살해했을지도 생각해 봐야 해."
"만일 살인자가 알아투프 사람이라면요?"
"살인자가 카프르 알자가리 사람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다른 놈들을 공포로 몰아넣는 데 관심 있지, 범인을 처벌하는 것에는 관심 없다."
"훌륭하십니다!" 아부 사리으가 탄성을 질렀다.
라이시는 화로를 비우고 담뱃대를 바라카트에게 건네며 말했다.
"불쌍한 함단 놈!" 
-우리 동네 아이들 1권, 209쪽


깊은 한숨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저절로.




2. 세상은 점점 나빠져만 가고 있는 게 아닐까?


때때로 생각한다. 세상은 점점 나빠져만 가고 있는 게 아닐까? 수십 번은 완전히 무너졌어야만 맞는 것 같은 이 사회가 오늘도 짐짓 차분하고 뻔뻔한 얼굴로 꾸역꾸역 수명을 연장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세상이 전혀 좋아지지 않고 있다는 증좌는 아닌가? 그래도 예전보다는, 그래도 그때보다는, 이라는 생각은 너무 나이브한 것이지 않나? 김연수소설가가 눈먼 자들의 국가에 쓴 이 문장에 백퍼센트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과연 있나?


인간은 저절로 나아지며, 시간이 흐른다는 이유만으로 역사는 진보한다고 우리가 착각하는 한, 점점 나빠지는 이 세계를 만든 범인은 우리 자신일 수밖에 없다. 오이디푸스의 망각과 무지와 착각은 또한 우리의 것이기도 한다. 


우리 동네 아이들을 읽는 내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던 질문 역시 저것이었다. 이 이야기 속의 '우리 동네' 역시 과연 좋아지고 있는 건가? 후맘이 친형 까드리의 손에 살해당한 이후부터 인간은 이를 끝없이 반복할 수밖에 없는 천형을 지게 된 건 아닐까? 정의와 질서가 세워진 동네란 그것을 유지할 수 있는 지도자가 존재하는 순간에만 가능할 뿐이다. 자발, 리아파, 까심이 대체 누구지? 이야기가 아닌 카페 밖 어디에 대체 그들의 흔적이 있다는 건가? 라는 반문에는 조소가 가득 섞여 있다. "현세에서 우리가 파리라면 내세에서 우리는 흙먼지야"라는 말에는 이번 생에 대한 기대가 먼지만큼도 없는 동네 사람들의 비탄과 절망이 묻어나온다.


같은 이유로, 우리 동네 아이들을 읽는 내내 마음이 아팠다. 쫓겨났던 아드함이 아버지의 부르심을 받고, 후맘을 죽인 후 도망갔던 까드리가 다시 돌아와 동네를 이루고, 자발과 리파아와 까심이 평화와 사랑과 평화와 형제애와 평등을 전파함으로써 동네를 변화시킬 때마저도 그랬다. 그 변화가 찰나에 불과하리라는 걸 너무 쉽게 예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발과 리파아와 까심으로 인해 사람들 사이에서 넘쳐흐르던 기쁨과 희망은 금세 지나가고, 잠시 후의 어두움은 더 짙게 칠해졌으니까.


책을 다 읽기도 전에 너무 힘이 들어서, 김수영의 시를 읽었다.


우리는 무슨 적이든 적을 갖고 있다

적에는 가벼운 적도 무거운 적도 없다

지금의 적이 제일 무거운 것 같고 무서울 것 같지만

이 적이 없으면 또 다른 적ㅡ내일

-적1 중에서




3. 우리 동네 '아이들'에게.


문득 궁금해졌다. 왜 이 책의 제목은 우리 동네 아이들일까. 우리 동네 '이야기'가 더 적당한 것 같은데. 책을 덮고 표지를 바라보았다. 종이를 넘겨 보는 남자, 그 앞에 앉아 있는 어린 아이.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이어지는 이야기. 과거 어른들의 것이면서 현재를 살아가는 나와 미래를 살아가게 될 너의 것이기도 한 이야기. 갑자기 아득해졌다.



이 이야기는 지금 이 순간에도 만들어지고 있는 이야기일 테다. 이것을 끝없이 이어가게 될 이들은 탐욕으로 눈이 멀어 미래를 보지 않는 어른들이 아니라 아이들이니, 나 역시 아이들로서 존재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거다. 자발이나 리파아나 까심 같은 사람은 되지 못할지언정 이드리스나 자끌루트나 하자즈 같은 사람이 되어선 안 되니까.


그러니 아랍의 어느 작은 동네에서 벌어졌다가 이미 종료되어버린 '옛날 이야기'가 아니란 거다. 자발라위라는 절대적인 존재가 가족을 이루고 그 가족들의 후손이 이어지면서 되풀이된 이야기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쓰이고 있는 역사인 게다. 인간이 존재하는 모든 시간의 모든 공간이 곧 자발라위의 동네일 테니, 나의 동네 역시 자발라위의 동네인 게다. 


나지브 마흐푸즈는, 인간이라면, 자신이 존재한 모든 장소의 모든 시간을 기록하고 기억함으로써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으려 노력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이 피묻은 이야기로써 전달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자발과 리파아, 까심에게 전해진 자발라위의 말을 구현해내자고. 절대로, 포기하지, 말고.


힘으로 억압과 맞서 이기고 너희들의 권리를 찾아서 행복하게 살면 된다.

-우리 동네 이야기 1권, 261쪽


'사랑을 받고 싶으면 행동으로 옮기거라.' 그래서 제가 물었어요. '이렇게 약한 제가 무슨 수로 저 수장들을 물리칠 수 있나요?' 그러자 그분은 '나약한 자는 잠재된 자신의 힘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이고 나는 어리석은 자들을 좋아하지 않아.'라고 말씀하셨어요.

-우리 동네 이야기 1권, 356-357쪽


그분은 당신에게 동네 사람들 모두가 그의 자녀고, 그의 재산은 그들 모두의 재산이고, 수장들은 반드시 사라져야 할 사악한 존재라고 말하실 겁니다. 거기다 동네는 틀림없이 그 저택이 증축된 형태가 될 것이라고 말하실 겁니다.

-우리 동네 이야기 2권, 70쪽




4. 그리고 나에게.


물론 쉬울 리 없다. 오늘 포털사이트의 초기화면에는 4월 16일에 맞춰 콜롬비아로 간 그녀가 "가슴을 가진 사람에게 망각은 없다"고 말했다는 뉴스가 버젓이 떠 있었다. 유가족을 광화문 앞에 가두고 찬 땅바닥 위에 누워 노숙하게 하더니 차벽으로 겹겹이 포위하고 무차별적으로 연행하던 경찰은 세월호 추모 집회가 폭력 집회로 변질됐다고 발표했단다. 2008년의 데자뷰 같은 느낌이다. 물론 그 전에도, 그 전에도, 그 전에도, 비슷한 광경이 있어 왔었지. 보네거트는 그랬다, 내 늙어가는 것이 끔찍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끔찍할 줄은 몰랐지, 라고.


그렇기에 나는 또다시 김연수소설가의 문장을 다시 찾아 읽는다. 그가 인용한 테이레시아스의 말을. "그대가 바로 그대가 찾고 있는 범인이란 말이오." 


이 끔찍함과 고통스러움을 배태한 세상이 나의 세상이라면, 나 역시-어느 정도는-그 끔찍함과 고통스러움의 창조자이자 동조자. 사람들이 아주 사소한 실수를 범해도 무자비하게 응징하고, 웃고 농담하고 쳐다보았다고 몽둥이찜질을 가하는 관재인과 그의 첩자들 앞에서 한 마디 말도 못한 채 고개 숙였던 적이 정말 없었던가. 폭력 행위가 난무하고 증오와 공포가 팽배한 험악한 분위기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 있겠냐고, 나는 그와 상관 없고 싶다고 고개 돌린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견디고 버틴다는 게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이라는 걸, 시간이 갈수록 더더욱 실감한다. 그러니 수많은 이들이 잊고 보지 않고 뒤돌아서버리는 거겠지. 나 역시 자주 그러고 말겠지. 그렇게 악령으로부터 잡아먹히고 말겠지. 고개 돌리지 말고, 바로 보고, 기억하고, 잊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일 텐데.


왜 망각은 전염병처럼 우리 동네를 휩쓸고 지나가는 걸까?

-우리 동네 이야기 1권, 4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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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족.


해설을 읽지 않고서도 성경에서 모티프를 따왔다는 걸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자발라위의 권위는 신의 것과 다름 없었으니까. 아드함과 이드리스, 까드리와 후맘, 자발과 리파아의 이야기를 읽으며 만약 이런 얘기가 우리 작가의 손으로 쓰였다면 어땠을까 상상해 봤다. 마흐푸즈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공격받았듯이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엄청난 고초를 겪었겠지.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인물(!)은 리파아였다. 폭력적 권위 대신 사랑을 통해 힘을 가진 자와 싸웠고 약한 자를 위해 살려고 했던 리파아는 예수님을 바로 연상시켰다.



1권의 남은 페이지가 줄어들 수록 두려웠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글로 옮겨져 있을 리파아의 죽음을 확인하기가 겁났다. 리파아의 죽음이 서술된 페이지 앞에서 몇 번을 주저했고, 읽는 내내 한 글자 한 글자가 참 아팠다.


리파아는 절망스러워 물었다.

"왜 저를 죽이려 하십니까?"

바유미가 몽둥이로 리파아의 머리를 가격하자 그는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그의 영혼 깊은 곳에서붵 소리가 터져 나왔다.

"자발라위!"

그다음 쿤피스가 몽둥이로 그의 목을 내리쳤고 이어서 몽둥이찜질이 비 오듯 쏟아졌다. 그의 마지막 단말마의 비명 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손으로 열심히 땅을 파기 시작했다.

-우리 동네 이야기 1권, 424-425쪽


저 부분을 읽던 때의 고통 덕분에 오늘날의 답 없는-_-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야말로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더 커졌다. 저런 죽음을 온몸으로 맞은 그분의 가르침은 당신들이 지금처럼 힘을 가진 자 앞에서 비굴하고 약한 자 앞에서 기세등등하라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당신들이 그분의 이름을 함부로 팔고 다니는것이야말로 신성모독이라는 걸 알아주면 얼마나 좋을까. 아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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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셋 리미티드]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선셋 리미티드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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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셋. 해질녘. 빛이 스러져가는 시간. 세상이 어두워지기 직전.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 

그 이름을 단 열차가 있다. 선셋 리미티드. 시속 130킬로미터로 달리는 급행열차. 그 열차에 한 남자가 자신의 몸을 부딪쳐 산산조각내려고 한다. 플랫폼에 뛰어든다. 투신하기 직전, 누군가 그를 붙잡는다. 아무도 부탁하지 않았는데, 누구도 시키지 않았는데.

오늘 아침에 지하철역에서 선생더러 내 품으로 뛰어들어달라고 내가 부탁한 게 아니잖아. (13쪽)

자신을 죽이려 한 이는 사는 동안 아주 약한 것을 믿고 의지해왔노라고 말한다. 그것들이 다 무너졌다고 느낀 이상, 더 살 마음이 없다고. 포기하는 것만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그에게, 그를 붙잡은 이는 포기하지 말라고 한다. 네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건 이미 잃어버린 것 때문이 아니라 잃지 않으려고 하는 것 때문일 수도 있다고. 포기하느니 차라리 죽고 싶은 것 때문일 수도 있다고.

이제는 포기하겠다고 하는 남자는 백, White이고 포기하지 말라고 붙잡는 남자는 흑, Black이다. 부정적인 감정의 더미 속에서 모든 걸 내려놓고 싶어하는 백인 교수와 진창 속에서도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으며 그를 먹이고 달래는 전과자 출신의 흑인 목사. 다분히 의도적이다. 더 많이 가졌고, 더 많이 대우받고, 인종적 차별의 대상이 되거나 편견 어린 시선을 받는 데서 더 자유로울 이가 죽음과 고통과 절망만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내가 사랑했던 것들은 아주 약했어요. 아주 부서지기 쉬웠지요. 나는 그걸 몰랐습니다. 절대 파괴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요. 한데 그렇지가 않더군요. (27쪽)

비록 네가 내 형제처럼 보이지 않더라도 거기 서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지나치지 못하겠다며 계속 말을 거는 Black과 일어나는 모든 일에 의미가 있는 건 아니라며 자신을 내버려두라고 퉁명스럽게 대꾸하는 White. Black은 White의 삶을 계속 땅 위에 붙잡아두려 하고, White는 그런 Black에게 세상이 얼마나 살 필요 없는 곳인지를 끊임없이 역설한다. 차를 마시고 밥을 먹으며 마음을 가벼이 해보려 하지만, 말과 말은 부딪치고, 마음은 깨어진다. 애원하고 부탁해도 White는 떠난다. 무너진 채로 문간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Black을 한 번 돌아보지도 않고.

누구나 우연히 사람들을 만나고, 그중에 어떤 사람은 곤경에 처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그게 우리가 그 사람을 책임져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8쪽)

아무리 단순한 것이라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면이 있기 마련이지. 아침에 열차 플랫폼에는 많은 사람들이 서 있어. 일하러 가려고 기다리고 있는 거지. 백 번은 그랬을 거야. 어쩌면 천 번인지도 몰라. 그건 그냥 열차 플랫폼일 뿐이야. 달리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할 게 없어. 하지만 그 플랫폼 가장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는 한 통근자에게는 그게 다른 걸 수도 있지. 어쩌면 그게 세상의 맨 가장자리일 수도 있단 말이야. 우주의 가장자리일 수도 있고. (84쪽)

이것은 신에 대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구원에 대한 이야기일지도. 그것도 아니라면 고통에 대한 이야기일까? 어쩌면 그 세 가지가 모두 다 같은 건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때까지, 완전히 바닥에 떨어질 때까지 그를 지켜 보다가, 어떻게든 크게 한 걸음을 떼지 않으면 안 되는(51쪽) 상태가 되었을 때 말을 거는 신이라니. 이것은 구원인가, 아니면 고통인가. 나는 쉽게 대답하지 못하겠다.

사실은 나도 White처럼 생각할 때가 많다. 삶이란 고통과 동의어라고. 오래 살면 오래 살수록 고통이 길어진다고. 늙고, 결리고, 부서지고, 퇴화되고, 삐걱거리고, 아프고, 피흘리고, 산산조각나는 육체적 고통뿐만 아니라 잊고, 잃고, 실패하고, 부딪히고, 갑갑하고, 얽매이고, 벗어나지 못하여 스스로를 죄수로 만드는 정신적 고통까지. 살아 있는 이 순간은 죽어 가는 순간이니까, 때로는 지금 내가 살아 있다는 생각 대신 죽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얼마나 더 죽어가야 죽음에 도달할 수 있을까 궁금해한다. 

그래서 또 자주 생각한다. 나는 오래 버티지 못할 거라고. 나뿐만 아니라 이 세상도 오래 지속되지 못할 것 같다고. 그리고 꿈꾼다. 모든 것이 한 번에 끝나버렸으면. 죽어가는 순간이 길지 않았으면. 

세계의 역사를 읽는다는 것은 유혈과 탐욕과 어리석음의 대하소설을 읽는 겁니다. 그 의미는 아주 분명하지요. 그런데도 우리는 미래가 어떻게든 달라질 거라고 상상합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우리가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 것도 신기한 일입니다. 더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 분명해요. (108쪽)

그렇지만 나는 안다. 이런 내 말이 얼마나 비겁한지를. 조금이라도 더 사는 것처럼 살아보기 위해 지금 이 순간도 싸우고 있는 사람들은 고통을 몰라서 싸우는 것인가, 고통스럽지 않아서 싸우는 것인가. 그들이 도달할 곳 역시 패배라면, 질 것이 뻔한 싸움을, 유혈과 탐욕과 어리석음에 조금이라도 덜 잡아먹히려고, 그토록 치열하게 하고 있는 것인가. 죽은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고, 철탑 위에 올라가고, 굴뚝 위에서 밥을 먹고, 차가운 땅바닥 위에 세운 천막을 지키고, 송전탑이 들어설 자리에 당신의 몸을 사슬로 묶고, 자신을 쓰레기처럼 질질 끌고 가려는 이들의 손아귀에 붙잡혀서도 저항하고, 두들겨 맞아도 계속 소리지르고, 말하고, 또 말하고, 또 말하고 있는 그들은, 살아 있는 것인가 죽어가고 있는 것인가.

삶은 긴 가뭄 같거나 긴 빗속 같다. 하지만 그 가뭄이 매일 똑같지도 않고, 그 빗줄기가 매일 똑같지도 않다. 잘 안다. 그래서 나 대신 싸우고 있는 그들에게 감사하고, 그들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낀다. 이것이 나의 삶이다.

그냥 긴 가뭄 같은 거 말이야. 어쨌거나 내 말은 말이오, 설사 겉으로는 그렇게 보인다 해도, 그래도 해가 매일 똑같은 개의 궁둥짝을 비추는 건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한다는 거요. 내 말이 이해가 되쇼? (43쪽)

나의 삶 역시 White의 말처럼 고통의 유대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White에게 그 고통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누군가가 단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가 무無의 희망에 매달리게 된 건 어쩌면 그의 곁이 무無였기 때문은 아닐까. 아니, 정말 이건 바보같은 생각이지만, Black의 작은 아파트를 뛰쳐나간 White의 마음 속에 아주 미미하게라도 균열이 일어나진 않았을까. 자신이 나간 뒤에도 "내가 거기 있을 거야"(138쪽)라고 되뇌이는 Black의 목소리가, White의 머릿속 깊이 자리잡고 있던 무無의 희망에 금을 내진 않았을까.

비록 Black은 White를 붙잡지 못했지만, 그래서 무릎을 꿇고 몸을 앞뒤로 흔들며 울 수밖에 없었지만, 나는 Black이 실패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바보 같았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어쨌거나 그는 알고 있으니까. 두 번 다시 자신에게 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자신이 신의 말을 충실하게 지킬 거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러면 되는 거다. 유대는, 연대는, 함께 한다는 것은 위대하니까. 결국 인간은 함께 해야 하고, 지금 싸우고 있는 이들이 나를 대신해 싸워주고 있음을 알아야 하고, 그러니 함께 싸워야 하고, 그래서 살아야 한다는 걸, Black은 알고 있을 테니까.

댁이 말하는 건 고통의 유대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133쪽)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 아니면 죽는다. (117쪽)


이 책 덕분에 나를 대신해 싸우고 있는 수많은 분들을 떠올릴 수 있어 기뻤고 또 슬프다. 수많은 곳에서, 고통 속에서도 삶을 계속해가고 있는 그들의 시간을 존경한다. White처럼 고통의 유대조차 갖지 못한 채 외떨어진 누군가가 내 주위에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겠다고 생각한다. 더 이상 나아질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확신 속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는 이들이 적었으면 좋겠다고 소망해 본다. Black의 이 말이 맞다, 인간이라면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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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모노프]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리모노프
엠마뉘엘 카레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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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전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몇 권 읽지도 않았다. 나이를 먹어서도 그랬다. 남들이 좋다고 칭찬하면 '분명 나쁜 점이 있을텐데…'하며 눈에 불을 켜는 못돼먹음을 기본 옵션으로 갖고 있었던지라 긍정적 측면을 중심으로 실존 인물의 삶을 짚어나가는 글을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입을 삐쭉거리곤 했다. 지루했다.


그뿐인가. 러시아 역사에 대해선 아는 게 없다. 파시스트는 인간에게 함부로 하면 안 되는 심한 욕이라고 생각한다. 민족주의는 영 맞지 않는 옷 같다. 엠마뉘엘 카레르의 책은 겨우 한 권 밖에 못 읽어본데다가 그 한 권도 끝까지 못 읽었고 크게 재미있다고 느끼지도 못했다. 이러니, 리모노프를 펼쳐들기 전 내 마음이 가벼웠을 리가 없다. 리모노프를 읽기에 적절치 않은 요건을 이리도 두루두루 갖고 있으니. 심지어 책은 또 왜이렇게 두꺼워? 마음에 드는 건 표지 하나 뿐이었다. 보기만 해도 신맛이 입 안에 고이는 레몬과 수류탄의 조합. 이것이 '리몬카'에서 나온 디자인이겠구나 하는 건 나중에 깨달았지만.


'그래도 어디 한번 읽어나 보자'였던 마음이 조금씩 변한 건 프롤로그를 거의 다 읽어갈 때쯤이었다. 리모노프가 엠마뉘엘 카레르에게 세면대에 대한 일화를 얘기해주는 장면, 그러니까 감옥에서 철제 세면대를 보며 과거를 회상하는 부분을 맞닥뜨렸을 때, 딱 집어 말하자면 여기서.


에두아르드 리모노프처럼, 볼가 강변의 강제 노동 수용소에 수감된 일반범의 세계와 필립 스탁의 디자인 속에서 유영하는 멋쟁이 작가의 세계, 이토록 이질적인 세계뜰을 두루 경험한 사람이 과연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을까, 하고 그는 생각했다. 아니, 틀림없이 많지 않아, 라는 결론에 이르는 순간 그는 자긍심을 느꼈다. 그 심정, 나도 이해한다. 바로 그 때문에 내가 이 책을 쓰려는 것이다. (37쪽)


이질적인 세계를 두루 경험해 본 이의 자신만만함 속에서 나는 자신이 그 중 어디에도 완전히 속한다고 느끼지 못하고 떠도는 이의 그림자를 느꼈다. 그 그림자는 자주 나의 것이기도 했기에, 왠지 나는 그 스킨헤드 민병대의 우두머리인 몹쓸 파시스트(라니, 어감은 정말 무시무시하다!)이자 우크라이나의 깡패로 출발해 소비에트 언더그라운드의 아이돌, 맨해튼의 거지, 억만장자의 집사를 거쳐 파리의 인기 작가로, 발칸 반도를 헤매던 사병으로, 그리고 이제는, 공산주의 붕괴 이후 혼란기에 청년 무법자들의 당을 이끄는 카리스마 넘치는 늙은 보스로 살고 있다는 그 에두아르드 리모노프의 이야기가 읽고 싶어져 버렸다. 갑자기 불현듯이 우르르쾅쾅쾅쾅!



죽음조차 그는 두렵지 않았다. 무명으로 죽는 게 괴로울 뿐이었다. (201쪽)

어떤 사람은 자신이 남들보다 유명하지 않다는 것 때문에 고통받는다. 어릴 때는 나도 그랬다. 다른 사람들보다 튀고 싶어했던 것 같고, 남들 앞에 나서는 걸 좋아했던 것 같고, 리더 같은 역할을 잘 한다고 평가받았던 것 같다. 지금은 나의 가장 큰 욕망이 바틀비처럼 상대의 모든 말에 I would prefer not to라고 대꾸한 후 총총히 사라지고 싶어하는 욕망이라는 걸, 그러니까 내가 노출과 외양 대신 고독과 은둔을 익숙히 여기는 엠마뉘엘 카레르와 가까운 인간이 되었다는 걸 잘 알지만.


그래서 나는 이 불같은 성미에 청개구리 같은 친구(269쪽)의 순수한 욕망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잘나가고 싶고, 잘나가는 사람들 사이에 들어가고 싶고, 그래서 잘나가는 사람들 사이에 들어가면 그들보다 더 잘나가고 싶고, 그들과 다르고 싶고, 그렇지만 막상 더 잘나가면 허무하고, 왠지 이게 아닌 것 같고, 그래서 딴 길로 가버리는 청개구리. 그것이 청년 에두아르드의 삶 아니었을까. 그런데 이사람 도대체 언제 진짜로 잘나가게 되는 거지? 


안나의 집주인이 되었을 때나 엘레나와 함께 큰 뜻을 품고 러시아를 떠났을 때는 금방 '청년천재문호 에두아르드'의 이야기가 펼쳐질 것만 같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엘레나와 헤어지고 엉망으로 살다가 제니를 만났다 헤어지고 스티븐의 집사로 살았던 에두아르드의 이야기는 버스 안에서 끽끽거리고 웃게 해 줄 만큼 재미있었지만, 나는 조금씩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226쪽이나 읽었는데 아직도 엄청나게 유명해지지 않았으니 어쩌면 좋아! 이 유명해지지 않으면 절대 안 되는 이 남자가!!



강하고 못된 그가…모든 민중의 착한 무기력함을 지켜 주기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하고 싶었다. (296쪽)

이 책의 매력 중 하나는 그의 화려한 성공담이 줄줄 나열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뒷표지에 쓰인 리모노프의 인생 요약 중 '문단의 풍운아로 뉴욕과 파리를 휘어잡다가'에 해당하는 부분은 '미국 이민 길에 올라'에 해당하는 부분보다 많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성공한 리모노프는 조금 알려진 작가에 만족하지 않고 정말 유명한 작가가 되겠다는 야심에 불타고 있었으니까. 달콤한 맛에 취해 있을 여유 따위 없었던 거다. 그사이 강하고 음울하다고 믿었던 고국 소련은 급격히 변해가고, 적군 사병의 군복 단추가 놋쇠에서 플라스틱으로 바뀐 것을 보며 군인들이 이렇게 조악한 고국을 볼썽사납게 입고 다니는 나라의 국민은 자신감을 상실한 국민이며, 더 이상 주변의 존경도 받을 수 없는 국민(269쪽)이라며 기분 나빠하던 리모노프는 1989년 12월, 소련으로 돌아간다.


그 이후 리모노프의 삶은 소련의 현대사와 맞물려 돌아간다. 고르바초프와 옐친, 푸틴으로 권력 구도가 이어지는 와중에 등장하던 러시아의 수많은 정치인들은 낯설었지만, 자본주의의 폭격과 무시무시한 독재정치로 쑥대밭이 되어가는 나라 꼴은 어디서 보던 거랑(-_-) 너무 많이 비슷해서 기분이 꽤 묘했다. 특히 <충격 요법>의 등장 이후에 대한 부분. 


지폐를 포대로 들고 다니면서 늘씬한 미녀들을 정부로 거느리는 포악하고 상스러운 <신러시아인>이라는 인물 유형이 현대적 신화로 등장했다. (중략) 수완 좋은 1백만 명이 <충격 요법> 덕에 벼락부자가 되는 사이 나머지 1억 5천만 명의 꽁다리들은 빈곤에 시달렸다. 물가는 지속적으로 올랐지만 임금은 물가 상승을 따라가지 못했다. (360쪽)


거물들은 콤비나트나 천연자원 매장지를 놓고, 피라미들은 가판대나 시장 좌판을 놓고 서로 혈투를 벌였는데, 손바닥만 한 가판대든 손바닥만 한 시장 좌판이든 무조건 <지붕>이 필요했다. 이것은 난립 중이던 경호업체들에 붙여진 이름으로, (중략) 갈취를 일삼는 강도 집단과 하등의 차이가 없었다. (362쪽)


기껏 열에 한 명만 총을 든 시위대를 기다리는 것은 결사 투쟁의 대오로 서 있는 오몬 부대였다. 오몬들은 버스들이 도착하기 무섭게 발포했고, 곤봉을 휘두르며 돌격해 왔다. 곤봉으로 시위자들을 가격하고 총을 난사하면서 전진해 왔다. 살육이었다. (386쪽)


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정부가 독재를 자행하며 국민들의 피를 빨아먹고, 이를 견디지 못한 이들이 반란을 일으키자며 '극우민족주의파시스트집단'의 형태로 시위를 하다가 정부군에 의해 짓밟히는 모습. 폭력적인 정부와 극우파시스트 중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무엇이 진보이고 무엇이 반동인지 누구도 구별할 수 없는 이 상황에서, 리모노프는 끝까지 약한 자들의 옆에 서 있으려고 했다. 그것이 내가 그에게 파시스트라는 딱지를 붙일 수 없는 이유이다. 물론 엠마뉘엘 카레르는 '에두아르드라는 파시스트'라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ㅋ


에두아르드라는 파시스트한테 한 가지는 인정해 줘야 한다. 그는 과거나 지금이나 항상 소수의 편에 서 있다. 뚱뚱한 사람들보다는 마른 사람들, 부자들보다는 가난한 사람들, 수두룩하게 있는 착한 사람들보다는 당당한 개차반들의 편이다. 갈팡질팡하는 듯 보이는 인생 역정이지만 그는 언제나, 정말로 언제나, 그들의 편에 서는 일관성을 보여 주었다. (436쪽)



그가 늘, 용기 있게 어린애처럼 고집스럽게 되고자 했던 영웅 (472쪽)

그러니 정치인 에두아르드의 삶이 평탄할 리 없다. 출마를 하고(당연히 낙선하고) 전쟁에 뛰어들고(심지어 사람도 죽이고!) 당을 없애라는 정부의 방침에 "합법적인 길을 막으면 우린 다른 길을 가겠다는 겁니다."라고 대꾸한 후 정치적 탄압을 당하고 중앙아시아를 떠돌고 알타이의 오두막에서 갑자기 체포당하고(심지어 대령에게 스카우트 제안도 받고!!) 그리고 그리고 테러리즘, 무장 단체 결성 및 가입, 총기의 불법 취득과 운반과 판매 및 저장, 극단주의 활동의 선동으로 재판을 받고 옥살이를 하고…

하지만 나에게는 '정치 투사로서의 파란만장한 삶'보다 감옥에서 에두아르드가 보여준 '좋은 인간으로서의 모습'이 더 인상 깊었다. 이 때의 에두아르드를 묘사하는 엠마뉘엘 카레르의 시선이 가장 호의적이지 않나 싶기도 하다. 그러니 그가 감옥에 있을 때를 리모노프의 인생의 절정기였을지도 모르는 때, 진정으로 위대한 인간이자 영웅에 가장 근접했던 때라고 설명한 거겠지. 너무 이상적이었다면 좀 짜증스러웠겠지만, 마흔 살 차이가 나는 애인 나스치아에게 자신을 떠나라고 말하지 못하고(심지어 그는 출소 후 나스치아와 바로 헤어진다) 나타샤가 죽었다는 비보를 듣고 자신의 형량 선고 소식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그의 모습은 '완전히 이상적인 인간'과는 또 좀 멀어서, 짜증나지 않았다.

에필로그에서 에두아르드가 자신의 입으로 말한 것처럼 그의 삶은 부분적으로 개떡 같을지도 모른다. 500페이지 넘게 서술한 주인공의 삶이 결국은 '개떡'이라니, 엠마뉘엘 카레르가 독자들 입장에서 실망스러운 결말이 될 거라고 걱정할 만 하다. 하지만 에두아르드의 그 말이 진심은 아니었을거라고 나는 믿고 싶다. 나르시스트이고 에고이스트인 그가 진심으로 자신의 삶을 개떡에 비유했을 리 없을 거라고. 평온한 노년이나 은퇴 대신 중앙아시아에서 넝마를 걸친 채 모두 다 내려놓은 사람들로 생을 마치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는 그가, 그럴 리 없다고.

그러므로 이 책의 결말은 하나도 실망스럽지 않다. 잘나고 싶었고, 유명해지고 싶었고, 강하고 싶었고, 그래서 많이 갖고 많이 누리고 싶어했던 에두아르드 베니아미노비치는 재산도 이름도 없이, 모두 다 내려놓은 사람들로서, 동전을 던져 줘도 고맙다는 인사 한 마디 없는, 느리고 격렬한 도시 안 사원들의 높은 담장 및 그늘에서, 왕처럼, 늙어가는 누군가의 모습을 편안하게 떠올리고 있으니까. 그게 자신의 미래여도 그는, 아무렇지 않다고 여기고 있으니까. 그걸로, 충분히, 감동적이니까.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사족 1. 소설을 다 읽은 후 너무나 당연하게!! Eduard Limonov를 찾아보았다. 여러 페이지가 나왔는데 그 중 두 개만 링크해 본다. 하나는 리모노프와 격렬하게 사랑했던 나타샤에 관한 페이지 : http://ex-soviet.blogspot.kr/2006/11/natalia-medvedeva.html 다른 하나는 리모노프의 사진이 청년 시절부터 노년 시절에 이르기까지 쭉 올라와 있는 페이지 : http://www.tout-sur-limonov.fr/222318826 리모노프의 연인이었던 여인들의 얼굴도 모두 볼 수 있고 소설에서 언급된 엘레나와 리모노프의 사진도 올라와 있다. 리모노프의 누드 사진도 ;ㅂ; 엘레나와 리모노프의 '그' 사진만 올려 보면,


설마 음란물로 신고당하진 않겠지;



사족 2. 리모노프의 표지는 소설리스트(www.sosullist.com)의 2015년 세 번째 표지갑으로 선정된 바 있다. (표지갑이란 그 주에 나온 소설 중 가장 표지가 훌륭한 책을 뜻한다) 디자이너는 Fallk Nordmann이라는 분. 소설리스트에 링크된 그분의 웹사이트에 가 보니 작업하신 여러 책 표지가 올라와 있었다. 거기서도 리모노프는 눈에 띄었다. 웹사이트 주소는 http://falknordmann.de/illu/buch/falk-nordmann-buch.html


사족 3. 박노자 씨의 비굴의 시대에 리모노프의 활동을 국내 NL과 비교하는 부분이 있었다(리모노프를 다 읽은 후에 알았다. 읽어봐야겠다). 박노자 씨는 '두긴이 당을 떠난 뒤로 민족볼셰비키당은 한국이나 남미나 중미의 좌파 민족주의의 전형에 가까워졌다'며 에두아르드가 대통령 선거 출마 때 내걸었던 공약을 제시하고, '지금 러시아의 여러 반독재 민주화 운동 세력 중에서는 리모노프의 무리야말로 가장 대중적이고 서민적이며 열정적이고 자기희생적'이라고 평가했다. 오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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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너리 오코너 - 오르는 것은 모두 한데 모인다 외 30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12
플래너리 오코너 지음, 고정아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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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작가가 좋아하는 소설을 추천했을 때는 기분이 좋고, 좋아하지 않는 소설을 추천했을 때는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문제는 선후가 바뀌었을 때, 그러니까 좋아하는 작가가 좋다고 한 소설을 읽을 때다. 그분이 좋다고 했으니까 나도 이 책이 좋다고 해야 할 것 같은데, 이 책이 재미있었다고 해야 할 것 같은데, 뭔가 대단한 의미를 찾을 수 있어야 할 것 같은데…하는, 참으로 이상한 부담감에 나도 모르게 압도당하는 것이다-_- 게다가 그런 책들의 대부분은 끝까지 읽지 못하게 되니, 더 슬픈 일이다.


『플래너리 오코너』를 읽기 전에도 그랬다. 이 책은 소설리스트(sosullist.com)의 '금요일의 리스트'에서 이 주의 책으로 당당히! 선정된 책이다(그 주의 '표지갑'에도 선정됐다ㅎ). 김연수소설가님을 비롯한 여러 소설리스트의 필진들은 이 책을 '2014년의 소설 베스트 3' 중 한 권으로 꼽았다. 정이현소설가는 이 책이 나오기 전에 출판된 플래너리 오코너의 소설집을 극찬했다(팟캐스트 낭만서점에서). 



믿을 만한 작가들이 이렇게까지나 입을 모아 칭찬한 책인데, 당연히 나도 '참 좋은 책이었어요'라고 말할 수 있어야 되는 거 아닌가. 그렇지 않으면 틀린 거 아닌가. 만약에 틀려버리면 어쩌나. 이번에도 끝까지 못 읽으면 어쩌나…하면서 책 표지를 덮었다 폈다 한 게 삼일쯤. 어쩌긴 뭘 어째, 어쩔 수 없는 거지 뭐!! 하며 '제라늄'부터 읽기 시작했고, 두 번째 소설인 '이발사'를 다 읽어갈 때쯤 이 책이 마음에 들어 버렸다. 성급하게도.


하지만 이 소설을 읽는 시간 동안, 나는 자주 불편했고 자주 머리칼이 쭈뼛 섰다. 소설 속 인물들의 모습에서 내 얼굴이 계속 비쳐보였기 때문이다. 그 모습들은 어딘가 일그러지거나 균형을 잃은 것이어서 나는 자꾸만 부끄러워졌다. 깜둥이 옹호자냐는 질문을 아무렇지 않게 던지던 이발사와의 바보 같은 대화를 계속 되새기면서 '자신이 준비가 되어 있었다면 대응했을 말들'을 밤새도록 떠올려 보는 '이발사'의 레이버, 어머니가 들으면 머리를 후려갈길 말을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자신에게 들려 주며 폭소하는 '칠면조'의 메이슨, 뒤집혀진 자동차 밖으로 나가서는 신이 난 목소리로 "사고가 났어요!"라고 소리치다가 절뚝거리며 차에서 나오는 할머니를 보고서는 "하지만 아무도 안 죽었어."라며 실망하는 '좋은 사람은 드물다'의 준 스타, 계단 꼭대기로부터 곤두박질쳐 중간 즈음에 거꾸로 뒤집힌 노인을 그대로 두고 지나간 '심판의 날'의 '뉴욕 사람'…내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내 모습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곤혹스러웠다.



그 중에서도 가장 등골이 서늘했던 것은 도덕적 우월감으로 타인에게 친절을 베푸는 인간들이 인정사정없이 파헤쳐져 있는 것을 보아야만 헀을 때였다. 책 속의 구절을 빌리자면, 이런 인간들 말이다.


어머니의 행동은 한결같았다. 그것은 좋은 의도로 세상의 미덕을 우롱하는 것, 미덕을 너무도 생각 없이 추구해서 거기 힌 모든 사람이 바보가 되고 미덕 자체도 빛을 잃게 만드는 것이었다.

-'가정의 안락' 중, p.516


친절한 말투와 표정으로 선의에서 비롯해 보이는 행동을 한 후에 나 지금 지나치게 친절했어, 사실은 이러고 싶지 않았는데…하고 깨달을 때가 있다. 하고 싶지 않았던 행동을 적극적으로, 심지어 친절하게 해치워 버린 내 마음의 바닥에 '나는 이 정도의 친절을 아무렇지 않게 베풀 수 있는 사람이다'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는 생각이 들면 두려워진다. 남에게 착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는 욕망이 크지 않은 내게 가식적인 행동을 했다는 죄책감은 거의 없다. 남이 나를 어떤 사람으로 보든지 말든지 나는 선하고 정의로우니까 상관없다는 도덕적 우월감이 내겐 더 가깝고, 그렇기에 더 무섭다. 


플래너리 오코너의 작품을 읽는 내내 이런 종류의 공포를 맞닥뜨려야만 했다. 조금도 기쁘지 않은 표정과 말투로 '불쌍하고 배고픈 아이들'이 찾아와 기쁘다고 말해 놓고는 그 아이들이 자신에게 끼칠 피해와 불편함 때문에 어쩔 줄 몰라 하던 '불 속의 원'의 코프 부인을 보면 너그러운 척 친절을 베풀고는 후회했던 기억이 떠올랐고, 총을 든 부적응자를 "당신은 좋은 핏줄이에요! 숙녀를 쏠 사람이 아니에요!"라며 다독이다가 "너도 내 아기들 중 하나야. 내 새끼들 중 하나!"라는 말을 내뱉자마자 총에 맞아 죽은 '좋은 사람은 드물다'의 할머니를 보면서 다른 이의 아픔이나 상황을 공감하는 척, 이해하는 척 하다가 진실을 알아챈 상대의 반응에 난감했던 경험이 떠올랐다. 



"주변을 보세요, 지금 어머니가 사는 곳이 어디인지"

-'오르는 것이 한데 모인다' 중에서, p.547


31편의 소설을 다 읽고 난 지금도 여전히 마음이 편하지 않다. 플래너리 오코너라는 이름을 떠올릴 때 마냥 기분이 좋지만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앞으로 이 책을 찾아 읽게 되리라는 예감이 강하게 드는 것 역시 그 때문이다. 지금 내 모습이 어떤지, 얼마나 나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있는지, 얼마나 남을 속으로 깔아뭉개고 있는지, 얼마나 겁먹고 있으면서 안 그런 척 허세를 부리고 있는지, 똑바로 고개를 들어 직시하라고 뒷통수를 한 방 갈겨준 게, 이 책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자주 읽을 생각이다. 길게 시간을 두고 한 편씩 천천히 다시 읽을 생각이다. 다시 읽을 때는 어떤 인물이 또 나를 부끄럽게 만들까 싶어 기대나 설렘 대신 두려움이 먼저 일어나지만, '진짜 현실'에서 뒷통수를 맞는 것보다야 플래너리 오코너를 읽으며 부들부들하는 게 낫겠지. 아직 출간되지 않은 것 같은 그녀의 장편소설과 전기도 곧 읽을 수 있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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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권수연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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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떤 팟캐스트에서 이런 얘기를 들었다. 한 가수가 공연을 하러 갔는데 공연장에 어려 보이는 관객들이 많더라고. 몇 살인지 물어봤더니 열 다섯 살이란 대답이 돌아왔다고. 그 대답을 듣고 나니 이 관객들이 이제까지 살아온 만큼을 더 살아도 지금 내가 살아온 것보다 많이 산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도대체 나는 얼마나 오랫동안 살아온 건가 싶어 아찔했다고. 


지평을 읽는데, 이상하게 그 얘기가 자주 떠올랐다. 그와 몇 살 차이나지 않는 나도 자주 내가 너무 오래 살아왔구나 싶어 아찔함을 느끼기 때문일까. 희미해진 날짜들, 장소들, 얼굴들, 소리들, 냄새들이 이 긴 시간 속에 묻혀 있겠지. 그만큼의 날짜들과 장소들과 얼굴들과 소리들과 냄새들을 앞으로도 기억해야 할 지 모른다는 게 문득 버겁게 느껴지곤 한다.



2. 소설 속의 시간은 잔뜩 주름져 있다. 주름 사이사이에는 잊었던 이름들이 묻혀 있다. 메로베, 즐거운 도당, 세르슈 미디 가, 리슐리외 대행사, 세비녜 호텔, 이본 고셰, 꼬맹이 페터…수많은 별의 파편과 부스러기들이. 질질 늘어난 현재는 잔뜩 구겨져 있다. 뚝뚝 토막난 과거는 현재 주변에 흩어져 있다. 보스망스는 수첩에 메모를 하며 과거의 조각들을 모은다. 될 수 있었거나 되지 못한 것들을 생각하며 현기증을 느낀다. 너무도 많은 길이 나타나는 까닭에 어디를 골라야 할지 몰라 당황하게 되는 그런 시기를 떠올린다. 지금의 내가 때때로 열 넷의 나를, 열 일곱의 나를, 스물의 나를, 되새기는 것처럼. 그 때 내 주변에 있었던 이름들을 찾으려 애쓰는 것도 어쩌면 그와 같을까?

 

그리고 보스망스는 마르가레트를, 마르가레트 르 코즈를, 찾아 헤맨다. 한때는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자취를 찾아 다닌다. 빨간 머리에 매정한 눈빛을 가진 여자와 환속한 신부의 꼴을 한 남자를 피해 다니던 자신이 부아야발에 대한 두려움으로 몸서리치던 그녀와 거리를 걷고, 페른 교수의 집에 가고, 푸트렐 박사와 점심을 먹고, 페터와 더불어 산책을 하던 그 때를. 그녀와 함께 있다는 사실에 살아갈 힘을 얻던 그 때를. 나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들의 이름을 알면 위험에 맞설 수 있을 것이라는 용기가 생겨나던 그 때를.



3. 삶은 녹록치 않다. 그 모든 잘못된 만남을 잊을 수 있을 것이라는 보스망스와 마르가레트의 믿음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생의 한 교차로에, 보다 정확하게는 미래를 향해 도약할 수 있는 한 경계에 도달한 느낌으로 자신들은 파리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산속에, 앙가딘 어디쯤에 들어와 있다고 느꼈던 그들의 평온함은 일순간 깨어진다.


마르가레트는 그에게 연거푸 손을 흔들던 그날 밤 후 지평 너머로 사라졌고, 보스망스 역시 어수선한 시절을 살아가며 마르가레트를 찾지 못한다. 그러니 조만간 그녀와 새로운 지평을 찾아 파리를 떠날 수 있을 거라고, 두 사람은 자유롭다고 마르가레트를 설득하던 보스망스의 생각은 틀린 것이었다. 보스망스의 지평에서 마르가레트는 사라졌다. 스무살에 가까웠을 그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들 앞에 놓인 현재는, 왜그리도 그들에게 가혹했을까.


그러니 누군가는 보스망스를 어리석다고 할 것이다. 과거에 얽매여 방황하고 있다고 손가락질할 것이다. 서로를 사랑했다고 말하지도 않고, 마르가레트가 자신의 연인이라고 말하지도 못하는 보스망스가 왜 마르가레트를 찾고 있는지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마르가레트는 보스망스 앞에 놓여진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에 불과했었고 그 가능성은 현실의 옷을 입지 못했으니, 결국 보스망스에게 마르가레트는 한 때 스쳐 지나간 수많은 사람 중 하나일 뿐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4. 어쩌면 시간의 문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지나온 길을 돌아봤을 때, 박제된 과거를 비집고 나온 누군가의 이름을 발견한다면, 그 이름과 맞닥뜨린 순간 가만히 서 있기만 하면 보이지 않는 벽을 서서히 통과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든다면, 일종의 희망이, 먼 지평을 향한 탈주로가 남아 있는 건지도 모른다고. 과거의 기억에 묶여 지평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된 것이 아니라, 긴 시간 동안 살아남은 기억 그 자체가 어쩌면 나의 지평이자 미래인지도 모른다고.


그러므로 보스망스는 과거에 얽매여 어리석은 방황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고, 믿는다. 그의 삶은 마르가레트를 찾을 수 밖에 없는 것이었을테니까.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하던 마르가레트를 기억 속 어딘가에서 끄집어내 찾아낸 사람은 결국 보스망스였고, 수많은 시간이 흐른 뒤 보스망스는 자신이 떠나온 그 장소 그 지점으로 같은 시간 같은 계절에 돌아온 것이니까.



5. 로드 밀러의 안부를 가지고 마르가레트의 서점을 방문한 보스망스는 어떻게 되었을까. 반은 깨고 반은 잠든 듯한 상태로 부유하듯 걸어 가는 보스망스의 뒷모습을 상상해 보며 생각했다. 밤늦도록 문을 열어둔다는 마르가레트의 서점이, 보스망스와 마르가레트가 젊은 날 함께 있던 구 사블리에 출판사의 서점 같은 모습이었으면 좋겠다고. 그들이 태어나던 그해에도 공원 저 구석 폐허 사이에서 꽃을 피웠던 라일락의 향기가, 그들의 재회에 가득했으면 좋겠다고.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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