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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 박람강기 프로젝트 3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안현주 옮김 / 북스피어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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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자신(만)의 탐정이 있다.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내 인생 최초의 탐정 역시 셜록이었다. 아빠가 매달 사다 주시던 보물섬의 '셜록 홈즈 만화'에서 처음 그를 만났다. 바스커빌가의 개보다는 붉은 머리 연맹과 얼룩끈의 비밀이 재미있었다. 이후 친구네 집에서 어린이용 셜록 홈즈 시리즈를 발굴! 신나게 읽었다. 친구는 뤼팽을 추천했지만(그때는 '루팡'이었지) 왠지 우아한 뤼팽보다는 뭔가 신경질스러운 셜록이 좋았다. 그러다 두 번째 탐정을 만난 것이 초등학교 5학년 때. 네 살 위인 사촌언니가 읽던 해문출판사의 애거서 크리스티 시리즈 속 마플 아주머니에게 매혹되었다. 셜록이나 포와로처럼 잘난 척 하지도 않고, 말하는 것도 하는 행동도 탐정같지 않게 수더분한 것이 이색적이었다. 한동안 또 신나게 마플 여사가 나오는 해문출판사의 빨간책을 모았더랬다. 언제까지? 필립 말로를 알기 전까지…

2006년 겨울, 침대 위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빅 슬립과 하이 윈도와 안녕 내사랑…을 순서대로 읽으며, 나는 필립 말로에게 완전히 매료당했다. 아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빅 슬립의 첫 장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내가 그에게 속수무책으로 빠질 것임을 확신했다. 이토록 강하고 정의롭고 무뚝뚝하고 늠름하면서도 섬세하고 따뜻하고 착하고 수줍은 남자라니. 반해버리기에 완벽한 조건이었다. 더불어 이렇게 멋진 인물을 만들어내신 레이먼드 챈들러 선생님(!!)을 사모하게 되었다. 그 겨울 내내는 물론이고 지금도 필립 말로가 툭툭 던져대는 '막말'을 읽을 때마다 육성으로 빵빵 터지는 나이니, 챈들러 선생님이 쓴 편지들을 (다른 곳도 아닌) 북스피어에서 책으로 엮어 낸다는 소식에 가슴이 얼마나 쿵쾅쿵쾅 역시나 신나게 뛰던지 두말하면 잔소리.



때로는 소리 없이, 자주 소리 내어, 낄낄낄.

책을 만드는 동안 많이 신났고 때때로 짜릿했다는 편집자의 후기를 가장 먼저 읽었다. 낄낄 웃었다. 이 책의 전반적인 내용과 레이먼드 챈들러라는 인간에 대한 번역자의 짤막한 소개를 그 다음에 읽었다. 챈들러의 불평 섞인 자기 소개가 실려 있었다.


"사람들은 도대체 왜 이력 따위를 원하는 걸까요? 그게 왜 중요해요? 그리고 왜 작가가 한 인간으로서 자신을 논해야만 합니까? 그저 지루할 뿐인 것을. 나는 일리노이 주의 시카고에서, 너무 오래전이라 아무도 몰랐으면 좋겠다 싶은 언젠가 태어났습니다." (1950년 11월 10일, 챈들러가 자신의 이력을 알려 달라는 출판사 측에 보낸 편지)


또다시 낄낄 웃었다. 두근두근 가슴이 뛰는 걸 더불어 느꼈다. 넘겨 본 목차는 다섯 장이었다. 1장은 문학에 대한 챈들러의 생각을, 2장은 다른 작가들에 대한 챈들러의 평가를, 3장은 할리우드에서 챈들러가 겪고 느낀 것들을 다른 이들에게 편지로 적어내려간 것. 그리고 4장은 필립 말로, 5장은 그의 일상에 대한 편지들이었다. 순서대로 읽으면서 빅 슬립을 처음 읽었을 때처럼 읽다가 웃다가 진지해졌다가 또다시 웃다가 금세 또 진지해졌다가를 반복했다. 어쩌면 더했을지도 모른다. 필립 말로라는 허구의 남자가 허구의 이야기를 이끌어 가던 것보다, 레이먼드 챈들러라는 실존 인물이 자기 주변 사람에게 편지로 주저리주저리 속내를 털어놓으며 툴툴대는 게 훨씬 더 솔직한 내용이었을 테니까.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잘났든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엄청난 말들을 톡톡 내뱉는 남자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내용의 묵직함과 표현의 가벼움이 어찌나 조화로운지, 경탄스러울 지경이었다. 말도 못하게 차갑고 무뚝뚝하고 인정사정 없으며 짓궂기까지 해 도저히 웃지 않고는 못 배기겠더라. 예를 들면 뭐 이런 거?


스스로 평론가라고 부르며 거들먹거리는 트집쟁이들


그 사람(제임스 케인)은 내가 싫어하는 모든 요소를 다 지닌 작가예요. '얌체'이자, 기름때 낀 작업복을 입은 프루스트이자, 보는 사람 없는 널빤지 울타리 앞에 분필 하나를 들고 선 지저분한 꼬마예요. 그런 사람은 문학계의 쓰레기입니다.


(히치콕에게 쓴 편지에서) 당신의 길고도 성공적인 경력에서 단 한번만이라도 정상적이고 탄탄한 이야기를 각본에 넣기를, 그리고 흥미로운 카메라 연출이라는 명목으로 그 타당성을 조금이라도 훼손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영화란 대체로 그 이상주의조차 거대한 거짓에 불과한, 타락한 공동체의 산물입니다. 그 허세, 가짜 열정, 끝없는 음주, 돈을 둘러싼 끝없는 분쟁, 전능하신 에이전트, 거들먹거리는 거물들(그리고 일을 벌여 놓고는 거두지 못하는 그들의 전형적인 무능함, 반짝거리는 황금을 몽땅 잃고, 사실은 원래부터 그랬지만 자기들만 몰랐던 '아무것도 아닌' 상태가 되지 않을까 하는 끝없는 두려움, 헐뜯는 기술, 그 빌어먹을 개판이 이 세계를 갉아먹어요.



결코 패배하지 않는, 정의로운 감상주의자

그의 이런 돌직구가 불편하거나 거슬리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말은 이래도 마음은 안 그런 사람'이라는 게 단어들 사이사이에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4장과 5장이 특히 더 흥미로웠나 보다. 1장부터 3장까지의 내용에서 '작가로서의 레이먼드 챈들러'가 읽혔다면, 4, 5장에서는 '인간 레이먼드 챈들러'가 더 부각된다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필립 말로가 감정적으로 미성숙할지도 모른다고 편지를 쓴 독자에게 '도대체 너는 어쩌다 그런 생각을 갖게 됐니'라는 뉘앙스(물론 저런 문장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ㅋ)의 답장을 조목조목 이유까지 들어가며 써 주고, 독자가 상상(혹은 창조?)해낸 말로의 취향과 일상과 과거와 주변 상황들에 대해 답변을 달아 줄뿐만 아니라 자기의 소설에 반영하기까지 하는 소설가라니. 이렇게 마음 약한 소설가가 또 있을까. 실제로는 4장을 통해 진짜 필립 말로에 대해 알게 된 것이 거의 없었지만, 이 친절함 때문에 4장 전체가 참으로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사소한 일상적 행위들을 편안하게 나열-심지어 그 편지의 제목은 '나의 주부 생활'이다!!!-하거나, 고양이에 대해 얘기하거나, 자기가 어떤 사람을 좋아하고 어떤 것을 좋아하고 어떤 세계를 좋아하는지 구구절절 설명하거나, 아내 시시의 죽음 전후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자신의 모습을 수줍게 고백하는 5장은 더더욱 인상적이었다. 맨손으로 비엔나 롤을 부러뜨릴 수 있을 만큼 거친 남자의 거만한 껍질 속에 들어 있는, 부드럽고 따뜻한 속살(!)을 슬쩍 본 기분이랄까. 이런 바게트 같은 남자ㅋㅋㅋㅋㅋㅋ 알고보면 챈들러는 츤데레였던건가ㅋㅋㅋㅋ

 



고마워요, 레이먼드 챈들러.

강하고 차갑지만 생각보다 훨씬 연민 넘치는 남자, 의외로 겸손하고 생각 깊은 남자, 악마적 가학성을 끔찍히도 싫어하고 사랑에 모든 걸 걸려고 하는 남자, 그래서 필립 말로가 그러하듯이, 믿을 수 있는 사람. 타락한 사회에서 괜찮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투쟁하는 정직한 사람이자 외롭고 가난하고 위험하고 동정심이 강하며 어떤 불편한 사람에 의해 어떤 불편한 시간에 깨어나 어떤 불편한 일을 하게 되는 것을 운명으로 타고난 인간. 결코 패배하지 않는, 강한 남자이면서 어쩔 수 없는 감상주의자. 실제의 챈들러가 완벽히 저런 인간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내가 이제까지 상상해 왔던 그의 모습과 이 책을 통해 만난 그의 모습은 꽤 유사했다. 반갑고 기뻤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필립 말로 시리즈를 다시 읽고 있다. 그저께 빅 슬립을 새삼 펼쳐들었는데 여전히 말로는 매력적이었다. 근 한 달 동안 소리내어 웃을 일도 별로 없었는데, 말로 덕분에 또다시 자주 소리내어 웃을 수 있었다. 예측된 패배가 기다리고 있어도 두려움 없이 뛰어들 수 있는 용기와 의지를 잃지 말아야겠다고 새삼 다짐해본다. 고마워요, 필립 말로. 고마워요, 레이먼드 챈들러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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