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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박사는 누구인가?
이기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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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지금도 궁금하다. (p.366)
모든 걸 얘기해주는 텍스트가 있고, 얘기해주지 않는 텍스트가 있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정원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지만, 관객들은 끝날 때까지 그가 어떤 병에 걸렸는지, 남은 생이 얼마나 되는지, 어쩌다가 병에 걸렸는지 알 수가 없다. 어떤 인물도 말해주지 않고, 감독이 화면으로 보여주지도 않는다. 나는 이런 텍스트를 좋아한다. 특히 소설의 경우, 서술자의 외피를 쓴 작가가 하나부터 열까지 소설 속의 상황을 꼬치꼬치 해석하고 설명해 주면 흥미가 뚝 떨어진다. 자신의 작품 속 세계에 대해 100퍼센트 완벽하게 꿰뚫고 있는 창작자나 창작자에 의해 100퍼센트 완벽하게 설명될 수 있는 작품 속 세계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게 답답한 건 창작자가 말해주지 않는 부분이 아니라 창작자가 던져놓는 오직 단 하나의 답이다.

이런 내 기준에 따르자면, 김 박사는 누구인가?는 후자이다. 최순덕 성령충만기의 작가가 아닌 것 같이 느껴질 정도다. 자신만만하고 거침없게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펼쳐보여주던 작가가 주저하고 머뭇거리고 구구절절 덧붙이지 않게 되었다. 누군가는 확실한 해답이 없는 이야기라 답답해서 못 보겠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같은 이유 때문에 나에게는 이기호의 전작들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책이 되었다. 다 읽고 나서도 계속 무슨 내용인지 궁금한 이야기, 그게 내겐 재미있는 이야기니까 말이다.


눈에 띄진 않지만 분명 존재하는, '사실' 이외의 세계들. (p.192)
김 박사는 누구인가?에 실린 소설들은 다들 명쾌하지 않다. 그래서 김 박사는 누구라는 거야? 그래서 프라이드를 몰고 다니던 삼촌은 '오백원 갖고 튄 년'과 정확하게 무슨 관계라는 거야? 그래서 기증자의 딸이 전도사님한테 침을 뱉었다는 거야? 그래서 P는 어떻게 됐다는 거야? 끊임없이 질문들을 만들고 또 만들 수 있다. 이 불명확성은 전달자 혹은 매개의 부재에서 비롯한다. <밀수록 다시 가까워지는>의 삼촌이나 <화라지송침>의 아내, <탄원의 문장>의 최나 P, <이정-저기 사람이 나무처럼 걸어간다 2>의 이정 아들이 무슨 말을, 무슨 생각을 했는지 매끈하게 언어화해 전달해 주는 사람도 없고 통로도 없다.

하지만 과연 그 말과 생각이 전달된다고 해서 제대로 이해될 수 있을까. 아니, 그 말과 생각이란 게 애초부터 매끈하게 언어화될 수 있는 종류의 것들일까. 인간의 이해와 인식에는 한계가 있고, 나의 뜻을 너에게 정확히 이해시킨다는 건 불가능한 일 아닌가. 그것을 꼬치꼬치 전달하려 기를 쓰는 건 계획된 실패를 피하려고 억지를 부리는 것과 다름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고 아예 아무 것도 전달하지 않을 수는 없고. 이 상황에서 작가/서술자가 선택하는 건 생략이다. 전달자/매개를 차단함으로써 불명확성을 획득하는 것.

그래서 글을 읽는 '나'에게 전달되는 '너'의 이야기는 여백이 많은 그림 같아 보인다. 내가 알지는 못하지만 분명 존재하는 그 무엇. 소설집 맨 뒤에 실린 작품해설에서도 '삶의 여백'이라는 단어로 이 소설집의 이야기들을 설명하며, 작가 스스로 이런 문장을 소설 속에 써 놓기도 했다. : 이 이야기는 어쩌면 프라이드를 위해, 삼촌의 이야기를 모두 여백으로 돌리고, 계속 한강시민공원 주위를 맴돌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던 것이 바로 이 이야기의 운명이다. 이제 그 여백을 채워야 하는 순간이 온 것이다. (p.86)


그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그것만이 진실이 아닐까? (p.164)
그런데 내겐 여백이 아닌 공백처럼 보인다. 그냥 텅 비어 있는 것. '너'의 이야기가 존재하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라 할지라도 이해의 주체인 나에게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없다는 것이 오히려 진실 아닐까. 그렇기에 이 소설집을 다 읽고 난 후 내 눈 앞에 떠올랐던 그림은 1인칭의 옷을 입고 '나'에게 이야기를 전달하는 '너'들이 텅 빈 것처럼 보이는 3인칭의 세상과 부딪쳐 조각조각 깨지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독자들은 김 박사가 누구인지 끝까지 알 수 없다. 프라이드를 몰고 다니던 삼촌이 '오백원 갖고 튄 년'과 정확히 무슨 관계인지 모른다. 기증자의 딸이 전도사에게 침을 뱉었다고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다. P가 풀려났는지, 최를 얼마나 때려왔는지, 박수희와는 무슨 관계였는지, 탄원서를 써 준 교수(서술자)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었는지, '나'에게 이야기를 전달하는 '너'들은 답해주지 않는다. '너'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모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너'들이 알 수 없는 것들뿐만 아니라 '너'가 알더라도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실재하기에, '너'들은 독자인 '나'에게 꼬치꼬치 '너'가 만든 세계를 설명해 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공백으로 둠으로써, 알 수 없는 것/ 할 수 없는 것/ 알지만 말할 수 없는 것 들이 엄존함을 깨끗이 인정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두 달 후, 자신이 또다시 같은 생각에 빠지게 될 것이라곤 짐작도 하지 못했다. (p.220)
내가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은 아프고 어렵다. 패배감에 사로잡히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앞으로의 삶을 예측할 수 없다면 지나간 삶에 대해서라도 완전히 알 수 있어야 할텐데 그것조차 안 된다니, 어쩌란 말이냐 하는 말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다. 이 소설집의 서술자들이 본격적인 '썰'을 풀어놓기 전,  회한이 짙게 묻어나오는 탄식을 내뱉고 있는 것 역시 그 때문일 테다. 

그러니까 나는 그 후로 석 달 넘는 시간 동안 최가 어떤 방식으로 탄원서를 쓰게 될지, 그것이 그녀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 전혀 예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예상했더라면……나는 물론 그녀에게 부탁하지 않았을 것이고, 아마 이 글 또한 세상에 없는 글이 되었을 것이다. (p.198, <탄원의 문장> 중)

솔직히 나는 지금도 그가 왜 두루마리 휴지를 두려워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에 대해선 명확히 알지 못한다. (중략) 그저 모르는 척 다른 이야기를 하는 마음들, 강의 그림자를 바라보면서 하는 짐작들. 나는 지금 그것을 하려고 하고 있다. 이제야 비로소 중요한 건 두루마리 휴지가 아니었다는 것을, 그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p.263, <화라지송침> 중)

나는 삼촌에 대해서, 또한 프라이드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듣고, 또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모든 건 제자리에 멈춰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조금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삼촌은 다시 저만큼 달아났고, 무언가 흩어진 퍼즐을 거의 다 맞췄다고 생각한 순간, 또 다른 모양의 조각이 튀어나와 그림을 한순간에 원점으로 만들어놓았다. (p.83, <밀수록 다시 가까워지는> 중)

이해되지 않고, 알 수 없는 것들을 이해하기 위해선, 우선 그것들에 대해서 차근차근 이야기해야 한다. (p.339)
그러나 그 패배감 때문에라도 '나'는 알 수 없는 것/ 알지만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음을 인정하고 말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나'가 '너'의 경험을 직접 해 보고, '너'의 목소리 대신 '나'의 목소리로 얘기해 보면서 '너'의 공백에 공명을 만들어야 한다.  소설을 읽는 행위가 가치 있는 건 소설가가 써낸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인간의 이야기 속에서 독자가 스스로 진실을 찾아낼 수 있는 과정이 그것이기 때문 아닌가. 그 과정을, 나는 '나'와 '너'의 공명이라고 생각한다. 

김 박사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에서, 최소연은 이렇게 절규한다 : 이 개새끼야. 정말 네 이야기를 하라고! 남의 이야기를 하지 말고, 네 이야기. 어디에 배치해도 변하지 않는 네 이야기 말이야! 나에겐 지금 그게 필요하단 말이야, 김 박사, 이 개새끼야. (p.130, <김 박사는 누구인가?>) 마치 이 세상의 모든 '글 쓰는 이'를 수신자로 하고 있는 듯, 최소연의 이름을 빌려 이기호가 독자들에게 고백하는 듯. 앞으로, 독자들에게 어디에 배치해도 변하지 않는, '정말 네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그 이야기가 '정말 네 이야기'라면, '너'는 '나'에게 단 하나의 답을 던져주지 않아도 된다. 현란하고 화려한 색상의 반바지가 정말 반바지인지 트렁크 팬티인지, 맞는 건 뭐고 틀린 건 뭔지 말해주지 않아도 되고 말해줄 필요도 없다. 그냥 반바지라고 믿으면 되니까. 어차피 그 반바지가 트렁크 팬티인지 잘 분간되지 않으니까. 그래서 나는 앞으로의 이기호 소설이 더욱 기대된다. 무엇이 맞고 무엇이 틀린지 분간하지 않고, 이것일 수도 있고 저것일 수도 있는 그것들을 이야기하면서 나를 더더욱 궁금하게 해 줄 테니까. 소설집의 마지막 작품인 <내겐 너무 윤리적인 팬티 한 장>이 풀리지 않는 질문으로 끝을 맺고 있듯이.

그러나, 나는 지금도 궁금하다. 그날 오후, 나를 '씩씩' 거리게 만들어, 도시가스관을 타고 올라가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그것이 반바지일까, 팬티일까, 김 주석일까? 십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야기를 다 끝낸 지금까지도, 나는 그것을 잘 모르겠다. 혹시, 니코틴 때문은 아닐까? (p.366)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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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2019-07-09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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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
공선옥 지음 / 창비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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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무심하고 무심한 것은 무섭다. (p.50)

어렸을 때 우리 집엔 아버지가 어디에선가 구해 오신 사진집이 한 권 있었다. 국내외 매체에 보도되었거나 보도될 뻔 했으나 잘린 사진들이 가득 실려 있던 책이었다. 마루에 벌렁 누워 한 장 한 장 넘겨보면서, 나는 한국의 현대사가 참 무섭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본 사람들에 대해 다른 책을 더 찾아봐야겠다는 생각 따위는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책을 통해 박종철 열사와 이한열 열사의 이름을 외웠고, 최루탄이 눈에 박힌 김주열 열사의 사진을 보면서 등골이 오싹해졌으며, 5.18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고등학교 국사 시간에 한국의 역사적 사건 중 하나를 선택해 조사를 해 온 후 발표하는 과제를 하게 되었다. 5.18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호기롭게 도서관에 가서, 5.18 혹은 광주라는 말이 들어간 책들을 원형 책상 위에 와르르 쌓아 놓았다. 해가 잘 드는 1층 열람실의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나는 한 권 한 권씩 책을 훑기 시작했다. 물론 페이지를 술술 넘기진 못했다. 가슴이 턱턱 막히는 것 같았으니까. 발길질 소리가, 비명 소리가, 날리는 핏방울들이, 페이지마다 뚝뚝 떨어지는 것 같았으니까. '두 쪽 가슴이 잘린 여인' 얘기에서 결국 잠시 책을 덮어버리고 말았다.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를 읽으면서, 봄날의 토요일 오후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던 열 여덟 살의 나와, 흑백의 청년들을 보며 등허리를 꿈틀댔던 열 살의 내가 자주 떠올랐다. 아주 무서운 세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세계, 육체적 고통이 우선하는 세계, 발길질과 비명 소리로 피칠갑된 세계가 지척에 존재하고 있음을 깨달았을 때 화살처럼 피부에 박히는 온갖 감정들을 처음으로 느꼈던 때가 바로 그 순간들이었나보다. 



세상은 똑똑허지 않고 야물지 않고 영리허지 않으면 사람을 바보 천치 농판 취급을 헌다.

그런 세상을 내가 어치게 해야 쓰것냐. (p.46)

소설은 총 4부로 이루어져 있다 : 대숲에 이는 바람, 한여름 밤, 바람의 말, 강 너머 미루나무. 1, 3부 격인 대숲에 이는 바람과 바람의 말은 전라도의 시골 마을 새정지에서 온갖 폭력에 노출된 채 꾸역꾸역 삶을 이어나가는 정애를, 2부 격인 한여름 밤에서는 새정지에서 정애와 어울려 지내다가 광주에 올라와 여러 사람을 만나는 묘자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4부인 강 너머 미루나무에서는 정애의 죽음 이후 묘자에게 일어난 일이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면서 서술된다. 


이웃의 손에 이끌려 간 투전판에서 재산을 날린 후 직업까지 잃은 정애의 아버지는 고향을 떠나 돈을 벌러 가겠다고 결심하고, 어린 딸 정애에게 어머니와 동생들을 맡긴다. 우리 집의 희망을 위해서는 너의 희생이 필요혀. 니가 엄마 노릇을 좀 해라이. 어쩔 것이냐, 이것이 내 운명이다 허고 사는 수배끼는. 내가 왜 부잣집에 안 태어나고 요런 물짠 집에 태어났으까, 원망하는 수배끼는 달리 수가 없다-고 딸에게 변명 같은 말을 늘어놓으며. 


아버지가 떠난 후 정애네의 형편은 갈수록 악화된다. 정애네는 갈수록 가난해지고, 정애와 정애 동생 순애는 동네 사람들에게 강간당한다. 결국 순애와 아버지, 어머니를 차례로 보낸 정애는 남은 두 동생과 함께 마을에서 쫓겨난다. 니가 지금 사는 것은 즘생이나 한가지니 우리가 살아갈 방도를 주선해 줄 때 조용히 가라고 협박한 동네 사람들에 의해서. 그들은 정애네 식구의 삶을 짐승처럼 만들어 놓은 것이 누구인지, 정말 몰라서 그런 말을 한 걸까. 아마도 아니었겠지.



난리 난 뒤끝에는 미친년, 미친놈 생기게 마련이여. 세상이 돌아부렀는디 사람인들 온전헐 수가 있가디.

그중에 특별히 더 모진 꼴 당해불면 미쳐불제. (p.114)

묘자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광주에서 식당을 하는 어머니를 찾아간다. 그 도시에서 정애와 재회하고, 숙자 씨와 박용재와 오남수를 만나고, 또 용순과 재회한다. 1980년 5월, 군인들이 사람을 죽였던 그 봄날의 한밤중에 군인들에게 변을 당한 정애와, 이유 없이 '폭도'로 몰려 두들겨맞고는 시위대에서 '악'을 몇 번 썼다가 채증을 당해 상무대와 교도소와 삼청교육대에 끌려간 박용재와, 공수부대로 광주에 투입되었던 오남수와, 오남수에게 찰밥을 해 먹이며 수발하는 새정지 사람 용순을.


상처는 그림자가 길다. 트라우마는 오래 남는다. 5월이 다가오자 박용재의 머리와 가슴 속에 똬리 틀고 있던 짐승들이 서서히 기지개를 켠다. 활개를 치더니 박용재를 씹어 삼킨다. 박용재는 짐승이 되어 짐승의 말을 하고, 자신을 짐승으로 만든 짐승들을 죽이고 싶어 하고, 자신의 아이도 짐승일지 모른다는 공포심에 사로잡힌다. 박용재는 묘자에게 칼을 겨누고 묘자는 박용재의 목을 조른다. 묘자가 교도소에 가자 용순은 묘자의 돈을 말도 없이 가져간다. 예전에 정애네 강아지를 훔쳐갔듯이.


정애는 약을 먹고 미친년 소리를 들으며 길거리를 헤맨다. 고향으로 가야겠다며 새정지행 버스를 탄다. 해마다 종자와 비료와 농약과 비닐을 사서 농사를 지어 봤자 빚만 늘어나는, 옛 마을로. 떠난 사람들이 남긴 집과 논과 밭을 박샌이 사서 부자가 되는, 고향으로. 정애네 돼지를 빼앗아가고 정애의 아버지를 죽인 박샌이 마을 사람들의 칭찬과 신뢰를 받으며 새로운 이장으로 마을을 발전시키고 있다는, 새정지로. 


그렇게 다들 미친 세상에서 미친년, 미친놈이 되어분다. 우리집 다무락에 도야지 피는 끈적끈적 이발소 솥단지에 도야지 지름이 찐덕찐덕…



그 말은 사람이 말로는 더 어떻게 해볼 수 없을 때 터져나오는 소리인데

보통의 사람들은 그 말을 알아먹을 수 없는것이 당연한 것이고 (p.184)

누군가는 이 소설이 불편할 것이고 불쾌하기도 할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소설인데, 어쩌면 이렇게 잔인할 수 있냐고 혀를 내두를 것이다. 이렇게 지독한 소설은 읽고 싶지 않다며 작가를 향해 욕지기를 내뱉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소설 속 사건의 대부분이 실화를 기반으로 한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묘자와 정애의 모델이 된 분들이 지금도 생존해 계신다고 한다. 창비에서 만드는 팟캐스트 '라디오 책다방'을 통해 이 이야기를 듣고(http://blog.changbi.com/lit/?p=16636&cat=1454 또는 http://soundcloud.com/changbi-managers/8-1), 나는 스톱 버튼을 누른 채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랬다. 이제까지 내가 5.18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건 사실 다 마네킹 같은 거였다. 공식적인 언어로 매끈하게 다듬어져 누구나 이해하고 알아듣기 쉬운, 그런 말이었다. 광주에 한 번 가 보지도 않고, 5월을 직접 겪어본 사람 한 번 만나보지도 않은 채, 그런 언어로만 5.18을 '외운' 주제에, 5.18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부끄러웠다. 아무것도 몰랐고, 어쩌면 모르고 싶어했으면서. 5.18의 민낯을 마주대하는 게 두렵고 무섭고 공포스러워서, 어차피 남의 일이고 이미 끝난 일이라 되돌릴 수도 없어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일년에 두세번 5.18에 대해 떠올리는 것 정도라고 생각하면서,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했으면서.



죽지 않은 것은 복잡하고 시끄러운 것이고 죽은 것은 간단하고 조용하다. (p.71) 

정말 5.18이 끝난 거라면, 세상은 이제 멀쩡해졌고 행복해졌고 온갖 미친년과 미친놈들도 다 치유됐다면, 이 이야기를 더 할 필요도 없을 테고 더 들을 필요도 없겠지. 하지만 아니잖은가. 그 이후로도 광주에는 5월이 끊임없이 찾아왔고, 묘자에게는 정애가 찾아왔고, 정애가 찾아오던 날 묘자가 보던 자정 뉴스에서는 유산 문제로 싸우는 재벌 형제와 철거를 반대하다 불에 타 죽은 사람들의 가족이 나오고 있었잖은가.


나는, 너는, 우리는, 유산 문제로 싸우는 재벌 형제를 부러워하면서 재벌 형제처럼 되고 싶어했을 거다. 더 잘 먹고 잘 살려면 '이미 지나간 남의 일' 따위엔 신경쓰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번지르르하게 자기를 꾸미고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썼을 거다. 사실 나와 닮은 건 재벌 형제가 아니라 철거를 반대하다 불에 타 죽은 사람들이고 그들의 가족인데. 아니, 어쩌면 나 자신이 불에 타 죽은 사람들이고 그들의 가족이고 정애고 묘자고 박용재고 오남수인데. 그러니까, 정애는 나고, 정애는 지금 이 순간도 살아 있는데.


그러니까 나는 정애를 잊지 않고 묘자를 잊지 않고 박용재와 오남수를 기억할 거다. 광주의 5월을 기억해야 하고 철거를 반대하다 불에 타 죽은 사람들을 기억할 거다. 광장에서 제 몸에 불을 붙이고 크레인 위에서 제 목을 맨 사람들을 기억할 거다. 종탑 위와 철탑 위와 송전탑 위에 올랐던 사람들을 기억할 거다. 그들이 나고, 내가 그들이니까. 그들이 진짜로 죽는 순간은 사람들이 그들을 다 잊어버리는 순간이니까, 간단하고 조용하게 끝나버리지 않도록, 복잡하고 시끄럽게 그들에 대해 얘기할 테다. 하고 싶은 말은 너무나 많으나 차마 말로 만들어낼 수 없었던, 차마 말로 다듬어지지조차 못하고 입밖으로 튀어나올 수밖에 없었던 소리들을 내 입으로 내 보고 되뇌어 볼 테다. 융구 쇼바 슝가 아리따 슈바 슈하가리 차리차리 파파, 아바아바사융기샹가바, 라고.



우지 마소 꽈리때깔을 불어줄게 우지 마소 참지름으로 밥 비벼줄게 우지 마소 (p.195)

많은 장면에서 울컥 울컥 했었다. 묘자가 수세미 싹을 엄마라고 부르던 장면, 박용재의 시체 앞에서 사랑한다고 고백하던 장면, 교도소 안에서 정애를 만나던 장면…쓰려면 끝도 없지만, 지금 가장 기억나는 장면은 정애가 밥을 먹는 장면이었다. 이 소설 속 인물들 중 참혹한 일을 가장 많이, 가장 심하게 겪은, 약하디 약한 정애가 얼마 되지도 않을 제 밥을 제 아닌 존재에게, 심지어 그림자에게까지 나눠 먹이는 장면에서,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위로를 받았다. 잔인한 사람들과 지독한 고통 앞에서도 울거나 화내거나 소리지르는 대신 노래를 부르던 정애는 밥을 나눠 먹임으로써 생쥐의 엄마가 되고 그림자의 엄마가 되고 산 것과 죽은 것과 모든 것들의 엄마가 된 건 아닐까. 그래서 바람을 타고 달빛 속으로 들어가 오르고 내리고 오르고 또 오르면서 노래부르고 춤출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세살짜리 정애가 열살짜리 정애를 이끌고, 열살짜리 정애가 열다섯 정애에게 더운 숨을 불어 넣고, 서른살 정애가 달려오고, 쉰살 정애가 노래하고, 백살의 정애가 춤을 추는 그 아름다운 장면에서, 나는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났다. 피부에 와닿는 감정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던 열 살의 나, 그것을 공포라고밖에 설명하지 못하고 망연자실했던 열 여덟의 나, 그 둘이, 책을 읽는 내 속에 들어와 함께 눈을 빛내다 슬퍼하다 괴로워하다 웃다가 울었다. 덕분에 나는 정애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어린 정애와 늙은 정애 들이 뒤엉키고 끌어안고 매달리면서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주는 그 장면들을,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읽을 수 있었다. 고마웠다. 오래 잊지 못할 것 같다. 지독하게 슬프지만 그래서 더 아름다운 정애를. 그녀가 외우던 아바아바사융기샹가바를.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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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당한 유언들 밀란 쿤데라 전집 12
밀란 쿤데라 지음, 김병욱 옮김 / 민음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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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쓰기'를 눌러버린 지금 이 순간도 '이 책은 소설이 아니잖아, 근데 왜 주목할 만한 소설 신간으로 선정된 거냐고ㅠㅠㅠㅠㅠ'로 시작하는 불평을 좔좔 늘어놓고 싶은 마음이 아주 없지는 않다(이런 문장을 썼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불평의 9할은 다 한 셈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대해 별 다섯 개를 매겨 놓고, 리뷰를 시작한다. (왜 별을 다섯 개 매겼는지는 마지막에 쓸 것이다ㅋ)



<배신당한 유언들>은 말 그대로 예술가들의 배신당할 수 밖에 없는 유언들에 대한 쿤데라의 글이 묶여 있는 책이다. 글 한 편 한 편은 길지 않지만, 꽤 많은 작가들과 작품들이 인용되어 있기에 풍부한 배경 지식이 없다면 이해하기 쉽지 않은 글이다. 물론 나는 풍부한 배경 지식이 없기 때문에 이해하려고 애쓰기보다는 그냥 그러한 존재가 있음을 확인하면서 넘어가야만 했다(즉 야니체크의 음악에 대한 부분을 읽으며 '아 쿤데라의 이 말은 야니체크의 이 음악에 대한 설명 같은데 왜 나는 이 음악에 대해 이런 느낌이 들지 않지?'라고 고민하지 않고 '응응 그래 세상에 이런 것도 있구나 응응 예 아이고 잘 알았습니다' 하며 술술 페이지를 넘기는 식으로-_-). 따라서 내가 이 책을 완전히 이해했다고 말하긴 매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세상에서 어떤 책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게 가능한가? 어떤 책까지 갈 것도 없다, 어떤 문장 하나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이 가능한가? 아니, 그 이전에, 완결된 의미를 지닌 완벽한 문장이란 게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가능한가? 글쎄, 완벽한 직선 하나 제대로 긋지 못하는 인간이 그런 걸 만들 수 있을까? 


나는 내가 던진 저 질문들에 대해 모두 다 회의적이다. 그렇기에, 완벽하게 이 책의 내용을 숙지하지 못했을지라도, 쿤데라가 언급하는 헤밍웨이의 책과 카프카의 책과 니체의 사상과 야니체크의 음악과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에 대해 지식이라 할 만한 정도의 정보도 갖지 못했을지라도, 그가 헤밍웨이와 카프카와 니체와 야니체크와 스트라빈스키와 플로베르와 조이스와 발자크 등등을 인용해 가며 이 글들을 써내려간 '의도'가 무엇일지 추측해 가며 이 책을 읽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총 9부로 이루어져있다. 각 부의 줄거리나 중심 내용을 일관되게 요약한다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므로 그냥 인상적이었던 부분들 또는 비중 있게 다루어진 소재를 언급하자면, 1부에서는 소설과 유머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했고, 2부에서는 카프카를, 3부에서는 스트라빈스키를 중심으로 글이 묶여 있었다. 4부에서는 쿤데라가 직접 카프카의 문장을 번역해 보면서 카프카의 글에서 나타나는 특징들을, 5부는 헤밍웨이의 단편을, 6부에서는 니체의 사상을, 7부에서는 야니체크의 음악을 중심으로 한 글이 실려 있었다. 8부에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여러 소설 속의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가, 9부에서는 (제목과 가장 관련이 깊게) 예술가의 뜻과 반하는 방식으로 쓰이거나 재편되거나 만들어진 예술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1부였다. 쿤데라는 소설 속의 유머를 유머로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유머를 이해시키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도 없다는 깨달음을 털어놓는다. 소설이란 모든 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호기심을 품고 자기 것과는 다른 진실들을 이해하도록 노력하는 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여기서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란 '그저 장난이라 생각하고 가볍게 넘기는 것'의 반의어가 아니라, 소설 속의 모든 사건에 대해 윤리적으로 '판결'을 내려야만 한다는 강박을 가리킨다고, 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소설은 도덕적 판단이 중지된 땅이어야 한다는 쿤데라의 말은, 일견 틀리게 보이지만 사실은 진실이라고 믿는다. 저 말은 소설이 도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영역이어서, 비윤리적인 내용-예를 들어 한국의 상황이라면 어떤 게 있을까, 5.18 때 시민들에게 발포를 허락한 '그들'의 용기와 대담함을 열정적인 어조로 찬양하는 것 따위? 아, 글자로만 봐도 토할 것 같구나-을 아무렇게나 써제껴도 된다는 말이 아닐 것이다. 소설 속의 내용을 현실의 잣대로 재어 '선'인지 '악'인지 구분하느라 낑낑대지 말고, 그 겉 이야기 속에 숨어 있는 진실을 발견하려고 호기심을 가지고 노력해야 한다는 뜻일 게다. '얘는 좋은 얘기니까 상' '얘는 나쁜 얘기니까 벌' 따위의 규범적 갑갑함에서 벗어나, 작가가 숨겨 놓은 유머를 찾아 내라고.


그래서 쿤데라는 소설 속의 모든 존재들이 그의 내부에서 잠자는 그 자신의 가능태들이며, 그만의 개성을 갖기 위해서 그 가능태들과 싸우는 존재들이라고 얘기한다.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인지, 영예가 무엇이고 파멸이 무엇인지, 한 소설을 두고 딱 잘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를 쿤데라는 선악에 대한 파악 불능이라고 칭하며, 그 속에서 인간 실존의 토대인 불확실성을 찾아낸다. 그리고 유머란 이 불확실성에 대한 확신에서 오는 기이한 즐거움이자 인간이 다른 사람을 심판할 수 없는 존재임을 드러내는 신성한 빛으로서 현대 정신의 위대한 발명품이라고 평가한다. 아, 이 얼마나 멋진 설명인지. 선과 악이 확실하게 딱딱 나눠진다면, 인간의 오늘과 여기가 '확실한 것'이라면,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완벽하게 평가할 수 있다면, 세상은 얼마나 단순무지하고 재미없고 잔인하겠는가. 도덕과 유머라는 키워드를 통해 소설과 인간에 대한 이해를 넓히게 해 준, 멋진 글들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외에도 인상적인 부분들은 참 많았다. 무감한 것은 영원한 존재이고, 그러므로 인간에게 위로가 된다는 말, 카프카의 <아메리카>에 대한 이야기(사실주의를 애초부터 지향하지조차 않았다는!), 엑스터시에 대한 이야기와 예술의 행복에 대해 논한 부분, 예술 작품에서 특정한 태도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에 대한 혐오, 공포 자체보다 더 무서운 것은 공포의 서정화라는 지적, 소설은 현재라는 달아나는 현실의 상실과 대립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말, 아, 줄을 그으려고 들면 온 책이 다 줄투성이가 될 까봐 쉽게 펜이나 색연필을 들지도 못하겠다.



참 식상한 말이지만, 아는 만큼 더 알게 된다는 걸 늘 깨닫는다. 이 책 속에 언급된 책들을 더 찾아 읽어 보고, 언급된 음악들도 찾아 들어 보고, 쿤데라가 던진 여러 가지 명제들에 대해 고민도 해 보면서, 오랫동안 여러 번 보고 싶은 책이다. 그래서 나는 아낌없이 별 다섯 개를 선사한다. 다섯 개 중 세 개는 오래 곱씹어 보고 싶은 생각거리를 글로 구체화해 준 쿤데라 선생(!!)에 대한 고마움, 한 개는 활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들었던 몇(십?) 개의 문장들에 대한 찬사, 한 개는 글의 제목만큼이나(어쩌면 그보다 더!!) 마음에 드는 표지에 대한 칭찬의 의미로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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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셋 파크
폴 오스터 지음, 송은주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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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테레사 라이트한테 꽤나 고생스럽게 살게 될 거라고 하잖아. (p.128)

폴 오스터의 소설을 있는대로 찾아 읽던 때가 있었다. 스무살 즈음, 도서관에 갔다가 늘 대출 중이던 <달의 궁전>이 웬일로 서가에 꽂혀 있는 걸 발견하고 빌려 왔더랬다. 도대체 폴 오스터가 뭐라고 이렇게 다들 폴 오스터 타령이야? 라는 기분으로 침대 위에 벌렁 누워 책장을 펼쳤는데, 이십 페이지쯤을 넘겼을 때 이 소설은 이따위 자세로 읽을 만한 책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는 행여 누가 훔쳐갈지도 모른다는 듯 온몸을 웅크리고 앉아 페이지가 뚫어져라 쳐다보며 읽었다. 페이지가 꿀떡, 꿀떡, 넘어갔다. 진짜 꿀떡, 이 넘어가듯이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삼키는 침이 달았다.


다른 책을 읽었다. <뉴욕 3부작>을 읽었고, <우연의 음악>, <스퀴즈 플레이>, <공중 곡예사>, <환상의 책>을 읽었다. <빨간 공책>을 읽고 나서 우연히 그 책과 비슷하게 생긴(!) 공책을 발견해 구입하고는 낙서장으로 쓰기도 했다. 또 뭘 읽었더라? 몇 권 더 읽은 것 같은데, 기억이 잘 안 난다. 뭘 읽어도 <달의 궁전>만 못하다는 생각에, 언제부턴가 그의 책을 읽기가 재미없어진 탓이다. 뭘 읽어도 <달의 궁전>만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랬던가. 


사실 위에 나열한 책들의 줄거리도 또렷하게 기억이 잘 안 난다.  머릿속에 내용이 다 섞여 있다. 왜 이런 건지 그동안 잘 몰랐었는데, 이번에 <선셋 파크>를 읽으면서 그 이유를 짐작하게 됐다. 폴 오스터의 소설 속 주인공들이 내게는 다 비슷비슷해 보였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름이나 직업이나 묘사된 외양은 다를지언정 결국 같은 길로 향하는 인물들 같다는 느낌이랄까. 잘 살아가는 것 같아 보여도, 잘 이겨내는 것 같아 보여도, 끝내 인간은 인생의 내리막길로 쭉 미끄러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걸 맨 마지막 페이지에서 절절히 느껴야 한다는 게, 그때의 내게는 버거운 일이었나보다.


그래서일까. <선셋 파크>를 읽는다는 것 자체가, 내게는 하나의 모험이었다.




세뇨르 헬러가 이렇게 대단한 찬사에 어울릴 만한 인물일지는 시간이 가면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p.100)

아주 오랜만에 폴 오스터의 소설을 붙잡고, 원서보다 더 매력적인 표지를 잠시 구경하고(특히 마음에 드는 건 뒷표지에 그려진 거위의 표정! '네 인생도 미끄럼틀 위에 있어'라는 듯한 표정!!), 역자 이름이 있어야 할 자리에 '황보석'이 없다는 것에 잠시 실망하고, 송은주 씨가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을 번역하신 분임을 떠올리고, 다시 기대감을 부풀린 후, 드디어 페이지를 넘겼다. 신기하게도 <달의 궁전>을 읽을 때처럼, 페이지가 꿀떡, 꿀떡, 넘어갔다. 아아, 재미있다 재미있어, 라고 중얼중얼거리며 읽었다. 중간 중간 기억해두고 싶은 문장이 있는 페이지에 포스트잇을 붙였는데, 책을 다 읽고 보니 붙인 포스트잇이 스무 개도 넘었다.


스물 여덟. 한국의 청년이라면 취업 걱정에 토익 준비에 대기업에 이력서를 내니 공기업이 최고니 공무원밖에 없니 하며 혼란에 빠져 있을 지도 모르는 나이. 미래에 대한 준비와 설계가 당연히 되어 있어야 한다고 여겨지는 나이. 젊을을 불태워라 열정과 자신감을 가져라 세상에 나의 가치를 증명해라 따위의 이야기를 조언이랍시고 들어야 하는 나이. 하지만 햇살 가득한 플로리다에서 살아가는 이 소설의 주인공 마일스 헬러는, 스물 여덟 살임에도 불구하고, 앞일은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여기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버려진 것들의 사진을 찍는다. 최소한의 욕망만을 가지고 살려 한다.


처음부터 그의 삶이 이러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형의 죽음 이후, 형을 자신이 죽였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 이후, 부모가 자신으로 인해 슬퍼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 이후, 마일스는 이제까지의 생에 흥미를 잃었고 자신이 살아가야 할 미래가 없음을 느꼈다. 부모의 생각처럼 그는 자신이 미래가 없는 아이가 되었다는 깨달음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동시에 과거를 버린 아이가 된 것일지도. 


그 때문에 마일스가 버려진 물건의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물건을 버린다는 것은, 그 물건에 얽힌 시간들을 함께 버린다는 것일 테고, 마일스 역시 그 물건들처럼 잠시 버려진 존재로 자신을 정체화하고 있었을 테니까. 자신 때문에 슬퍼하고 있는 부모로부터, 버려진 존재로. 실제로 부모가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든 말든, 그렇게 스스로를 버려진 존재로 만든다는 것이, 보비의 죽음이 자신의 어깨에 얹어 놓은 죄의식에 깔아뭉개지지 않고 오늘이라는 짐을 지고가면서 삶을 근근이 이어갈 수 있는 방법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유일한 방법.



이제 최악의 일들은 다 지나갔다. (p.319)

살아 있으나 죽은 것 같이 느껴지는 존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라사와 나오키의 <몬스터>에서 요한은 자신의 존재를 지우려면 자신에 대한 기억을 없애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곧 기억하는 사람들의 존재를 없앤다는 것이다. 내 머릿속에서뿐만 아니라, 실재 그 자체를. 그래서 그는 자신과 관계된 사람들을 하나씩 죽여나간다. 그러나 마일스는 과거를 완전히 지우려 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는 자신이 발붙이고 서 있던 과거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마일스 헬러'의 삶으로부터 잠시 떠나 있을 뿐, '마일스 헬러'라는 존재 자체를 완전히 폐기하지는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전히 아버지와 어머니를 사랑하고 새어머니를 걱정하며, 어린 시절의 친구들 중 한 명인 네이선과의 연락을 계속 유지하면서 과거와 연결된 끈을 쥐고 있기에. 가족과 자신을 단절시키고 있기는 하지만, 뉴욕에서 가족과 함께 있든 플로리다에서 폐가 처리를 하고 있든 그는 어쨌든 마일스인 것이다. 지적인 호기심이 많고, 책 읽기를 좋아하고, 말장난하기를 좋아하는, 마일스 헬러. 


따라서 그는 애초부터 미래가 없는 아이일 수 없었다. 미래가 있다는 건 무슨 뜻일까. 기대하고, 약속하고, 계획하고, 꿈을 꾼다는 것 아닐까.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돌아갈 곳이 있고, 과거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미래는 '분명히 있다'. 게다가 필라라는, 매력적인 여인의 연인이 되면서 그는 분명히 미래가 있는 사람이 되어 버린다. 필라가 열 여덟살이 되는 5월 23일(바로 오늘!!), 그녀와 결혼하겠다는 것이 그의 미래 아니겠는가.


어찌 보면 당연하게도, 마일스는 과거의 마일스로 돌아가기 위한 수순을 천천히 밟는다. 뉴욕으로 돌아가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거나 지속하고-심지어 사람들은 마일스를 좋아한다!-, 필라가 가야 할 대학을 행복하게 고르고, 어머니를 만나고, 아버지를 만나고, 살 곳을 알아보러 다닐 계획을 품고, 새 집을 구할 때까지 함께 지내도 좋다는 아버지의 제안을 받아 놓는다. 이렇게만 흘러 가면 해피엔딩이다. 마일스는 곧, 마일스의 미래가 될 것이다.



그는 아버지를 실망시켰고, 필라를 실망시켰고, 모든 사람을 실망시켰다. (p.328)

그러나 결말은 또다시 수렁이다. 아버지와 필라와 모든 사람이 마일스에게 실제로 실망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마일스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마치 거짓말을 하고 부모 곁을 떠나던 그 때, 실제로 부모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마일스에게 중요하지 않았던 것처럼.


첫 번째 수렁 때문에 과거를 버리려 했던 마일스는, 두 번째 수렁 때문에 장담했던 미래를 잃는다. 최악의 상황은 다 지나갔다고 믿었지만, 그것은 마일스의 생각일 뿐이었다.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별 문제 없이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제까지 잘못해 온 것에 책임을 지고 몇 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필라와 함께 살 수 없을 것이다. 필라가 그를 버릴지도 모른다. 필라와 함께 도망가서 산다 해도, 둘이 꿈꾸던 뉴욕에서의 생활 따위는 먼지처럼 날아가버릴 것이다. 그리고 그는 생각한다.


미래가 없을 때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는 것이 가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지금부터 어떤 것에도 희망을 갖지 말고 지금 이 순간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 지금 여기 있지만 곧 사라지는 순간,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지금만을 위해 살자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p.328)



우리는 세월이 흘러갈수록 더 강해지는 것이 아니다. (p.285)

마일스는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폴 오스터를 한창 즐겨 읽던 10여년 전이라면, 이 결말을 보고 허탈함에 혀를 끌끌 찼을 것이다. 이 책을 읽는 시간이 재미있고 즐거웠더라도 '이따위 결말을 보자고 신나게 읽어온 건 아니라고!!!'하면서 하드커버를 북북 찢어버리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꾹꾹 눌렀을 것 같다. 하지만 <선셋 파크>를 다 읽고 나서 든 생각은, 마일스의 삶이 행복해졌나 불행해졌나 추측해 보는 것이 쓸데없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연필로 윤곽을 잡고, 디테일을 하나씩 추가하면서, 하나의 스케치를 대충 마쳐놓는 바로 그 순간. 누군가 심술궂게 연필 자국을 손가락으로 뭉개 버린다. 디테일이 망가진다. 윤곽이 무너진다. 어쩌면 스케치라는 존재 그 자체가 사라져버리는지도 모른다. 그런 스케치가, 인간의 미래 아닐까.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의 일들을 우리는 마치 이미 다 벌어진 일들처럼 얘기한다. 나는 뭐가 될 거라는 둥, 어디를 갈 거라는 둥, 뭘 먹고 뭘 사고 뭘 입고 뭘 읽을 거라는 둥, 이건 수익성이 높고 저건 안전성이 높다는 둥. 지금 이 순간, 내 삶이 끝날지도 모르는데.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은 나의 현재이자 끊임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과거이며, 곧이어 다가오는 미래인데, 마치 현재와 과거와 미래가 무처럼 뚝뚝 잘려 분리될 수 있다는 둥.


그게 아니라는 걸, 인간은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걸, 삶이란 그토록 자비로운 표정으로 인간에게 계획 가능한 행복 따위를 선물해 주지 않는다는 걸, 지금 이 순간 살아있다는 것은 이 순간의 고통을 견디고 있다는 것이고 그로 인해 더 약해져 간다는 것이고 그로 인해 아파해야만 한다는 것과 다름없다는 걸, 폴 오스터는 얘기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러니까, 예상치 못했던 불행이 나에게 끊임없이 찾아오는 건, 내가 특별히 불행한 시기를 보내고 있거나 나 개인의 불행이 워낙 특이해서가 아니다. 그냥, 그게 내 삶이고, 네 삶도 그렇고, 다른 어떤 이의 삶도 모두 다 그런 것이기 때문인 거다.



우리를 구해 줄 테니까. (p.65)

그래서 더더욱, 이렇게 고통스러운 내가 할 수 있는 건, 지금 이 순간에 대한 희망 외에는 그 무엇도 갖지 않는 것. 지금 여기 있지만 곧 사라지는 순간,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지금만을 위해 사는 것. 마일스가 맨 마지막 장에서 스스로에게 되뇌었듯이, 나 역시 되뇌어 본다. 벌어지지 않은 일을 걱정하지도, 일어나지 않은 일을 장담하지도 않겠다고. 이미 다 끝나 버린 일에 목매지도 않겠다고. 그저 지금의 순간에 집중하고 몰입하겠다고. 마일스의 말에 귀 기울일 때 필라가 보여준 몰입의 눈빛 때문에, 마일스가 필라와 함께 있을 때 그녀가 온전히 그 자리에 있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처럼. 나 역시, 내 자리에, 지금 이 순간 온전히 있게 된다면, 그걸로 충분하겠다.





+ 사족

1. 마일스 이외의 인물들도 매력있었는데. 특히 나는 메리-리가 좋았다. 특히 마일스에게 신경질을 낸 후, 한순간에 극에서 극으로 바뀌면서 '아이고 맙소사, 내가 정말 못된 년처럼 굴었구나, 그렇지 않니?'라고 묻는 부분은 끌리도록 매력적이었다!


2. 네이선이 바이(혹은 게이?)였다는 것, 소설 전체를 보자면 사소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나에게는 꽤 인상적인 반전이었다.


3. 폴 오스터 소설을 보면서 '아 이 사람도 여자 심리 묘사는 참 못하네…'라고 자주 생각했었던 것 같은데, 이 책에선 그런 느낌이 많이 안 들었다. 앨렌이나 앨리스, 윌라와 필라, 메리-리 모두 여성이라기보다는 그냥 보편적인 인간의 한 종류처럼 그려졌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 오히려 헬러의 시각이나 모리스의 시각에서 여성 인물들에 대해 애기하는 부분들이 더 흥미로웠다. 알 듯 모를 듯, 이도 저도 아닌 것 같은.


4. 야구 얘기는 역시 재미있었다. 샌디 '코팩스'를 '쿠팩스'라고 번역했더라면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긴 한다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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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수꾼들
발따사르 뽀르셀 지음, 조구호 옮김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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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탄다는 행위에 대해 생각한다. 움직이지 않고 단단히 내 발 아래 존재해 주는 뭍. 뭍 위에 발바닥을 디디고 산다는 것이 고정되고 안정된 것에 대한 지향이나 희망을 의미한다면, 내가 밟고 살던 땅을 떠나는 것은 불안을 온몸으로 끌어안겠다는 것일 테다.  내 몸이 끊임없이 휘청거리도록 허락하고 배멀미에 시달려야 하는 일상에 내던져지는 배 위의 삶.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라면, 그래서 많은 것을 지켜야 하는 사람이라면, 쉽게 선택할 수 없는 길이다.


그건 배 위의 삶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뭍 위에선 가진 것이나 지킬 것이 많지 않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일지도 모른다. 움켜쥔 것을 쉽게 놓을 수 있을수록, 아예 움켜쥔 것 자체가 적을수록, 배를 타겠다는 선택을 쉽게 내릴 수 있다는 것.


<밀수꾼들>을 처음 읽을 때,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질 거라고 생각했다. 육지에서의 삶을 놓을 수밖에 없는 경험을 해 본 사람들이 떠밀려 선택한 배 위에서의 또다른 삶. 땅을 떠난 그들이 몰입해야만 했던 배와 바다와 다른 세계. 어쩌면 나도, 그들처럼 떠밀려서라도, 지금의 삶이 아닌 다른 삶을 선택하고 싶은 걸까. 그들이 몸으로 겪어냈던 배 위에서의 삶과 그들의 눈을 빌려 그려낸 바다의 모습을 만날 때면 왠지 벅찬 기분이 들었다.


아침은 현기증이 날 정도로 밝아왔다. 불그스레하게 물들었던 푸른 바다는 이미 활활 타오르는 붉은 막으로 변해 있었고 그 표면에는 반짝반짝 빛나는 점들이 콕콕 찌르는 듯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눈부실 만큼 붉게 물든 하늘이 바다에 푸르스름한 오렌지빛으로 투영되고 있었다. 서쪽으로는 날씨가 맑고 차분했으며 바다는 호수 물처럼 푸르고 잔잔했다. 농밀한 물이 옥빛으로 빛났다. 연한 푸른색 막이 하늘을 덮고 있는 것 같았다. 곧 해가 떠오르리라. 상큼하고 건조한 바람 한 줄기가 불어왔다. (183-184쪽)


손에 잡힐 것 같은 축축한 어둠이었다. 하늘 쪽을 바라보니 저 위, 끝없이 높은 절벽 위로 동굴의 입구가 보였고 그 위로 톡톡 튈 것 같은 별들이 빽빽하게 들어 차 있는 푸르스름한 하늘이 전개되고 있었다. 동굴 위에서부터 귀뚜라미 소리가 하늘에 깔린 별처럼 빽뺵하게 들려왔다. (270쪽)


파도가 선체에 부딪쳐 산산이 부서져 파편이 갑판까지 세게 튀겼다. 파도가 일정한 높이로 규칙적으로 밀려왔으며 배는 전후좌우로 움깆이며 파도를 비스듬히 가르고 있었다. 바람이 약간 수그러들긴 했으나 아직도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쌩쌩 불어내려오고 있었다. (349쪽)


세차게 엉켜돌아가는 역사의 조류가 어떻게든 이어져야만 하는 개인의 삶에 만들어낸 온갖 상흔들. 삶의 굴곡들을 생생하게 보여주기 위해, 그들이 배에 오르기 전의 과거는 배 위에서의 현재와 교차되며 조명된다. 레오나르, 쁘루덴시, 마르꼬, 요렝-까발, 비센 바랄...의 삶에 조금 더 감정이입할 수 있었다면, 조금 더 공감할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텐데. 스페인 역사와 그쪽 지리에 대한 지식이 너무 짧다 보니 충분치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밀수꾼으로 살아야만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좀더 긴장감 넘치게 펼쳐졌다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그들의 비극을 더 잘 이해하지 못했다는 데 대한 안타까움이 더 크다.


스페인 내전에 대한 책이라도 좀더 읽어보고, 여유롭게 다시 책을 읽어보고 싶다. 좀더 정성스럽게, 배 위의 그들에 대한 연민을 잃지 않고.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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