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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셋 리미티드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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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셋. 해질녘. 빛이 스러져가는 시간. 세상이 어두워지기 직전.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 

그 이름을 단 열차가 있다. 선셋 리미티드. 시속 130킬로미터로 달리는 급행열차. 그 열차에 한 남자가 자신의 몸을 부딪쳐 산산조각내려고 한다. 플랫폼에 뛰어든다. 투신하기 직전, 누군가 그를 붙잡는다. 아무도 부탁하지 않았는데, 누구도 시키지 않았는데.

오늘 아침에 지하철역에서 선생더러 내 품으로 뛰어들어달라고 내가 부탁한 게 아니잖아. (13쪽)

자신을 죽이려 한 이는 사는 동안 아주 약한 것을 믿고 의지해왔노라고 말한다. 그것들이 다 무너졌다고 느낀 이상, 더 살 마음이 없다고. 포기하는 것만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그에게, 그를 붙잡은 이는 포기하지 말라고 한다. 네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건 이미 잃어버린 것 때문이 아니라 잃지 않으려고 하는 것 때문일 수도 있다고. 포기하느니 차라리 죽고 싶은 것 때문일 수도 있다고.

이제는 포기하겠다고 하는 남자는 백, White이고 포기하지 말라고 붙잡는 남자는 흑, Black이다. 부정적인 감정의 더미 속에서 모든 걸 내려놓고 싶어하는 백인 교수와 진창 속에서도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으며 그를 먹이고 달래는 전과자 출신의 흑인 목사. 다분히 의도적이다. 더 많이 가졌고, 더 많이 대우받고, 인종적 차별의 대상이 되거나 편견 어린 시선을 받는 데서 더 자유로울 이가 죽음과 고통과 절망만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내가 사랑했던 것들은 아주 약했어요. 아주 부서지기 쉬웠지요. 나는 그걸 몰랐습니다. 절대 파괴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요. 한데 그렇지가 않더군요. (27쪽)

비록 네가 내 형제처럼 보이지 않더라도 거기 서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지나치지 못하겠다며 계속 말을 거는 Black과 일어나는 모든 일에 의미가 있는 건 아니라며 자신을 내버려두라고 퉁명스럽게 대꾸하는 White. Black은 White의 삶을 계속 땅 위에 붙잡아두려 하고, White는 그런 Black에게 세상이 얼마나 살 필요 없는 곳인지를 끊임없이 역설한다. 차를 마시고 밥을 먹으며 마음을 가벼이 해보려 하지만, 말과 말은 부딪치고, 마음은 깨어진다. 애원하고 부탁해도 White는 떠난다. 무너진 채로 문간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Black을 한 번 돌아보지도 않고.

누구나 우연히 사람들을 만나고, 그중에 어떤 사람은 곤경에 처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그게 우리가 그 사람을 책임져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8쪽)

아무리 단순한 것이라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면이 있기 마련이지. 아침에 열차 플랫폼에는 많은 사람들이 서 있어. 일하러 가려고 기다리고 있는 거지. 백 번은 그랬을 거야. 어쩌면 천 번인지도 몰라. 그건 그냥 열차 플랫폼일 뿐이야. 달리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할 게 없어. 하지만 그 플랫폼 가장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는 한 통근자에게는 그게 다른 걸 수도 있지. 어쩌면 그게 세상의 맨 가장자리일 수도 있단 말이야. 우주의 가장자리일 수도 있고. (84쪽)

이것은 신에 대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구원에 대한 이야기일지도. 그것도 아니라면 고통에 대한 이야기일까? 어쩌면 그 세 가지가 모두 다 같은 건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때까지, 완전히 바닥에 떨어질 때까지 그를 지켜 보다가, 어떻게든 크게 한 걸음을 떼지 않으면 안 되는(51쪽) 상태가 되었을 때 말을 거는 신이라니. 이것은 구원인가, 아니면 고통인가. 나는 쉽게 대답하지 못하겠다.

사실은 나도 White처럼 생각할 때가 많다. 삶이란 고통과 동의어라고. 오래 살면 오래 살수록 고통이 길어진다고. 늙고, 결리고, 부서지고, 퇴화되고, 삐걱거리고, 아프고, 피흘리고, 산산조각나는 육체적 고통뿐만 아니라 잊고, 잃고, 실패하고, 부딪히고, 갑갑하고, 얽매이고, 벗어나지 못하여 스스로를 죄수로 만드는 정신적 고통까지. 살아 있는 이 순간은 죽어 가는 순간이니까, 때로는 지금 내가 살아 있다는 생각 대신 죽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얼마나 더 죽어가야 죽음에 도달할 수 있을까 궁금해한다. 

그래서 또 자주 생각한다. 나는 오래 버티지 못할 거라고. 나뿐만 아니라 이 세상도 오래 지속되지 못할 것 같다고. 그리고 꿈꾼다. 모든 것이 한 번에 끝나버렸으면. 죽어가는 순간이 길지 않았으면. 

세계의 역사를 읽는다는 것은 유혈과 탐욕과 어리석음의 대하소설을 읽는 겁니다. 그 의미는 아주 분명하지요. 그런데도 우리는 미래가 어떻게든 달라질 거라고 상상합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우리가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 것도 신기한 일입니다. 더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 분명해요. (108쪽)

그렇지만 나는 안다. 이런 내 말이 얼마나 비겁한지를. 조금이라도 더 사는 것처럼 살아보기 위해 지금 이 순간도 싸우고 있는 사람들은 고통을 몰라서 싸우는 것인가, 고통스럽지 않아서 싸우는 것인가. 그들이 도달할 곳 역시 패배라면, 질 것이 뻔한 싸움을, 유혈과 탐욕과 어리석음에 조금이라도 덜 잡아먹히려고, 그토록 치열하게 하고 있는 것인가. 죽은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고, 철탑 위에 올라가고, 굴뚝 위에서 밥을 먹고, 차가운 땅바닥 위에 세운 천막을 지키고, 송전탑이 들어설 자리에 당신의 몸을 사슬로 묶고, 자신을 쓰레기처럼 질질 끌고 가려는 이들의 손아귀에 붙잡혀서도 저항하고, 두들겨 맞아도 계속 소리지르고, 말하고, 또 말하고, 또 말하고 있는 그들은, 살아 있는 것인가 죽어가고 있는 것인가.

삶은 긴 가뭄 같거나 긴 빗속 같다. 하지만 그 가뭄이 매일 똑같지도 않고, 그 빗줄기가 매일 똑같지도 않다. 잘 안다. 그래서 나 대신 싸우고 있는 그들에게 감사하고, 그들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낀다. 이것이 나의 삶이다.

그냥 긴 가뭄 같은 거 말이야. 어쨌거나 내 말은 말이오, 설사 겉으로는 그렇게 보인다 해도, 그래도 해가 매일 똑같은 개의 궁둥짝을 비추는 건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한다는 거요. 내 말이 이해가 되쇼? (43쪽)

나의 삶 역시 White의 말처럼 고통의 유대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White에게 그 고통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누군가가 단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가 무無의 희망에 매달리게 된 건 어쩌면 그의 곁이 무無였기 때문은 아닐까. 아니, 정말 이건 바보같은 생각이지만, Black의 작은 아파트를 뛰쳐나간 White의 마음 속에 아주 미미하게라도 균열이 일어나진 않았을까. 자신이 나간 뒤에도 "내가 거기 있을 거야"(138쪽)라고 되뇌이는 Black의 목소리가, White의 머릿속 깊이 자리잡고 있던 무無의 희망에 금을 내진 않았을까.

비록 Black은 White를 붙잡지 못했지만, 그래서 무릎을 꿇고 몸을 앞뒤로 흔들며 울 수밖에 없었지만, 나는 Black이 실패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바보 같았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어쨌거나 그는 알고 있으니까. 두 번 다시 자신에게 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자신이 신의 말을 충실하게 지킬 거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러면 되는 거다. 유대는, 연대는, 함께 한다는 것은 위대하니까. 결국 인간은 함께 해야 하고, 지금 싸우고 있는 이들이 나를 대신해 싸워주고 있음을 알아야 하고, 그러니 함께 싸워야 하고, 그래서 살아야 한다는 걸, Black은 알고 있을 테니까.

댁이 말하는 건 고통의 유대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133쪽)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 아니면 죽는다. (117쪽)


이 책 덕분에 나를 대신해 싸우고 있는 수많은 분들을 떠올릴 수 있어 기뻤고 또 슬프다. 수많은 곳에서, 고통 속에서도 삶을 계속해가고 있는 그들의 시간을 존경한다. White처럼 고통의 유대조차 갖지 못한 채 외떨어진 누군가가 내 주위에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겠다고 생각한다. 더 이상 나아질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확신 속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는 이들이 적었으면 좋겠다고 소망해 본다. Black의 이 말이 맞다, 인간이라면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으니까.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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