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발단은 마르크스였다. 


자본론을 읽기 시작했다. 읽어졌다. 읽어져야지. 먹은 입문서가 몇 권인데. 한 꼭지를 읽고 책을 덮은 다음, 자 이제 한 번 써볼까. 써졌다. 그럼, 써져야지. 제낀 개론서가 한 박스다. 다 쓰고 읽어봤다. 응? 그것은 syo가 여지껏 읽어 본 글 중 가장 형편없는 글이었다. 뭐냐하면, 그냥 글. 이 글은 무슨 글입니까 하고 물으면, 한글이요, 라고밖에 대답할 수 없는 그저 글자들의 집합. 세상에서 제일 못 쓴 자본론 입문서보다 더 못난 글이 여기 있네? 


며칠을 끙끙 앓았다. 나의 독서는 뭐지? 읽을 수 있고 쓸 수 있으나, 정작 읽을 수 없는 글을 쓰거나 읽을 수 있는 글을 못 쓰는 독서. 자연히 쓰는 것도 읽는 것도 지치고 세상 만사가 다 귀찮아졌다. 독서판을 떠날까 잠깐 고민해 보았으나, 돌아보니 여기가 이미 벼랑끝인 걸 가긴 어딜 가.


돌아보면, 이건 옛날에 이미 관측이 가능한 결말이었다. 4학년 1학기를 마쳐갈 때쯤 지도교수님을 찾아갔던 일이다.


교수님, 유학가고 싶어요. 어디로. 교수님 박사하셨던 학교요. 거기 좋지. 네. 근데? 추천서 좀 써주세요. 교수님은 말이 없었다. syo는 식어가는 커피잔을 바라보며 조용히 기다렸다. 학점 관리는 잘 했냐. 네, 저 4점 넘어요. GRE는. 그거 할라고 들면 얼마 안 걸린다고 교수님이 그러셨는데요. 내가? 네. 다시 교수님은 말이 없었다. 커피는 이미 싸늘히 식어 있었다. 넌, 어렵다. 왜요, 저 학점도 좋은데. 넌 학점은 좋지만 깊이가 없어. 네? 넌 학점은 좋은데 깊이가 없다고. 깊이가 뭔데요. 너 지난 학기 때 뭐하고 돌아다녔었냐. 영화..... 그래서 그거 찍었냐? 아뇨, 각본만 하고 전 중간에 나왔죠. 너 이번 학기에는 뭐 한다고 그랬냐. 게임 제작...... 그래서 그거 만들었냐? 아뇨, 막판에 팀이 해체되는 바람에..... 그래서 넌 안 되는 거야, 넌 한 가지에 집중을 못하고, 맨날 일만 벌려 놓기 바쁘지 뭐 성과가 없잖아, 뭔가 하나 하다가도 금방 딴 데 한눈 팔고 그러잖아, 맞아 아냐. ......맞습니다. 그래서 넌, 유학 글렀어, 너한테 추천서 안 써줘. 네...... 그러니까 그냥 우리 랩실 와. 네.....네? 우리 연구실 오라고. 교수님, 전 학점은 좋지만 깊이가 없어서 어렵겠는데요. 아냐, 넌 깊이는 없지만 학점은 좋아서 괜찮아.


결국 유학도 못가고 대신 군대를 갔다. 늘상 이런 식이었다. 대학을 5년 다녔으나 일군 것은 하나도 없고 졸업과 동시에 입대. 군대에서 꿀보직을 받아 시간이 꿀처럼 흘렀으나 역시 일군 것은 하나도 없고 제대. 제 버릇 개나 좀 주지 그걸 못 주고 제대 후에도 이리 기웃 저리 기웃거리기만 하다 결국 자리를 잡지 못하고 현재 실업자 통계에 일조 중. 이런 처참한 인생이 결국은 다 선택과 집중을 할 줄 모르는 데서 비롯되었다는 진단이다. 


독서도 마찬가지다. 마르크스야 그렇다 치고, 뜬금없이 리영희에 루쉰에......


겉보기엔 유익한 다독 욕심 뒤에 숨어 있는 마음이 어떻게 생겨먹었나 한참을 들여다 봤다. 많이 읽으려는 욕심은 많이 가지려는 욕심과 똑 닮아 있었다. 많이 가지려는 갈증이 얼굴을 바꾸어 많이 읽으려는 욕심으로 나타난 것이다. syo는 돈이 없으므로, 곳간에 쌀가마니를 쌓는 대신 두뇌에 정보가마니를 채워놓으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병신이 되고 싶지 않았다. 겉으로는 아닌척 해도 이 나이 먹도록 이룬 것 하나 없는 백수라는 것이 못내 부끄러웠던 거라, 비록 가진 건 없지만 든 건 많으므로 나는 그렇게 후진 사람이 아니라며 스스로의 자존심에 아까징끼를 쳐바르고 살았던 것이다. 아이고, syo야, syo야. 그게 더 쪽팔리는 거야......아이고, 임마.



171011-171019 33권


문학 6권


1. 남아 있는 나날

: 남아 있는 이시구로의 책들이 이미 읽은 책들보다 더 많다는 사실이 행복하다.


2.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 1

3.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 2

: 그 행복감이 사라지고 두려움이 그 자리에 들어섰다. 이시구로, 이러지 마세요. 랜덤으로 책을 펼쳐서 한 챕터씩 읽으나 그냥 읽으나 별 차이 없는 책을 만들다니.


4. 시인의 사물들

: 시인. 한 때는 목말랐으나 이제는 추억 속에 못박아 넣고 먼지만 맞히는데도 아쉬움조차 가물거리는 희미한 그 이름. 아무나 가질 수 없는 이름.


5. 아픈 천국

: 우리가 몸을 잃고 떠도는 유령이라면, 체온을 만나기 위해 세상을 헤매는 괴물이라면, 차라리 서로의 시체를 서로의 가슴에 묻고, 물처럼 불처럼 찬란히 사랑하다 빠져 죽고 타서 죽어도 좋겠다.


6. 우리가 고아였을 때

: K.O.를 노리지 않는 이시구로의 문장. 한 방 없이 이야기를 축적해가는 영리한 전략.




철학 9권


7. 아미엥에서의 주장

: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하나를 꼼꼼히 읽을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다. 번역은 그냥 그런 것 같다.


8. 마르크스주의 철학 입문

: 뭐지, 이 괴물 같은 사람은.거의 세상 모든 학자들의 말을 벽돌로 써서 마르크스주의 철학이라는 집을 지으려 시도한다. 신기하나 산만하다.


9. 에리히 프롬, 마르크스를 말하다

: 그러니까, <경제학-철학 수고>와 <독일 이데올로기>를 열심히 읽으라는 말씀이시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요.


10. 푸코에게 역사의 문법을 배우다

: 선선히 읽어 나갈 수 있는 푸코와 역사. 밀도는 낮다.


11.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

: 이 책의 제목이야말로 <철학하는 여자는 강하다> 같다. 강신주 네 이놈, 여성철학자가 어쩌고 어째? 하는 책이다.


12. 현재의 역사가 미셸 푸코

: 결국 마지막에는 푸코로 푸코를 죽여야 한다. 그말은 곧, 이미 나보다 앞선 많은 사람들이 푸코를 휘둘러 푸코를 죽여놨음을 의미한다. 푸코는 에이즈로 죽었지만 푸코의 철학은 푸코의 철학 때문에 죽었다. 근데 그 철학의 시체가 아직도 다른 말들을 죽이는 데 너무 유용하다.


13. 철학이 필요한 시간

: 철학이 쉬운 건 줄 알았다. 크게 속았다. 


14. 제 2의 성 

: 원전을 읽을 거라면 큰 의미가 없는 평이한 요약서.


15. 흐름으로 읽는 프랑스 현대 사상사

: 좋은 책이다, 이해가 쉽고 설명이 훌륭하다, 이런 평들을 올리시는 분들 참 부럽습니다. 내가 조금이라도 아는 철학자들에 관해서는 동의하는 바가 있는데, 배경지식이 없는 부분은 거의 이해가 잘 안 된다.....




읽기 / 쓰기 7권


16. 우리는 모두 저자가 되어야 한다

: 시키는 대로 하면 나도 막, 막, 저자가 될 수 있을 것 같고 막, 막, 그렇다.


17. 집 나간 책

: 정말 부럽다. 얼굴 빼고 모든 것을 다 가진 당신.


18. 새벽 2시, 페소아를 만나다

: 잘 쓴 알라딘 서재글 같은 책. 그러나 한 건의 실수 때문에 진정성에 살짜쿵 금이 갔다.


19. 글 잘 쓰는 독종이 살아남는다

: 분명 도움은 된다, 되는데, 왜 90%는 똑같은 말로 채워진 책들을 자꾸자꾸 찍어내냐고.


20. 고전과 인생 그리고 봄여름가을겨울

: 많이 읽는 사람들의 글은 각기 참 다르다. 자신의 것을 만드는 데는 쓰기와 읽기가 넉넉히 필요하다.


21. 문학은 노래다

: 도저히 이유를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책이 묻혔으므로, syo의 책 같은 건 태어나기도 전에 묻힌 셈이다.


22. 10권을 읽고 1000권의 효과를 얻는 책 읽기 기술

: 비록 제목은 낚시지만 내용은 충분히 가치있다. 그러니까 syo처럼 읽는 놈들을 나무라는 책인데, 옳다. 느끼는 바가 많다.




인물 5권


23. 리영희를 함께 읽다

: 스승을 만나러 처음 떠나는 길. 좋은 책이지만 사실은 아무 배경지식 없이 읽기에 적합하지는 않은 듯.


24. 한국 현대사의 길잡이 리영희

: 역시 강준만 선생님 스타일. 자료 인용, 자료 인용. 솔직히 방법론적으로 보면 리영희 선생님 다음 자리는 강준만 선생님이라 해도 놀랄 일이 아니다.


25. 리영희 평전

: 딱 이 책까지 읽는 순간, 이제 리영희 선생님의 책을 바로 읽어도 되겠다는 감이 왔다.


26. 역정 

: 자전인데 평전보다 나은 경우가 흔치 않다. 이 경우가 그 경우다.


27. 루쉰 그림 전기

: 참신하지만 장면을 위주로 서술하다보니 흐름이 끊기는 느낌이다. 그럼 재미가 덜한 법이다.




그 외 6권


28. 프랑스 혁명

: 장난하나..... 아무리 입문이고 총서라지만 역사서 쓰는 데는 자격이 필요한 법이다. 피해자 코스프레를 해? 동아시아가 노려보고 있다, 이 영감아.


29. 시사인 525-526

: 손석희 만쉐. 뉴스룸 만쉐. 뉴스공장 대박.


30. 언어 공부

: 언어학 책 주제에(?) 왜 딱딱하지 못하고 웃기는 거야. 니가 이렇게 웃기면 정작 웃겨야 될 다른 책들은 어떡하라고.


31. 엄마는 페미니스트

: 번역된 가즈오 이시구로의 전작을 다 읽고 다음 작가를 찾던 중 이 책을 펼쳤다. 다음이 결정되었다.


32. 글 쓰는 여자의 공간

: 읽고 쓰기가 지겹다는 생각은 읽고 쓰려면 언제든 그럴 수 있는 여유덕에 생겨나는 비만 같은 증상임을 알아채고 나니 슬럼프가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33. 그림 읽는 시간

: 사소하다. 그냥 한 번 피식 웃고 말 책. 





아무튼 그리하여 이런 모자란 짓은 오늘로 땡. 내일부터는 적게, 그리고 깊이 읽는 법을, 그러니까 집중해서 사는 방법을 연마해야겠다. 책탑은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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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7-10-19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많은 책을 읽어내는 쇼님의 눈을 존경하면서 이 긴글을 읽다가 잃어버린 제 눈을 찾아야 할 것아요.. 오른쪽 눈알이 빠진것 같은 데 왼쪽으로 구르는 것 같아요... 찾아서 다시 집어넣으면 내일 다시 쇼님의 글을 포함해서 알라디너님의 좋은 글 읽겠습니다...이만!

syo 2017-10-19 21:24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ㅎ 웃겨라.

좋은 밤 되세요. sprenown님!!

독서괭 2017-10-19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하심 교수님...-_-^
독서에 의미와 목적을 부여하는 것도 좋지만, 그냥 그 자체로 즐기는 게 가장 좋은 거 아닐까요. syo님은 이미 충분히 즐기고 계신 것 같은데요^^

syo 2017-10-19 21:26   좋아요 0 | URL
원래 학생들 다른 대학원 안보내고 붙잡으려고 그래요 ㅎㅎㅎ 대학원은 다들 학부보다 더 좋은데로 지원하거든요 ㅎ

sprenown 2017-10-19 21: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아, 간신히 오른쪽 눈알을 찾았는데, 넣기전에 왼쪽 눈알이 다시 빠지네요..오늘 왠 지랄이야..

다락방 2017-10-19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너무 좋은 글이고 너무나 귀엽습니다 쇼님 ❤️

syo 2017-10-19 22:04   좋아요 0 | URL
어느 포인트가 귀여우셨을까요 ㅎㅎㅎㅎ 감사합니다. 귀여움이 세상을 구원할거예요.

AgalmA 2017-10-20 0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전에 펭귄 클래식판 <공산당 선언> 읽으니 엥겔스와 마르크스가 <독일이데올로기>에 왜 그렇게 열 올리며 집중했는지 이해 됐어요. 하지만 난 <독일이데올로기>책은 없지-,.-....<경제학-철학 수고> 좋다는 말 하도 들어서 준비는 해 놓았으나 언제 읽을지;;; 다들 노벨문학상 받은 이시구로만 관심주고 노벨물리학상 받은 킵손한텐 너무 관심 없어서 저는 그쪽으로 가기로ㅋㅋ 책청개구리~우후후

syo 2017-10-20 07:18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물리는 어려우니까요!! 일년에 평균 한두 권 읽는다는데 킵손은 부담이 크다..... AgalmA님이 읽고 좋은 리뷰해주시면 저도 꼽사리낄래요.

psyche 2017-10-20 0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저의 마음 탓인지 쇼님 글 읽으면서 울컥했네요. 나는 뭔가 나는 왜 읽나 하면서요.

syo 2017-10-20 07:19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왜 읽는 걸까요 이 험한 세상에ㅠ

cyrus 2017-10-20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루쉰’하니까 ‘루쉰P’라는 닉네임의 알라디너가 생각나는군요. 그분도 책을 열심히 읽었고, 정성을 담아서 리뷰를 썼습니다. 루쉰P님이 마지막으로 쓴 글이 <루쉰 전집> 리뷰였어요. 그 이후로 활동이 뜸해요.

syo 2017-10-20 16:05   좋아요 0 | URL
기억납니다. 제 서재에도 댓글 한번 남기셨습니다. 눈탱이 밤탱이 된 주성치 사진을 프로필 이미지로 쓰셨지요.

캐모마일 2017-10-20 1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6. 역정 과 30. 언어공부 읽어보고 싶네요. 소개 감사드립니다.

syo 2017-10-20 16:05   좋아요 1 | URL
별 말씀을요. 즐거운 독서 되세요 캐모마일님^^

블랙겟타 2017-10-20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님의 정성스런 글은 늘 잘 읽고 있습니다. ^^

syo 2017-10-20 16:43   좋아요 0 | URL
ㅎㅎ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뿌듯합니다. 그렇지만 과연 정성스런 글인지는 좀 더 반성해보겠습니다....

블랙겟타 2017-10-20 16:54   좋아요 0 | URL
계속 정성스런 글을 써주십사하는 무언의 압박입니ㄷ.... 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에요 충분히 좋은 글 써주시고 계세요 ㅋㅋㅋ

syo 2017-10-20 16:56   좋아요 0 | URL
앜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