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양의 모양 8
내가 사랑해, 하면, 여자친구는 사랑해, 한다. 나는 그게 참 좋다. 나도, 하지 않는 것. 나도 사랑해, 를 고르지 않는 것. 나는 우리가 그저 ‘사랑할’ 수 있을 뿐, 결코 ‘나도 사랑할’ 수는 없다고 믿는다. 그래서 하나의 “사랑해”가 건너가서 깨끗한 “사랑해”와 닿을 때, 나는 우리가 지금 어떤 거짓말도 하고 있지 않다는 거짓말 같은 말을 기꺼이 믿을 마음이 되고, 우리가 무엇도 착각하지 않고 있다는 착각에 선뜻 빠져들 용기가 생긴다.
나도 사랑한다는 말은 항상 거짓말이다. 거짓말인 줄도 모르고 하게 되는 선하고 귀여운 거짓말이다. 모든 사랑은 지문이나 홍채처럼 저마다 달라서 사랑 인식 방식으로 핸드폰을 잠가도 된다. 아니다, 그건 안 되겠다. 사랑이 지문이나 홍채와 다른 점은 시시각각 그 조성이 변한다는 것. 너를 향한 어제의 내 사랑은 너를 향한 오늘의 내 사랑과 완전히 같지 않기 때문에, 사랑으로 잠근 핸드폰은 그 즉시 영영 풀 수 없는 핸드폰이 된다. 이렇듯 내 사랑도 순간순간이 다른데, 네가 하는 그 사랑을 ‘나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장 많은 뜻을 지닌 다의어는 ‘사랑’이라서, 그 마법의 단어는 발음될 때마다 새로운 의미 하나를 사전에 등재하는 것이다.
어디 사랑만 그럴까. 행복도 그리 다르지 않다.
여기 두 사람이 있다. 그들은 서로를 사랑하고 함께 있을 때 행복하다고 느낀다. 오늘따라 그들은 먹고 싶은 것이 같고, 가고 싶은 데가 같다. 누가 보기에도 우리는 커플입니다, 하는 옷을 약속도 없이 맞춰 입었다. 신발은 사이즈만 약간 다르다. 손을 잡고 길을 걷다 문득 한 사람이 고개를 돌려 상대를 바라보면 상대도 때마침 고개를 이쪽으로 돌리는 중이다. 그럴 때마다 입을 맞추었더니 모든 길모퉁이에 추억이 남았다. 참다 참다 불쑥 사랑한다고 말했는데, 이쪽이 ‘사’를 지나 ‘랑’의 입구에 들어설 때 저쪽도 ‘사’의 문을 열고 나온다. 조금 천천히 말을 맞추었더니 ‘해’에서 두 개의 사랑이 손을 맞잡을 수 있었다. 오늘은 무슨 날인 것만 같다. 둘은 더없이 서로를 원하고 어느 쪽도 오늘은 홀로 집에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엘리베이터가 유독 천천하다. 카드키를 쥔 손도 유독 떨린다. 애써 차분하게 옷을 개켜 놓고, 함께 샤워하며 살짝살짝 서로를 건드린다. 그리고 하얀 시트 위에 한 사람이 올라가고 그 위에 한 사람이 올라가 서로를 바라본다. 금방이라도 불이 날 기세였는데도, 어쩐지 그들은 천천히 오래오래 서로의 눈을 올려다보고 내려다본다. 오늘 참 신기했어, 그치. 응, 맞아. 오늘은 정말 네 맘이 다 내 맘 같았어, 그치. 응, 그랬어. 지금도 그렇지, 그치. 응, 지금도 그래. 나는 너무 행복해. 나도 너무 행복해. 지금 네 맘을 다 알 것 같아. 내 맘이 네 맘이니까. 우리 같은 생각 하고 있는 거지, 그치. 응, 그러니까 이제 말은 그만하고…….
두 사람은 한 사람같이 오늘을 보냈고, 한 개의 공으로 기나긴 랠리를 이어간 테니스 선수들처럼 하나의 마음을 끊임없이 주고받은 듯하다. 그래서 두 사람은 지금 행복하다. 상대가 느끼는 그 행복을 지금 내가 느끼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러나 그건 정말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요즘 A는 되는 일이 없었다. 위태위태했던 프로젝트는 결국 클라이언트의 변덕으로 엎어졌다. 처음부터 A가 반대했던 일이었다. 일단 시작하면 어떻게든 되게 되어 있다며 자기만 믿으라던 부장은 말을 바꾸었고, 프로젝트의 실패에 A의 지분이 크다는 소문을 내고 다닌다. 지난 반기 고과가 예상보다 낮게 나왔는데 이번 반기도 반등은 어렵겠다고 생각하니 한숨이 나왔다. 집에는 당장 돈이 들어갈 환자와 학생이 하나씩 있다. 열심히 일하지만 생활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다. 빚내서 집 사는 꼴 보니 조만간 큰일 치겠다 싶었던 친구가 집값 상승으로 앉은 자리에서 빚을 다 청산하고도 연봉의 몇 배를 남겼다는 소식이 들린다. 주식과 코인을 이야기하며 세상을 정복한 듯한 표졍을 짓는 친구도 있다. 반면 A의 통장 잔고는 조금씩 내리막을 타고 있다.
그렇지만 A는 지금 더없이 행복하다. B와 함께 있는 이 순간 세상 모든 근심이 녹아 사라진다. 더없이 행복해 보이는 B의 눈빛 속에 역시 그만큼 행복해 보이는 A 자신의 얼굴이 비친다. 지금 우리의 세계는 여기 딱 이 공간뿐이야, 이 안에는 행복한 나와 행복한 너만 있어. 다른 것들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아. A는 B를 느끼느라 다른 그 어떤 것도 느낄 여력이 없다. A에게 행복이란 두 사람을 제외한 세상 모든 것들에 괄호를 치는 순간에 느껴지는 충만한 감정이다.
사실은 B 역시 우울의 기나긴 터널을 지나는 중이었다. 터널의 입구는 아마도 오래 만나던 연인이 제일 친한 친구와 손을 잡고 B의 인생에서 퇴장해 버린 바로 그 지점이 아니었을까, B는 생각했다. 그때부터 세상이 내미는 모든 손이 B에게는 칼날을 숨긴 손처럼 보였다. 순수한 호의나 배려였을 것들을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받아들이더라도 오래 망설인 뒤였다. 망설이는 사람에게 끊임없이 손 내미는 세상은 없었다. B는 자기가 자초한 고립 속에서 낫지도 않는 상처를 핥으며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것 봐, 결국은 다 이렇게 될 거였어, 끝까지 같이 가는 사람은 없어, 변하지 않는 눈빛은 없어. 웅크리면 웅크릴수록 B는 작아졌다. 작아지고 작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 B는 세상에 자기 자리가 없어졌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B가 어디에 있건 세상은 하나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건 내가 없어져도 마찬가지겠지? B는 그렇게 조금씩 없어지는 중이었다.
그렇지만 B는 지금 더없이 행복하다. A와 함께 있는 이 순간 이 세상에서의 내 자리를 되찾은 것만 같다. A와 함께 있으면 세상이 둘을 중심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열심히 그들을 지켜보고 그들을 위해 많은 기적과 우연을 준비해주는 것 같다. 이제는 가끔 혼자 있는 시간에도 분명히 세상에 속해 있음을 느낀다. B에게 행복이란 두 사람을 위한 자리가 세상에 버젓이 마련되어 있음을 발견하는 순간에 느껴지는 충실한 감정이다.
지금 이 순간 그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행복하지만 같은 행복 속에 있다고 착각한다. 그 착각은 서로를 더 가까이 붙들어 놓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진실보다 가치 있다. 우리에게 지금 우리가 같은 마음인지 아닌지를 정확히 따져 밝혀내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건 불가능한 만병통치약을 만들어 보겠다며 효과 있는 플라시보를 공개하는 짓에 가깝다. 효과, 그게 전부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냥 그렇다는 믿음, 내가 믿는 것을 너도 믿는다는 그 믿음의 믿음, 여러 겹으로 엉키어 있어서 허물려고 해도 도무지 쉽지 않은 믿음의 중첩, 그냥 그런 것들이다.
--- 읽은 ---
168.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
김금희 지음 / 창비 / 2021
「너무 한낮의 연애」를 처음 읽었을 때쯤의 내 연애는 너무도 아니고 딱히 한낮도 아니었던 것인지, 별 감흥 없이 으응 좋네 으응 하고 넘어갔다. 좋은데 난리칠 정도는 아닌데? 그렇게 미지근하고 떨떠름한 기억으로 김금희의 이름을 묻어두고 살던 어느 날, 뜻 없이 다시 읽는데 눈물이 또르르 흐르더니 이내 마지막 장면에서는 어쩐지 목놓아 오열하면서 앞으로는 김금희라고 부르지 않고 금희누나라고 부르겠다는 맹세를 하게 되었다는 슬픈 전설이 전해집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감상의 극적 대전환을 일으킬 만큼의 내적/외적 변화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냥 그렇게 되었던 것. 나는 소설을 잘 못 읽는 것인가, 세차게 고민했으나 그냥 그렇게 되먹은 것으로. 그러니까 대체로 한 번 읽어서 좋았던 소설이 다시 읽으면 너무 좋은 소설이 되어 자꾸 작가님을 형아 누나 상영이로 부르게 되는 병에 걸린 것입니다.
수록작 중 하나인 「기괴의 탄생」을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2020>에서 처음 만나 읽었을 때, 이게 뭐야, 금희누나가 왜 이랬어, 누나……. 이런 느낌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다시 읽으니까 꽤 좋았다. 표제작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 역시, 한 번 읽고 덮어두었다가 며칠 뒤에 다시 읽었더니 훨씬 좋았다. 일독에서 아, 별 넷인건가- 했다가 재독으로 역시, 그럼 그렇지, 금희누나가 잘못할 리 없어, 잘못은 모두 syo에게 있어- 하며 웃는 낯으로 당당하게 별 다섯 꽝꽝.
그나저나 이런 식이면 앞으로 책을 무조건 두 번씩 읽어야 한단 말인가. 얼른 이 병을 고쳐야 한다.
‘희부윰’, ‘형질’이라는 단어를 세 번 이상 만난 것 같다. 누나가 근래 좀 꽂힌 듯.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하고 묻자 아이는 박자를 맞춰가며 예준아, 안녕, 방학 잘 보내,라고 대답했다.
"그건 어제 편지에도 썼잖아. 다른 말 없어?"
나는 아이가 다른 단어들을 떠올리기를 재촉하며 기다렸다. 아이는 입술을 내밀고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니까 친구에게 정말 하고 싶은 다른 말이 없는지, 친구에게 묻고 답을 듣고 싶은 특별하고 색다른 말은 없는지 고민하면서. 얼마 동안 생각하던 아이는 없어,라고 말했고 나는 몇번이나 그랬던 것처럼 안녕이라는 단어를 점점이 찍어 색칠공부 책에다 썼다. 안녕이라고, 안녕하라고, 잘 보내라고, 그러다 자꾸 붙들려들어가 생각하게 되었던 원미우동을 떠올렸고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내게는 어떤 기회가 있었던 걸까. 그러니까 그건 내가 어떻게 다르게 흘러가게 할 수 있는 여름이었던 걸까. 죄의식이 밀려올 때마다 강하게 부정해왔지만 아이의 부탁으로 그 말을 적어보던 그 순간, 나는 아이가 옳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안녕,이라는 말이야말로 누군가에게 반복해서 물을 수 있고 그렇게 물어야만 하는 일이라는 것, 비록 이제는 맞은편에 앉아 있지 않은 사람에게라도 물을 수 있는 일이라는 것, 그것이 일산의 여름을 지켜내는 일이라는 걸.
_ 김금희, 「우리가 가능했던 여름」
169. 매일 10분 왕기초 영문법의 기적
키 영어학습방법연구소 지음 / 키출판사 / 2017
나에게 반드시 구멍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심심파적 삼아 후루룩.
170. 어른의 교양
천영준 지음 / 21세기북스 / 2021
교양이 없어서 교양 없는 짓을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대체로 교양 없이 구는 인간들은 교양 없이 굴어도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교양 없이 구는 것이다. 그러니까 교양있는 어른이 되는 방법은 교양을 쌓는 것보다 어디서나 교양 있게 굴어야지 하는 마음을 먹는 것이다. 그런데 그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세상에는 나를 빡치게 하여 교양이고 나발이고 저걸 그냥 확 그냥 막 그냥 하게 만드는 인간이 천지다. 그런 사람들 앞에서도 교양있게 굴라고? 그러나, 내게 교양 없이 구는 인간들도 붙잡고 물어보면 그건 네가 먼저 나를 빡치게 하여 교양이고 나발이고 개나 줘버리고 싶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똑같다. 그러니까 그런 경우에도 교양 있게 날카롭고 교양 있게 당당한 인간이 되려는 굳은 마음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결국 교양을 쌓긴 쌓아야 한다. 그러니까 “교양->교양있는 사람”의 2단계가 아니라 “교양->교양에의 의지->교양있는 사람”이라는 3단계 구조임을 명심하면서 교양을 쌓아야겠다. 가운데 과정이 없으면 교양이란 결국 교양 없는 짓을 똑똑하고 폼나게 하기 위한 탄약보급 정도에 그칠지도 모른다.
이 책이 타인에게 교양있게 구는 법을 가르치는 책은 아니다. 저 교양은 그런 교양이 아니다. 하지만 어쩐지 요즘 syo는 모든 철학이 결국 윤리학/정치학 같고, 윤리학/정치학이 되지 못하는 철학은 그래서 뭐 어쩌라고 싶다.
지성인들은 있는 그대로의 현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개념'을 본다. 어딘가에서 한 번쯤 들어본 풍월, 책으로 익힌 이론 등이 얽히고설켜 그들이 세상을 인식하는 틀이 된다. 그리고 그 틀을 통해 얻은 지적 우월감으로 남을 가르치고 이끌려고 한다. 그래서 배운 사람일수록, 전문 분야가 있는 사람일수록 스스로 더 많은 편견과 아집에 싸여 있음을 인정하고 살아야 한다.
_ 천영준, 『어른의 교양』
171. 팬텀 이미지
정지돈 지음 / 최지수 그림 / 미메시스 / 2018
대한뉴스에서 바버라 존슨이 상을 받고 기념 사진을 찍는 모습을 봤다. 정장을 입은 공무원이 바버라 존슨과 아서 존슨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섰다. 아서 존슨은 대머리였고 안경을 쓰고 있었다. 콜라를 마시는 미셸 푸코 같아요. 아서 존슨의 사진을 본 상우가 말했다. 상우는 경주에 가고 싶었지만 경주 맛집을 검색한 뒤 싫어졌다고 했다. 한기는 경주까지 뒤로 걸어서 가고 싶다고 말했다. 왜요? 길티 플레져예요. 한기가 대답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내가 묻자 한기는 제 길티 플레져는 뒤로 걷는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나는 무슨 맥락에서 나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설명을 요구하자 한기는 죄송합니다, 제가 이상한 거 같아요, 은진이도 저보고 아무 말이나 하지 말래요, 라고 말했다. 은진은 한기의 아내다. 나는 한기에게 아내가 있다는 사실에 가끔 놀란다.
_ 정지돈, 최지수, 『팬텀 이미지』
바로 이거다, syo의 제한된 상상력과 고착된 장르 포용능력 때문에, 정지돈을 읽으면 매번 대체 이 문장들이 “무슨 맥락에서 나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설명을 요구하고 싶지만, “죄송합니다, 제가 이상한 거 같아요”라는 대답 말고, 아니 넌 대체 어떻게 이것조차 이해하지 못하니, 라는 타박이라든지, 이해요? 당신은 이해가 무엇인지 진정 이해하고 있습니까, 하는 역공을 당할 것 같아서 물어보지도 못하고, “아무 말이나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입을 다문다. 그러면서도 계속 정지돈을 읽는 것이 나의 길티 플레져인가? 하여간 뒤로 걸어서 경주까지 가는 기분이다. 이야기가 어디로 가는지 도무지 앞이 보이지 않고, 내가 읽었다고 느끼(기만 하)는 것들이 휙휙 내 앞으로 지나가는 기이한 독서.
--- 읽는 ---
내 언어에 속지 않는 법 / 허새로미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 / 오혜진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 / 어슐러 르 귄
메리, 마리아, 마틸다 /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메리 셸리
내 주위에는 왜 멍청이가 많을까 / 장 프랑수아 마르미옹
무사시노 외 / 구니키다 돗포
수학이 만만해지는 책 / 스테판 바위스만
알랭 바디우: 진리를 향한 주체 / 피터 홀워드
핏빛 자오선 / 코맥 매카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