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의 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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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2

 

마지막 졸업 이후로 누구도 나를 공부시키지 않았다. 이제 공부를 하려거든 알아서 해야 했고, 잘하고 있는 건지 확인할 수 있는 중간고사도 없었으며,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 건지 알려주는 사람을 만나기는 더없이 힘들었다. 공부는 평생 하는 거야- 하는 허망하고 위압적인 말, 이게 다 공부야- 하는 기만적이고 자포자기적인 말들이 가득한 이 세상에, 정작 내가 무슨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누구도 도움 되는 말을 해주지 않는 깜깜한 시대가 도래했다.




3

 

뭐하냐고 물어오면 공부한다고 대답하는 때가 많았다. 서른이 넘어서도 그랬다. 전 여친은 선생님 남자친구는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묻는 학생들에게, “늦게까지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대답했다며 웃었고 나를 웃겼는데, 실은 그게 웃을 일이 아니었다는 걸 우리 두 사람이 이미 알았다. 늦게까지 공부하는 일은 훌륭한 일도 아니었고, 웃어넘길 일조차 아니었다.

 

사실 딱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말이 너무 길고 절절해서공부한다는 줄임말을 대신 쓰는 일도 많다. 그럴 때 공부는 자체로 어떤 목적이 아니라 어딘가에 도달하기 위해 거쳐야 할 터널 같은 것이 된다. 터널은 원래 어둡고, 그 속에서 울면 울음소리가 크게 울린다. 그러면 꼭 공부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아무것도 아닌 나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를 감추기 위해 찍어 바르는 두터운 분 같다.




4

 

공부가 업이고 본분이던 시기에는 그렇게 학을 떼던 사람들도, 단지 그때를 지나왔다는 이유만으로도 공부라는 낱말의 무늬에 어떤 매력을 느끼는 것 같다. 마음 공부, 인생 공부, 돈 공부…… 세상에 있는 이렇게 많은 공부들이, 왜 공부로 불리는지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마음 연구, 인생 탐구, 돈 학습이 아니라 다 공부라는 꼬리를 달고 있는 이유. ‘공부만큼이나 사람들을 올챙이 적 생각 못 하는 개구리로 만드는 마법의 단어가 없다. 공부는, 하지 않아도 누가 뭐라고 하지 않을 때 하고 싶고 또 해야 하며 그래야 남은 인생이 어떤 방식으로든 아름답고 향기로워진다며 끊임없이 자기에게 거는 주문의 고갱이다.




5

 

나도 나만의 공부가 가지고 싶지만, 해 아래 더는 새것이 없는 법이어서, 세상 모두를 깜작 놀래킬 독창적이고 신통방통한 공부를 찾는 것은 이제 불가능하다. 그저 이 시대의 이런 공부, 저 사람의 저런 공부 가운데 닮고 싶은 것들을 조각조각 훔쳐내 서툰 바느질로 기워낼 수 있을 따름.


 

 

소크라테스 이전에 나타났던 그리스 사상의 또 다른 조류에 대해서도 철학 이전의 철학을 논할 수 있다. 이는 그리스적 정신, 교육과 양성에 대한 욕망, 그리스인들이 <파이데이아paideia>라고 불렀던 것에 대한 근본적인 요구와 관련된 이론과 실천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호메로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고대 그리스 이래로 청년 교육은 귀족 계급 밑 <아레테>를 지닌 자들의 크나큰 관심사였다. 아레테는 고귀한 혈통의 후예들에게 요구되었단 탁월성으로, 훗날 철학자들에게서 덕, 다시 말해 영혼의 고매함으로 변하게 된다. 우리는 도덕적 훈계를 모아 놓은 테오그니스의 시를 통해 이러한 귀족적 교육에 대해 알 수 있다. 이 같은 교육은 사회적 집단 체제 내에서 어른들에 의해 주어졌다. 이 안에서 젊은이들은 신체적 힘, 용기, 의무감, 전사에게 걸맞은 명예심 등의 자질을 고양하는 데 힘썼으며, 그들이 귀감으로 삼았던 위대하고 거룩한 조상들은 이 같은 자질들의 화신이었다.

_ 피에르 아도, 고대 철학이란 무엇인가

 

존재양식으로 세계와 관계를 맺고 있는 학생들은 학습과정에서 전혀 다른 특질을 보인다. 우선 그들은 첫 강의부터 백지상태로 참여하지는 않는다. 그 강의가 다루는 주제를 미리 고찰하고 특정한 문제와 의문에 대해서 골몰한다. 그들은 강의주제를 놓고 이미 씨름한 바가 있어서 그것에 흥미를 느낀다.

  그들은 그저 수동적으로 낱말과 사상을 수신하지 않고, 경청하며, 듣는 데에 그치지 않고 능동적이고 생산적으로 수용하고 대응한다. 그들이 들은 것은 그들 고유의 사유과정을 자극한다. 새로운 의문, 새로운 관념, 새로운 전망이 떠오른다. 경청행위는 그 자체로 살아있는 과정이다. 학생은 선생이 말하는 어휘들을 수용하고 그것에 대응하면서 생기를 얻게 된다. 그가 습득한 것은 단순히 집으로 들고 가서 암기할 수 있는 그런 지식에 그치지 않는다. 모든 학생은 자기 나름대로 충격을 받고 변화한다. 강의를 들은 후에는 그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된다.

_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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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해서 뭐가 되는 것보다, 공부하는 뭔가가 될 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끼는 요즘이다. 공부하기 위해서 공부 거리를 찾아다니는 삶을 한심하게 여기는 사람들로부터 숨어 지내는 지하생활자가 나쁜가? 하나의 삶이 그 존재 자체만으로 다른 형태의 삶을 공격할 때가 있다. 그럴 때 다수가 선택한 삶의 형태는 힘이 세서, 잔 펀치 한 방으로도 치명상을 입힐 수 있다. 도덕도 경제도 사회도 문화도 모두 그들과 함께다. 공부하기 위해 공부하는 사람들은 공부 속으로 더 깊이 더 멀리 도망친다.

 

하지만 어떤 삶을 선택해도, 언젠가 반드시 도망쳐야 하는 때는 온다. 시간은 누구의 편도 아니기 때문이다. 공부하는 사람들은 도주로를 만드는 사람들이다. 도주로는 돈을 주고 살 수는 없다. 그저 돈을 주고 샀다고 착각할 수는 있다. 착각이 달아나는 순간 허무가 찾아올 것이고, 인간이 감당해야 할 허무의 총량은 어마어마하여, 한순간에 허무가 총량으로 육박해 올 때 삶을 견뎌낼 수 있는 초인은 몇 없을 듯하다. 범인은 매일 조금씩 그 허무를 나누어 감당하는 편이 좋을 수 있다. 공부하는 사람들은 그런 길을 걷는 것 같기도 하다.

 

 

 

--- 읽은 ---

 


165. 삶의 무기가 되는 자본론

시라이 사토시 지음 / 오시연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1

 

‘~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개념체계들은 모두가 다 삶의 무기고다. 베지 않기 위해 태어난 칼이 없듯이, 무기로 쓰이지 않기 위해 태어난 체계는 없다. 철학 역시 마찬가지라서, ‘삶의 무기가 되는이라는 수식어는 사실 중언부언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그런 말이 울림을 가지고 소비자에게 다가오는 건, 개념들이 삶과 유리된 추상적이고 허망한 것들이라는 인식이 세상을 정복했다는 뜻이겠다. 그래서 개념과 삶을 다시 연동시키려는 시도는 자체로 가치가 있다. 단지 저자가 이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지가 문제인 것이다. 그간 읽은 무기운운하는 제목의 책들은 대체로 허접했다. 승진, 혁신, 판매량 제고, 신임 얻기, 자기 표현, 인정 받기…… 이른바 성공의 요소이거나 증거가 되는 것들을 취득하여 경쟁 사회에서 남다른 존재가 되는 것, 그런 것을 이라고 상정하고 쓴 책들 속의 무기, 삶에 대해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이 쓴 책 속의 무기들과 같은 원료를 가지고 만들어도 모양이 다를 수밖에 없었고, 나는 그 무기를 휘두를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 그러니까 이런 제목의 책을 읽을지 말지 저울질 할 때, 제일 먼저 고려해야 하는 것은 무기가 아니라 인 것이다. 이 책은 자본론이라는 무기로 신자유주의라는 삶의 모델을 겨냥한다. 신자유주의가 곧 우리네 삶인 이 세상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사실은 사실이므로, 그 삶과 싸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이 어떤 무기를 제공하는지 한번 살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독서의 방향은, 자본론을 어떻게 휘두를 것인가 보다, 자본론을 무기로 쓰는 저자의 방식을 공부해서 자본론이외의 책도 무기화하는 역량을 획득하는 것이 되겠다. 

 

자본의 종속 공세에 아무 반격도 하지 않으면 인간의 기초 가치는 점점 떨어질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세계를 점령한 과거 수십 년간 그 일이 진행되었다. 인간의 기초 가치를 낮추고 자본에 봉사하는 능력으로 인간의 가치를 결정한다. 그리고 능력이 없으니까 자네의 임금은 이게 다야. 이걸로 가치에 준한 등가교환을 한 거니까 불만 없지?’라고 압박한다. 그 공세에 맞서려면 인간의 기초 가치를 믿어야 한다.

  우리는 사치를 더 누릴 권리가 있다고 확신해야 한다. 사치를 누리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풍요로워야 한다. 우리는 모두 그럴 자격이 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에 종속되고 그 가치관에 길든 주체는 그 점을 잊어버린다. 이 망각을 강제하는 것이야말로 신자유주의의 가장 큰 성과였을지도 모른다.

_ 시라이 사토시, 삶의 무기가 되는 자본론

 

 

 

 


166. 10대를 위한 나의 첫 고전읽기 수업

박균호 지음 / 다른 / 2021

 

10대 때를 생각해봤다. 이 책 속의 고전들은 당연히 그때도 있었고 역시 당연하게 그때도 고전이었다. 문제는 접근성이어서, 10대의 syo는 이런 고전들을 몰랐거나, 알았어도 걔들은 당최 읽고 싶지 않게 생겼었다. 읽고 싶지 않게 생긴 책들을 일단 읽게 만들려면, 누군가 미리 읽고 흥미로운 지점들을 발견해 꺼내놓은 책들, 그러니까 책의 책이 필요하다. 20대의 syo가 독서의 판을 키우고 영역을 넓힐 때마다 도움이 되었던 책들이 있었다. 그래서 이 책이 고전을 모르는 아이들, 혹은 고전에 고전하는 아이들에게 어떤 의미가 될지, syo는 체감에 가까운 예감이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책에서 멈추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아무리 박균호 선생님이 독서의 달인이라고 해도, ‘책의 책은 어떤 책을 읽은 이의 가치관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 하나의 책에서 무엇을 읽어낼 것인가를 결정하는 의지, 생각거리를 발굴해내는 눈, 내가 읽은 책의 어느 부분을 얼마만큼 골라 내가 쓸 책에 실을 것인지를 결정하는 손가락, 그 모든 것에 작가의 세계관이 묻어 있고, 그 결과 모든 책의 책은 하나의 예시에 그친다. 그렇지만 두꺼운 책보다 얇은 책을 읽고 싶은 마음, 어차피 다 기억하지도 못할 거, 정리된 중요한 것들만 읽고 싶은 유혹을 떨쳐내기는 쉽지 않겠지. 모르긴 몰라도 박균호 선생님 역시 이 책을 쓰시며 그게 가장 큰 고민이었을 듯. 어떻게 아이들을 고전 앞으로 달려가고 싶게 만들 것인가. 그건 참 중요하면서도 무시무시한 질문이다.

 

 

 


167. 비트겐슈타인 철학으로의 초대

박병철 지음 / 필로소픽 / 2014

 

- 일독(xxxxxx) / 재독(xxxxxx) / 삼독(1712xx) / 사독(191101)

- 오독(210516)

 

딱히 이 책이 위대하여 다섯 번이나 읽은 것은 아니다. 그저 멍청한 syo가 있었을 뿐. 확실히 비트겐슈타인 개론서 가운데 가장 쉽다. 그래서 까먹고 다시 보고 까먹고 다시 본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만 봐야지. 다섯 번은 진심 과했다.

 

 

 

--- 읽는 ---


팀 하포드의 경제학 팟캐스트 / 팀 하포드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 / 오혜진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 / 김금희

시녀 이야기 / 마거릿 애트우드

생전 유고 ­ 어리석음에 대하여 / 로베르트 무질

을의 민주주의 / 진태원

문명과 혐오 / 데릭 젠슨

어른의 교양 / 천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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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16 16: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5-16 16: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난티나무 2021-05-16 1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잔 펀치 한 방에 치명상을 입지 않기 위해!!!

syo 2021-05-16 20:01   좋아요 0 | URL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고, 잔 펀치가 진짜 무섭잖아요. 깨달았을 때는 이미 빈사....

북다이제스터 2021-05-16 1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구는 단어 무게가 만만치 않아 상대적으로 편한 공부란 단어를 사용해 봅니다. ^^
오늘도 세상이 뭔지 열심히 공부해 봅니다. ㅎㅎ

syo 2021-05-16 20:02   좋아요 0 | URL
북다님께 공부와 연구가 그런 개념이라면, 사실 북다님의 읽기 쓰기는 이미 연구에 가깝지 않나 합니다 ㅎㅎㅎ

뒷북소녀 2021-05-17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번에 해당하는 사람 여기 한명이요! 이렇게 말하고 싶지만...
제대로 하고 있는게 하나도 없어서요.

syo 2021-05-20 20:02   좋아요 0 | URL
사람이 다 비슷한가 봐요.
그럴 때는 소소하게나마 위로가 되기도 합니다 ㅎㅎㅎㅎ
힘내자구요^-^

유부만두 2021-05-21 07: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얼마전 철학책을 몇 권 샀잖아요. 샀다고요. 그런데 펼치기 까지 또 몇 년 걸리겠죠, 아마.

syo 2021-05-21 09:15   좋아요 1 | URL
제 책장에도 2011년에 호기롭게 구매하고 10년째 책등만 쓰다듬느라 빛이 바랜 철학책이 한권 있습니다. 그치만 이번 생에 읽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허망하지만은 않을 것 같아요......

초딩 2021-06-04 22: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철학으로의 초대 담고 갑니다 ^^
그리고 5월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syo 2021-06-04 23:33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ㅎㅎㅎㅎ 신나네요^-^>

새파랑 2021-06-04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늦었지만 완전 축하드려요. 독서 천재 syo님~!!

syo 2021-06-04 23:34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 ‘천재 syo‘는 형용 모순입니다.
syo의 s가 stupid의 s라는 믿을만한 소문이 있습니다 ㅎㅎㅎ

감사합니다, 파랑님 ㅎ

이하라 2021-06-05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

syo 2021-06-08 12:48   좋아요 0 | URL
ㅎㅎㅎ 늦었지만 감사드립니다^-^

초란공 2021-06-05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공부왕 syo님 축하드립니다~ 생계와 도주로 사이를 고민하는 요즈음입니다.. ^^;;

syo 2021-06-08 12:4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초란공 님.
초란공님의 고민이 글로 화하여 제게 많은 배움이 되겠지요. 기다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