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적놈과 도적놈 심보
1
감기의 정점에서는 아무 약도 약발이 안 받듯, 슬럼프도 정점에서는 백약이 무효다. 그러다 그 맹렬한 기세가 한풀 꺾인다 싶으면 그때부터는 이런저런 처방을 시도해 볼 수 있게 되고, 재수 좋으면 즉시 깔끔하게 털고 일어나기도 한다. 그런 상황에서 쓰는 약으로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나보다 나은 놈, 나보다 못한 놈, 그리고 미친놈. 이번 시간에는 미친놈으로 한번 슬럼프를 치료해보자.
그는 옥중에서 죄수들을 상대로 『맹자』를 강의했다. 이 강의는 1855년 12월 보석으로 풀려난 후에도 친족과 찾아오는 청년들을 상대로 자택에서 1857년 6월까지 계속되었고, 그 내용은 저 유명한 『강맹차기』로 정리되었다.
남을 가르치는 데 그친 게 아니었다. 14개월의 수감 기간 동안 독서에 열중해 554권의 책을 독파했다. 출옥 후에도 1856년에 505권의 책, 1857년에 385권의 책을 읽어제쳤다. 고향에 돌아온 후 3년간 약 1500권의 책을 읽어냈으니 가히 독서광이라 할 만하다.
쓰기도 열심히 썼다. 『유수록』, 『노야마옥 문고』, 『회고록』등 45편의 저술이 이 3년간 쏟아져나왔다. 『맹자』에 이어 『일본외사』, 『춘추좌씨전』, 『자치통감』 등 일본과 중국의 역사서 강의가 이어졌다.
_ 박훈, 『메이지 유신을 설계한 최후의 사무라이들』
막부 말, 체제변동의 중심부에서 사상을 생산하고 새 인재를 기르던 인물로 유명한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이야기다. 1830년에 태어나 1859년에 죽었다. 저 때는 우리 나이로 26살.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완전 애기다! 애기는 영어로 baby다.
우리 쇼인이 몇 짤 먹어떠요? 스물여섯 개 먹어떠요? 아코 겁나 귀여워. 솜털 보송보송. 연애는 좀 하니?
라고 묻기가 무서울 정도의 도른 젊은이 요시다 쇼인. 강의까지 했다는 걸 보니 사무라이 용 옥사라는 건 수감시설이라기보다는 문화시설에 가까웠던 듯. 그래도 분명히 쾌적하지는 않았을 텐데, 강의하는 와중에 554권을 읽었다고. 연평균 500권쯤 읽는 모양이다. 젊은이, 좀 읽는데?
그걸로 모자라 3년간 45편의 저술을 썼다고 하니, 강준만 선생님도 혀를 내두를 생산력이 아닐 수 없다. 심지어 쇼인이 너네 집에는 인터넷도 안 들어오잖아…….
아, 정말 너무 부끄러워서 고개를 못 들겠다. 열 살도 더 어린 친구가 저렇게 치열하게 사는데, syo야, 넌 슬럼프나 운운, 지금 대체 뭐 하는 거니? 형아가 돼가지구서는 모범은 보이지 못할망정…….
2
솔직히 말하기로 한다.
어젯밤 11시. 자리에 누워 코니 월리스의 단편집 『화재감시원』을 시작했다. 2019년 개정 전 출간된 책이어서 첫 작품은 「리알토에서」. 음, 코니 월리스는 처음인데. 리알토는 어디일까?
아, 리알토. 거기가 어디인지는 몰라도 겁나 지루한 곳이었고 나는 졸았다. 리알토에서는 뭔가 진행되는 게 없으며 그저 온통 카오스였고 나는 졸았다. 양자역학적 일상이라는 것이 이런 느낌일 수 있겠구나 싶었고 나는 졸았다. 자꾸자꾸 졸았다. 낮에 우산을 들고 바짓단을 적시며 자박자박 걸었던 빗길이 총 일만이천 보였다. 그래서 그런가? 원래 잠드는 시간까지 4시간 30분이 남았건만…….
어찌저찌 리알토가 마무리되자 다음 등장한 작품은 「나일강의 죽음」. 아, 리알토만 거쳐오지 않았어도 안 죽고 버틸 수 있었을 것 같은데. 들고 있던 아이패드를 놓치기를 두 번. 나는 이럴 바엔 그냥 자기로 하고 불을 껐다. 나일강에서 마침내 나는 죽었다.
덕분에 푹 자고 개운한 아침을 맞이했다. 7시에 일어나 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조록조록 내리는 빗소리. 아침에 어울리는 커피 향. 달콤한 딸기 요거트 한 컵. 그리고 읽다만 「나일강의 죽음」. 아…….
개정판의 목차를 보면, 걸작이라 불리는 「내부 소행」이 맨 앞으로 와 있다. 뒤따르는 작품은 표제작 「화재감시원」이다. 리알토와 나일강은 책 가장 뒤쪽으로 좌천당했다. 그렇게 개정한 찐의도야 알 길 없지만, 결과적으로 탁월한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빗속의 일만이천 보가 없었더라도 맑고 깨끗한 정신상태로 리알토를 지나오긴 힘들었을 것이다.
3
며칠 전 도적맞은 7만 원 상당의 책 택배에는 티머시 스나이더의 『피에 젖은 땅』이 들어있었다. 리뷰 대회에 참가하려고 산 놈이었다. 그걸 가져가다니 범인은 리뷰대회 참가자 중 한 명이 틀림없다, syo의 참가를 방해하려고 치밀하게 범행을 저지른 것이다, 심지어 그 동기를 숨기기 위해 애꿎은 하인즈 케찹 1.25kg까지 함께 가져가는 용의주도함을 보였다, 결국 내가 도둑맞은 것은 고작 7만 원이 아니라 리뷰 대회 1등 상금 40만 원인 셈이다- 뭐 이런 식으로 징징거렸다. 4만 원짜리 책을 두 번 살 건 아니어서 대회 참가는 물 건너간 모양이니 너스레를 떨어본 것이다. 아, 내가 참가만 했으면 40만원인데, 참가를 못 하네?
그랬더니 그 말을 듣고 있던 친구가 기프티북을 쐈다. 선물 메시지에는 “1등 아니면 안 돼, 오직 1등뿐”이라는 짧은 협박성 격려와 함께 4만 개에서 40만 개 사이쯤 되어 보이는 느낌표가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어제 내게 두 번째 『피에 젖은 땅』이 도착했다. 아, 이제는 도망칠 데가 없는 것이다. 나는 이제 저 800페이지짜리 두꺼운 책을 읽고 리뷰를 쓸 모양인가 보다. 피로 쓴 리뷰, 아주 피에 젖은 리뷰를 써서 40만 원을 쟁취해야 한다. 도적이 보아라. 내 네가 리뷰대회에서 1등 하는 꼴을 볼 수는 없다. 그건 정의가 아니까. 그러니까 정의롭게 1등은 나여야만 해…….
출판사 관계자 여러분 보고 계신가요…….
4
정작 리뷰도 안 써놓고 1등 내놓으란다. 도적놈이 여기도 있네.
--- 읽은 ---
128. 안나 카레니나 1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 윤새라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1
친구와 나란히 읽으며 가끔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결론은 늘 톨스토이 겁나 잘 써-로 요약된다. 사실 그건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이야기라서, 이게 다라면 읽고 나서 얻은 게 하나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그게 다는 아니다. 절대 아니지.
이 대목을 한번 봐 보자구요.
봐 보기 전에 앞 상황을 요약하면 이렇다. 레빈은 키티에게 청혼했다가 까였다. 왜냐하면 키티는 브론스키를 좋아했고 브론스키도 자기를 좋아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한 데는 키티의 어머니인 공작부인의 역할이 컸다. 공작부인이 보기에 브론스키는 완벽한 사윗감이어서, 딸에게 계속 푸시를 넣었던 것. 하지만 브론스키는 개스키였던 거라, 안나에게 홀딱 반해서 키티에게 제대로 된 작별 인사 한 번 없이 안나가 있는 페테르부르크로 이동, 안나 주변을 계속 얼쩡거린다. 키티는 날개도 없이 새됐고, 삶이 영 개 같다. 이번 생은 망했어. 브론스키도 원망스럽고 엄마도 원망스럽다. 엄마도 마음이 편하지는 않다. 심지어 키티보다 더 빡치는 게, 브론스키가 아직 키티 근처를 알짱거릴 때부터 벌써 남편인 공작이 브론스키 스키는 진정성 없는 스키라서 사위로는 좋지 않은 스키고 진짜 좋은 사람은 레빈이라는 충고를 해 왔음에도 개무시한 채 브론스키에 올인한 것이 자기 자신이란 걸, 그래서 이 파국 속에서 가련한 키티가 받고 있는 고통에 자기 지분이 가장 크다는 걸, 남편도 알고 키티도 알고 심지어 자기 자신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걸 인정하는 순간 내가 뭐가 되냐고, 그래서 모든 잘못을 남에게 돌리고(물론 브론스키 그 스키가 제일 잘못한 스키가 맞다) 자신에게 면죄부를 주려는 심리, 자기 과오를 들추어내는 사람에게 적대감을 품는 심리 같은 게 있었던 것 같다. 이런 공작부인의 심리를 구구절절 설명하면 톨스토이가 아니라 syo지. 톨스토이는 다음과 같이 한다. 키티를 위로하러 달려온 언니 돌리와 그녀들의 어머니인 공작부인의 대화다.
“오래전부터 물어보고 싶었던 것이 있어요, 마망. 레빈이 지난번에 여기 왔을 때 키티에게 청혼하고 싶어 한 걸 아세요? 레빈이 스티바에게 말했대요.”
“무슨 말이냐? 난 기억이 안 나는데…….”
“그럼, 아마도 키티가 레빈을 거절한 모양이네요……. 그 애가 엄마에게 말하지 않았어요?”
“아니. 그 남자든 다른 남자든 간에 그 애는 아무 말도 안 했다. 너무 고고해서 말이야. 그렇지만 내가 알기로 이 모든 건 그…….”
“그래요. 키티가 레빈을 거절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다른 남자가 아니었다면 그 애는 레빈을 거절하지 않았을 거예요. 저는 알아요……. 그러고 나서 그 남자가 키티를 잔인하게 농락한 거예요.”
공작부인은 자신이 키티에게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생각하기조차 무서울 정도였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아, 난 이제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난다니까! 요즘은 모두 자기 생각대로 살고 싶어 하고, 어미는 아무 말도 않고, 그러니까 이런 일이…….”
“마망, 제가 그 애한테 가볼게요.”
“가보렴. 내가 가지 말라고 막든?” 어머니가 대답했다.
_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1』
도망친 브론스키 탓, 요즘 젊은 것들 성향 탓, 나한테 말 안 해준 키티 탓……. 마지막 한 마디, “내가 가지 말라고 막든?”은 얼마나 많은 것을 알려주는가.
읽기에 따라서 저런 한 마디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건 우리가 읽는 책을 쓴 사람들이 다 꾼들이라서 그렇다. 막상 써 보잖아? 저렇게 대화를 활용하여 성격과 심리를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기술은 굉장히 고등하다. 된장찌개는 누구나 끓일 수 있지만 거업나 맛있어서 자꾸만 생각나는 된장을 끓이는 건 웬만큼 어려운 요리를 하는 사람, 그 단계를 넘어선 단계다.
129. 길 위의 철학자
에릭 호퍼 지음 / 방대수 옮김 / 이다미디어 / 2014
한참 아나키즘 책 찾아 읽던 20대 젋은 아나키스트워너비 syo의 시야에 처음 포착된 이후, 에릭 호퍼는 syo가 사랑하는 두 호퍼 중 1인으로 만신전에 입성해 든든히 자리를 지켜왔다. 일은 호구지책에서 멈추고 읽고 사색하는 삶, 겁나 힙해 보였지. 딱 그렇게 살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그 삶의 궤적이 syo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 인생에 선명한 홈을 파 놓은 책을 가끔 다시 읽는 것은 내 무늬를 찾는데 꽤 도움이 된다. 재독 삼독까지는 좋은 책으로 하는 것이겠지만, 그 이상의 주기적 독서는 좋은 책이 아니라 좋아하는 책으로 하게 마련이다.
"한평생 나는 모든 사색을 분주히 돌아다니면서 해 왔습니다. 번쩍이는 모든 생각들은 일을 하던 중에 떠오른 것들입니다. 나는 따분하고 반복적인 일터에서 일하는 경험을 즐기곤 했지요. 파트너에게 이야기를 하면서 머리 뒤쪽에서 문장을 따 맞추었던 거지요. 그러다가 은퇴를 하고 나서 나는 세상의 모든 시간을 내가 다 차지했어도 뭘 할 수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아마 머리를 아래로, 엉덩이를 위로 하는 것이 사유의 가장 좋은 자세일 겁니다. 동시에 두 방향으로 끌어당기는 것은 영혼의 스트레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방법은 아주 생산적이지요.“
_ 에릭 호퍼, 『길 위의 철학자』
130. 혐오의 시대, 철학의 응답
유민석 지음 / 서해문집 / 2019
- 일독(191127)
- 재독(210412)
혐오 표현을 주제로 한 이런저런 철학 문헌들을 발췌, 정리하여 엮은 요약서나 강의 자료, 혹은 리포트 느낌을 주는 책이다. 멈춰서 오래 생각하게 하는 책이 있고, 여기가 아니라 저기 저 다른 책으로 나아가서 멈추세요 하는 책이 있다. 둘 다 좋은 책이다. 생각해 볼 만한 주제를 생각해 보게 하는 책은 어떻게든 좋은 책이 아니기 어렵다.
《말을 가지고 행위하는 법》이라는 오스틴의 저서 제목은, 표현의 자유를 누리고 있지 못한 소수자들에게는 일종의 넌센스다. 언어가 행위라고? 아니, 그건 최소한 누군가에게만 그렇다! 소수자들은 언어를 가지고도 무언가를 행할 수 없다. 혐오표현은 일종의 '침묵시키는 말'이기 때문에, 소수자들이 언어 행위를 할 수 없게 만든다. 이들에게는 '표현의 자유'란 없는 것이다.
_ 유민석, 『혐오의 시대, 철학의 응답』
--- 읽는 ---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 우치다 다쓰루
한나 아렌트와 마틴 하이데거 / 엘즈비에타 에팅거
에세이 만드는 법 / 이연실
200년 동안의 거짓말 / 바버라 에런다이크, 디어드러 잉글리시
피에 젖은 땅 / 티머시 스나이더
조선에서 백수로 살기 / 고미숙
화재감시원 / 코니 월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