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TOFU‘tin
그러니까 그게 이틀 전이었지. 쿠팡에서 장을 봤어. 난 분명히 두부를 주문했거든. 근데 두부 가게가 통째로 도착한 거야…….
아무래도 클릭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아. 다들 잘 알겠지만, 더블 클릭이라는 게, 그게 되게 섬세한 작업이잖아…… 어쨌든 두부 6kg의 위용은 대단했지. 얇게 잘만 저미면 우리 집 거실을 통째로 도배할 수도 있겠더라고. 한숨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었지.
하지만 내가 어릴 적부터 테트리스에 꽤 소질이 있었거든. 갖가지 모양으로 요렇게 조렇게 잘라서 둥근 플라스틱 통에 물을 채워 담은 후 결국 냉장고에 다 쳐넣을 수 있었지. 냉장고가 콩장고가 되고 말았지만.
근데 어떡하지? 냉장고 문을 열고 물통에 든 두부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어쩐지 포르말린에 담아놓은 라스푸틴의 페니스가 자꾸 떠오른단 말이야. 난 이제부터 저걸 먹어야 하는데. 아무리 늦어도 연휴까지는 다 먹어야만 하는데…….
스스로의 허술함을 연민으로 바라보는 건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어색한 것도 사실이다. 아마도 우리가 발 담그며 살아가는 곳이 실패에 그리 관대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_ 김상민, 『아무튼, 달리기』
경험을 해석한다는 말은 모든 경험에 이름표를 붙이거나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살아가는 일이 그렇듯 뚜렷하게 정해진 답이나 결말은 없다. 우리는 다만 시간과 사건의 끝없는 연속성 안에 존재하고, 순간을 이야기라는 방식으로 품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글도 서둘러 끝낼 필요 없다.
_ 홍승은, 『당신이 글을 쓰면 좋겠습니다』
"코브 씨가 내 동행이에요. 정말 근사한 동행이죠, 코브 씨는. 이렇게 세심하거든요. 맨정신일 때는 어떤지 꼭 보세요. 나도 이 사람이 맨정신일 때 한번 보고 싶네요. 이 사람이 맨정신일 때 누군가는 꼭 봐야 돼요. 기록이라도 남겨두려면 말예요. 그래야 역사의 일부분이 될 테니까, 섬광처럼 짧은 그 순간이 금방 세월 속에 묻혀버려도 영원히 기억될 테니까요. 래리 코브가 맨정신일 때도 있긴 있었다고.“
_ 레이먼드 챈들러, 『빅 슬립』
--- 읽은 ---
40. 스피노자와 근대의 탄생
스티븐 내들러 지음 / 김호균 옮김 / 글항아리 / 2014
스피노자는 철학자 가운데 누가 뭐래도 단연 syo의 최애캐다. 이 사람은 멋진 구석이 겁나 많지만, 역사 속 그 누구 못지않게 풍성하고 넉넉한 박해를 받으면서도 소규모 친구들과 철학 공부도 열심히 하고 골방에서 렌즈도 갈아가면서 자급자족 어떻게든 안 죽고 살아냈다는 점이 압권이다. syo 같은 나부랭이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고 스피노자를 최애로 생각하는 훌륭한 학자들이라면 누구나 가슴 속에 그 ‘내새끼 박해부심’을 품고 있다. 그 증거로 스피노자를 다루는 모든 책에는 반드시 그 유명한 그의 파문 판결서(?)가 첨부되어 있다. 읽어 보자.
스피노자는 파문당하고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추방당해야 한다. 천사의 법령과 신성한 사람들의 명령에 따라서, 축복의 근원인 신의 승인과 신성한 전체 공동체의 승인을 받아서 그리고 613개의 계명이 쓰여 있는 이 신성한 두루마리 앞에서, 우리는 바뤼흐 드 에스피노자를 파문하고, 추방하고, 저주하고, 비난한다. 여호수아가 예리코를 저주했던 그 저주로 그를 저주한다. 엘리사가 소년들을 저주했던 그 저주로 그를 저주한다. 율법 책에 쓰여 있는 모든 징벌로 저주한다. 낮에도 저주받을 것이며, 밤에도 저주받을 것이다. 누울 때 저주받을 것이며, 일어날 때 저주받을 것이다. 나갈 때 저주받을 것이며, 들어올 때 저주받을 것이다. 주主가 그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며, 주의 분노와 질투가 그를 불태울 것이다. 그리고 이 책에 쓰인 모든 저주가 그를 덮칠 것이다. 그리고 주가 하늘 아래로부터 그의 이름을 없앨 것이다. 그리고 이 율법 책에 쓰여 있는 계약의 모든 저주에 따라, 주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로부터 악에 속한 그를 떼어놓을 것이다.
_ 스티븐 내들러, 『스피노자와 근대의 탄생』
저 문서는 조금 더 이어지다가 “야, 너네 이제부터 스피노자 걔랑 놀면 가만 안 둘 거야! 스피노자랑 이야기하거나 쪽지 주고받다가 걸리기만 해!”라는 위협으로 끝난다. 가히 못된 말 보습학원 다니는 사람들 솜씨라 하겠다. 아, 혹시 원장님이세요…?
“낮에도 밤에도, 누울 때 일어날 때, 나갈 때 들어올 때” 대목은 리듬마저 지렸다. 그야말로 주옥같다. syo도 종종 응용하는 구절이다. 나는 낮에도 먹을 것이며 밤에도 먹을 것이다. 나는 누울 때 책을 지를 것이며 일어날 때 책을 지를 것이다. 너는 나갈 때 못생겼더니 들어올 때 역시 못생겼구나.
사람이 역시 심보를 곱게 써야 한다. 독한 말을 일삼는 인간들이 어떻게 역사에 기록되는지 정말 선명하게 보여주는 문서가 저거라고 하겠는데, 패기 넘치게 “그리고 주가 하늘 아래로부터 그의 이름을 없앨 것이다”라고 질러본 게 무색하게도 이제는 지구가 뽀개진들 스피노자의 이름은 살아남아 하늘 꼭대기에 똥침이라도 놓을 기세인 반면, 세상 당당하게 깝쳤던 그들의 이름은 모두 사라지고 그저 “스피노자에게 저주를 퍼부었던 인간들”이라는 명찰을 단 먼지 뭉치 비슷한 것들로 남아버렸다…….
그러나 내 최애는 아주 쿨하게, 그러냐? 그래라- 했던 듯. 그리고 너희가 애는 쓴 것 같지만 그 정도 박해로는 나의 거대한 그릇을 다 채울 수 없노라며 열심히 집필에 매진, 또다시 거한 박해 한상차림을 받았는데, 그 정황이 아래와 같다.
1670년 5월에 쓴 글에서 독일의 신학자 야코프 토마시우스는 근래에 익명으로 출판된 어떤 책에 대해 맹렬하게 비난했다. 그 책은 국가 전체에서 즉각적으로 금지되어야 하는 "사악한 문서"라고 그는 주장했다. 위트레흐트 대학의 교수이며 토마시우스의 네덜란드인 동료인 레흐니르 만스벨트는 새로 나온 그 책은 모든 종교에 해로우며,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사라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철학적인 성향을 지닌 네덜란드인 무역상 빌럼 판 블레이엔뷔르흐는 "이 무신론적인 책은 (…) 이성적인 모든 사람에게 혐오감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증오로가 가득 차 있다"고 썼다. 그 책 때문에 안절부절못했던 어떤 비평가는 그것을 악마가 쓴 "지옥에서 꾸며진 책a book forged in hell"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이 모든 관심의 대상은 바로 『신학-정치론Tractatus Theologico-Politicus』 라는 제목이 붙은 책과 그 책의 저자였다.
_ 같은 책
스티븐 내들러의 이 책이 바로 『신학-정치론』의 개론서입니다. 스티븐 내들러의 스피노자 책들은 늘 너무 좋아요. 나는 가끔 스피노자가 지옥에서 와이파이로 내들러 조종하는 건 아닌가 한다…….
41. 내일의 연인들
정영수 지음 / 문학동네 / 2020
기억 속의 정영수 선생님은 이름 앞뒤로 아무런 수식어가 붙지 않는 그냥 정영수였다. 정영수 읽어봤어? 몇 개. 어때? 어. 어? 어. 좋아?/그저 그래?/별로야? 어. 그런 식이었는데, 이게 무슨 조홧속인지 첫 작품 「우리들」부터 좋아서 몸부림을 쳤다. 심지어 이건 처음 읽는 것도 아니다. 지난번 읽었을 때는 분명 이게 정영수네… 였는데, 왜 이번에는 이게 정영수네! 가 되었는가.
뒤이은 작품들도 좋았다. 다 몸부림 수준은 아니었지만, 정영수네!가 쓴 중 가장 별로다 싶은 작품조차 정영수네…가 쓴 가장 나았던 작품보다 나았다. 도대체 이게 무슨……. syo는 혼란 속에 리뷰를 준비하고 있다.
그날 밤 우리는 사랑을 나눈 뒤에 속옷만 대충 걸치고 침대에 누웠는데, 나는 한동안 잠에 들지 못해 뒤척였다. 우리는 처음에 몸을 포개어 누웟다가 곧 자신만의 공간을 찾아 조금 떨어져 누웠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이 지났고, 나는 그녀가 잠든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몸을 틀지 않고 혼잣말처럼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정말 어쩌다 헤어졌을까?" 나는 그 말에 대답하려다, 곧 딱히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그냥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다시 찾아온 침묵 속에서, 나는 새삼스레 내가 낯선 곳에서 잠을 청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창가에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가 점점 아득해졌고, 나는 문득 끝나지 않을 시간에 갇혀서 텅 빈 공간을 떠다니고 있는 사람이 된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왠지 그 밤은 영영 지나가지 않을 것만 같았는데, 그것은 내게 앞으로 다가오거나 다가오지 않을 무수히 많은 행복한 시간들과 외로운 시간들의 징후처럼 느껴졌다. 나는 비스듬히 누운 채 아직 잠들지 않았을 지원의 윤곽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어쩌면 그들의 유령들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_ 정영수, 「내일의 연인들」
이런 것. 길고 평탄하여 어딘가 빼도 될 문장이 있을 것만 같은 문단인데, 막상 작품을 다 읽어보면 저 가운데 뭐 하나 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 읽는 ---
생활 속 법률 상식사전 / 김계형, 이재호
무엇이 예술인가 / 아서 단토
만화 재무제표 모르면 주식투자 절대로 하지 마라 上 / 사경인
죽음의 선고 / 모리스 블랑쇼
물리 오디세이 / 이진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