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물어도 아플 것 같지 않던
사랑이란 게 지겨울 때가 있다며 옛사랑을 노래하는 사람이 말하는 그 지겨운 사랑이라는 건 어떤 사랑을 말하는 것일까. 그 사람은 흰 눈 내리는 날이면 옛사랑 생각이 사무쳐 광화문 거리에 찾아가서 하얀 눈이 바람에 휘감겨 하늘로 자꾸 올라가는 것을 바라보곤 한다. 지겨워 놓아버린 오늘의 사랑이 사무치게 그리운 어제의 사랑이 되는 것일까. 모든 사랑이 언젠가 사무치는 옛사랑이 되어 바람 부는 가을에 옷깃을 여미게 하고 흰눈 내리면 들판을 서성이게 하고 눈 녹은 봄날 잎새 위에도 영원히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는 지독한 고독의 순환, 이 정해진 사랑의 운명이 지겨운 것일까. 그도 아니면 후회와 눈물과 고독이 너무 흘러넘치는 마음 품고 여기저기를 서성이고 헤매게 만드는 이 못 해먹을 짓, 그럼에도 늘 생각나고 그리워 그리운 대로 생각난 대로 내버려 두어야만 하는 이 막돼먹은 침입이 지겹도록 아픈 것일까.
어쩌면 그 모든 것이고 혹은 그 이상이어서 이 노래는 여태 사랑받는 것일까.
옛사랑은 기필코 아름다워서 지난 후 돌아보아 아름답지 않았던 것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한다. 다른 많은 사건들이 그렇듯이 사랑 역시 사후에 의미가 확정된다. 당시 내가 사랑이라 굳게 믿으며 했던 그 모든 사랑들이 생각나면 생각난 대로 그리우면 그리운 대로 내버려 두어도 좋은 아름다운 옛사랑으로 남아 있다는 것은 그래도 좋은 일. 행운이라면 행운이라고 하겠고, 행복이라면 또 그렇게 부를 수도 있는, 지겨울 때가 있어도 끝내 사랑에 집착하고 포기하지 않게 하는 좋은 일이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연주할게요, 그만 하라고 할 때까지, 점심 시간이 될 때까지, 내 손가락이 벗겨질 때까지. 난 당신을 위해 뭔가 해 주는 게 좋고 당신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테니까 말만 해요. 처음 본 순간부터 좋았어요. 친근하게 다가가는 나에게 또다시 얼음처럼 차갑게 반응할 때조차. 우리 사이에 이런 대화가 이루어졌다는 것, 눈보라 속에서 찬란한 여름을 되찾아 오는 쉬운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나는 절대로 잊지 못할 거예요.
_ 안드레 애치먼,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누구인가 스쳐지날 때 닿는 희미한 눈빛, 더듬어보지만 멈칫하는 사이 이내 사라지는 마음이란 것도 부질없는 것 우린 부질없는 것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친 일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낱낱이 드러나는 민낯을 어쩌지 못했을 것이다 생각날 듯 말 듯 생각나지 않아 지날 수 있었다 아니라면 모르는 사람을 붙들고 더욱 부질없어질 뻔하였다 흩날리는 부질없음을 두고 누구는 첫눈이라 하고 누구는 첫눈 아니라며 다시 더듬어보는 허공, 당신은 첫눈입니까
_ 이규리, 「당신은 첫눈입니까」부분
"거기에는 내 마음이 다 담겨 있어."
그러면서 E가 사람들 몰래 경애의 손을 살짝 잡았다 놓았기 때문에 경애는 그 말을 할 때의 E를 더 선명히 기억했다. 거기에는 내 마음이 다 담겨 있다는 말.
_ 김금희, 『경애의 마음』
--- 읽은 ---
29.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 강의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지음 / 류재화 옮김 / 문예출판사 / 2018
레비-스트로스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게 없다. 단지 오늘날의 세상이 빠른 속도로 그의 말을 틀린 말로 만들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그의 말을 어렵지 않게 믿을 수 있는 세상에서 태어나 그의 말이 점점 거짓말이 되어가는 이 미친 세상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볼 수 있는 마지막 세대일지 모른다. 단일한 기준이 모든 문화의 줄을 세우고, 그 대열에서 낙오한 문화들을 박물관과 테마파크에 쳐넣어 보존(보관)하는 시스템이 당연한 시대에 태어나 부대끼며 그 시대의 일부분으로 부대끼며 살아가야 하는 세대에게 레비-스트로스는 어떻게 읽힐까.
훗, 방금 나 되게 꼰대 같았지.
서구식 문명은 스스로에게조차 더 이상 본보기가 되지 못하므로 다른 문명에게 따르라고 감히 제안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인간에게 주어진 조건을 성찰하지만, 전통적 틀 안에 갇혀 있고 더 이상 이 틀을 확대할 수도 없으며 그렇다고 다른 곳을 바라볼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한동안 갇혀 잇던 제한적 수평선에서 벗어나, 우리의 경험과는 다른 훨씬 다양한 사회적 경험을 이 틀 안에 가져와 통합해 볼 수는 없을까요? 서구식 문명이 새롭게 재생하거나 비약할 수 있을 만한 고유한 바탕이 이젠 없는데, 소박하고 겸허하며 사실 최근까지도 무시당하고 있는 서구 영향 밖에 있는 인간 혹은 개인에게 무엇을 가르친단 말입니까?
_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 강의』
30. 마르크스주의의 기초와 그 고전적 전통 1
알렉스 켈리니코스, 크리스 하먼 지음 / 이정구 엮음 / 책갈피 / 2018
처음에는 이 시리즈를 다 사 모아 볼까 하는 생각도 있었는데, 그럴 필요까지는 없겠다. 여러 곳에 분산되어 게재된 글들을 번역하고 한 곳에 모았다는 것이 이 <국제주의 전통 자료집>의 의의겠지만, 뭐랄까, 정말 자료집이라는 느낌이라 나 같은 일개 교양독자가 책장에 꽂아놓을 필요까지야 있겠나 싶은 것. 사실 내가 영어만 잘하면 문제는 일거에 해결되는 건데.
다른 한편으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본래부터의 결함들을 파악했습니다. 즉, 노동 착취에 바탕을 둔 경제 체제인 자본주의는 위기로 나아가는 본래부터의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변증법적 시각은 미국의 마르크스주의자 프레드릭 제임슨이 아주 잘 표현했습니다. 그는 《공산당 선언》의 내용을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우리는 자본주의가 인류가 겪은 최선의 것인 동시에 최악의 것이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는 지점으로까지 인식 수준을 어떻게든 높여야 한다.” 자본주의는 원리상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어지간한 생활 수준을 누릴 수 있는 지점까지 생산력을 발전시키기 때문에 인류가 겪은 최선의 것입니다. 자본주의의 착취, 부당함, 환경 파괴, 위기와 전쟁으로 나아가는 경향 따위 때문에 인류가 겪은 최악의 것입니다. 저는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시각이 새 천 년이 들어서는 세계를 인식하는 최상의 시각이라고 생각합니다.
_ 알렉스 켈리니코스 외, 『마르크스주의의 기초와 그 고전적 전통 1』
31. 여성의 글쓰기
이고은 지음 / 생각의힘 / 2019
syo는 남자로 태어나 남자처럼 살았고 남자의 눈으로 남자의 언어를 읽고 역시 남자의 손으로 남자의 언어를 쓰는 그야말로 남자남자지만 남성의 글쓰기보다 여성의 글쓰기에 관심이 많다. 남자의 글쓰기는 널려 있다. 심지어 여자들도 남자의 언어로 글을 쓴다. 그거 말고 다른 언어가 없(었)기 때문이다. 여성의 글쓰기라는 담론은 여성의 목소리를 담을 수 있는 새로운 언어를 직조하려는 이런저런 노력들을 뜻하는 것 정도로 파악하고 있는데, 그것은 물론 여성에게 좋은 일이지만 남성에게도 못지 않게 좋은 일일 것이다. ‘나’라는 것은 최소한 세 가지 시선이 겹쳐져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보는 시선, 내가 남을 보는 시선, 남이 나를 보는 시선. 남성에게 여성의 글쓰기는 두 번째 시선을 두텁게 하고, 세 번째 시선을 인정하게 해주지 않을까.
이 책이 뜻하는 바는 잘 모르겠다.
이미 내가 있고, 단지 그것을 표현할 내 언어가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은 언어가 부족하면 꼭 그 부족량만큼은 아니더라도 어쨌든 나도 부족해진다. 언어는 행동의 발목을 잡고 가능성의 경계를 친다. 언어의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은 그 구속을 즉시 알아차리지는 못한다. 체감까지는 구속의 축적이 필요하다. 의혹과 고뇌의 밤이 쌓여야 무엇이 내 몸을 묶고 있는지 느끼게 되고, 그제야 거부를 시작하는 것인데, 그땐 이미 모든 것을 싹 갈아엎기는 틀린 상태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점진적 개혁을 택할 뿐이다. 이 다음에 오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구속받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런 관점은 글쓰기는 쓰는 이에게 대체로 유익한 것이고, 그것은 사회적으로 부여받은 언어가 없는 존재들에게 더욱 그렇다는 사실로 귀결된다. 그래서 여성에게 글쓰기는 유익을 넘어서 필요의 지점까지 도착한다. 그러나 그건 누구에게나 그렇다. 권력관계는 모든 관계 속에, 모든 모임 속에, 모든 발화 속에 있고 우리는 모든 순간 권력관계에 포획된다. 단순하게 말하면 우리는 누구나 하루에 몇 번쯤 갑이 되어 내 앞에 선 을의 언어를 묶기도 하고, 또 몇백 번쯤 을이 되어 내 앞에 선 갑에게 내 언어가 묶이는 경험도 한다. 이 세상에 흉터 없는 언어를 가진 사람은 없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언어가 필요하고, 글쓰기가 필요하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그 이유가 하나 더 추가될 수는 있다. 그래서 여성에게 글쓰기가 더 중요할 수도 있다. 그런 입장을 강조하는 것이 이 책의 제일 큰 목적이라면, 그것만으로 여성 독자들이 만족할지 아닐지는 남성인 내가 판단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다. 글을 써야 하는 이유를 말하는 좋은 책이고, 작가가 그런 깨달음을 몸소 체험한 것이 여성이라는 위치에서 비롯되었음을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여성이 하는 글쓰기’와 ‘여성의 글쓰기’가 같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건 내 착각이었을까? 혹은, 그런 내 생각 자체가 ‘성녀’, ‘창녀’와 같은 이미지를 덧씌워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는 남자들처럼, ‘여성의 언어’, ‘틀을 깨는 여성’ 같은 새로운 올가미를 던져 여성들을 포획하려는 욕망일 뿐인 걸까?
또한 글쓰기의 고통과 기쁨에 대해 말하고, 나누고 싶었다. 누구나 크든 작든 인생의 부침을 겪는다. 나 역시 앞서 살아온 것과는 결이 다르게 삶의 변화를 겪으면서 여러 종류의 혼란이 동시다발적으로 찾아온 시기가 있었다. 답은 머리를 싸맨다고 해서 얻어지지 않았다. 고뇌와 질문이 진화하는 길목에서는 언제, 어디에서든 무언가를 쓰고 고치는 일을 거치곤 했다. 글쓰기의 과정은 고되고 그 결과는 자주 무위로 돌아갔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당장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더라도 글을 쓰며 마주하는 나의 삶에 변화가 찾아왔다. 나는 좀 더 유연하고, 좀 더 명료해졌다. 스스로 더는 누추하지 않았다.
_ 이고은, 『여성의 글쓰기』
32. 알고리즘 라이프
알리 알모사위 지음 / 정주연 옮김 / 생각정거장 / 2017
대학교 2학년 때 Data structure, 3학년 때 Algorithm 강의를 들었으니, 비록 다 까먹었더래도 syo는 분명히 전공자다. 전공자의 입장에서 보면 글쎄, 어떨까나- 하는 정도의 책에 불과했다. 그런데 전공자는 비전공자의 입장에서 책을 볼 수가 없다. 입장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탈부착식으로 띡띡 전환될 수 있는 거였으면 지구는 에덴동산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상상만 할 뿐이다.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이 책을 본다면……. 그게 잘 안 되네.
일단 쉽긴 하다. 소소한 농담도 있다. 알고리즘을 통해 일상 속 사건들을 설명하려는 게 아니라, 일상 사건들을 통해 알고리즘을 설명하려는 취지다 보니 문턱은 낮다. 그런데, 알고리즘이라는 게 이런 거군- 하는 정도의 깨달음 이상의 무언가를 주는 책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 책을 보고 알고리즘에 대해서 더 공부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까? 그건 상상의 영역 밖이다. 알고리즘에 대해 소박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비전공 독자가 읽어보고 감상을 말해주면 좋겠다.
파인먼은 문제를 빨리 해결하는 능력으로 유명하다.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능력을 가지게 되었느냐고 묻자 파인먼은 문제를 아주 여러 가지 방식으로 바꾸어 생각한 덕분이라고 답했다. 그러니까 문제들을 다른 관점들로 보았다는 말이다. 유추를 해볼 수도 있고 동일시를 할 수도 있고 변증법적 방법을 써볼 수도 있다. 쇼맨십이 강한 파인먼에게는 청중들을 깜짝 놀라게 해줄 웃긴 얘기를 생각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_ 알리 알모사위, 『알고리즘 라이프』
33. 섹스를 위한 내 몸 사용법
이종석 지음 / 중앙books / 2016
운동 진짜 싫다. 운동으로 만들어지는 건강과 아름다움이야 탐이 나지만 그 과정에서 겪어야 할 이런저런 고통이 싫어서 합계는 언제나 마이너스. 살려고 운동하는 시기가 이제 곧 오겠지만, 그건 그때의 일이고 syo는 미루기의 천재고…….
그렇지만 곰곰 생각해보니, 섹스를 위한 운동이라면 효용과 고통의 합이 플러스는 아니더라도 제로에 매우 근접할 정도는 될 것 같은 거라. 약간 음흉한 표정을 하고 이 책을 펼쳐 들었는데(말이 그렇다는 것. e북 봤어요) 안에 든 것은 몽땅 과학이었다. 젠덩.
이놈의 섹스가 그야말로 육체활동이라는 사실을 새삼 느끼는 요즘인데, 특히 무릎이 그렇다. 하고는 싶은데 근육이 부족하니 아쉬운 대로 뼈를 가지고 뭐 어떻게 해보려는 못난 주인을 만나 고생하는 무릎. 조금만 참아, 내가 어떻게든 여기저기 힘을 길러 볼게. 호강은 못 시켜줘도…….
질문 하나. 섹스는 운동인가? 그렇다. 섹스는 몸을 쓰는 것이기에 당연히 운동이며, 몸의 움직임과 근육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근육은 뼈에 붙어 몸의 움직임을 만들어주는 필수 기관이다. 몸은 여러 근육의 상호 보조 작용으로 움직이게 된다. 어떤 움직임도 개별 근육의 움직임만으로 만들어질 수 없다.
_ 이종석, 『섹스를 위한 내 몸 사용법』
--- 읽는 ---
빅슬립 / 레이먼드 챈들러
스피노자와 근대의 탄생 / 스티븐 내들러
칼 마르크스 – 그의 생애와 시대 / 이사야 벌린
좌파 고양이를 부탁해 / 김봄
자본주의 / 홍기빈
교양으로 읽는 기독교 / 손석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