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ring, forsythia and the baby baby b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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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껏 멍청하게 지내느라 눈치 못 채고 있다가 깜짝 놀랐다. 2020년이 이제 스무 밤 남짓 남았다.
최근 날이 추워지면서 등이 자꾸 가려운 게 이슈였다. 그딴 게 핵심 토픽이라니? 그 옛날, 서른을 눈앞에 둔 12월 11일의 syo는 무슨 생각을 했었던가. 서른이었다. 온통 서른이었다. 서른셋을 앞에 놓고는 무엇으로 겨울밤을 활활 태웠는가. 삼땡이었다. 모든 게 삼땡이었다. 그때는 그래도 한 살 한 살 늙어간다는 게, 앞자리가 바뀐다든가, 초반이 중반이 된다든가 하는 것들이 연말 이슈였다. 크게 봤을 때 올해는 전반적으로 망했군. 그래도 크게 봤을 때 전반적으로 망해서 다행이지, 전반적으로 봤을 때 크게 망한 거였으면 어쩔 뻔했어. 수고했어, 수고했구나, 나여. 내년에는 또 어떻게 망할지 미리 잘 생각해놓고, 망해도 부드럽고 계획적으로 망하자. 뭐 이런 깜찍한 다짐 유사품들도 있었다. 그런데 오늘의 syo는 날갯죽지와 죽지 사이의 손 닿지 않는 부위에 어떻게 하면 바디로션을 바를 수 있을지에 대한 고뇌에 사로잡혀, 한 해 반성이나 내년을 위한 계획 수립 같은 소소하고 수수한 일들에 관심을 가질 틈이 없는, 그런 인간이 되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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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또 하나 배웠는데, syo는 장작 타는 소리를 오래 들으면 자는 동물이었다. 지금 유튜브 공부 채널을 점령한 최신 츄-렌드가 바로 장작 타는 소리 ASMR이라서 그걸 들으며 공부를 했던 것인데, 한 며칠 아 봄날 개나리 아기곰도 아니고 왜 이렇게 졸아대나, 이상하다 이상하다, 했더니 그게 다 장작 의 범행으로 밝혀진 것. 이쯤 되니까, 장작 소리 틀어놓고 라이브 방송으로 공부하는 저 사람들이 마치 괴물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안 존다고? 타탁 탁 타닥 하는데 안 졸아? 타다닥 탁 탁 타다다타닥 탁 타다…… 아, 입으로 장작 소리 내며 쓰다가 졸 뻔했다. 혹시 이거, 자기들은 도저히 잠들 수 없는 트렌디한 지니차트 TOP 200 이런 거 듣고 있으면서 구독자들한테는 장작 소리 들려줘서 재우는 수작 아냐, 이거? 와, 이렇게까지 한다고, 이 장작범들아.
그렇게까지야 하겠냐. 그냥 syo가 문제인 듯. 내가 봄날 개나리 아기곰이다…….
--- 읽은 ---
241. 보통의 언어들
김이나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0
나한테 처음으로 김이나라는 방송인의 존재를 알려줬던 친구가 누구였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말 잘하는 예쁜 누나’라고 설명해준 거 보면 사내놈이었는데, “말잘 + 예쁜 + 누나 = 사랑해요” 방정식은 내가 아는 모든 놈들에게 “각A+ 각B + 각C = 180도” 수준의 진릿값을 가진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라서, 당최 누가 저 말을 했던 건지 모르겠다. ……설마, 난가?
나였다면 아마 준-덕질 급의 정보검색 정도는 했을 텐데, 별로 아는 게 없는 걸 보니 나는 아닌 듯. 이렇게까지 글을 잘 쓰는 사람일 줄은 몰랐거든. 생각해보니까 몰랐던 게 더 이상하군. 글로만 밥 벌어도 노후가 든든한 정말 극소수의 사람 중 하나일 텐데. 어쨌든 아마 나였다면 ‘말 잘하고 예쁘지만 글은 더 잘하고 더 예쁜 누나’라고 했을 것도 같다.
다종다양한 글쟁이들 가운데서도 작사의 길을 오래 걸은 사람이 획득하는 선명한 강점이 있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라면,
나는 가끔 세상의 모든 형용사들이 가진 기가 막힌 표현력에 감탄하게 되는데, 이는 주로 발음에서 온다. '반-짝'하고 말할 때 ㄴ받침을 부드럽게 도움닫기 삼아 '짝' 하고 내뱉는 발음은 무언가에 빛이 닿아서 튕겨 나오는 모습 그 자체인 것 같고, 찬란하다는 말의 실제 발음인 '찰-란'은 '찰'의 받침 ㄹ과 '란'의 자음 ㄹ이 파도 능선처럼 이어지는 기분이 들어 앞서 비유했던 것처럼 햇살이 닿은 물결의 느낌인 것이다. 게다가 '차-' 하면서 시작되는 첫 음절은 퍼져나가는 빛이 혀에서 구현되는 착각이 들지 않는가.
네, 들어요. 든다구요. 진짜로!
내가 오래오래 지내고 싶은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바로 저 말이었던 것 같다. 실망시키는 데 두려움이 없기를 바란다는.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높은 확률로 당신을 실망시킬 테지만 우리 평균점을 찾아가보지 않겠냐는 말….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만인에게 사랑받을 수는 없다. 하지만 역으로 말하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인 소수와의 관계는 견고한 것이다. 한 번도 실망시키지 않고서는, 나는 누군가와 진실로 가까울 자신이 없다. 우리, 마음껏 실망하자. 그리고 자유롭게 도란거리자.
_ 김이나, 『보통의 언어들』
242. 도시로 보는 유럽사
백승종 지음 / 사우 / 2020
죽기 전에 유럽을 갈 수 있을까. 그거 한 번 가는 거 별것 아닌 것 같아보여도 진짜로 별것 아니었다면 내가 이 나이 먹도록 살면서 한 번은 가봤겠지. syo는 아직 여권도 없는 오랑캐다……. 매번 책으로 이렇게 먼 타국의 도시를 만날 때마다, 분노가 치민다. 특히 사진 별로 없는 에세이가 마음을 끄는데, 사진 많은 에세이는 겁나 뽐내는 것 같아서 어떻게든 트집을 잡아버리겠다는 자세로 읽게 되고, 사진 아예 없는 에세이는 선생님 이렇게까지 하셔야 합니까 싶고 그렇거든. 그런데 이 책은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까지 왠지 평온한 태도로 일관할 수 있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뭘 뜻하는 건지 모르겠다. 좋았던 거야, 아니었던 거야?
과거의 슬픈 흔적을 깨끗이 지우는 일을 나무랄 수도 없으나, 꼭 잘한 일이라고만 보기도 어렵다. 상처도 남겨두면, 더러는 약이 되는 법이다. 싹 쓸어낸다고 뭐가 근본적으로 달라지는가. 역사란 아픔을 끌어안고 제 길을 가는 사람에게만 축복이 된다.
_ 백승종, 『도시로 보는 유럽사』
243.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이규리 지음 / 문학동네 / 2014
2회독인데, 읽기 시작하던 날 알라딘에 이규리 선생님 성함을 때려 넣었는데 이 다음 시집이 없었다. 이 책이 2014년 출판이니 이제 7년이 다 되어가건만 왜 최선을 다해주지 않으신 거예요, 선생님- 하는 마음으로 눈물을 닦으며 돌아섰는데, 지금 이 글을 쓰며 검색했다가 10일자 출간된 선생님의 새 시집 <당신은 첫눈입니까>를 발견했다. 아, 바로 알아버렸다. 그러니까 이거 사라고 알라딘에서 나한테 적립금 2만원을 쾌척한 것이었음을. 아, 모아놨다가 민사소송법 다음 판 나오면 보태서 사려고 했지만, 지금 이 마당에 민사가 문제겠냐 소송이 대수겠냐.
잘려나간 꼬리는 얼마간 움직이면서
몸통이 달아날 수 있도록
포식자의 시선을 유인한다 하네요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외롭다는 말도 아무때나 쓰면 안 되겠어요
_ 이규리, 「특별한 일」 부분
244. 너무 재밌어서 잠 못 드는 지구의 과학
신규진 지음 / 생각의길 / 2018
이 시리즈를 몇 권 읽으며 매번 했던 말(“잘 잤다”)이 식상할 때가 되었기에 더는 이 겁 없는 제목을 단 책들을 읽지 않겠다 다짐했건만, 어찌 된 일인지 운명처럼 이 책을 만나버렸다! 라고 쓰면 이 책이 정말 재밌어서 잠 못 들기라도 했다고 오해하시겠지. 그 정도는 아니었고, 때마침 잠 못 드는 밤에 읽었는데 읽다가 잠이 드는 일은 없었다- 수준입니다. 그래도 꽤 재미있게 쓰려고 노력했고, 쉬우면서 알이 꽉 찼다. 거물급 지식이 들어있는 책은 아니지만 이 분야 꼬꼬마들에게 권할 만하다.
3월 21일. 잠에서 깨어보니 황당하게도 당신은 사방이 온통 회벽인 방에 갇혀 있었다. 방에는 고양이가 드나들 만한 작은 창이 하나 뚫려 있는데 햇빛이 잘 드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남향 창이다. 문 밖에는 검은 터번을 두른 사람들이 AK소총을 메고 보초를 서고 있다. 몰래 탈출하는 건 꿈도 못 꾼다. 그들은 무전기를 이용하여 어딘가와 교신하며 협상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당신은 포로가 된 모양이다. 어찌 하면 좋을까?
_ 신규진, 『너무 재밌어서 잠 못 드는 지구의 과학』
245. 질문하는 법
윌리엄 고드윈 지음 / 박민정 옮김 / 유유 / 2020
‘최초의 아나키스트’ 윌리엄 고드윈은 한때 젊은 syo의 아버지였다. 오, 아부지. 말씀의 힘으로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하셨도다. syo 고드윈으로 개명을 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던 순간이 있었다. 그러니까 『프랑켄슈타인』를 쓴 메리 셸리는 syo의 누나가 될 뻔했고, 『여성의 권리 옹호』의 저자 메리 울스턴크래프트가 우리 엄마가 될 뻔한 것. 그러나 그 당시에는 메리들을 전혀 몰랐고. 그야말로 철없는 무정부주의자 시절이었다. 무정부주의적 글을 써서 syo의 심금을 울렸지만 사실은 사방팔방 온갖 글을 다 쓰고 다니던 지식인 고드윈은, 역시 교육 쪽으로도 나팔 꽤나 불었던 모양이다. 아동 문학출판사도 차리고 어린이 책도 많이 썼다고. 최초의 아나키스트는 사실 18세기 영국판 김소영 선생님 포지션이었던 것인가.
책은 인간에게 가장 훌륭한 모든 것을 모아 둔 보물창고다. 문학은 모든 방면에서 인간과 동물계 사이의 거대한 경계선을 형성한다.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은 자신의 손이 닿는 범위 안에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그저 원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올바른 판단에 필요한 모든 종류의 지혜와 행동할 힘을 스스로 얻게 될 것이다.
_ 윌리엄 고드윈, 『질문하는 법』
--- 읽는 ---



사랑의 기술 / 에리히 프롬
혼자 있기 좋은 방 / 우지현
그림으로 이해하는 현대사상 / 발리 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