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인 크라이시스
1
꿈을 꾸었다. 다정한 친구 한 명이 미국 유학을 가게 되었다며, 설렘 반 걱정 반이라며 두려운 표정으로 자랑질했다. 유학은 내 오랜 꿈이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친구는 드넓은 에이뭬리커 대륙에서 끝없이 펼쳐질 자신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해 겸손하게 잘난척했다. 부러워 죽겠고 꼴뵈기 싫었다. 그리고 친구는 유학을 떠났다. 시간이 흘러, 친구로부터 첫 번째 엽서가 도착했다. 그 엽서를 읽으며 나는 알게 되었다. 친구가 유학을 떠난 학교가 고등학교였다는 사실을……. 어딜 가나 결국 수학이 답인 것 같아- 엽서에는 이럴 줄 알았으면 정석 좀 풀고 오는 건데, 하는 후회가 끈적하게 묻어있었다. 부러움은 말끔히 소멸되었고 나는 웃었다. 으하하하, 고등학교래! 고등학생이래! 미국 고등학생이래!!
그리고 잠에서 깨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세상에서 제일 부럽다고. 고등학생이래…… 그것도 미국 고등학생이래…….
2
어제 책장을 정리하다가 <내 이름은 빨강>의 위치를 옮길 일이 생겼다. 왜냐면 이 책은 내가 3번이나 읽은 책이니까, 아직 안 읽은 책들을 전진 배치하고 얘처럼 내용 다 아는 애는 뒤로 보내야 하니까, 얘처럼 내용 다 아는 애는…… 근데 범인이 누구더라?
그것은 실로 오랜만에 마주한 공포였다. 이 책을 3번이나 완독한 내가, 그러니까 북플에서 <내 이름은 빨강 1>, <내 이름은 빨강 2> 마니아 1위에 빛나는 syo가 범인이 누구인지조차 기억을 못하고 있다……. 아, 나의 투명하고 청초한 뇌세포여. 연결을 두려워하는 내성적인 시냅스여…….
용의자 세 명이 그러니까, 토끼, 순무, 엘레강스였던 건 확실해.
펼쳐보니 나비, 황새, 올리브였다. 음, 세상에 확실한 것 따윈 어디에도 없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역시 <내 이름은 빨강>, 좋은 책. 엘레강스한 책.
3
syo가 생각하는, 세상에서 가장 글 잘 쓰는 사람들 가운데 두 사람의 책을 동시에 읽고 있다. 나는 이 사람들의 책을 씹어먹어서 이 사람들처럼 쓸 수만 있다면 남은 평생 종이만 씹으며 살 수도 있다!
……아, 말이 그렇다는 거죠.
먼저,
세상은 가장자리에서, 그리고 깊은 곳에서 푸르다. 이 푸름은 사라진 빛이다. 빛 스펙트럼에서 푸른색 쪽 끝에 있는 빛은 태양에서 우리에게 오는 길을 끝까지 다 오지 못한다. 그 빛은 공기 분자에 부딪혀서 흩어지고 물에 부딪혀서 산란된다. 물은 원래 무색이고, 그래서 얕은 물은 어떤 색이든 그 밑에 잠긴 것의 색을 똑같이 띠지만, 깊은 물에는 이 산란된 빛이 가득하고, 더 깨끗한 물일수록 푸름이 더 깊다. 하늘도 같은 이유에서 푸르다. 하지만 지평선의 푸름, 하늘로 녹아드는 듯한 땅의 푸름은 그보다 더 깊고 더 몽환적이고 더 멜랑콜리한 푸름, 우리가 몇 킬로미터나 멀리 내다볼 수 있는 장소에서도 제일 먼 영역을 물들인 푸름, 먼 곳의 푸름이다. 이 빛, 우리를 건드리지 못하는 빛, 우리에게 도달하는 거리를 끝까지 다 오지 못하는 빛, 사라지는 빛, 이 빛이 우리에게 세상의 아름다움을 안겨주며, 세상의 아름다움은 정말로 많은 부분이 그 푸른빛 속에 있다.
예전부터 나는 눈에 보이는 것의 가장 먼 가장자리에 있는 푸름에 마음이 움직였다. 지평선의 색, 먼 산맥의 색, 무엇이 되었든 멀리 있는 것의 색인 푸름에. 그렇게 먼 곳의 그 색은 감정의 색이고, 고독의 색이자 욕망의 색이고, 이곳에서 바라본 저곳의 색이고, 내가 있지 않은 장소의 색이다. 그리고 내가 영원히 갈 수 없는 곳의 색이다.
_ 리베카 솔닛, 『길 잃기 안내서』 51-52쪽
다음은, 좀 길지만,
'이 성당은 1612년에 지어졌다'라는 진술처럼 하나의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과, '이 성당은 바로크 건축의 훌륭한 예이다'와 같은 가치판단의 표출 사이에는 명백한 차이가 있다. 그러나 내가 외국인 방문자에게 영국을 구경시키면서 전자와 같은 종류의 진술을 했을 때 그가 상당히 놀랐다고 해 보자. 그는 왜 나에게 이 건물들의 건립날짜를 말씀하시고 계십니까, 왜 기원에 이렇게 신경을 쓰십니까라고 물을 수 있다. 그는 계속해서,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는 그러한 것을 전혀 기록하지 않으며 그 대신에 건물들을 북서향이냐 남동향이냐에 따라 분류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아마 이것은 나 자신의 기술적(記述的)인 진술들의 기저에 있는 무의식적인 가치판단체계의 일부분을 드러내 보여줄 것이다. 그러한 가치판단은 '이 성당은 바로크 건축의 훌륭한 예이다'와 반드시 똑같은 종류는 아니지만 아무튼 가치판단임은 분명하며 내가 하는 어떠한 사실발언도 그러한 가치판단을 벗어날 수 없다. 사실진술도 결국은 '진술'이며 이 '진술'이란 것은, 그 진술들은 할 가치가 있다, 아마 다른 어떤 것들보다도 할 가치가 있다, 나는 그 진술들을 할 권리가 있고 아마도 그 진실성을 보증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당신은 나의 진술을 들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며 그 진술을 함으로써 어떤 유용한 것이 성취된다라는 등등의 문제성 있는 많은 판단들을 전제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전혀 사심이 없는 진술이 있을 가능성은 없다. 물론 성당이 언제 지어졌는지를 진술하는 것은 우리 문화에서는 그 건축술에 대하여 의견을 말하는 것보다 중립적인 행위로 여겨지지만, 또한 전자의 진술이 후자보다 더 많이 '가치를 적재한' 것이 되는 상황을 생각해볼 수 있다. '바로크'와 '훌륭한'은 다소 동의어가 되었을 수도 있는 반면에, 우리들 중 고집스런 잔당만이 건물이 건립된 일자가 중요하다는 믿음을 고수하고 있어 나의 진술은 내가 이 잔당의 일원임을 알리는 암호화된 방법으로 여겨질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기술적인 진술들은 종종 보이지 않는 가치범주들의 그물조직 속에서 움직이며 실로 그러한 범주들이 없으면 우리는 서로에게 할 말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사실적 지식(factual knowledge)이라고 불리는 어떤 것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이 다시 특별한 이해관계나 판단에 의해서 왜곡된다는 것만이 아니다. 물론 이것도 분명히 가능하지만, 그보다도 특별한 이해관계가 없이는 아예 지식을 갖지 못하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것을 굳이 알려고 애쓸 이유가 없을 테니까. 이해관계는 우리의 지식을 '구성하는' 요소이지 지식을 위태롭게 하는 한갓 편견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지식은 '몰가치적'이어야 한다는 주장은 그 자체가 하나의 가치판단이다.
_ 테리 이글턴, 『문학이론입문』 22-24쪽
다가가면 멀어지는 욕망에 대해 아름답게 이야기하고 싶은 욕망이 늘 있었는데 그 욕망은 내가 다가가면 멀어지기만 했다. 내게서 멀어져서 솔닛 쪽으로 갔나보다.
또한 이글턴의 저 말은, 내가 늘 하고 다니는 말이지만 그 말로 누구도 설복시킬 수 없었다. 근데 이글턴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 읽은 ---
108. 맑스주의 역사 강의
한형식 지음 / 그린비 / 2010
맑스주의 역사라는 것 자체가 흥미로웠지. 사실은 맑스 전기, 레닌 전기, 스탈린 전기, 등등 각종 사상가의 전기를 다 갖춰놓고 읽으면 그게 최선이요, 하다못해 로버트 서비스의 <코뮤니스트>랄지 하는 두껍한 역사책을 꼼꼼히 읽어보는 것이 차선이겠지만, 세상에 관심 둘 데가 얼마나 많은데 어지간하면 그러긴 힘들다. 그럴 때 짠, 하고 읽기 좋은 책이고, 그렇게 짠, 하고 몇 번 읽었으니 나는 이제 이 책을 팔고 차선이나 최선을 향해 달려나가야지.
109. 너의 거기는 작고 나의 여기는 커서 우리들은 헤어지는 중입니다
김민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
망했다. 나의 감이 더는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게 되고 말았는가…….
110.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사 / 2009
마라톤 완주가 버킷리스트에서 탈퇴를 선언했다. 난 너랑 함께할 수 없어. 왜! 너의 육신은 총체적으로 비루하지만 그 와중에도 무릎은 비루를 넘어 비참에 도달했거든. 나는 잠깐만 울고 쿨하게 마라톤을 보내주었다. 안녕, 잘 가. 그래, 너도 나 같은 목표는 깨끗이 잊고, 너랑 더 잘 맞는 목표를 만나서 행복하게 살아. 아니, 싫은데? 난 너 끝까지 안 잊고 죽을 때까지 까고 욕하면서 살 건데? ……와 저런 새끼 버킷에 들어있었다니 소오오름.
내적 극장에서 벌어진 셰익스피어 뺨치는 연극의 결과 어쨌든 syo는 달리기에 대한 애정의 5할을 상실하였으니, 그러고 다시 이 책을 보았을 때 예전에 받았던 감동의 5할은 상실되고 그 자리를 부러움과 아니꼬움과 너잘났네좋겠다야 마음이 차지하였으니, 아 그야말로 상실의 시대…….
--- 읽는 ---
길 잃기 안내서 / 리베카 솔닛
살인자의 기억법 / 김영하
문학이론입문 / 테리 이글턴
돌이킬 수 있는 / 문목하
헤겔에 이르는 길 / 미타 세키스케
칠레의 밤 / 로베르토 볼라뇨
이인 / 알베르 카뮈
성의 변증법 / 슐라미스 파이어스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