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1
장마와 코로나. 이렇게 써 놓으니까 무슨 순정만화 제목 같은 구성이다. ‘장미와 코로니’. 옛날 옛날 어느 식민지에 순박하고 아리따운 아가씨가 살았는데 본국에서 깨친 젊은 금발머리 남자가 나타나 가지고서는 둘은 첫눈에 반해 가지고 아 글쎄 심장이 콩닥콩닥…….
그러나 현실은 개차반. 비가 오나 비가 안 오나 수감생활.
2
10시간 동안 빗소리를 들려주는 영상들이 유튜브에 있어서 마른 날 젖은 날 할 것 없이 syo의 방에는 늘 비가 온다. 숲에, 작은 연못에, 한옥집 처마에, 파도치는 바다에 떨어지는 비는 저마다의 소리가 있어서 의자에 앉은 귀가 풍성하다. 비가 오는 날이면 공부가 잘되는 것 같다고 생각하던 어리고 어리석은 syo도 떠오르고, 반지하 방 침대에 누워 작은 창을 통해 타닥타닥 마당에 떨어져 튀어 오르는 빗물을 하염없이 지켜보던 젊고 가난한 syo도 떠오르고, 비가 오는 날이 좋다고 말하던 사람들과 풋풋 사랑을 하던 이런저런 syo들도 떠오른다. 아, 비 오는 바다 모래톱에 앉아 추운 줄도 모르고 넘실거리는 수평선을 바라보던 syo도! 어쩐지 바다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는 요즘이다.
3
syo에게 알라딘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얼마 전 일이었다.
사가독서 휴가라는 것이 있다. 이틀 휴가를 다녀와 10일 내 독후감을 제출하는 시스템인데, 그걸 다녀와서 한참이 지나도록 독후감을 안 낸 거라. 점심에 식사하다 갑자기 생각나서, 아, 맞다, 저 사가독서 독후감 아직 안 냈네요, 라고 말했더니 팀장님이 그러셨다. syo씨, 독후감 정 못쓰겠으면, 거기 알라딘이라는 데가 있거든? 거기 가면 독후감 잘 쓰는 사람 많아. 그중에 한 개 슬쩍 베껴서 조금 수정해서 내든지 해. 정 안 되겠으면.
……그러니까 알라딘, 알라딘에서 말씀이지요, 팀장님…….
4
성, 인종 그리고 문화에 의한 지배는 인간 내부에 기호화되어 있다. 몸은 인간 개인의 내면 세계와 사회적인 외부 세계, 우리 자아와 사회의 연결점이다. 몸은 분화(구분 짓기, differentiation)의 물리적 공간이며, 분리된 독특한 인간으로서 자신을 알게 하는 자기 바깥 세계와의 연결점이다. 세계 그리고 타인과 상호 작용하면서 인간성이 성취되고 유지될 때, 몸은 인간의 경험을 담고 있으며 나아가 그 자체를 초월한다. 모리스 버만은 "몸의 이미지는 몸의 경계를 넘어서 확장된다"고 지적한다. 그는 폴 실더를 인용하고 있다. "몸의 이미지가 구성되는 데 있어서 거기에는 무엇이 몸에 통합될 수 있을 것인가를 발견하기 위한 끊임없는 실험이 있다. 몸은 사회적인 현상이다" 따라서 이미지의 차원에서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람에게 육체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몸은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자리에서 떨어진, 분리된 사물로 여겨질 수 없다. 버만과 다른 사람들이 지적하듯이 "나는 존재한다"는 것은 동시에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_ 캐슬린 배리, 『섹슈얼리티의 매춘화』, 45-46쪽
‘몸의 이미지’라는 개념을 만났는데 더 뒤져볼 만한 재미가 있겠다.
마르크스 한 스푼, 정신분석 한 스푼을 구조주의 한 컵에 타서 들이켜고 나면 그간 믿어왔던 주체성이니 자아니 하는 것들에 대한 확신을 적잖이 잃어버리게 된다. 관념에 관해서라면, 그중에서도 특히 언어에 관해서라면 syo는 ‘내 언어’라는 것이 있는 게 아니라 언어라는 것 안에 내 위치가 있을 뿐이라는 생각을 한다. 내 머릿속에서 나온 것 중에 내가 만든 건 없고, 그저 이런저런 것들이 뒤엉켜 몸부림치다가 나라는 필터에 걸러져 쫄쫄 흘러내릴 뿐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늘 필터 관리를 잘하고 싶은 거지.
육체는 좀 다르다고 생각해왔던 것 같다. 몸이라는 것은 너무나 물리적이고 가까이 있어서 만지고 싶을 때 나는 언제든 내 몸을 만질 수 있으니까, 이것만큼은 그냥 물질, 뚜렷한 경계 너머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효율적으로 막아낼 수 있는 방어시스템을 갖춘 하나의 요새라고 믿어온 듯하다. 그리고 그것은 오만과 편견인 모양이다.
육체가 방어능력을 갖춘 것이 아니다. 타인의 육체를 침입할 의사를 가진 것들이 내 육체에 관심이 없었던(통계적으로 적었던) 것이다. 찢겨나간 육체에 대한 무한히 많은 기록을 넘기며, 한 번도 공격받지 않은 요새는 방어력을 논할 입장이 되는지에 대해 생각한다. 오만이다.
족쇄를 차고 있지 않은 사람은 없다. 태어나 보니 남자여서 나는 핑크색 반바지를 입으면 안 되었다. 여섯 살짜리 syo를 미용실에 데려가 머리를 예쁘게 볶아놓은 엄마에게 아버지는 한참동안이나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syo는 자기 머리가 부끄러워졌다. 고작 꼬마의 몸이었을 뿐인데도 그 몸에 매달린 남자라는 관념이 무거워서 나는 내 육체를 가지고 고무줄을 뛰어넘는 놀이를 해선 안 되었다. 고무줄을 끊어먹는 놀이는 권장되었다(해서는 안 된다고, 혹은 해야만 한다고 정해진 것들이 훨씬 무겁고 많은 몸도 세상에 있다는 것을 잘 알지만, 내가 겪지 않은 일들을 나열하는 것도 오만 같아서). 나는 다리가 있었으므로 핑크색 반바지를 장착하는 데 물리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머리카락이 존재했으므로 파마를 하는데 하등의 물질적 하자가 없었다. 그럼에도 내 몸에 덧씌워진 이미지는 많은 가능성들을 불가능으로 바꿈으로써 내 육체에 영향을 미쳤다. 나는 지금도, 반바지를 입고 출근하지 못한다. 위반하기 어려운 제약을 마주쳤을 때, 그리고 억지로(혹은 부득이하게) 그 코드를 위반했을 때, 내가 겪어야 할 감정들은 육체와 관념(이런 이분법이 가능하다면) 중 어느 쪽에 가까울까. 가지고 있는 모든 긴바지가 간밤에 일어난 화재로 소실되는 바람에 부득이 겁나 짧은 반바지를 입고 구청에 출근했는데 과장님이 나를 흘끗 보며, “syo씨, 오늘 참 시원하게도 입었네?”라고 말한다면, 그때 내가 느끼는 기분은 도둑질하지 말라는 추상적 규범을 어겼을 때의 죄책감과 발가벗고 횡단보도에 섰을 때의 부끄러움 가운데 어느 쪽에 더 가까울까? 사소한 예시지만(이런 대목에서 사소한 예시밖에 들 게 없는 인생은 그 자체로 기득권이다), 내 몸이 완전히 내 것이고, 내 육체의 경계가 가시적이고 물리적이라는 생각은 사회 속에서는 통용되기 어렵다. 편견이다.
후려치기 오졌다.
‘몸의 이미지’라는 개념은 저렇게 단순하게 인식하고 넘어갈 것은 아닌 듯. 아무래도 푸코나 아감벤 정도는 읽고 와야 깝칠 수 있겠다.
--- 읽은 ---
96.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이원하 지음 / 문학동네 / 2020
제목만 만났을 때, 귀엽다고 생각했다. 막상 읽어보니 귀엽다가 슬펐다. 찐슬픔. 다 읽고 났더니 이 세상에 슬픈 귀여움 같은 게 태어났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귀여운 슬픔이 아니라 슬픈 귀여움. 이 독창적인 감정(과 그 표현)을 내 서재에 잘 꽂아놓아야지.
97. 역사학 공부의 기초
존 루카치 지음 / 이재만 옮김 / 유유 / 2018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큰 질문에 크게 대답하기보다, 역사적이라는 것은 무슨 뜻인지, 어떻게 더 역사적이고 덜 역사적일 수 있는지, 역사의식이라는 것은 또 어디 쓰는 물건인지, 이런 작은 질문들을 통해 역사라는 것의 실체 속으로 밀고 들어가는 방식을 택한다.

98. 마르크스 철학 연습
한형식 지음 / 오월의 봄 / 2019
마르크스 철학이 매력적인 부분은 으아아아 때려뿌셔 우와와와 저새끼들 뚜까패- 하는 데가 아니라 ‘인간의 본질은 그 현실에 있어서 사회적 관계들의 앙상블’이라는 통찰에 있다. 21세기에 연습해야 할 마르크스 철학이 있다면 사회적 관계들의 앙상블로 만들어진 인간들의 앙상블을 더 선명하게, 더 잘 어우러지게, 더 멀고 어두운 곳까지 퍼져나갈 수 있도록 만드는 데 있지 않나, 싶다. 그러기 위해서 반드시 때려뿌시고 뚜까패야 하는 것들, 물론 있다. 으아아아 우와와와.
--- 읽는 ---








독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 야마구치 쇼
100개의 명언으로 보는 철학 / 개러스 사우스웰
프로이트 심리학 강의 / 베벌리 클락
우리는 얼마나 깨끗한가 / 한네 튀겔
한국인의 99%가 헷갈려하는 동음이의어 / 송호순
라이브 경제학 / 강성민
섹슈얼리티의 매춘화 / 캐슬린 배리
처음 읽는 논어 / 공자
--- 갖춘 ---



주디스 버틀러의 철학과 우울 / 사라 살리
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들 / 제임스 설터
스피노자와 정치 / 에티엔 발리바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