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가자
1
문득 도망가고 싶을 때가 있다- 고 써놓고 보니 거짓말이었다. 문득 도망가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라고 써야지 올바르게 말한 것이다. 사는 게 늘 그런 식이다. 입구에 들어서면서 출구를 확인하는. 퇴로가 없는 진입로엔 들어서지 않는.
들숨과 날숨의 횟수나 맥박수를 세는 일이 건강한 사람에게 별 필요가 없는 것처럼, 도망으로 끝나버린 일들의 횟수를 세는 것은 syo에게 큰 의미가 없었다. 넌 또 도망을 쳤구나- 하는 말 같은 건 아무렇지도 어떻지도 않았다. 넌 또 숨을 쉬었구나-
도망치는 일이 무책임하거나 부끄럽다고 여겨 본 일이 없다. 도망치지 않는 삶 같은 게 세상에 있을 거라고 믿지도 않는다. 내가 지금 도망치고 있음을 알거나 모르거나의 차이일 뿐. 숨을 쉬는 데에 숨을 쉬고 있다는 인식이 필요한 것은 아니니까. 동거인 三의 경우를 보자. 업무 핑계를 댔지만 사실 그냥 괴롭히려는 마음으로 과장 놈이 三에게 도를 넘는 말을 했을 때, 三이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존엄을 외치는 마음의 소리를 외면한 채 꾹 참고 돌아섰다면, 그는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을 친 것이다. syo의 경우도 있다. 둘이 합쳐 2인 가구 중위소득 기준보다 겨우 10만원 넘게 버는 젊은 부부의 신청은 부적합 판정을 내리면서, 재산이 10억에 달하지만 근로소득이나 사업소득이 없는 어느 노인에게 긴급생활비 지원 적합 판정을 내릴 때, 공무원으로서 당연하게도 규정에 따라야 하는 syo는 자기 내부에 오래 품어 둔 무엇인가로부터 도망을 친 것이다. 이런 도망들은 너무나 소소하고 빈번하여 도망으로 계산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겠다. 그런 사람들이나 syo나 다른 건 없다.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이고, 어떤 도망만은 치지 않기 위해 어떤 도망만큼은 쳐야 하는 것이니까.
이래저래 안타까운 일이 잔뜩인 세상이라, 점점 화내는 법을 잊어가고 있다. 여력이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분노에도 에너지가 필요하니까. 건강한 사람이 분노한다. 지친 사람은 연민하고 고갈된 사람은 자기연민한다.



우주에서 보면 인간은 하루를 사는 곤충이나 길가의 이름 모를 풀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인간은 우주가 아니라 자기가 만든 세상에서 산다. 이름을 얻으려고 발광하다가 타인까지 질식시키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드물지만 흔적을 지워 가며 사는 이들도 있다. 나 역시 미숙한 범죄자처럼 가는 곳마다 뭔가를 흘리고 다니지만, 나는 욕망한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는 삶을.
_ 정희진,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
사랑하는 동생아,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어쩌면 우리의 자잘한 슬픔들을 농담처럼 받아들이는 일인지도 모른다. 어떤 점에서는 인류의 거대한 슬픔들까지도 말이다. 사태를 받아들이고 목표를 향해 돌진해야 한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 예술가들은 부서진 컵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
_ 빈센트 반 고흐, 『반 고흐, 영혼의 편지』
"변질된 가치나 가면이 벗겨진 환상은 똑같이 초라한 몰골을 하고 있고, 서로 비슷하게 닮아서 그 둘을 혼동하기보다 더 쉬운 건 없죠.“
_ 밀란 쿤데라, 『농담』
2
이번 주에는 생일이 있었는데, 그날 하루만 12개의 기프티콘을 받았다. 대부분 커피였고 치킨도 있었다. 전에 없던 일이었고, 내 생일이건 니 생일이건 생일 같은 걸 크게 여기지 않는 스타일이라 예상조차 하지 못하다 얻어맞은 선물폭격이었다. 내가 참 잘 살았구나 하는 생각은 하나도 들지 않았다. 똑같이 살아왔던 작년까지는 이런 일이 없었으니까. 그보다, 나도 베풀고 살아야겠구나 하는 마음을 먹게 되었다. 한두 개 받았으면 먹고 잊었겠는데, 이쯤 되니까 무시하기가 어렵다.
3
시력교정수술을 위해 매달 얼마씩 돈을 모아 보기로 했다.
4
6시에 일어나고 대충 21시쯤 집에 도착하는 패턴은 변함이 없다. 요즘은 일찍 자는 편이라 23시에는 일단 자리에 눕고, 누워서 책을 보든가 뭘 하든가 하다가 정신을 차려보면 새벽을 건너 아침으로 순간이동이다. 읽으려는 마음은 여전한데 주어진 시간이 적다 보니 일단 읽다가 하품이 나온다? 그럼 바로 집어던지고 있다. 그랬더니 방 한 켠에 나동그라진 책들의 작은 산이 생겨났는데, 가관이다. 책이란 게, 이렇게까지 재미없는 것이었던가? 마르크스고 나발이고 확 다 불싸지르고 남은 재를 물에 태워서 삼키고 싶고 막 그렇고…….
요즘 고양이는 잘 울지도 않는다 사람을 별로 두려워하지도 않고 가까이 다가오지도 않고 적절한 거리에서 노려보다가 등을 돌린다 너희도 내일이 오지 말기를, 중얼거리며 돌아다니는 거니? 물어 보고 싶은 밤이다 거대한 사상은 이미 내게는 골칫거리다 장식된 책들을 솔직히 다 불사르고 싶다 다 타고 남은 수북한 재를 모아두었다가 심심할 때 물에 타 마시고 싶다 방이 아닌 큰독 안에 들어가 웅크린 채 잠들고 싶은 밤이다 나에게 심각한 표정으로 질문하는 사람을 이해할 수가 없어 그 사람과 둘이 독 안에 들어가 웅크려 자는 것도 좋을 듯싶다 나는 아직 어른이 아니지만 백 살도 넘게 살아버린 느낌은 뭘까
_ 김충규, 「내일이 오지 말기를 중얼거리는 밤이다」부분
--- 읽은 ---
37. 어떤 양형 이유 / 박주영 : 122 ~ 279
: 반드시 글을 잘 쓰게 해 주는 직업이라는 게 있긴 하겠으나, 어떤 직업이든 거기에 종사하는 이들 중에는 기막히는 글빨로 기죽이는 사람 꼭 있는 거 보면, 역시 글잘잘(글은 잘 쓰는 사람이 잘 쓴다).
38. 연애 소설 읽는 노인 / 루이스 세풀베다 : ~ 178
: 헛똑똑이들이 우글거리는 이놈의 문명사회에서 건질 것이라고는 오로지 연애소설뿐이다! 라는 컨셉까지는 아니지만.
: 책 읽는 방법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는 데가 있다. ‘뜨거운 키스’라는 구절을 만난 우리의 주인공은 대체 어떤 게 뜨거운 키스인지에 대해 곰곰 생각하며 상상과 기억을 넘나드는데, 어쩌면 그런 게 읽기의 본령일지도.
: 그나저나 뜨거운 키스, 그건, 헤헤.
--- 읽는 ---

생각하는 마르크스 / 백승욱 : 155 ~ 241, 418 ~ 512
--- 갖춘 ---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 / 데이비드 하비
한 권으로 읽는 지젝 / 켈시 우드
라캉과 지젝 / 강응섭 외
너의 거기는 작고 나의 여기는 커서 우리들은 헤어지는 중입니다 / 김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