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발, 헤발놈

 

 

1

 

이제 더는 헤겔로부터 도망칠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이게 처음 하는 생각이 아니라는 점이다. 벌써 세 번째다. 그것도 올해에만!

 

어찌된 일인지 앞으로 가도 헤겔, 뒤로 가도 헤겔이다. 물론 다들 저마다 필요한 만큼의 헤겔을 설명하고는 있다. 최소한 내가 읽는 책들 중에는, 더 상세한 설명은 헤겔의 역사철학강의를 참조하라거나, 헤겔의 정신현상학쯤 안 읽어본 태만한 독자는 이 세상에 없을 테니 긴 설명은 지면낭비라는 식으로 말하는 못된 새끼는 없다. 그러나 무언의 압박은 있다. 내 이름이 귀에 꽂히는 횟수보다 헤겔 이름이 눈에 꽂히는 경우가 더 잦다보니, 이제 나도 사람의 도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다시금 들었다. , 식욕 수면욕 못지않은 이 치명적인 헤겔욕.

 

헤겔욕구가 사무치는 게 처음이 아니라서, 이미 내 책장엔 1,000페이지에 육박하는 헤겔에 대한 책이 두 권씩이나 꽂혀 있다. 지지난번 헤겔발정에 못 이겨 무려 십만 원 돈을 주고 사들인 것이다.


 

당시 이 두 놈을 책상 위에 올려두고 누굴먼저읽을까요알아맞춰보세요딩동댕동쎄쎄쎄를 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간택된 놈은 첫 페이지부터 네까짓 녀석이 나님을 읽겠다고? 어디 한번 해보시지, 하는 태도로 나왔다. 겨우 다음 쪽으로 넘어갔더니, 어쭈? 이래도? 이래도? 했고, 기진맥진 세 번째 쪽으로 넘어갔더니, 생각보다 끈기가 있는 녀석이군. 인정하지. 그러나 그거 아나? 나는 우리 1,000명 형제 중 셋째 막내일 뿐이라는 사실을, 내 뒤로 997명의 형님들이 기다리고 있다구, 으하하하! 라고 했다. 분명 그렇게 말했어. 내가 들었다니까. 들은 것 같애.

 

결국 그놈을 덮고 다른 아이를 골라 읽었다. 얘는 그나마 헤겔의 사상과 개인사를 버무려 놓아서 읽어지긴 했다. 그렇게 하루에 얼마씩 꾸준하게 읽어나갔다. 그런데 200쪽 근처에 도착할 즈음에는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읽을 때마다 헤겔과 함께 나도 늙어가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 이렇게 800쪽을 더 읽으면 분명 헤겔은 죽겠지. 그리고 나도 죽겠지. 죽을 것 같애.

 

결국 그놈도 덮고 헤겔도 덮었다. 그렇게 그 시기의 헤겔발정은 생명의 위협 앞에 깨끗이 해소되었다. 사람이 먼저지, 헤겔이 먼저냐.

 

 

 

2

 

그러다 오늘날 뜻밖에 역병처럼 다시 찾아온 헤겔발정에, 얇디얇은 책 세 권을 빌려왔다. 그 가운데 하나는 아무래도 청소년용으로 쓰인 듯 보이는 헤겔 입문서다. 그런데 읽다보니, 이런 대목이 나왔다.



하지만 노트북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고 하자치료를 해야 하는데 나는 컴퓨터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하지만 내 친구 병창이는 컴퓨터 프로그램에 대해 잘 알고 있다병창이가 내 노트북을……

이광모세계 정신의 오디세이, 52

 

? 내 친구 병창이라고? 근데 왜 나도 병창이가 내 친구인 것만 같지? 금방 그 이유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 컴퓨터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따라서 치료를 해야 하는데나는 컴퓨터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하지만 내 친구 병창이는 컴퓨터 프로그램에 대하여 잘 안다그래서 나는 병창이에게 ……

이광모다시헤겔을 읽다

 

syo는 이 지점에서 다섯 가지의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첫째, 이광모 선생님과 이병창 선생님은 최소한 12(2019 2007)지기 친구다.

둘째, 12년이 지나도록 두 분의 우정은 탈 없이 이어져왔다.

셋째, 이병창 선생님이 컴퓨터 프로그램에 대해 잘 아시기는 오지게 잘 아시나보다. 12년이 지나도 이광모 선생님께 컴퓨터 프로그램 하면 이병창 선생님인 것이다.

넷째, 2019년 작을 읽었으니 2007년 작은 이만 읽어도 될 듯하다.

다섯째, 사실은 이 책이 다시, 헤겔을 읽다바로 옆에 꽂혀 있었을 때 짐작했었어야 했다. syo는 정말 아무 생각이 없는 듯하다. 몇 주 전만 해도 신간 코너에 꽂혀있더니 너도 이렇게 아무도 찾지 않는 철학 서가 구석탱이에 꽂히는 운명이 되고 말았구나. , 화무십일홍이오 권불십년이누나, 이러면서 멍청하게 이 책을 뽑아들었네. 저자 이름도 확인 한번 안 해보고.

 

 

 

3

 

그리고 그 근처에서 뽑아온 얇은 헤겔 전기 한 권.


하지만 그가 제일 좋아한 책은 사실 철학이나 전위적인 교양서가 아니었다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나 같은 해에 출간된 실천이성비판도 아니었고 레싱의 에밀라 갈로티도 현자 나탄도 아니었다괴테의 괴츠 폰 베를리힝엔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혹은 실러의 군도』 역시 그의 관심 밖이었다그가 즐겨 읽은 작품은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요한 티모테우스 헤르메스의 소핀의 메멜에서 작센까지의 여행으로 영국 가정소설을 모범으로 7년전쟁 이후 동프로이센 시민들이 겪은 현실을 묘사한 작품이었다청년 헤겔은 이해력이 매우 뛰어났음에 틀림없다그리고 성실하기도 했다-적어도 쿠노 피셔의 진술에 따르면 헤겔은 대때로 지나치게 꼼꼼하다는 평을 받았다고 한다하지만 그토록 한심하고 지겹기 짝이 없는 소설에 몰두할 수 있는 그 보잘것없는 청년이 미래의 어느 날 의미심장한 사상가로 변모할 것이며그것도 가장 선두의 대열에서 세기를 대표하는 최초의 철학자가 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_ 우도 티이츠, 『헤겔』, 13-14쪽

 

이후에도 친구들의 헤겔 걔가 저렇게 뽱 뜰 줄은 정말로 몰랐다니까요?식의 진술 몇 개와, 학기가 거듭할수록 미세하지만 뚜렷하게 망해가는 성적표 같은 것들을 언급하면서 이 전기는 헤겔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도입부에서 이렇게 독자의 흥미주머니를 잡아채는 책이라면 믿을만하거나 사기거나 둘 중 하나다. 얘는 뭘까? 아직은 모르겠다. 실은 이 책 두 번째 읽는데도. 뜬금없이 리셋증후군에 걸렸던 재작년 5월초,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는 없어서 대신 읽은 책 목록을 싹 비우고 대리만족한 일이 있었는데, 읽었어요 스탬프는 아무래도 그때 날아간 듯하다.

 

 

 

4

 

철없는 인간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런 syo라고 해서 이렇게 입문서만 읽다가 흥미를 잃고 다시 흥미가 생기면 입문서를 읽다가 또다시 흥미를 읽는 쳇바퀴 같은 독서경로가 썩 자랑스러운 것은 아니다. 단지 능력과 의지와 의욕과 비전과 뚝심과 기억력과 용기와 절제력 등등이 각각 조금씩 부족할 뿐이다

형편없는 인간인데 이거?

 

그래서 이런 대목을 만나면 목뼈 부러진 사람처럼 고개를 주억거리게 된다.

 


한국 출판시장은 그 어느 때보다 페미니즘 서적의 홍수다하지만 풍요 속에는 짙은 언어의 빈곤이 동시에 자리하고 있다모두가 페미니즘을 외치는 시대에도 한국 독자들은 페미니즘의 문턱에 들어서는 순간 황량함을 감내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있는지도 모른다풍요 그 자체는 반가운 일이지만문제는 그로 인해 입문으로 시작해 입문으로 끝나고 만다는 것이다처음은 나아가기 위한 것이다그렇지 않다면 되풀이되는 시작만 있게 된다.

말과활 아카데미12개의 테마로 읽는 페미니즘 도서목록

 

되풀이되는 시작만 있다니, 정말로 절묘하게 syo의 뼈를 정밀타격하시네요…….

 

 

 

--- 읽은 ---

+ 세계정신의 오디세이 / 이광모 : ~ 64

+ 희망 대신 욕망 / 김원영 : 224 ~ 341

+ 감정의 혼란 / 슈테판 츠바이크 : 63 ~ 213

 

 

--- 읽는 ---

= 카를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상 / 알렉스 캘리니코스 : 108 ~ 214

= 칼과 책 / 둥핑 : 73 ~ 199

= 빨래하는 페미니즘 / 스테파니 슈탈 : ~ 151

= 헤겔 / 우도 티이츠 : ~ 60

 


댓글(15) 먼댓글(0) 좋아요(5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삭매냐 2019-08-18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도가 나가지 않는 책은 빨리 포기하심이.... 그나저나 저도 헤겔은 읽어 보고 싶습니다. 특히 그놈의 변증법에 대해서요.

syo 2019-08-19 11:10   좋아요 0 | URL
포기는 제 특기지요. 정말 빨리 포기합니다. 벌써 얼마나 많이 포기했게요 ㅎㅎ

수연 2019-08-19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신기. 저녁때 헤겔 관련서 살까 말까 한참 갈등하다가 애인이 안사준다고 해서 또 한참 갈등하다가 그냥 안사고 왔는데 지금 막 컴 켜고 포스팅 쓰고 확인하니 헤겔 이야기. 찌릿. 언젠가 읽게 될 날이 있겠지요 저도...

syo 2019-08-19 11:10   좋아요 0 | URL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야말로 헤겔의 마력을 증명하는 대목일까요......

반유행열반인 2019-08-19 0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울보면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헤겔이는 읽기 어려운 데다가 못생기기까지! 입문입문입문 하다 보면 그래도 코끼리 다리 정도는 확실하게 이건 다리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아닐까요.

syo 2019-08-19 11:47   좋아요 1 | URL
저래봬도 여자들에게 인기가 좀 있는 축이었다는 평입니다. 라이벌(이라고 혼자 주장하는) 쇼펜하우어가 워낙 까이고 다녀서 상대적으로 그래 보이는 걸지도 모르지만....

다락방 2019-08-19 0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병창이는...어??? 병창이가 왜???? 했는데, 쇼님 페이퍼에서 기존에 읽었던 구절인가 봅니다. ㅎㅎㅎㅎ

병창이 안녕?
잘 지내지?
여름이 가고 있단다.

syo 2019-08-19 11:15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 이병창 선생님은 잘 계시는 듯합니다. 최근에 마르크스의 대작 <독일이데올로기>를 완역하셨어요. 두 권 5만원 돈이지요😣

독서괭 2019-08-19 12: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000명 형제... 병창이..ㅋㅋㅋㅋㅋㅋ
헤겔은 읽을만한 놈이 못된다는 걸 확실히 알고 갑니다. 전 변증법 같은 거 몰라도 됩니다ㅋㅋ

다락방 2019-08-19 13:26   좋아요 0 | URL
독서괭 님의 이 댓글을 다락방이 좋아합니다..

syo 2019-08-19 13:54   좋아요 0 | URL
헤겔은 대체 수없이 많은 인간들에게 좌절 혹은 짜증을 안기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일까요.

공쟝쟝 2019-08-19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병창이? 어디서 많이 들었는데... 지금 읽는 책 저자 이름이네요.. <현대 철학 아는 척하기:부제- 한권으로 끝내는 현대철학 다이제스트> ㅋㅋㅋㅋㅋ 저는 다음주까지 한권으로 현대 철학 끝내려고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나 저나 헤겔에 대해서라면 제가 할말이 정말 많은 데요.. ......... 음 하지 않겠습니다... ㅋㅋㅋㅋㅋ 요점은 헤겔 이후로 오늘 날까지 철학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는 것. 그랬던 제가 정말 오랜만에 철학 입문서를 집어 들었는데... 그 저자 이름을 여기서 만나다니.. 으아~ 기분 좋다 ㅋㅋ

syo 2019-08-20 23:58   좋아요 0 | URL
바로 그렇습니다. 저는 ‘병창이‘가 이병창 선생님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습니다. 두분 다 헤겔로 논문 쓰신 것 등으로 비추어보면 꽤 높은 확률로 그럴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책은 좋은 책이지만 어쩐지 사람 지치게 하는 데도 있습니다. 건승하세요, 장쟝님.

카알벨루치 2019-08-19 1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읽다 죽다 ㅜㅜ ㅎㅎㅎㅎ헤겔겔겔겔

syo 2019-08-20 23:58   좋아요 1 | URL
얼마나 읽으면 책 읽다가 죽게 되나요? 헤겔겔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