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한데 아무도 답을 알려 주지 않으면 혼자서 실험을 하곤 합니다
1
이십대 중반이나 후반쯤이었으려나, 읽은 책이 지금의 절반 정도였을 즈음에는 왜 읽는지 명확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책을/책은 왜 읽느냐고 물어오면 대답으로 난사할 묵직한 총알들을 잔뜩 마련해놓은 시절이었다. 그런데 어떤 변곡점을 지나고 나서부터는 읽어도, 읽어도 내가 왜 읽는지를 모르게 되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점점 더 알 수가 없었다.
2
북플의 마니아 로직을 분석하는 글을 쓰면서 syo가 스스로 상정했던 이미지는 ‘큰 의미도 없고 보상도 없는 일에 몰두하여 뭔가를 찾아내는, 미미하고 미세하지만 그래도 세상에 한 줌 도움은 되는 덕후’ 정도였던 것 같다. 그런데 의외로(사실 그렇게 의외는 아니었다. 이런 말을 하실 분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다) 마니아 그게 뭐라고 집착하는지 모르겠다는 식의 댓글을 여기저기서 많이 받았다. 물론 syo야, 인마, 이 못난 놈아, 마니아 그깟 거에 집착하다니 부끄러운 줄 알아라, 하며 직접 syo를 질타하신 분은 없었다. 그러나 syo가 또 마니아에 완전히 욕심 없는 인간은 아니었고, 특정 작가, 특정 분야의 마니아가 되기 위해 로직의 허점을 공략하여 점수를 획득한 적이 없다고 할 순 없으므로, 불특정 다수를 향한 이웃 분들의 탄식은 그대로 칼이 되어 syo의 가슴팍에 팍팍 꽂혔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웃 분들의 단단하고 선명한 독서의지를 마주하노라면, 아직 나는 내가 왜 읽는지를 전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더 아팠다. 다시 오래 생각했다. 나는 왜 읽는 것일까.
3
책은 우리 내부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뜨리는 도끼여야 한다는 카프카의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그걸 독서 방법론으로 풀어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syo는 공포(농담이 아니라 진짜 공포)를 느꼈다. syo는 저 문장을 이렇게 독해했다. 책이라면 모름지기 우리 내부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뜨리는 도끼는 되어 줘야지. 그래야 책이지. 그러니까 저건 카프카의 독서론이 아니라 창작론 아닌가? 어떻게 읽으라는 말이 어디 있지? 그런데도 기어코 저걸 독서론으로 치환하는 이들이 있다. 그런 시각은 곧 특정한 목적의 독서를 강요한다. 네 안의 편견을 깨고, 새로운 눈을 뜨게 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하는 것, 그게 독서다- 라고. 이것은 자기계발과 자기착취의의 논리다. 그리고 마땅히 책이 지어야 할 짐의 일부를 독자에게 전가한다. 책은 도끼여야 하지만 모든 책이 반드시 도끼는 아니다. 어떤 책은 칼이고, 망치고, 송곳이지만, 또 어떤 책은 대걸레, 빗자루, 심지어는 이쑤시개일 수도 있다. 도끼가 아니라 빗자루라 하더라도 세게 내려치면 얼음은 깰 수 있다. 그런데 왜 빗자루를 들고 낑낑대며 얼음을 깨야 하는데? 무엇보다, 왜 우리가 책으로 얼음을 깨야 하는데? 책으로 그 얼음을 지치고 나가면 안 돼? 책으로 그 얼음을 갈아서 마시면 안 돼?
syo는 항상 궁금했다. 왜 사람들은 독서의 효능과 독서의 목적을 혼용하는 걸까? 효능이 곧 목적인 것, 그건 기본적으로 책이 내게 뭔가를 주니까 읽는다는 마음이다. 뭐라도 주지 않으면 책을 읽을 이유가 없다는 생각의 뒷면이다. 책은 우리에게 재미, 감동, 지식, 지혜, 감수성, 간접 경험, 그리고 심지어는 세계평화까지도 가져다 줄 수 있다. 분명히 책엔 그런 효능이 있다. 하지만, 그러므로 우리가 책을 읽는 것일까? 책 한권을 다 읽었는데 저것들 중 어느 하나도 얻지 못했다면, 아, 젠장, 시간 낭비 했네, 이 시간에 뭐라도 다른 걸 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며 호모 이코노미쿠스적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일까? 사실 우리는 누구도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을 낭비 없이 가장 효용이 높은 방향으로 사용하고 있지는 않다. 당신도 그렇습니다. 아니라면 지금 이 택도 없는 잡글을 읽느라 낭비되고 있는 시간을 푸시업과 스쿼트를 하시든지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으시든지 하며 쓰셨겠지요. 그런데, 왜 유독 책에게만 책아, 책아, 뭐라도 내 놓아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먹으리- 하는 식으로 모질게 대하는 걸까? 왜 살아요? 하는 질문에는 각각의 인생마다 너무도 독자적인 대답을 내놓을 것이라서 남이 내린 답을 내 인생에 그대로 바를 수 없을 것을 충분히 예상하면서, 왜 읽어요? 하는 질문은 왜 이리도 물어대는 것일까?
4
나는 마니아가 되기 위해 책을 읽지는 않는 것 같다. 마니아 백만 개 1위 해봐야 손에 떨어지는 건 아무 것도 없다. 이야, 내가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서 마니아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어, 하며 혼자 방구석에서 자위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syo는 마니아로 오르가즘을 느낄 만큼 섬세한 인간이 못된다.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책을 읽지는 않는 것 같다. 책을 읽고 나서 한줌이나마 더 괜찮은 사람이 된 것 같지만 그래봐야 큰 인물이 되진 못했다. 고작 syo에 도착했을 따름이다. 만약 책을 읽지 않고 여기까지 왔다 해도 그렇게 쓰레기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봐야 syo였겠지.
나는 재미나 감동을 위해서 책을 읽지는 않는 것 같다. 내가 읽는 책은 대체로 나를 어렵게 하고, 나를 불편케 하며, 가끔은 나를 즐겁게 하지만, 기어코 나를 울리거나, 결국은 나를 분노케 한다. 책을 읽지 않으면 내 감정은 대체로 평탄할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걸 보장해주진 않는다. 결국 책만이 내 감정을 들었다 놨다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세상에 크고 작은 도움을 주기 위해 책을 읽지는 않는 것 같다. 세상은 미세하기가 먼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syo의 고사리 손까지 빌릴 정도로 망하지는 않은 동시에, syo가 피와 땀과 사랑과 정열을 다 바쳐 한 몸 헌신한대도 병아리 눈물만큼도 나아지지 않을 만큼 망했다. syo가 소인이건 거인이건, 결론적으로 syo 한 스푼은 세상을 달게 하지 못한다.
나는 많이 읽네, 잘 읽네, 칭찬 받고 허영을 떨기 위해서 책을 읽는 것 같기는 하다. 아마도 이 나이에 무직이라 제 한 몸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패배감을 독서를 통해 메워보려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다시 과거로 돌아가도 책을 내려놓고 취업 전선에 뛰어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을 보면, 무언가를 ‘대리’하여 만족하기 위해 책을 읽는 것만은 아닌 것도 같다.
그렇다면 나는 대체 왜 책을 읽는 것일까?
왜 그 이유는 아무리 읽어도 발견할 수가 없는 걸까?
혹시, 읽지 않아야 발견되는 것일까?
5
하여 한동안 읽지 않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막상 간절하게 원하면 쉽게 구할 수 없다. 이건 오르골의 법칙이다. 이걸 뒤집으면 쉽게 구할 수 없다면 간절하게 원하게 된다. 이건 도루묵의 법칙이다. 그러고 보면 서울의 거리를 걷다가 마치 낯선 여행지처럼 느껴질 때가 몇 번 있었다. 나 혼자 하염없이 걷고 있을 때, 이별했을 때, 이제 다시는 누군가와 웃으며 그 거리를 걸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돌이켜보면 바로 그때가 도루묵의 법칙이 작용했을 때였다. 쉽게 구할 수 없는 것이 도처에 널려 있는데도 간절히 원하지 않는 인생이란 어쩐지 낭비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_ 김연수, 『언젠가, 아마도』
무슨 문제가 생기거나 타인과 마찰이 생겼을 때 우리는 쉽게 말하고는 한다.
"그거 상식 아니에요?"
하지만 여행을 해보니 세계가 공유하는 상식이란 없었다. 나라마다 법이 다르고 정서가 다르다. 싱가포르에선 껌을 팔지 않는다. 네덜란드는 마약이 합법이지만 어떤 나라는 마약을 운반만 해도 중형을 받는다. 한국에선 몇 년 전만 해도 식당에서 담배 한 대 피우는 게 어렵지 않았지만, 지금은 상식을 벗어난 일이고 법으로도 금하고 있다. 상식은 늘 변한다. 상식은 자기 안에서만 통하는 헛된 믿음이다. 그 상식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순간 상식은 폭력이 된다.
_ 박 로드리고 세희, 『나는 평생 여행하며 살고 싶다』
사랑에 빠진 자는 그 대상을 소유하려고 애쓰지만 타자는 항상 달아난다. 사랑한다고 해서 그 타자를 가질 수는 없다. 남는 것은 타자가 부재하는 자리에 고인 시간이다. 타자가 부재하는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기다림이다. 사랑에 빠진 자는 끊임없이 그 대상을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린다.
_ 장석주, 『슬픔을 맛본 사람만이 자두 맛을 안다』
가능하다면 하루에 여덟 시간에서 열 시간 정도, 매일매일 책만 읽고 살았으면 좋겠다. 어쩌면 그 이상도 좋겠다. 책 읽기 말고는 딱히 하고 싶은 일이 없다. (...) 그리고 나는 내가 강박적으로 책 읽기에 매달리는 이유를 안다. 나는 다른 곳에 있고 싶어서 책을 읽는다. 그래, 지금의 우리 사회가 그나마 합리적으로 살 만한 세상이라는 것은 안다. 하지만 책이 제시하는 세상은 그보다 훨씬 낫다. 가난에 시달리거나 뭔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사람이라면 더욱더 그럴 것이다. 극빈자 임대주택에서 표준에 한참 미달인 부모와 살던 어린 시절부터 나는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책만 읽어댔고,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은 이 욕망이야말로-그날 그날, 아니 매시간-독서의 가장 강력한 동기라고 굳게 믿어왔다.
_ 조 퀴넌, 『아직도 책을 읽는 멸종 직전의 지구인을 위한 단 한 권의 책』




독서가 가지는 여러 가지 놀랍도록 무궁무진한 효용과는 별개로 저는 사람이 가장 아름다워 보일 때가 책을 읽으며 뭔가 깊은 생각에 잠기며 몰입할 때입니다. 요리사는 요리에 집중하고, 바이올리니스트는 연주에 몰입하고, 소방관은 화재를 진압하고, 강사는 강의에 열정을 다할 때 가장 아름답죠. 그런데 이것은 각자의 직업과 관련한 아름다운 순간이죠. 반면, 독서하는 그 순간은 사람의 직업, 신분, 나이, 성별에 상관없이 가장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_ 오프리, 『뷰티 인 리딩』
구멍을 메워야 할 틈으로만 본다면 평생 부질없는 삽질을 해야 하겠지. 모두 메웠다 싶어 돌아보면 다시 드러난 틈에 절망할지도 모르고. 만약 뚫린 그곳에 빛을 들일 수 있다면, 삽은 그만 내려놓고 거기 쪼그리고 앉아 쏟아지는 빛에 등을 데우고 싶어. 그러면 마음까지 훈훈해질 것 같은데 말이야.
_ 김민아, 윤지영,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자신의 안부를 물었다』
우리의 불투명한 내부는 우리 삶의 부끄러움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삶이 다른 삶의 식민지가 되지 않았다는 증거다.
_ 황현산,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
저는 위안 받고 싶었습니다. 제가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믿고 싶었습니다. 하느님의 선의로 빚은 사람이라는 존재를 믿고 싶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저는 저를 결코 떠나지 않을 존재를 소유하고 싶었습니다. 버려지고 싶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홀로 남더라도 결코 홀로이지 않고 싶었습니다. 보이지 않더라도, 세상 어딘가에는 저의 편이 존재한다는 감각을 느끼고 싶었어요.
_ 최은영, 「선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