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나 서울이나 덥기로는 별반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24시간 가운데 20시간은 에어컨을 가동하사 7월에 옆방 사람과 기침소리로 교통하는 거룩한 기적 충만한 축복받은 고시원과는 달리, 지옥문 지키는 개나 물어갔으면 좋겠다 싶은 누진세 걱정에 뜨문뜨문 냉방할 밖에 도리 없는 가난한 우리 집은 은총이라고는 씨가 마른 열대야의 시커먼 뱃속이다. 생각해보면 그 고시원은 정말 좋았다. 1월에 올라가 겨울 내내 반팔티를 입어야 했고, 6월부터는 실내에서 카디건을 착용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꽤 많은 고시원을 전전해 온 syo지만, 세상에 살다 살다 이런 대접은 그야말로 처음이었다. 남들 다 덥다 덥다 미쳤다 할 때, 방 안에 처박힌 나는 세상이 지금 어떻게 돌아가는지 도통 모르고 잘 살았는데, 이제 모든 것을 알았다, 이 저주 받을 온난화 새끼야......

 

어쨌든 대구에 내려오자마자 가장 먼저 한 대외활동(?)은 도서관 방문 및 도서 대출이었다. 나도 참 어지간한 놈이지. 쨍한 볕이 정수리를 폭격하는 그 고난의 길을 걷고 걸어서 근 8개월 만에 중앙도서관에 들어섰는데,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놈의 세상이 하나 변한 게 없고, 이놈의 syo도 하나 변한 게 없다는. 이놈의 책들을 읽는다고 이놈의 syo가 변하겠냐는. 겨울은 자꾸 추워지고 여름은 자꾸 더워지고 syo는 자꾸 늙고 자꾸만 무지몽매해지는 기분이다. 남들은 도서관에 자주 드나드는 이들은 자꾸 똑똑해질 거라 생각하겠지만, 사실 도서관에 자주 드나드는 이들은 스스로 자꾸 멍청해지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읽어야 할 것들의 거대한 산 앞에서 목소리는 점점 기어들어간다. 강녕하시옵니까, 도서관님, 미미한 소생은 syo라고 하온데, 소생에게 부디 책 10권만 빌려갈 수 있는 은덕을 베풀어 주실 수 있으시겠사옵니까굽신굽신. 예끼, 이놈. 네놈 같은 무지렁이가 책은 읽어 무엇 하려 하느냐. 사람이 되고 싶사옵니다. 허허, 참으로 거대한 욕망이로세. 오냐, 어디 한 번 가져가 읽어 보거라 이놈. 사람이 될 수나 있는지.

 

그런 마음으로 다시 10권을 읽어 사람에 한 치 더 바투 다가앉으려 한다. 여름은 독서의 계절. 읽는 것 자체가 수양이 되는 불구덩이라 심지어 만화를 읽어도 효능이 뿜뿜인 계절, , 여름이다.

 

180801-180807 : 20권


 

1.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

- 제목에 묘가 있다. 실제로 황현산 선생님이 쓴 글들을, 그 글들이 우리에게 말하는 바를 각기 하나의 부탁으로 본다면, 그래서 이 한 권의 책 안에 깃든 선생님의 부탁을 우리가 들어 드린다면,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더 이상 다른 세상을 꿈꿀 필요가 없을 것이다.

- 그리고 그런 거대하고도 위대한 부탁을 놓고 사소하다며 눙치시는 모습에서, 그저 작은 사람의 작은 의견일 뿐입니다, 하는 겸손함은 물론, 이런 사소한 것들도 안 들어주고 그럴 거야? 하는 은근한 채근도 느껴지는 것 같다. 앞으로도 한 70년 정도 더 계시며 계속 이 세상을 글로 깨우고 적셔 주셨으면 하는 부탁을 드리고 싶은데, 이 부탁은 또 사소한 부탁인가, 거대한 부탁인가.

- 황현산 선생님의 문체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 자체가 시간과 활자를 낭비하는 일이겠으나, 비판하는(때로는 비난하는) 글조차 이렇게 낙낙하시다니, 매사 분노와 비꼼으로 글을 만드는 syo 같은 인간은 도대체 인간입니까.....

 

2. 철학자의 공부법

- 조선에서 초중고를 나온 사람이라면 ’~공부법이라는 제목의 낚시질에서 영원히 자유로울 수는 없는 운명인 것인가.

- 저자가 자신이 읽은 책들을 성장 과정에 맞춰 주우우우우우욱 나열하며 평하는 꼭지는 그가 1897년생이고, 일본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다지 의미도 재미도 없는 부분이다. 철학 공부법, 책 읽는 법에 대한 이야기는 나도 어디 가서 해 줄 수 있는 정론의 범위에서 크게 일탈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이 책은 뭐랄까, 뭐라고 하고 싶지 않은 책이다.

 

3. 요즘 무슨 책 읽으세요

- 내가 요즘 읽고 있는 책에 대해 실컷 이야기한 다음, 나 다음 이야기해 줄 사람을 지목하는 식으로 줄줄이 이어지는 독서판 아이스버킷 챌린지 인터뷰.

- 전 도무지 책을 읽지 않사오니 저는 스킵해 주세요, 하며 뿌리치는 이 없이 인터뷰 릴레이의 사슬이 이어졌다는 사실은, 내 주변의 인물 군상들을 생각해보면 정말 놀라운 일이다. 요즘 무슨 책 읽느냐 물었더니 오랑캐 같은 친구 자식의 대답. '요즘'이라는 게 몇 년 전까지를 말하는 건데? 이 책은 결국 크건 작건 자기 분야에서 깃발을 흔드는 이들은 모두 꾸준히 읽고 있음을 재확인한다.

4. 과학이라는 헛소리

- 과학을 빙자한 각종 의도적/비의도적 개소리들을 유쾌하고도 신랄하게 척살하는 가볍고도 중요한 책.

- 선풍기를 틀고 자는 계절이 돌아왔으므로, 반드시 이 책을 읽어야만 했다. 과학적으로 아니라고는 하지만 사실, 아직도 선풍기 켜 놓고 자면 죽을까 봐 조금은 불안하기 때문이다.....

-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편견은 자신이 객관적이고 불편부당하다고 철석같이 믿는 이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편견이고,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개소리는 과학의 세례를 받았거나, 최소 과학의 외피라도 입은 척 하는 개소리다. 바야흐로 때는 21세기고, 인공지능이 우릴 보며 저 멍청한 것들을 지배해야겠다는 생각을 품기 전에 얼른, 우리는 이 사악한/무지한 멍멍이들이 과학적멍멍 소리를 내지 못하게 그 입에 진짜 과학의 재갈을 물려야 한다.


5. 베를린에 없던 사람에게도

- 3개월 베를린을 살아낸 후, 한 달 이내에 원고를 넘겨주기로 약속한 소설가가 어찌된 일인지 1년이 다 지나서야 겨우 쓰기 시작했던, 그럴 수밖에 없었던 베를린 체류기.

- 소설가의 일기/여행기가 그의 소설과는 완연히 다른 색조를 드러내 독자를 깜짝 놀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동시에 역시 이 소설가의 글이다 싶은, 그러니까 글쓴이의 지문 같은 것이 은근히 묻어있을 수밖에 없는 이치다. 그러다보니 독자는 소설가의 소설을 읽으며 그가 비소설은 어떻게 쓸까 궁금해 하거나, 반대로 비소설을 읽으며 그의 주 종목에 대한 큰 기대를 가지게 되는 경우가 있다. 한은형이라는 사람의 숨길 수 없는 독특함, 독자적인 색채가 군데군데 압정처럼 박혀 독자의 손끝을 찔러온다. 이 소설가의 소설을 읽어야겠다.

 

6. 만화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

- 베르그송의 주저 창조적 진화먼나라 이웃나라스타일로 친절하게 풀어 어린이가 읽을 수 있게 펴낸 야심찬 기획

- 베르그송이 말했던 진화는 오늘날 진화생물학에 두드려 맞은 것 같고, 지속으로서의 시간 개념은 베르그송 생전에 아인슈타인에게 실컷 털려서 그런가, 오늘날 우리는 베르그송 이전의 철학자와 이후의 철학자들을 호출하는 빈도에 비해 그의 사유를 즐겨 찾지는 않는 듯하다.

- 원저는 웬만큼 책과 가까운 어른이 읽기에도 쉽지 않다. 그리고 이 책은 아이들에게 읽혀야 한다. 그렇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겠는가? 이 책은 생명은 펄떡펄떡 살아 숨 쉬는 위대한 것이라는 허랑방탕한 한 마디를 길게 늘여 200쪽을 채운 것 같은 인상을 준다.

- 그렇다고 아이들에게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거나 그럴 것 같지는 않다. 어차피 아이들은, 이런 책을 읽을 의사도, 읽은 뒤 어떤 인식을 획득하고 오래 기억할 의사도 없을 것이다. 무용한 짓이고 무리한 짓이다. 도대체 아이들이 왜 베르그송까지 알아야 하는데.


7. 베르그송 읽기

- 그러나 syo는 아이들이 아니므로 베르그송을 한 번 알아보자 하여 집어 든, 성인을 대상으로 하여나온 베르그송 책 가운데 가장 나를 덜 괴롭힐 것 같아 보인 책.

- 입문서 빠돌이로서 syo는 원전을 읽어야 한다는 말씀은 귓등으로 듣고 흘리는 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문서를 읽다 보면 정말 원전을 봐야겠구나 하는 때가 있긴 하다. 이런 책을 만났을 때.

- 거두와 절미를 어떻게 했는지 모를 일이지만, 베르그송의 사유가 진짜 딱 이 책에서 묘사하는 정도라면, 그 사유의 정합성 여부를 따지기에 앞서, 도대체 베르그송이 왜 필요한지조차 알 수가 없겠다. ’안녕, 난 베르그송이야. 있지, 나는 세상이란 게 이랬으면 좋겠어.‘사실 세상은 이렇다로 바꿔나가는 과정에 설득력이 너무 부족하다.

- 이를테면, “하지만 베르그송에 의하면 페히너가 주장하듯 감각 S1S2 사이에 (.....) 그런데도 페히너는 감각 S1S2 사이에 중간 부분이 있다는 것을 믿는 잘못을 범했다.” (134) 부분은, 결국 페히너는 틀렸다. Because Bergson said so. 이런 식으로 읽힌다.

- 저자는 베르그송의 생명주의 철학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 10개를 나열하는데, 그 중 첫째는 모든 생명은 소중하고 평등하며 현재 진화의 끝자락에 서 있는 우리 인간은 더욱 그렇다.” 라고 한다. 모든 생물은 현재각자 진화 과정의 끝자락에 서 있다. 인간만 거기 서 있는 게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 문장은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더욱 평등하다.”를 떠올리게 한다.

 

8. 니체

- 니체가 머물렀던 자리를 따라 이곳저곳 여행하며 니체 사상의 궤적을 추적해 보는 본격니체탐사 프로젝트 그놈이 알고 싶다.

, 기획은 된 듯하나, 실제로는 니체의 철학이 아니라, 니체를 씹어 삼킨 이진우 선생님의 철학을 읽고 있다는 느낌이다. 이진우 선생님의 말씀과 그것을 뒤에서 든든히 받치고 있는 니체의 글들이 이루는 견고한 콜라보.

- 그러나 여행기로는 그다지 매력을 잘 모르겠다 싶은 책. 그렇다면, 굳이 안 다녀오셨어도 이 정도 책은 쓰지 않으셨을까요?



9. 지금 여기의 페미니즘 X 민주주의

- 꼭 가서 듣고 싶었으나 경성은 너무 멀었고, 경상도 유생은 그저 목멱산 방향을 바라보며 눈물을 떨굴 수밖에 없었던 슬픈 사연의 페미니즘 강의 8회를 옮겨 담아 놓은 강의록.

- 정희진 선생님이야 말해 입 아프지만, 손아람이라는 인물의 말힘이 보통 아님을 새로이 알았다.

- 아무래도 대중강의다 보니 복잡한 개념을 둘러친 어려운 책이 되지 않았다. 그 점은 누군가에겐 이 책이 가치가 있다는 증거로, 또 다른 누군가에겐 가치가 없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질 수 있겠다. 오래 두고 읽을 만한 책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 읽고 지나가는 일에 손해 날 이유는 없겠다.

 

10. 아무튼, 방콕

- 속지 마시라. 이것은 방콕 여행기를 빙자한 연애담이다전형적인 방콕 여행기처럼 시작하기에 안심하고 가드를 내렸더니만, 은근슬쩍 본색을 드러내더니 어어어 하는 사이에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염장 공격을 날린다.

- 아무튼 시리즈의 여러 권을 읽고 있지만, 재미있으리라 가장 기대가 컸던 택시는 그 거대한 기대감 때문인지 덤덤했고, 기대는커녕 김병운이 뭐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고 읽은 이 책 방콕은 퍽 웃기고 재미있었다. 방콕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은 1도 생기지 않았지만, 김병운이라는 작가가 쓴 소설이나 한 번 읽어 볼까나, 살짝 마음이 움직였다.

- 그리고, 그렇다면 나도, 8년 넘게 한 사람을 사랑하며 만든 이야기가 적지 않은 나도 어쩌면, 비록 방콕은 가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이런 글들을 지을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11. 굶어 죽지 않으면 다행인

- 신촌 인근에서 이후북스라는 작은 책방을 운영하며 쓴 소소한 책방 일기.

- 간결한 문장, 징징대는 척하나 씩씩하고 유쾌한 글투, 모자란 척하나 덧붙일 것이 없는 그림.

- 요즘 부쩍 많이 보이는 책방 책. 책방은 늘어나다가 이제 슬슬 소강상태인 듯하고, 대신 책방 책이 늘어나고 있다. 책방을 열었어요-부터 젠장, 책방을 닫고 말았다-까지.

- 여러분, 굿즈에 눈이 멀어 알라딘에서만 책을 사는 놈(저 아닙니다)이 있다고 합니다. 틈만 나면 굿즈에 투입하는 정성의 1/10만 북플에 좀 투자해 봐라 이 알라딘 시장만능주의자 놈들아!” 하고 외치고 다니면서도(저 같으시겠지만 저 아니에요) 매번 책을 구매할 때마다 어떻게든 5만원을 맞추기 위해 이 책 저 책 주문서에 넣었다 뺐다 하느라 시간을 탕진한다는데요(.....). 그놈이 이 책을 읽고 좀 반성했다고 하는군요.....(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저네요.)

 

12. 철학자 사용법

- 알랭 드 보통이란 영국 놈이 철학을 눈곱만큼 함유한 책으로도 쏠쏠히 해 먹었단 말이지. 그렇다면 나는 좀 더 진한 철학의 맛이 어떤 건지 보여주지, 하는 마음을 먹었다면 한 번 시도해 볼 수 있는, 전형적인 프랑스 철학자풍의 짧은 글들이 모여 있는 철학책.

- 끝내 이런 문장을 잘 읽어내는 사람이 되지 못하면 어쩌지 하는 마음이 불안이라면, 읽기를 넘어 이런 문장을 쓰는 사람이 되면 어쩌지 하는 마음은 공포다. 예를 들면 니체, 프루스트, 바슐라르, 베르그송의 문장을 군데군데 인용하는데, 세상에 걔네들 것보다 뒤따르는 작가 자신의 문장이 더 어렵고 현란하다. 무슨 의도가 있는 것 같지. 에잇, 불란서 놈들, 그야말로 애증의 존재입니다.



13. 페미니스트 선생님이 필요해

- 그다지 어렵지도 독특하지도 않지만, 제목에서 발생하는 충격파가 사회를 꽤나 뒤흔들어 놓을(놓았으면 좋을) .

- 책 자체는 술술 넘어간다. 공저자들의 글빨이 다채로워 읽는 재미가 역시 쏠쏠하다. 특히 김현 시인의 글은 읽고 좀 놀랐다. 그의 다른 산문집을 읽고 엄청 실망한 기억이 났기 때문인데. 아니, 이렇게 잘 쓰는데? 조만간 다시 읽어 보리. 역시 글잘잘(글은 잘 쓰는 사람이 잘 쓴다)은 진리.

- 일단은 페미니스트 선생님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책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페미니스트 선생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 방금 두 문장은 얼핏 읽으면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말이지만, 동시에 또 잘 읽어 보면 엄청 말 되는 말입니다. 제가 그렇게 허술한 놈 일리가요...... 죄송합니다

- 퍽 실효적이고 올바른 접근법이 아닌지? syo의 학창시절을 돌이켜 보면...... 남중 남고에도 정말 절실하다구요.

- 이 책이 문제제기만 하고 있다는 짧은 서평을 읽었는데, 의아하다. 이 책만큼 대놓고 해결방법을 떠먹여 주는 경우를 별로 못 봤는데. 제목을 한 번 읽어 보세요.....

 

14. 죽음을 이기는 독서

- 나중에 크면 비평가가 될 거예요, 야무진 꿈을 품고 SNS나 블로그에 이런 저런 글들을 올리며 자신을 단련하는 꼬꼬마에게 권하고 싶으면서 권하고 싶지 않은 책. 재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다.

- 저자는 그렇게 무결하지만 책 자체의 단점은 있는데, 저자가 비평한 책들이 대부분 국역으로 만날 수 없는 것들이라는 점이다. 다시 생각해보니 책의 단점도 아닌 것 같다. 잘못은 다른 데 있어.

- 그런 이유로 읽을 만한 책이 아닌 것 같다는 편견을 가지실까 봐 덧붙이고자 한다. 비평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비평 자체가 훌륭해야 한다. 그리고 비평의 대상이 되는 작품이나 현상을 독자가 이미 접한 바 있어야 한다. 그러나 가끔씩 우리는 글 자체가 너무 잘 만들어지다 보니 우리가 읽지 않은 책, 보지도 않은 영화를 말하는데도 덜컥 걸려들어 감탄사 제조기라도 된 마냥, 우와, , 대애박, 같은 말들을 대량생산하는 경험을 갖기도 한다. 정말 가끔씩. 아직 그런 적이 없으시다면, 어쩌면 이 책이 해줄지도 모릅니다, 와 같은 말까지 덧붙이는 섣부른 짓이야 하지 않겠으나, 어쨌건 저 솜씨가 참 탐나는 것만은 사실이다.


15. 모든 것이 되는 법

- 하고 싶은 일이 너무도 많은 다능인들을 위해 용기를 북돋아 주고, 그들이 각자 자신의 성향에 맞는 방식으로 커리어를 짜 나가는 데 유용한 4가지의 템플릿을 제공하며, 하고 싶은 일들을 마침내 다 시도할 수 있는 유용한 잔기술과, 인간을 한 분야에서만 최고 효율로 기능하는 분업사회의 부품으로 전락시키고자 하는 다양한 사회적 압박을 시원하게 쌩깔 수 있는 방법도 제안한다.

- 급하게 읽었지만, 희한하게도 은근히 위로가 되는 책이었다. 허허허.

 

16. 잃어버린 임금을 찾아서

- 이민경. 세상에서 제일 귀한 사람. 언어, 계보, 그리고 이번엔 임금이다. 3가지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있을까? 있다면 조금만 기다리자. 그것도 곧 이민경이 가져올 것이다.

- 이 책이 통째로 마음에 안 드는 분들 세상에 많을 것이다. 크건 작건 힘을 가진 분들일 것이다. 반면 구구절절 동의하는 syo에게 아무런 힘이 없다는 사실은 서글프다.

 


17. 파스칼 키냐르의 말

- 키냐르, 아 키냐르.

- 처음 읽은 키냐르가 아마도 심연들이었던 것 같다. 옛날에 대하여였을 수도. 몇 년 된 일이다. 몇 주를 투자해 꾸역꾸역 다 읽고 느낀 것은, 왠지 이 책은 반드시 정말 좋았다-고 해야만 하겠다는 부담감과, 그래야만 어디 가서 책 좀 읽는 놈 대접을 받으리라는 예감이었다. 그래서 그랬다. 좋다고 했다. 키냐르 크- 최고지. 솔직히 고백하면,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몰랐다. 하나쯤은 알았을 수 있겠다. 그러나 몰라도 좋았다. 하지만 역시 좋아도 몰랐다. 여전히 syo는 모른다. , 키냐르. , 아감벤.

- syo에게 무섭고도 신비로운 일은 키냐르의 알쏭달쏭한 글이 아니라, 그걸 읽어내는 눈 밝은 독자들이 부지기수라는 사실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작가로 키냐르를 꼽는다. 그렇다면 나는 그분들의 인생을 아무래도 이해할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때가 많았다.

- 이 책도 그렇다. 인터뷰라서 그나마 조금은 읽히는구나, 하는 고마움과 아니 뭔 놈의 인터뷰조차 이따위로 하나, 하는 원망이 겹친다. 여전히 키냐르는 저 높은 곳에 있다. 높고 아름다운 곳에 있다. 나는 이 아래에서 좀 지친다.

 

18. 역사의 천사

- 발터 벤야민의 마지막 가는 길을 조명하여 재구성한 소설

- 기대했던 것에 비해 훨씬 재미가 없었는데, syo가 생각건대 그 이유는 이 책이 절반만 소설이며 나머지 절반인 발터 벤야민 자체가 재미없는 사람이라서다. 시국이 유대인들에게 절체절명의 위기인지라, 소설로만 구성했다면 독자에게 훨씬 더 어필하는 작품이 되었겠으나, 우리의 벤야민, 이 모든 위기 속에서도 아, 어떡하지, 어떡한담, 어떡하면 좋단 말인가, 하며 이곳저곳을 방황하기만 할 뿐이다. 그러다보니 재미가 없을 밖에. 벤야민 하나만으로 책을 꾸려나가는 것이 무리수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을 작가는, 가공의 인물을 또 하나의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이야기를 병렬적으로 만들어나간다. 욕봤다.

- 작가의 문장에 대해 꼭 이야기하고 싶다. 대단하다. 재미없는 플롯과 스토리를 가지고도 이렇게 페이지가 잘 넘어가는 소설을 만드는 힘, 그것은 오롯이 작가의 문장에서 나왔다. 문장은 정말 짧고 간결하다. 한 줄에 마침표가 하나는 반드시 찍히며, 두세 개가 나오는 일도 빈번하다. 그럼에도 전혀 단조롭지가 않다. 묘사는 현란함 없이 신선하고,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지만 어디에서도 보기 어렵다. 조사와 어미를 다채롭게 사용하여 그 짧은 문장들의 신선도를 그대로 유지한 채 독자의 식탁에 올린 번역가의 노고도 새겨볼 만하다.

 

19. 내가? 정치를? ?

- 나는 내가 정치를 개똥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고 개똥은 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개똥보다 더 많이 아는지 확인하는 일이나, 혹은 개똥보다 더 많이 알게 되는 일 같은 것은 이 책 가지고는 어렵겠다. 괜히 빌렸어.

 

20. 패스워드

- 참신하다. 패스워드를 가지고 이런 책이 될 줄이야. 인문학이란 문어발 기업 같은 존재로군.

- 그러나 이게 12000원이라고. 세상에. 인문학이란 정말 봉이 김선달 같은 존재로군.

 


갑시다, 다음 10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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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나무 2018-08-07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님 글을 일고 저는 <아무튼, 방콕>을 장바구니에 담고 있습니다. ㅎㅎ
키냐르는...... 어떤 작품은 알 것 같다가도 또 어떤 작품을 만나면 키냐르는 평생 이해 못할 작가 같고...
저 인터뷰집 꾸역꾸역 읽으며 역자와의 만남을 통해서 그나마 조금 키냐르란 사람을 알 수 있었던 책이네요. ^^;;

syo 2018-08-07 23:49   좋아요 0 | URL
아무튼 방콕 달달합니다. 짜증날만큼요 ㅎㅎㅎ

키냐르는 저한테는 아직 멀고 먼 나라입니다. 10년 뒤쯤 다시 읽어볼까 해요.

북다이제스터 2018-08-07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서는 깨달음이 아닌 그냥 레크리에이션이란 생각이 드는 저도 요즘이라... 공감하며 좋아요 슬며시 누르고 갑니다. ^^
세상에 대체 진리는 어디에 있을까요? 훌쩍 ㅠ

syo 2018-08-07 23:49   좋아요 0 | URL
있어도 저같은 무지렁이한테는 잡힐 것 같지 않습니다..... 저한테 포획되는 진리라면 믿지 않겠어요ㅎㅎㅎ

2018-08-08 05: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08 08: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북깨비 2018-08-08 0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앜ㅋㅋㅋㅋㅋ 아무튼 방콕, 방콕 여행기인 줄 알고 샀는데 진정 연애담이란 말입니까! 망했어요 ㅋㅋㅋㅋ 🤣

syo 2018-08-08 08:08   좋아요 1 | URL
방콕여행기가 맞습니다. 맞습니다만.....
방콕연애기 정도로 보면 적당할듯 합니다 ㅋㅋㅋㅋ

다락방 2018-08-08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글을 읽고 [아무튼, 방콕]을 담을까 어쩔까...하고 있다고 합니다. ㅋㅋ

아, 그리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쇼님이 손아람보다 글도 더 잘쓰고 손아람보다 더 페미니스트라는 사실입니다. 이상.

syo 2018-08-08 11:38   좋아요 0 | URL
그건 아닙니다......
다락방님 누굴 보내시려고 이러세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앜ㅋㅋㅋㅋㅋ

다락방 2018-08-08 11:39   좋아요 0 | URL
응 왜요? 나는 나의 발언에 당당하다!! 나 심지어 저 강의도 듣고 온 사람이란 말입니다. 내 말 믿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yo 2018-08-08 11:40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은 정말 다 좋은데, 절 너무 과하게 좋아하시는 게 탈이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18-08-08 11:44   좋아요 0 | URL
아 몰라. 과하게 좋아할거야. 흥!!

syo 2018-08-08 11:46   좋아요 0 | URL
정말 아름다운 세상이네요. 후후후.

stella.K 2018-08-08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가 책을 읽는 건 적어도 치매에 걸리지 않기위한
작고도 위대한 몸부림이라고 정의해 봅니다.ㅋ

대구에 내려오셨구만요. 이달까지 고시원에 계시지...
어느 고시원인지 소개 받고 싶군요.
올여름은 이럭저럭 다 보내고 내년에도 이렇게 튀김질 해 댈 것 같으면
거기서 지내고 싶군요.ㅎㅎ

syo 2018-08-08 11:37   좋아요 0 | URL
그런가요. 그야말로 위대한 몸부림이군요 ㅎㅎㅎㅎㅎ
내려 ‘오셨‘다고 쓰셔서 대구 사시는가 했습니다.

stella.K 2018-08-08 12:47   좋아요 0 | URL
ㅎㅎㅎ 그렇게도 이해 될 수 있군요.
저는 어쨌든 대구가 서울 보다는 아랫쪽에
위치한지라...ㅋㅋ

카알벨루치 2018-08-08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방콕이 집에 쿡 쳐 박혀 있는 방콕인줄 첨에는 알았다는 ㅡㅡ암튼 띄엄띄엄 보는게 문제입니다 “아무튼 방콕” 도서관 주문했습니다

syo 2018-08-08 11:35   좋아요 0 | URL
으하하 그런 방콕이라면 저도 꽤 권위가 있는데ㅎㅎㅎㅎㅎ
카알님 즐거운 독서가 되시길 바랍니다 ㅎ

카알벨루치 2018-08-08 11:49   좋아요 0 | URL
고향이 대구세요? 제2의 고향 대구입니다! 지금은 대구 근처 언저리에 ㅎ

syo 2018-08-08 11:51   좋아요 1 | URL
그렇습니다. 이놈의 대구ㅎㅎㅎㅎ
가까운 곳에 카알님이 계시는구만요 ㅎ

카알벨루치 2018-08-08 11:57   좋아요 0 | URL
Syo님 독서불패! 오늘도 즐독하세요~아자자!

cyrus 2018-08-08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기세 아끼려고 퇴근 후에는 도서관에 갑니다. 밤 10시까지 운영하는 도서관에 가는데, 집에서 가까운 거리가 아니라서 아쉬워요. 도서관 문 닫기 전에 집으로 향하면 피로감이 몰려옵니다. 집에 오자마자 씻는 일이 귀찮아요. ㅎㅎㅎㅎ

오늘 아침에 부고를 확인했을 때 허무한 느낌이 들었어요. 황현산 님이 아폴리네르의 소설을 번역해주길 바랐었거든요. 훌륭한 불문학자를 떠나보내게 됐네요.

syo 2018-08-08 16:11   좋아요 0 | URL
아름다운 사람들이 자꾸만 스러지는 날들입니다.... 그리고 저는 더워서 쓰러지겠구요. ㅎ

단발머리 2018-08-08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열심히 읽고 쓰는 syo님! 엄지 척!!!
전 더워서 자체 휴업 상태인데, 진짜 걱정은 이 더위가 다 지나가도 책읽기에 게을러질것이라는 불길한 예감.
syo님 글을 읽으면서, syo님이 걸러준 책에서, 걸러가며 읽어가렵니다.

괜히 빌렸어....
인문학이란 정말 봉이 김선달 같은 존재로군...
이런 표현도 눈부시지만....

글잘잘.... 이런 표현은 진짜.... 어디서 배운 거예요? 알려주는 사람이 있어요? 완전 궁금하다.
나도 그 분 가르쳐줘요~~~~~~~~ 영업 비밀 좀 나눕시다! 에애~~~???

syo 2018-08-08 17:23   좋아요 0 | URL
야구요..... 야구판에서 배워온 거지요. 야잘잘....

단발머리님, 그 동네는요, 정말 센스의 미치광이들이 득시글거린답니다.

단발머리 2018-08-08 17:25   좋아요 0 | URL
야잘잘.... 야잘잘.... 야잘잘.....

아, 시작이 거기군요. 야잘잘.... 넘 근사하다, 야잘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