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십리 개차반들은 장유유서도 모르지


아마 서역 상인들이 벽란도에 몰려와 인솸은 코려인솸!을 외치던 시절쯤이었을 것이다. syo는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버스가 도착한다는 곳에 줄을 서 있었다. 바로 옆에는 얜 마음만 먹으면 기린 턱수염에 빗질도 할 수 있겠구나 싶을 정도로 길고 멀건 놈이 하나 말없이 서서 syo와 함께 버스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가뜩이나 추운 겨울, 놈의 거대한 그림자 안에 쏙 들어가 있자니 빙하타고 내려온 아기공룡 둘리라도 된 기분이었다. 호이! 이 뵈기 싫은 백색 장대 놈도 나랑 같은 신입생인가 본데, 그렇다고 먼저 말 붙이고 싶은 의욕은 멍게 눈알만큼도 생기지 않았다. syo는 항상 큰 놈들이 미웠다. 네놈들이 불필요하게 크는 바람에 나는 필요조차 충족시키지 못했잖아, 하는 삐뚤어진 마음, 논리는 없지만 아는 사람은 아는 그 마음, 참 슬픈 마음, 그런 마음이 내 안에 오래 묵은 피부염처럼 눌어붙어 있었는데, , 큰 놈들은 그걸 자꾸 긁잖아. 내 정수리를 함부로 조감하지 말란 말이야 이 독수리 같은 놈들아. 물론 이런 말들은 뇌 속으로만 크게 외쳤으므로 세상은 항상 조용했다. syo는 몹시 조용한 아이였다.

 

그렇게 20분이 흘렀지만 장대와 syo는 의례적인 말 한 마디 주고받지 않았다. 장대는 길게 syo는 짧게, 그냥 서 있었다. 먼 데를 바라보거나 발끝으로 땅바닥이나 툭툭 차면서. 스마트폰 하는 척이라도 하지 그랬냐고요? 벽란도에서 인삼 거래하던 시절이라니까요. 그 때의 학생들에게 물었다면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스마트폰? 그게 뭐죠? 스마트는 학생복인데..... ? , 그럼요, 인삼은 고려인삼이 트렌드죠. 그런 와중에 버스가 도착하고 신입생들은 하나둘 버스에 올랐다. 장대가 먼저 올라탔다. , 나도 단 한 번만 저 장대 놈처럼 버스 안에서 자리 찾아가는 동안 고개를 숙여야만 하는 불편한 인생을 살아보고 싶어. 하여간 일거수일투족이 하나하나 마음에 안 드는 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대가 어느 창가 쪽 좌석에 앉자, syo는 굳이 장대의 옆자리에 앉았다. 입에 단내 나게 조용한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어쨌든 20분을 옆에 서서 버스를 기다렸는데 떡하니 딴 자리 잡고 앉으면 내가 저를 싫어해서 피했다고 생각할까봐. 아무래도 동기고 앞으로 계속 봐야할 사이 같은데 그럼 불편해질까봐. 작은 키만큼 작은 이 마음.

 

버스는 달렸다. 선배라는 사람들이 마이크를 잡고 잠시 이런저런 주의사항을 전달한 후, 본격적인 장기자랑 시간이 시작되었다. 랜덤으로 좌석번호를 부르면 나와서 간단한 자기소개를 마친 후 필살의 재롱을 부리는 것인데, 모두들 고만고만해서 재미가 없었고, 누가 노래를 부르건 말건 학생들은 자기 옆에 앉은 이와 말이나 트자는 분위기였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이쪽도 통성명으로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 안녕하세요(거짓말들이다. 별로 안녕한 느낌 아니었다.) 저는 이번에 전자과에 들어온..... , 저도.....(이 멍청이들아, 여긴 OT 버스야....) 제 이름은 syo입니다. , 저는 장대예요(그리고 그 이후 어색한 긴 침묵) 경상도 사투리 쓰시는 것 같은데, 혹시..... , 네 저는 대구...... ! 저도 대구..... , 그러시구나...... , ...... 허허. 허허허. 이런 머저리 통신 같은 대화가 이어지는데, 갑자기 뒷자리에서 강렬한, 그러니까 경상도에서 일평생을 살아온 syo조차 몇번 들어보지 못한 슈퍼파워 경상도 사투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 뒷 분도 경상도 분인가 봐요. , ..... 저 정도면 경남사투리 62년식은 되겠는데요? 그러네요. 정말 엄청나요. 근데, 우리 어차피 동긴데, 말 놔야 되겠죠? 하하, 그렇겠죠? , 아마 그렇겠죠? 그렇겠죠. 그렇겠네요..... 우린 언제까지라도 그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제발 먼저 말을 놓으시라구요, 라는 말을 하고 싶었겠지. 뭐지, 이 큰 키에 작은 마음은...... , 젠장, 고려인삼 이야기라도 해볼까, 하는 찰나, 마이크를 쥔 진행자 선배가 좌석 번호를 불렀는데, 그게 syo의 번호였다. 신난다! 이 그렇겠네요 지옥에서 탈출할 수 있다니! 만세! 할렐루야! 평소 그렇게 장기자랑을 혐오하던 syo였지만 이번만큼은 춤을 추듯 흥겹게 자리를 박차고 나가 마이크를 뺏어들었다. 자기 소개하시구요. , 안녕하세요, 행복하세요, 여러분, syo입니다. 여자 친구 있습니까? , 있습니다. , 정말요? 정말이냐니, 그게 웬 말인가요, 선배님. 하하, 농담이구요. 그렇다면 진도는 어디까지 나갔습니까? 진도요? , 진도요. 하나, 첫 연애였고 아무것도 몰랐다. , 장대와의 속 터지는 대화가 끝났다는 사실에 너무 들떴다. , 허세를 부리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대답이 튀어나왔다. , 엊그제 설왕설래를 마쳤습니다.(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 망측끈적한 사자성어가 왜 불현듯 떠올랐는지 모르겠지만, 그 순간부터 OT가 끝난 36시간 뒤까지, 사랑하는 syo의 동기들은 누구도 syosyo라고 부르지 않았다. 어이, 설왕설래, 한 잔 해. , 설왕설래, 거기 잔 좀 줘. 이봐, 설왕설래. 설왕설래. 설왕설래는 남행열차를 불렀던 것 같다. 평소 슬픈 이별노래를 부르며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변태라서 그런 자리에서 부를만한 곡이라고는 그거 딱 하나 알았다. 그리고 자리에 돌아왔더니, 장대가 말했다. 이야, 설왕설래, 노래 잘 하네? 아니, 이 장대가 갑자기 말을 놓네? 이렇게 쉬울 걸, 왜 그렇게 그렇겠네요 표창만 죽자고 던져댄 것일까. 장대의 뇌하수체에 호기로움을 주입한 것이 설왕설래였을까, 남행열차였을까?

 

그날 이후 장대와, 우리 뒷자리에 앉았던 개화기시절 경상도 사투리 기능 보유자 CuFe(알고 보니 이 친구도 대구)syo와 함께 일당 '왕십리 개차반들'을 조직하여 종횡무진 꼴통 같은 대학생활을 만들어나갔다. syo는 재수 했고 CuFe는 평범했고 장대는 빠른 자였기에 실제로 우리 셋은 동기였지만 어느 둘도 동갑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사실은 우리가 위장 속 내용물로 왕십리 골목골목을 꼼꼼하게 덥혀(더럽혀)가며 청춘을 허망하게 탕진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셋이 뭉쳐 다니면 세상 무엇도 무서울 것이 없었다. , 학점 빼고. 대학 친구는 다 가짜라는 세상의 험악한 말들을 우린 개 무시했고, 장대가 자퇴 후 의대로 전향하고 CuFe가 군대를 가면서 서로의 생활에 아무런 매듭이 엮이지 않게 되었음에도 꾸준히 만나 밥과 술을 소비했다. 서로를 위해 해 준 것도 많다. 예컨대, 재작년 장대가 장가를 가면서 syoCuFe가 축가를 불렀는데 그건 정말 놀라울 정도로 시원하게 망했다. 장대의 장모님은, 이 서방, 그 사람(CuFe를 말합니다. 나 아님)은 돈 주고 섭외했어? 너무 웃기더라, 라는 말씀을 하셨다고. 장대 장모님, 한 번 뿐인 따님 결혼식에서 물의를 빚어놓고 이제 와 이런 말씀 드리기는 뭣하지만, 저흰 정말 최선을 다했거든요...... 가끔 부부싸움을 하고 나면 같이 결혼식 녹화 테이프를 본다는 장대와 장대 와이프, 그 어떤 밉고 서운한 감정도 축가 부분이 끝날 때쯤엔 마그마에 눈 녹듯 사라지고 가정은 온통 웃음으로 충만해질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래, 너희라도 행복하니 됐다. 나 하나 영원히 고통 받으면 되지 뭐.

 

그리고 오늘, CuFe77일로 결혼 날을 잡았다고 알려왔다. , 어찌 된 게 우리는 나이 역순으로 장가를 가네. syo가 말했다. 그러자 CuFe, , 오는 덴 순서 있어도 가는 덴 순서 없는 법이예요. 그러자 듣고 있던 장대 왈, 그리고 오는 덴 순서 있어도 갔다 오는 덴 순서 없는 법이지. 장대 너, 설마..... 모쪼록 깊이 생각하고, 정 힘이 들면 결혼식 테이프를 늘어질 때까지 돌려 보시기를. 그래도 못 버티겠으면 CuFe가 자기 결혼식에 스스로 축가를 한다고 하니, 그 영상을 통해 가정의 화목을 유지하시길. 알잖아, 그 친구는..... 정말, 정말 프로야.


온 누리에 평화가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축가로 부부싸움을 지우는 기적의 남자, 웃음 마그마 syo 올림.





외부의 자유는 재산으로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내면의 자유는 다른 재간, 바로 웃음으로 얻을 수 있다. 웃음은 자유이다. 억지로,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물건을 팔기 위해서 웃는 웃음은 마음의 자유와 정반대에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어른들은 마음의 자유를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_ 금정연, 『실패를 모르는 멋진 문장들』


웃음을 멈출 수는 없다그러면 더 큰 죄를 짓는 거다다음 세대에게다른 건 몰라도웃음은 전해주어야 한다얼마나 오래 기다려 이렇게 열심히 웃고 있는지 모른다대신 왜 웃는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웃음을 터뜨리기 전에 혹시 울어야 할 일은 아닌지비웃기 전에 혹시 정색해야 할 일은 아닌지 누군가를 조롱하기 전에 내가 정확히 누구를 조롱하려는 것인지알아야 한다그래야 무기력해지지 않는다그래야 우리가 시시해지지 않는다.

김중혁뭐라도 되겠지 


우리가 가치를 두는 것을 더 잘 사랑하기 위해서 조금씩 조금씩 나를 바꾸어 나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지금 여기서 힘 있게 존재할 수 있는 방식 아닐까요? 나의 삶은 유한하지만 애쓰고 있다는 것.

_ 정혜윤, 나를 바꾸는 책읽기

  

사람은 자신과 같은 결점을 가진 사람과 함께 있으면 확실히 마음이 편하지그러나 그건 싸움에 져서 상처 난 곳을 서로 핥아주는 개와 같은 거란다진정한 친구란 서로의 결점을 보완해주면서 우정을 키워나가는 거지그리고 너에겐 그런 친구가 많이 있잖니.

마쿠라 쇼오카노 타케시지옥선생 누베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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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2018-04-22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쇼님:) 친구분 결혼 축하드립니다. ‘왕십리 개차반들’ 모임은 아직도 지속되고 있나요?ㅎㅎ

syo 2018-04-22 10:17   좋아요 1 | URL
시원하고 쾌적한 주말입니다 유나님 ㅎㅎㅎ
제가 축하받을 일인가 싶습니다만, 감사합니다. 우리 모두 왕십리는 떠났지만 저 개차반들이 여전히 개차반들이라 아직도 모임의 명맥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2018-04-22 10: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22 1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22 1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8-04-22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우, 웃겨. 끝까지 웃게 해주셔서 감사요ㅋㅋ 정수리 조감ㅋㅋ 그렇겠네요 지옥 탈출ㅋㅋ
과 ot 때 syo님과 장대처럼 저도 그런 친구가 옆자리에 앉아서 저는 대차게 쏴 줬죠. 나 너 별로거든. 그러니 우리 말 섞지 말자고ㅋㅋ 그런데 지금 제일 친한 친구임ㅋㅋ 이 친구가 자기 소개 때 자기는 쾌락주의자라고 했다가(에피쿠로스의 그 쾌락주의란 말이야!) 그러나 듣는 사람 맘대로 곧잘 해석되듯이 그 쾌락은 육체 쾌락으로 해석돼 학기 초 음흉한 쾌락주의자로 곤욕을ㅋㅋ

syo 2018-04-22 12:08   좋아요 0 | URL
아갈마님은 정말 대쪽같으셨군요. 멋있으시다.

syo는 작은 키 작은 마음이라 그러지 못하고 ˝☞☜ 그렇겠네요˝만 반복했습니다.....

친구분은 일견 곤욕을 치를만 하셨네요. OT때 자기를 쾌락주의자라고 소개하다니, 정말 엄청난 쾌락주의자가 아니시고서 어떻게 그런......

단발머리 2018-04-22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왕설래님~~
역시나 오늘도!!! 설왕설래님 덕분에 한껏 읽고 웃고 즐기다 갑니다.
저희 가정도 웃음으로 충만해지고 싶어요.
장대님 결혼식 축가 파일 올려주시면 매우 감사하겠습니다^^

syo 2018-04-22 22:06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 그 영상은 저한테 없습니다. 폐기를 요청했으나 장대 부부가 내부적으로 이용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습지요 ㅎㅎㅎ

살다보면 제가 부른 노래를 단발님이 들을 날 있겠지요. 언젠가는요 ㅋㅋㅋ

라로 2018-04-22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대님 결혼식 축가 파일 올려주시면 매우 감사하겠습니다 2
웃음의 마그마 토비 syo 님이 그러니까 글도 잘 쓰시는데 노래도 잘 하신다는 거죠!!! ㅎㅎㅎㅎ (저번 글에도 축가 부르실거라고 쓰셨죠??)
암튼 구철(?) 씨가 자축가를 부른다니 정말 대단한 친구를 두셨어요!! 왕십리는 저에게도 추억이 많은 동네랍니다! ㅎㅎㅎㅎ

syo 2018-04-22 22:06   좋아요 0 | URL
잘하는 건 모르겠고 잘 웃겼다는 평입니다. 저는 최선을 다했지만요 ㅋㅋㅋㅋ

라로 2018-04-23 02:44   좋아요 0 | URL
🤪

다락방 2018-04-23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왕설래...라니요....
아 어쩐지 슬퍼지는 오전이다.......흙흙

7월7일, 제 가까운 사람도 그 날 결혼하는데, 우리 둘 다 그 날 예식장에 있겠네요. 서로 다른 포지션이지만요. 하하하핫.
건배...(댓글이 메롱이라 미안해요..)

syo 2018-04-23 12:58   좋아요 0 | URL
그랬는데 식장에서 떡 만나면 웃기겠어요 ㅋㅋㅋㅋㅋ 아니 이게 무슨 일이에요 이러면서.

설왕설래라니 21살짜리가 까져가지고..

독서괭 2018-04-23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정수리를 함부로 조감하지 말란 말이야 ㅋㅋㅋㅋㅋㅋㅋㅋ 아 넘 웃겼습니다. 왕십리개차반들 영원하라!!

syo 2018-04-24 01:18   좋아요 0 | URL
그래도 이제 세 명의 나이를 합치면 100에 달하는 마당인데, 개차반은 관둘 때가 되긴 한 것 같아요.




그러나 영원하라!!!! ㅋㅋㅋㅋㅋ

psyche 2018-04-24 0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왕설래라니... 너무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이라 풋했네요. ㅎ
부부싸움을 지우는 기적의 축가라니 저도 꼭 들어보고싶어요 ㅎㅎ

syo 2018-04-24 01:20   좋아요 0 | URL
웃음이 만병통치약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그치만 전 안 웃겼거든요.....

clavis 2018-04-27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왕십리,하고 나오는데 자동적으로 욕이 나오는건 왜죠? 138계단때매 제 종아리님이 피해를 많이 봐서겠지요..만나서 반갑습니다ㅠ♡

syo 2018-04-28 22:29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 비 오는 날이면 우리는 같은 워터파크를 경험했겠군요.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