맙소사, 이 카테고리에 이제서야 글을 올리다니. 그동안에 책 읽기에 얼마나 소홀해졌는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느누나. 그렇다, 나는 약 세 달 가량 한 없이 가볍게 가볍게 그리고 빠르고 빠르게 비워내기에 급급했다. 참을 수 없을 만큼. 소화가 힘든 것들은 외면하고, 말캉말캉하고 단순한 것들만 집어 삼켰다. 씹지도 않고 흡입한 후에 그대로 다시 내보냈다. 근육과 살뿐 아니라 머리 속까지 흐물흐물해지는 기분을 나는 느끼고 있다. 유약해진 정신은 그 단단함을 잃었을 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중력도 상실한 채 미친듯이 이리저리 머리채를 집어당겨지기 마련이다. 나는 흐름을 쫓기 급급해 흔적을 남길 정신도 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사실 나의 나태는 직접적이고 현실적인 형태로 먼저 나타났다. 바지 위로 빼꼼히 나오는 살이라던가, 걸을 때 느껴지는 몸뚱아리의 묵직함, 지방의 미세한 진동으로 인한 피로감 등등. 굳이 머리를 싸매고 나의 나태라는 놈의 정체를 고민할 필요도 없이 그것은 너무나 자명한 형태를 지니고 여기저기에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내 책상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내 책상 위에는 컴퓨터, 책, 노트, 연필 등등 많은 것이 있지만 그들 못지 않게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있으니 바로 온갖 빵종류의 간식거리이다. 간식 중에서도 가장 나태함률이 높은 것은 바로 크림치즈+초코크림+식빵 조합. (나는 이 조합을 마녀빵이라고 보른당.)이 조합은 그 강렬한 맛으로 혀만 흐물거리게 하는 게 아니라 정신까지 멍해지게 하는 효과가 있으며, 나이프질 두세 번이면 완성된다는 면에서 높은 효율성을 자랑한다. 하지만 서서히 돌아오는 정신이 나태를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경계태세를 갖추기 시작한 나는,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조금 더 육체의 노동과 집중력을 요하는 커피도 끓여 함께 곁들였다. 내 특제 커피로, 커피메이커로 커피를 끓여내 따뜻한 우유와 베일리스를 섞어 마시면 적당한 달콤함과 부드러움, 쌉쌀함이 섞여 절대 실패할 일이 없다. 





내가 이 소중한 점심시간을 포기할 수 없듯 나태가 제공하는 편안함은 정말 거부하기가 힘들다. 떠날 줄 모르는 그 손님은 내 몸과 마음에 자리를 꿰차고는 사사건건 간섭을 했다. 하지만 오늘은 나태함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미에서 커피를 탔다. 별 거 아닌 거 같지만 커피 한 잔을 만드는 데에는 생각보다 까다로운 집중력이 요구된다. 커피메이커에 물을 넣고 커피 가루를 넣고 커피가 올라오길 기다리고 우유를 뎁히고 베일리스를 살짝 섞을 땐 눈과 귀를 쫑긋하고 있어야 한다. 너무 오래 끓여도, 조금 끓여도, 약하거나 강하게 끓여도 안 된다. 그렇게 완성된 커피는 또 다시 시간을 들여 흡수해야 한다. 커피에는 시간이 담겨 있다. 마녀빵은 네 입이면 쫑나는 반면 커피는 조금씩 홀짝거리며 여러번에 걸쳐 비워진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카페인이 충분히 흡수될 수 있도록 약간의 시간 텀을 두면서 쌉싸르함이 가시기 전에 다시 한 모금을 들이키면 혓바닥 가득 커피 향이 물든다. 커피가 제공하는 그 여유로운 시간에는 유독 독서가 하고 싶어 진다. 가끔 독서하다가 식어버린 커피를 들이키게 되는 경우가 생기긴 하지만 주로 커피는 더욱 향기롭고 맛있어지며 글자는 쭉쭉 소화가 된다. 





그래서 오늘 마녀빵과 커피를 곁들인 시공간에 책도 초대하였고, 여전히 나태가 여기저기 묻어있는 까닭에 책 메뉴 중에서 비교적 담백하고 몰입도가 높은 아이들을 골라보았다. 종이책이 아니라 ebook 중에서 골라야 했기에 선택 폭이 매우 좁았는데, 오히려 이것이 고민의 폭을 줄여주어 고르기가 수월했던 거 같다. 일단 한국 소설일 것. 번역을 거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정서와 관념을 담은 언어는 머리로부터가 아니라 온 몸으로 받아들여지기때문에 이해하기가 더 쉽다. 일상적이고 공감될 만한 주제일 것, 그리고 내 가장 큰 고민 중 하나인 남녀의 연애를 다루면 더욱더 좋음. 단 갖가지 화려한 데코레이션과 있을 법 하지 않은 로맨틱함은 사양. 이러한 선별과정을 거쳐 이러한 책들이 오늘의 커피타임에 초대되었었다. 나와 만나지 못한 손님은 다음 커피타임 때 다시. 나른한 오후햇살과 방에 배어있는 은은한 향수냄새, 쌉싸름한 커피 그리고 적당한 나태함과 어울리는 손님은 언제든지 환영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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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위풍당당- 성석제 장편소설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5월
8,400원 → 8,400원(0%할인) / 마일리지 42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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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내 심장을 쏴라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20년 2월
6,600원 → 6,600원(0%할인) / 마일리지 33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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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태연한 인생
은희경 지음 / 창비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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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사랑의 기초 연인들
정이현 지음 / 톨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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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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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에게 가려고 뛰어본 적이 있는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자를 향해 뛰고 있는 사람은 아름답다. 그러므로 사랑에는 하나의 법칙밖에 없다. 그것은 그리운 그를 향해 뛰는 것이다. -444쪽

그 강의 리듬은 어린아이의 침실에 있었고
4월 앞마당 가죽나무 숲속에 있었고
그리고 "겨울 밤 가스등을 둘러싼 저녁 모임속에도 있었다." 라고 나는 소리 내어 시를 읽었다. T.S.엘리엇의 「사중주」였다.-454쪽

노인은, 그냥 자연일 뿐이다. 젊은 너희가 가진 아름다움이 자연이듯이. 너희의 젊음이 너희의 노력에 의하여 얻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노인의 주름도 노인의 과오에 의해 얻은 것이 아니다. -543쪽

관능은 아름다움인가, 연민인가. 아름다움이 참된 진실이나 완전한 균형으로부터 온다는 일반적인 논리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아름다움은 각자의 심상을 결정하는 주관적인 기호에 따른 고혹이거나 감동이다. 그것에 비해, 연민은 존재 자체에 대한 가없는 슬픔이고 자비심일 뿐 아니라,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도덕률의 가장 기본적 기준이다. 그 두가지는 어떤 의미에서는 상대적 개념인바, 완전한 합치는 쉽지 않다. -673쪽

아득한 옛이야기, 낮은 노랫말이 그애의 머리칼, 볼, 어깨, 허리, 장딴지에서 흘러나오는 것도 같았다. 가슴골은 깊고, 엉덩이로 내려간 허리 라인은 활공보다 부드러웠다. 관능적이었다. 아침 햇살로 밝혀진 그애의 모습은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고, 말할 수 없이 애련했다. 그애를 품 안에 담쑥 안아 뉘고서 온종일 머리와 어깨와 허리를 쓰다듬고, 홍옥 같은 입술과 뺨에 입 맞추고, 가슴에 귀를 댄 채 그애의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오르내리는 아랫배에 코를 문지르면서 그애의 숨결 속으로 자맥질해 들어가고 싶었다. -675쪽

그것은 고요한 욕망이었다. 한없이 빼앗아 내 것으로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아니라 내 것을 해체해 오로지 주고 싶은 욕망이었다. 아니 욕망이 아니라 사랑, 이라고 나는 처음으로 느꼈다. 비로소, 욕망이 사랑을 언제나 이기는 건 아니라는 확고한 생각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애를 오로지 소유하고 싶었던 욕망은 관능조차 이길 수 없었는데, 지금은 달랐다. 나의 사랑으로 관능과 욕망을 자유롭게, 공깃돌처럼, 갖고 놀 수도 있을 것 같았다. -6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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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국이 시끌시끌하드라. 여기까지 귀가 아프다. 그 쬐꼬만 땅덩어리에서 어쩜 그리두 치고박고 하든지. 시퍼렇게 날이 선 이빨을 드러내고 상대방의 목덜미의 핏줄을 탐욕스럽게 바라보는 잔혹성이,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는 검은 낱말의 조합을 통해 날 것 그대로 전해진다. 무의미한 형태소가 모여 그토록 잔인하고 치졸해질 수 있음을 다시금 깨달았다. 한반도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북한에 가로막혀 대륙과의 교류가 자유롭지 못해, 그렇다고 해서 완전한 섬도 아닌 애매한 땅을 기반으로 반 세기를 넘게 살아 온 사람들은 애매하게 서로를 미워하고 애매하게 서로를 사랑한다. 고개를 돌리면 보이는 것은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처럼 닮았으나 영원히 악수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북한과, 마찬가지로 닮았지만 확고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쌓아올려 배를 아프게 만드는 사촌같은 일본,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못난이 강자인 중국. 한반도 안에 갇혀 지긋지긋해 하면서도 저들과 섞이지 않겠다는 그 뒤틀린 자긍심이 사람들의 발을 묶어 권태로움을 낳고 배출되지 못한 분노를 고이게 한다. 아우 저것들 꼴보기 싫어. 왜 저거 밖에 안 되는 거야? 이러니 우리나라가 발전을 못하지. 그래도 빨갱이 쪽바리 양키 짱깨 등등보다는 나아. 물론 제일 똑똑하고 정신 머리 박혀있는 건 나! 서로 잘났다고 죽어라 조폭들 마냥 끼리끼리 편 먹고 배신하고 쌈박질하는 걸 보면 2013년 판 갱스 오브 코리아를 보는 것 같다. 이 땅에 두 명의 주인은 존재할 수 없다는 듯이 으르렁거리는 패거리들이 다니엘 데이 루이스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만큼 섹시하지 않다는 건 함정. 




 


그렇게까지 하면서 사람들이 지키고 싶어 하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각자가 신념을 지니는 것은 좋은 일이다. 세상에 절대적인 진실이 있다는 믿음은 인간을 파멸로도 이끌었고 구원으로도 이끌었지만 멈춰있게 하지는 않으니까. 갱스 오브 뉴욕에서 역시 마찬가지다. 암스테르담을 필두로 하는 데드래빗 파와 빌 더 부처가 이끄는 원주민 파는 결코 서로에게 양보할 수 없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그들의 목숨과도 같은 것이었다. 신념을 포기한다는 것, 상대방을 인정한다는 것은 동시에 자신의 소멸을 의미했다. 정과 반이 만나 합이 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 그 끝에는 선고된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시대상이 그러했고 이념이 그러했다. 개인적으로 매우 생소한 미국역사의 단면이었지만 현실에서든 가상세계에서든 너무도 자주 보아 왔던 극한 갈등의 구도를 통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중고등학교 역사 시간에 차갑고 딱딱한 의자 위에 앉아 분필 가루 냄새를 맡으며 넘겼던 책장 속에서는 그 갈등으로 인해 죽어간 사람들이 끊임 없이 나열돼 있었으니까. 칼이든 총이든 펜이든 저마다 무기를 들고 자신의 목숨을 뜯어 내어 적진에 내던지던 그 사람들. 거대한 절대적 진리 앞에 그리고 앞으로도 이어질 역사를 위해 수 없이 많은 개인이 제물로 바쳐졌다. 죽음으로 다가가는 기분은 어떠했을까. 상대방을 죽이고 싶어서가 아니라,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기 때문에 무기를 휘두르는 기분은 어떠할까. 초월한다는 것은 아마 그런 것일 것이다. 누군가의 아들, 누군가의 애인, 누군가의 부모로서가 아니라 흐르는 역사의 구성원으로 존재한다는 것. 





하지만 문제는, 그렇다면 그 갈등의 승자는 누구이며 승자를 결정하는 것 역시 무엇인가라는 판단기준. 갱스 오브 뉴욕이 재밌는 이유는 암스테르담의 복수를 보며 사람들이 느끼는 카타르시스때문만이 아니다. 빌 더 부처라는 캐릭터가 보이는 매력이, 그의 정당성이 암스테르담 만큼이나 강렬해 팽팽한 긴장감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이유 없이 미친놈은 전기의자에 앉혀 지지만 이유 있이 미친놈은 왕좌에 앉는다. 그는 악역으로 등장하지만 자신만의 신념이 있었고 그 신념은 결코 비논리적이거나 어처구니없는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랬다. 자신의 국가를 지키고 조상의 피땀을 지키고자 하는 그 신념은 충분히 이해가능했고 마땅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암스테르담과 빌 더 부처는 서로를 인정했다. 상대방의 신념과 태도를 높이 샀으나 다만 그들이 처해 있는 시대상에 의해 서로에게 칼을 겨눌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대립하는 두 가치의 우열은 정해져야 했고, 보다 우선시되어야 할 가치의 기준이 제시되어야 했다. 갱스 오브 뉴욕에서는 그 해결 방법이 파이브 포인츠에서 행해진 전투(일종의 대장 죽이기..)였고 지금 갱스 오브 코리아에서는 머리 수 싸움인듯 하다. 


어찌보면 상당히 무식하다고 볼 수 있는 무력싸움은 당시의 시대상을 고려하여 그렇다 치고, 수싸움이야 뭐 민주주의의 토대이니 이거 역시 물고 늘어지고 싶지는 않다. 민주주의가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을 뿐더러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진리라면 그만큼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일 수 있을 테고, 또 인간은 진리를 알아내고 받아들일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런데 왜 2013년 현재의 수 싸움이 1840년대때 무력싸움 마냥 사람들이 악에 받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1840년대 그들에게는 선택권이 많지 않았다. 혼돈의 시대에서 신념을 위해 무력을 써야만 했다. 오늘은 다르다. 싸움에서 진다 하더라도 자신의 신념이 틀렸음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생사와 직결되지 않는다. 무엇이 더욱더 진리에 가까운지 충분히 심사숙고해 볼 여건이 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귀를 막고 눈을 가리고 소리만 고래고래 지른다. 내가 제일 잘났다는 그 오만함이 자신의 신념을 아집으로 격하시킨다는 것을 모르고 상대방을 그저 비웃고 찍어 내리기에 바쁘다. 서로가 자신이 진짜라고 주장하지만 그 근거는 내가 진짜니까,라는 동어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정말로 진리를 추구하려 한다면, 자신이 옳은 길로 가고 싶다면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생각을 언제나 지녀야 하는데 한국의 갱들은 현재 자기와 다른 생각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방을 죽이지 못해 안달이다. 우리끼리 물고 뜯고 싸워 봐야 남는 게 뭐가 있을까. 전투 후 파이브 포인츠에 길게 늘어져 있던 시체가 생각나는 하루다. 이미 전효성양은 일밍아웃되어 그 무더기에 던져졌고.. 더 이상의 큰 소모적 갈등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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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지나면서 '진보'적이었고 '참신'했던 것들이 '오래 된' 것으로, '익숙한' 것으로 변하는 모습은 언제 봐도 신비하다. 그 말은 즉슨 지금이 순간 역시 과거의 한 자락으로 남는다는 거니까. 나의 의식이 끝난 이후에도 시간은 끊임없이 흘러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미래에 도달한다. 나의 뒤에 남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살아갈 것이며, 나의 역사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겠지만 누군가의 역사는 새로이 쓰여지고 계속해서 무수한 이야기를 잉태할 것이다. 나의 죽음과 세상의 끝이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은 참으로 묘하다. 같은 선상에 놓여 있지만 언젠가는 단절되고 마는 관계. 하지만 내가 몇 십 년 전의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의식이 나의 의식에 겹쳐지듯, 미래의 사람들과 내가 다른 차원으로 연결될 것임을 생각하면 그 '단절'이 마냥 야속하거나 두렵지는 않다. 


왜 이런 생각이 들었냐면, 요즘들어 꽂힌 The Velvet Underground의 노래를 들으면 마치 그들이 여전히 살아 있는 듯한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사는 시대도 다르고, 나라도 다르고, 인종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지만 노래를 통해 형성되는 공감대는 이 모든 것을 초월한다. '예술'의 힘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인간이 글을 통해, 노래를 통해, 행위를 통해 계속해서 무언가를 창조해내고 자신의 내부에서 토해내고자 하는 욕구도 결국에는 자신의 유한성을 극복하기 위해서, 삶 자체와 이어지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창조물을 소비하는 행위 역시, 이를 통해 시공간을 뛰어 넘는 존재와 접촉함으로써 자아를 확장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의 필연적인 욕구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나는 이 세상에 왜 존재하는가"에 대한 어찌보면 상당히 가학적인 질문에 대해, "존재하기 때문에,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존재한다."라고 대답하고 싶다. 존재의 목적을 굳이 따지기 보다,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를 따지기 보다, 그저 태어났으니까, 그리고 태어난 이상 가장 큰 목적은 삶을 유지하는 것, 그리고 삶을 확장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니까. 물론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에너지를 발산하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겠고, 결코 그 방법의 가치가 모두 동일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하등한 방법은 '돈'으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는 것. 존재의 유한성을 극복하기 위해 유한한 무언가에 집착한다는 것은 그 끝이 너무나 허무할 것이기에. 




Sweet Jane

Standin' on a corner
Suitcase in my hand
Jack's in his corset, Jane is in her vest
and me I'm in a rock 'n' roll band. Huh.
Riding a Stutz Bear Cat, Jim
ya know, those were different times
all the poets studied rules of verse 
and those ladies they rolled their eyes
Sweet Jane
Sweet Jane
Sweet Jane
Now Jack, he is a banker
and Jane, she's a clerk
and both of them save their monies
when they get home from work
sittin downby the fire
Ooo, the radio does play
the classical music there, Jim
The March of the Wooden Soldiers
All you protest kids
you can hear Jack say
Sweet Jane
Sweet Jane
Sweet Jane
Some people they like to go out dancin
and other people they have to work. Just watch me now
and there's even some evil mothers
Well there gonna tell you that everthing is just dirt
you know that women never really faint
and that villians always blink their eyes
that children are the only ones who blush
and that life is just to die
But anyone who ever had a heart
they wouldn't turn around and break it
and anyone who ever played a part
They wouldn't turn around and hate it

Sweet Jane, Sweet Sweet Jane..      



삶은 유한하다. 그래서 충실해야 한다. 저마다 각기 다른 삶의 방식이 있겠지만, 그래도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 자체를 가장 중시할 것. 미래를 걱정하고 과거를 후회하는 것 보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어야 오히려 시간의 속박에서 자유로워 질 수 있다. 어차피 인생은 짧고 언젠가 끝이 난다. 나의 삶 자체에만 매달리지 않고 나의 시간을 뛰어 넘는 영겁의 시간이 있음을 인식한다면 보다 궁극적인 인생의 목적에 집중할 수 있지 않을까? 이 목적을 행복이라고 바꿔 말해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 같다. 유한성을 극복함으로써 얻어지는, 물질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는 궁극적인 행복. Sweet life, Sweet Sweet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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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휴일이었어. 휴일이라는 단어는 묘하게 스트레스를 줘. 할 게 아무 것도 없는 데도, 뭔가 해야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게 하거든. 하지만 사실 진짜 '쉰다'는 건 사람마다 정의내리기 나름인 거 아닐까?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쉬기만 하는 건, 사실 모순이야. 정말 '아무 것도 안 하는' 상태는 음.. 죽음 밖에 떠오르지 않아. 아무튼 그래서 오늘은 휴일이니까, 창문을 통해서 들어오는 햇빛 외에는 네 벽에 반사되는 백열등의 인공적인 전기만 맛 볼 수 있는 내 방에서 벗어나 시내의 광장으로 나갔어. 일단 가장 큰 목적은 햇빛을 쬐고 싶다는 거였고, 그 목적이 도달하는 곳에 책이 있다면 더 좋겠다 싶었지. 결론부터 말하자면 성공적이었어. 햇빛은 눈부시게 하늘을 빛내고 있었고 그 밑의 지상까지 관대하게 반짝반짝 빛가루를 뿌려줬어. 내 파란 코트를 사기 잘했다고 다시금 생각했어. 그 부드럽고 온화한 분위기에 내 파란코트를 더함으로써 '창조'에 일조하는 듯한 기분좋은 착각에 빠질 수 있었으니까. 거기에 내 손에 들려 있는 책이 '백년의 고독'이란 것도 마음에 들었어. 도저히 현실이라고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 몽롱하고 강렬하면서도 잡으려고 하면 스르르 흩어지고 마는 이곳에서의 생활이, 이 책을 오히려 생생하고 '현실적'으로 만들어주었거든. 


'운명'을 믿니? 가끔, 지금까지의 발자취를 돌아볼 때면 알 수 없는 끈이 내 몸을, 내 생각을 휘감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왜 하필 나는 그때 그 선택을 했을까? 왜 그런 말을 했고, 그런 것에 동의를 하고, 그런 것에 반대를 했을까?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을까. 그리고 한 편으로는, 또 그 끈들이 나를 어딘가로 끌고 가고 있다는 생각도 들어. 정말 미래가 보이지 않는 거 같니? 한 발짝 바로 앞도 보이지 않는 새카만 어둠에 둘러 쌓여 있는 거 같아? 그렇다면 조심해. 불시에, 발 밑에서 귀 뒤에서 미간 앞에서 운명의 세 여신의 가위가 들이닥칠 수 있으니까. 그러면 공포에 질린 나머지, 그나마 유지해오던 조심성과 예민함마저 잊어버리고 자신이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 조차 모른 채, 사지를 버둥거리게 될 뿐이야. 


'고독'을 생각해봐. 나의 인생이 어느 양피지에 전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동시에 적혀 있고 그 양피지 마저 영원히 소멸될 것이라는 고독. 그 양피지가 누구에 의해 쓰였는 지도 알 수 없는 진저리나는 고독. 시작이 있기에 끝이 있음을 알고,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있음을 알고, 세상에 즐거움과 고통이 있음을 알고, 나는 다만 살아갈 따름이라는 것을 안다면 고독은 조용히 찾아올 거야. '운명'과 '고독'은 마치 동전의 앞면과 뒷면 같지. 운명에 대해 생각하고 고독을 씹어 삼켜. 그 쌉싸름한 환상 끝에는 안식이 분명히 있어. 마법의 세계를 뒤로 하고 문을 닫고 나오는 앨리스가 느꼈던, 진득한 고독과 그 끝에서 알싸하게 퍼져오는 해방감이 말이야. 그럼으로써 양피지는 끝이 나고 문은 닫히고 땅은 덮이고 꽃은 꺾이고 빛이 사라지고 어둠도 사라지고, 하늘은 내려앉고....마침표가 찍혀지지.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마음은 편해지지 않니? 아무리 발버둥쳐봐야 고독은 사라지지 않고, 외면하면 외면할수록 공허감만 커질 뿐이야.


만나서 반가웠어, 언제 다시 만날 지 모르겠지만 이 햇빛이 이렇게 따스한데 뭐가 문제겠어. 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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