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기술 - 출간 50주년 기념판
에리히 프롬 지음, 황문수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가슴을 후벼파는 서문이 있습니다. 이 책의 서문 역시 그러합니다. 


우선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의 문제를 '사랑하는', 곧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받는' 문제로 생각한다. 그들에게 사랑의 문제는 어떻게 하면 사랑받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사랑스러워지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들이 이 목적을 추구하는 몇가지 방법이 있다. 남자들이 특히 애용하는 방법은 성공해서 자신의 지위의 사회적 한계가 허용하는 한 권력을 장악하고 돈을 모으는 것이다. 그리고 특히 여성이 애용하는 또 한 가지 방법은 몸을 가꾸고 치장을 하는 등 매력을 갖추는 것이다. -13p


H양은 뽀송뽀송하게 마무리한 피부, 섬세하게 끝을 올린 속눈썹, 날렵한 눈꼬리에 적어도 매일 30분씩 시간을 보냅니다. 그녀의 전 남자친구는 양주를 즐겨 마시고, 언젠가 섹시하게 미끄러지는 선을 가진 자동차를 갖는 소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자기 만족'과 '허영심'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둘은 그것이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인지, 혹은 타인의 눈에 그것이 있어보이기에 원하는 것인지의 모호한 욕망의 경계를 왔다갔다 합니다. 둘의 연애 역시 그 모호함으로 둘러 쌓여 있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문화는 구매욕에, 또한 상호간 유리한 거래라는 관념에 기초를 두고 있다. (중략) '매력'은 보통 인기 있고 퍼스낼리티 시장에서 잘 팔리고 있는 품질 좋고 멋진 포장을 의미한다. -15p


H양과 ㄷ군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미 서로에게 호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서로를 향해 두근거리는 마음이 곧 사랑이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서로의 두근거림은 같은 속도로 뛰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실 상대방에게서 느꼈던 그 두근거림은 나의 '매력'과 상대방의 '매력'이 어느 정도 호환가능한지에 대한 고도의 그리고 무의식적인 관찰 끝에 이루어진, 어떻게 말하면 너무나도 외부적인 기준에 의한 두근거림이었습니다. 나에게 어울리는 상품을 구매하듯 상대방을 선택한 것이지요.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이에서 정신적인 교류라든가 서로의 단점을 보완해줄 만한 능력이 되는지에 대한 고민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콩깍지의 위력은 대단해서, 둘은 서로의 외모라든가 분위기, 말투 등에 대한 호감으로 1년이 넘도록 알콩달콩한 연애를 해나가게 됩니다. 남들 다 하는 데이트도 하고, 남들이 하지 않은 데이트도 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특별하다는 착각 속에서, 우리는 남들과 다르다는 착각 속에서 사랑을 유지해갑니다. 자그마한 충치가 점점 커지는 것을 어렴풋이 알면서도 방치해가면서요. 그 충치란 '우리가 사실은 맞지 않는다'는 불안감이었습니다. 애초에 너무나도 다른 두 사람이었고 서로에게서 기대하는 것도 너무나 달랐습니다. 퍼스낼리티 시장에서는 마이너스로 간주될 것이 분명하기에 애써 감춰왔던 각자의 약점들은, 일단 거래가 성사된 후 상대방이 원하지 않았음에도 딸려 오는 구박덩어리같은 존재로 서로가 기대했던 연애를 자꾸만 어그러뜨렸습니다. 


원래 애정결핍 증세가 조금 있고, 자존감이 매우 낮았던 H양은 자신이 꿈꿔왔던 연애와 현실 사이의 괴리가 점점 커져만 가자 좌절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에게 좌절은 참 위험한 단어입니다. 점차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들어, 정서적인 허탈함을 자신의 분신으로 채워 나가 결국 상대방과는 더욱 멀어지는 악순환에 빠지게 되거든요. 상대방에 대해 너무 많이 생각을 하다보니, 사실은 상대방이 자신의 거울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지 못하고 오해에 오해를 거듭하는 것입니다. 분노와 자책은 전형적인 H양의 행동 패턴이었습니다.


공서적 합일의 '수동적' 형태는 복종, 또는 임상적 용어를 사용한다면 피학대 음란증이다. 피학대 음란증적 인간은 자신을 지휘하고 인도하고 보호하는 사람, 말하자면 자신의 생명이고 산소인 다른 사람의 일부가 됨으로써 견디기 어려운 고립감과 분리감에서 도피한다. 인간이 복정하고 있는 자의 힘은, 그것이 인간이든 신이든 팽창한다. 그는 모든 것이고 내가 그의 일부가 아닌 한,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중략) 그러나 그는 독립하지는 못한다. 그는 통합성을 갖지 못한다. 그는 아직도 찬생하지 못한 자다. -36p



H양은 피학대 음란증적 인간 유형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남자친구에게 의존함으로써 대인간적 합일에 달성하려 했던 것이지요. 이런 어긋나고 잘못된 사랑은 H양과 ㄷ군 모두에게 상처만 줄 뿐이었습니다. 결국 둘은 헤어지기로 합니다. 물론 헤어지고 난 후에도 H양은 여전히 후회와 고통으로 눈물을 짜내야 했습니다. 그녀가 사랑이라는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그 합일에 도달하는 위한 길이 아예 암흑 속으로 사라져버렸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흔히들 '시간이 약이다'고 말합니다. 그녀도 무수히 그 말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시간은 영원히 흐르지 않을 것만 같았고, 그 시간을 흐르게 하는 것은 그녀의 전 남자친구뿐이라는 생각은 현실의 고통을 더욱더 확대시켰습니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고민하던 그녀의 손에 정말 운명처럼 닿은 책이 바로 이 「사랑의 기술」이었습니다. H양은 자신이 진정한 사랑을 하지 않았었음을 깨달았고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큰 위안을 얻었습니다. 적어도 기술을 계속해서 연마하다보면 그녀가 또다시 사랑의 잘못된 패턴으로 빠져들지는 않을 것이라는 희망이 생겼습니다. 그 후로, 「사랑의 기술」은 그녀의 연애 바이블이 되어 힘들 때마다 읽혀지게 되었습니다. 


조금 시간을 빠르게 돌려 볼까요. 그녀는 새로운 사랑을 만납니다. 여기서 해피엔딩으로 끝난다면 참 좋을텐데. 그녀는 또다시 핸드폰을 붙들고 울고 있습니다. 사랑의 기술을 체득하기란 참 어렵습니다. 비슷한 실수와 비슷한 상처 뒤에 따라오는 것은 더 큰 좌절감입니다. H양은 결국, 또다시 잘못된 길로 빠지고 말 것이라면, 그 끝이 자신만의 감옥으로 향하는 길임이 반복된다면, 애초에 발걸음을 떼지 않기로 결심합니다. 사랑을 '주는 법'은 너무나도 어렵다고 그녀는 생각합니다. 받는 법만 알려고 했던 그녀이기에 어떻게 줘야할지조차 알 수 없습니다. 그녀가 되고 싶어했던「두도시 이야기」의 시드니 카턴이나, 「레미제라블」의 장발장과 같은 사람이 되기에는 자신의 그릇이 너무나 작고 영혼의 따스함도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문을 닫아버리고 혼자만 그 안에 머물기로 마음을 먹은 것입니다. 연애의 낭만, 서로의 시선의 끝이 만나 가슴 속이 솜사탕처럼 빵빵해지는 그 순간에 대한 기대도 버렸습니다. 두 사람이 만나 몇 십년을 함께 해야하는 결혼은 더더욱 버겁기만 합니다. 


그래도 그녀를 위해 억지로라도 문을 살짝 열어두기로 합니다. 작은 빛이라도 그녀가 알아챌 수 있게.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인 '합일' 그 충만함을 평생 느끼지 못한 채 죽어간다는 것은 정말 많이 아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에리히 프롬이 말했듯 그것은 동물이 아닌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인데, 하다못해 곰도 쑥과 마늘을 먹으면 인간이 될 수 있거늘 인간으로 태어난 H양이 인간도 되지 못하고 혼자만의 동굴 속에 웅크려 있는 것은 좀 모냥이 그렇습니다. 나중에 그녀가 진정이 되면, 처음 헤어지고 그랬듯 다시금 「사랑의 기술」을 읽고 마음을 추스린 후 빛을 향해 걸어 나오길 바랍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0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처음 헤밍웨이를 접한 것은, (어렸을 때 어린이용으로 읽은 노인과 바다를 제외하면) 토요명화극장에서 해 줬던 무기여 잘 있거라를 볼 때였다. 소설을 영화화하는 많은 작품이 그렇듯 급격한 전개와 지금 보기에는 상당히 느끼한ㅎㅎ 대사들 때문에 처음에는 어색한 기분이 많이 들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하지만 결국 새벽 1시가 넘을 때까지 흥미진진한 줄거리와 아름답고 섹시한 배우들, 영화가 전하는 삶과 죽음에 대한 장엄한 메세지에 넋을 놓고 바라봤더랬다. 모든 작가들에게는 저마다의 매력이 있다. 헤밍웨이에게서 내가 느낀 매력은 거칠고 쾌락을 즐기는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염세적이고 이지적인, 고독하지만 멋있는 아저씨 같은 매력이다. 지금 보니 우디 앨런이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헤밍웨이를 정말 잘 표현한 것 같다. 정말, 완전 딱 그 이미지.

 

『무기여 잘 있거라』와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에는 헤밍웨이의 자전적 요소가 많이 들어 있다고 한다. 헤밍웨이 삶의 굴곡은 그의 작품에서도 물결치며 나타난다. 특히 전쟁이라는 테마는 개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만큼 등장 인물의 성격, 행동에 큰 영향을 주며 작품 전체의 분위기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또 다른 테마로는 투우가 되겠다. 작가 연보에도 나와 있듯, 헤밍웨이는 투우를 보기 위해 스페인으로 4 차례 여행을 갈 만큼 그 자신이 투우 아삐시오나도이다. (스페인 투우 아삐시오나도들이 미국인 투우 아삐시오나도를 대하는 장면의 묘사는 참 유머가 넘친다. ) 2부의 배경에 해당하는 축제에서 중심을 차지하는 투우에 대한 묘사는 헤밍웨이의 투우에 대한 애정과 철학을 잘 보여준다. 경험을 기반으로 쓴 만큼 생동감과 현장감이 잘 살아 있다. 그래서 두 번째 책을 읽을 때에는 처음 읽을 때 훑듯이 읽은 것과 달리 전쟁과 투우를 통해 헤밍웨이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를 고민하며 다시 읽어 보았다. 책의 앞 장에 적힌,

당신들은 모두 길을 잃은 세대요.”-거트루드 스타인의 대화 중에서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해는 뜨고 해는 지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아가며 이리 돌고 저리 돌아 그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전도서』

이 두 글귀에도 유의하며 읽었다. 헤밍웨이의 소설을 잘못 이해했다가는 헤밍웨이가 시크하고 터프하게 비웃음을 찍 날리는 게 꿈에 나올 거 같아서; 여전히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확신할 수는 없고, 그냥저냥 발 뻗고 잘 수는 있는 정도인 듯하다.


전쟁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허무주의이다. 전체의 영광과 거룩한 목표로 포장되고 선전되지만 전쟁은 그 시작이 급격한 만큼 끝도 급격하다. 온 몸과 정신을 바쳤던 전쟁이 끝나고, 일상생활로 되돌려 진 개인이 마주하는 것은 평화 안에 감추어진 허무함이다. 피와 총 소리로 얼룩진 전쟁터에서 삶의 리듬은 곱절로 빨라지고 매일 아침마다 목숨을 새로이 걸어야 한다. 그 리듬의 속도가 갑자기 늦춰지고 조심해야 하는 것은 잠결에 침대 모서리에 발을 찧지 않는 것 뿐이 된다면 그 간격의 공허함은 얼마나 클까. 만약에 전쟁에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한 것을 바쳤다면 허무함은 배가 될 것이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의 주인공 제이크 반스는 전쟁 중 부상으로 성기를 다쳐 성불구자가 되어 돌아 온다. ‘체 말라 포르투나!’ 그는 남성성을 전쟁으로 인해 잃고 만 것이다. 이는 일상생활의 리듬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중요한 하나의 매개체를 잃은 셈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이 '상실'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처럼 일상에 섞여든다. 그리고, 그의 상실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도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전쟁 후 누구나 하나 씩 '상실'을 '가지고' 있는 마당에 그 정도는 큰 결점도 아니다. 여기서 할 수 있는 말이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가 아닐까? 전쟁이 끝났지만 삶이 끝난 것은 아니다. 허무감도 상실감도 이어지지만 삶도 이어지기에 그는 살아나가야 한다. 그때 그가 택한 새로운 삶의 방식이 투우로 대변되지 않나 싶다.

 

투우

를 살펴보기 전에, 산 페르민 축제의 성격에 대해서도 중요한 밑줄을 쫙쫙 그어야 할 것 같다. 빰쁠로나에서 열리는 이 축제는 그 지역의 성인을 기리는 종교적인 축제로 일 주일간 지속되며, 이 때 그 유명한 ‘corrida de torros’와 투우가 열린다. 가게의 문은 모두 닫히고, 술집과 카페는 관광객과 현지인이 모두 축제 분위기 속에서 음식과 술을 나눈다. 바로 서 있던 것은 뒤집히고 뒤집혀 있던 것은 바로 선다. 경제 관념조차 뒤죽박죽이 되어 호텔의 식사 값이 두 배로 오르고 가만히 앉아 있는 손님에게 바로 주문을 요구하면서도 난생 처음 보는 사람의 술 값을 자기가 계산하기도 한다. 축제의 활기와 즐거움 아래서 모든 것은 용인된다.

이러한 무질서 속에서 홀로 우뚝하게 서 있는 것이 있다. 황소를 마주하는 투우사의 곧은 몸이다. 축제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투우 경기에서, 만원이 된 열기 가득한 경기장에서 투우사는 정직하게 죽음에 대한 위험에 자기 스스로를 내던지며 비극의 달콤함을 관객들에게 선사한다. 관객들도 가짜 기교를 보이며 거짓으로 연기하는 투우사보다, 진정으로 황소와 목숨을 둔 투우를 보여 주는 투우사에게 흰 손수건을 던지며 환호한다. ‘삶을 철저하게 사는그 자세를 찬양하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배우냐 보다, ‘어떻게 사느냐라고 제이크는 독백한다. 어떻게 사느냐를 알게 된다면 자연스레 배우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결국 제이크가 바랐던 것은 삶을 치열하게 사는 것이 아닐까? 마치 투우사처럼.

 

전쟁은 그 손이 닿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개인은 전쟁 전의 삶으로 돌아가려 해도 돌아갈 수 없다. 이미 그 자신이 변했기 때문에. 그렇다면 새로운 리듬에 맞춰 적응해야 할 뿐이다.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잃었는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다만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 허위와 가짜가 아니라 진실되게.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 장면에서 제이크 반스가 레이디 애슐리와 함께 택시를 타고 가는 장면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치러야 할 대가를 치루며 레이디 애슐리의 곁에 계속해서 머물렀던 제이크는 결국 그녀가 그를 필요로 할 때, 그녀에게 사랑하는 제이크라고 적은 전보를 보내고 달려가 그녀를 안아주게 된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퇴장한 로버트 콘처럼 자기연민에 빠진 짝사랑을 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물론 그가 브렛과 결합할 수 있으리라 보지는 않는다. 하지만 브렛에게 제이크는 위기에 빠졌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 가장 위로 받고 싶은 사람으로 다른 남자들과 헤어지듯 그와 헤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관계를 이어나가고 픈 남자일 것이다. 거기에 더 이상 화냥년이 되고 싶지 않다는 브렛의 고백으로 보아, 앞으로 제이크가 그녀 곁의 어설픈 다른 남자의 존재로부터 고통 받을 일은 없으리라 생각한다. 그것이 제이크가 치열하게 삶으로써 얻어낸 삶의 즐거움이 아닐까. 연인이 될 수 없다면 영원히 친구로 곁에 머물게 해달라는 남자의 애틋한 마음에 대한 보상말이다. 


하지만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해도 그것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알기란 어렵다.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면, 잘못된 방식으로 하고 있다면 어떡하지? 라는 걱정이 맴돈다. 힘의 강도만큼이나 방향도 중요하기에. 현재의 나도 그렇다. 앞으로 놓인 인생, 지금까지 살아 온 인생을 살피는 자기 성찰은 항상 불안함과 모호함을 불러 일으킨다. 나는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이 맞는가?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그래서 생각을 조금 뒤틀어 보았다. 그래도 '치열함'이 더 중요하다면 어째서일까 하고. 투우로 되돌아가서, 투우사가 잘못될 것이 두려워서 황소를 안전한 놈으로 고르고, 거짓된 묘기를 부린다면 결국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할인된' 영광 뿐이다. 잘못된 방향으로 달려 가더라도, 그래서 막다른 벽 앞에 부딪히는 대가를 치르게 되더라도 그 대가만큼 삶에서 얻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머뭇거리다가 아무 것도 잃지도 얻지도 못하는 삶보다는 나을 것이다. 하다못해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교훈이라도 얻게 될테니까. (로버트 콘은 다시는 그런 맹목적이고 바보같은 사랑은 안 하겠지..) 방향을 잡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제자리에서 맴도느니, 치열하게 살아나가는 방식을 택하라. 그러면 얻는 것이 있을지니! 라고 헤밍웨이의 목소리를 빌려 내가 나에게 말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몬 라
빅토르 펠레빈 지음, 최건영 옮김 / 고즈윈 / 201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는 비행한다. 미지의 세계, 동경의 세계를 향하여. 닿을 수 없는 저 먼 곳에서 빛나는 그 세계는 오물로 가득 찬 현실과 달리 청명하고 영광스럽다. 우리는 꿈을 꾼다. 현실의 기나긴 고통의 터널 끝에 빛으로 가득 찬 꿈을. 그렇게 우리는 현실을 살아가면서 동시에 꿈을 살아가고 꿈을 살아가면서 여전히 현실 속에 존재한다

 

이 기묘한 줄다리기. 혹자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이고 현상계를 넘어서는 초월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동서양을 막론하고 '눈에 보이는 것이 과연 전부인가'라는 물음은, 인간이라면 한 번쯤 하게 되는 것 같다. '오몬 라'는 그 팽팽한 줄다리기의 긴장을 여과 없이 보여 주는 소설이다. 주인공은 오몬 끄리보마조프는, 극단적으로 죽었는지 살았는지 조차 확실하지 않다. 환상이 현실과 계속하여 겹쳐지고, 비슷한 모티브가 반복되어 나타난다. 마치 꿈처럼. 로켓, 별 모양 마카로니와 냉동 닭고기, 끈적끈적한 케이블, 리놀륨 바닥, 자전거, 흐릿하고 왜곡된 시야 너머로 보이는 광경, 웅웅거리는 소리, 노랫소리, 적색 선 등이 우연치고는 너무도 자주 반복되는 것이다. 낮에 본 광경이나 했던 생각이 밤에 꿈 속에 재현되듯이 말이다. 마지막 장은 시공간과 인과성을 모조리 무너뜨리고 급격히 장면전환 되는 꿈처럼 시시각각으로 요동친다. 달표면에 호흡곤란으로 쓰러진 오몬이 태연히 일어나 산소호흡기를 벗어 던질 때부터 우리는 당황하게 된다. 소설이 진행되며 쌓여 온 불안과 의심은 너무나도 태연하게, 아무런 설명 없이 불쑥 정체를 드러낸다. 그리고, 정체불명의 악당에게 쫓기고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는 것은 악몽과 너무나도 비슷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오몬의 환상이었던 것일까? 마지막에 지하철 안에서 노선도 안의 적색 선을 바라보는 오몬은 진짜현실일까?

 

책을 다시 읽어보아도 여전히 이 현실과 환상의 사이를 명확히 구분 지을 경계는 찾을 수 없었다. 오몬은 여전히 7살이고 전부 그의 꿈이었다고 해도 말이 되는 것 같고, 그가 로켓 캠프에서 꾼 꿈이라고 해도 말이 되는 것 같다. 뒤집어 말하면 전부 말이 안 되는 것 같기도 하고. 결국 이 소설은 는 누구인가, 그리고 이 세상은 진짜인가라는 철학적 물음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어떻게 있는 것일까? 보고 있는 '' 누구인가? 그리고 본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나는 밖에 있는 어떤 것을 보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자신의 내면을 보고 있을 뿐일까? 그런데 자신의 안과 밖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107

 

그런데 사실, 이 모호함은 소설 속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일상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자신의 세상을 파악하는 데 자신의 지각능력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우리에게 현실로 다가오는 것은 우리가 보고 느끼고 기억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이 지각능력은 완전한가? 우리가 미디어를 통해 듣고 읽는 것, 이들은 진실을 말하고 있는가? 쏘베트가 만든 터무니 없는 모양과 기능의 루노호뜨나 스튜디오 내부에서 촬영하는 우주 착륙 광경, 거대한 사회주의 이념의 포장으로 가려지는 가련한 개개인들의 운명은 겉으로 보여지는 것과는 다른 진실을 품고 있다. 굳이 이것을 현대사회의 미디어의 병폐로 잇지 않더라도, 즉 진정으로 정보를 왜곡하려는 '의도' 외에도, 우리의 주위에는 정보의 왜곡과 소통의 오류가 '필연적으로' 존재하여 '진실'을 향한 길을 어지럽힌다. 소설이라서 허구와 진실을 혼란스럽게 뒤섞어 놓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자체가 그렇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꿈을 꿀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신이 아니다. 신이 되고 싶어하지만 우리의 발은 지상에 묶여 있다. 몇몇은, 그래서 더더욱 신에 대한 꿈을 꾼다. 하지만 꿈과 현실이 뒤죽박죽으로 마구 섞이고 버무려지는 그 혼란의 순간, 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되는 그 순간 저 먼 동경의 별을 향하는 머리와 땅에 놓인 다리는 분리되고 마는 것이 아닐까. 솔직히 말하면, 이 난해한 소설이 진짜 전하려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여전히 모호하기만 하다. 잡으려고 해도 낱말들은 자꾸만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말았다. 다만 그 낱말들 사이를 마구 휘저어 간신히 움켜잡은 것은, 꿈과 현실의 그 모호함 사이에서 자아를 잃고 산산이 조각나는 것이 엄청난 비극이 된다는 것. 그 뿐인 것 같다.


p.s. Pink Floyd의 노래를 이 소설을 읽고 처음 듣게 되었는데, 참 이 소설의 분위기와 어울리는 노래들인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 민음사 / 200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은 꼭 읽어보고 싶었다. 그의 이름을 처음 듣게 되었던 것은 고등학교 수업 시간, 

스페인어를 가르치던 선생님께서 스페인어 문화권의 작가들을 소개할 때였다. 

젊고 호탕하셨던 남자 선생님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노벨상을 수상했고, 여러 소설을 썼고, 그 중 

'백년의 고독'이라는 책으로 상을 수상했다.. 라는 사소한 사실들을 나열하다가 "정말 제목만큼 읽기 어려운 소설"이라는

평을 농담으로 끼워 넣으셨었다. 그때 이후로 나에게 각인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백년의 고독'과 

같은 무겁디 무거운 제목의 소설을 쓰는 난해하고 어려운 작가였다. 좀 더 머리가 큰 후, 여기 저기서 들려오는 

그의 이름을 들으며 그 중후함은 점점 지워지긴 했으나 여전히 그의 소설, 특히 '백년의 고독'은 집어들기가 어려웠다. 

그러다가 스페인으로 교환학생을 떠나기 한 달 전, 결국 그와 수줍게 만나기로 결심을 했다. 서점을 들어가 

이리저리 기웃거리다가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과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를 양 손에 하나씩 들고 고민을 했다. 

그리고 첫 문장을 읽고 둘 중 더 마음에 드는 책을 사기로 했다. 그렇게 선택된 책이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이다. 


그들이 그를 죽이기로 한 날, 산띠아고 나사르는 주교가 타고 오는 배를 맞이하기 위해 새벽 5시 30분에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강렬했다. '그들', '한 날', '주교', '일어났다' 가 연달아 쾅 쾅 눈 앞에 떨어졌다. 책을 다 읽고 난 후인 지금 

이 문장의 날카로움은 한 층 더 퍼렇다. 이 안에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다 담겨 있다. 왜 죽이려는 거지? 

주교는 왜 왔지? 왜 그는 일어났지? 그리고 이 문장을 시작으로 소설은 끊임없이 '왜'를 입 안에 머금은 채 이 비극적인

사건을 풀어 간다. 소설에서도 허용되지 않는 우연들이 현실에서 일어나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이야기가 펄쳐지고 그 우연들에 마주칠 때마다 우리는 힘겹게 '왜'를 되뇌이게 된다. 

우연이 모여 결국 필연을 확정짓는 그 잔인한 과정은, 끝내 칼부림에 내장이 꺼내지는 토끼 마냥 비까리오 형제에 

의해 자신의 집 문 앞에서 난도질 당하는 산띠아고 나사르의 붉은 내장을 보고서 끝이 난다. 이미 그의 죽음이 

예고되었음에도, 마지막 장에서 산띠아고 나사르에게 비까리오 형제가 달려드는 장면은 최고의 긴장감을 유발한다. 

당황하는 산띠아고 나사르와 거친 비까리오 형제를 바라보며 그리고 그들을 말리려 경고하는 사람들의 고함 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그 소용돌이 안으로 빠져 들어가 함께 그 살인 장면을 손에 땀을 쥐고 바라보게 된다. 

그의 죽음에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지만, 이미 아무도 운명이 결정지어진 가련한 나비를 구해낼 수 없다. 


이 살인은 과연 비까리오 형제에게서만 일어난 것일까? 다른 사람들은 이 살인에 무고할 수 있을까? 아니, 

비까리오 형제는 정말 산띠아고 나사르를 죽이려고 했을까? 그의 집 문에 살인이 예고된 쪽지를 밀어 넣은 것은 

사실 그 형제가 아니었을까? 순간의 무관심, 순간의 두려움, 순간의 분노, 순간의 잘못된 판단이 모여 결국 

무고한 사람의 목숨을 끊고야 말았다. 아주 작고 사소한 것들이 톱니바퀴처럼 물리고 물려 예고된 죽음을 향해 

산띠아고 나사르를 떠민 것이다. 사실 이미 오래 전부터 이 살인은 예고된 것일지도 모른다. 앙헬라 비까리오가 

소박을 맞기 전 부터, 아랍인과 콜롬비아 토박인들 사이의 갈등,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의 갈등, 여성의 정절에 

대한 이중적인 잣대, 남성 중심적인 문화, 공동체 의식의 끈끈함과 타인의 비극에 대한 무한한 관심을 뒤섞은 문화

 등은 이미 한 사람의 죽음을 미리부터 결정지어 놓고 있었을 것이다. 


마치 번외처럼 등장한 앙헬라와 바야르도 산 로만의 재회는 그래서 조금 더 의미가 있다. 둘은 편견과 관습, 외부의 

정념에 휘말리는 것을 그만두고 자신의 내부에서 오는 감정과 판단에 따라 '새로운 인간'으로 탄생한다. 물론 그 

재회가 로맨틱하다거나, 앞으로의 미래가 로맨틱할 것이라고는 장담할 수 없다. 다만 산띠아고 나사르의 죽음과

함께 과거의 자신도 죽여야 했던 그들이 이후 두 사람이 자신만의 판단과 감정을 따라 새롭게 태어난 것은 

축복할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에 대한 이미지는 상당히, 아니 거의 전부 변화했다. 다른 건 몰라도, 

지루하고 난해한 작가라는 이미지는 저 시퍼런 첫 문장에 의해 완전히 도려내졌다.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에는 여기저기서 

삶의 잔인함, 그리고 그 잔인함 사이에서 피어오르는 관능적인 매력이 묻어나왔다.  이 소설이 영화로도 만들어졌다니 

찾아봐야 겠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다른 소설들도. 수줍게 시작된 만남이었고 상당히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는 참 강렬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 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7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윤상인 옮김 / 민음사 / 200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같이 보자


 

민족성은 참 애매한 단어이다. 한국인하면 김치 없으면 밥을 못 먹는 민족, 한의 정서를 품고 있는 민족, 성질 급한 민족 등 다양한 수식어를 떠올릴 수 있지만 사실상 이것들은 만들어진경향이 크다. 게다가 민족주의가 과열될 경우 나치즘과 같은 배타적이고 살상적(?)인 괴물로 변모할 가능성도 다분하다. ‘민족’, ‘국가등은 공통점이 전혀 없어 보이는 사람들을 뭉뚱그려 거대한 덩어리로 만든 후 이들은 모두 같은 방향을 향해 돌진하도록 밀어붙이기 좋은 단어들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민족성 같은 단어를 사용하는 데에 반감이 있으며 국가의 중요성에 목 매는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문학을 읽을 때에는 어김없이 민족국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많지 않은 독서량이지만 각기 다른 문화권에 속한 소설들을 읽을 때마다 글자들 사이에서 다름’을 느낄 수 있다. 똑같이 하얀 바탕에 검은 글씨임에도 불구하고 뿜어져 나오는 분위기, 숨결은 서로 섞일 수 없는 독특함을 띤다. 나쓰메 소세키 소설 역시 마찬가지다. 그의 주인공들은 너무나도 일본적이다. 고유한 정체성이 곳곳에 깃들어 있다. 저번에 산시로를 읽을 때에도 그랬지만, 이번에 그 후를 읽을 때에도 , 이게 일본이구나.”가 무의식적으로 머리 속에 떠올랐다. 물론 지금의 일본은 아니고, 근대의 일본. 그렇다고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에서 일본의 국민성 운운을 끌어내고 싶지는 않다. 그러기에 민족성이나 국가성과 같은 단어는 너무나 강렬하기 때문이다. 차분한 풍속화에 시뻘건 페인트로 여기저기 별표를 하고 밑줄 쫙쫙 긋는 느낌이랄까. 그냥, 조금 다른 성격을 지닌 인물들이 조금 다른 환경에서 살아가는 이야기 정도로 말하고 싶다. 어쨌든 소설은 달라도 소설이다. 이해할 수 있기에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다를 지라도 우리는 모두 인간이므로 서로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은가? 그 후의 주인공인 다이스케는 묘한 인물이다. 이해가 안 가면서도 이해가 된다. 나와 닮았으면서 닮지 않았다. 다이스케는 특유의 예민한 통찰력으로 주위를 살피고 분석한다. 그에게는 가족 역시 분석 대상이다. 자신을 옭아 매는 관습에 둔해지지 못하고 예민하게 반응하며 이를 거부한다.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고 진심과 가식을 구분한다. 그 자체가 목적인 자연만이 그에게는 가치가 있으며 문명이 이룩한 갖은 위악은 열등한 것이다. 사람이 다이아몬드를 버리고 감자를 택하는 순간, 그 순간을 다이스케는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다. 위악에 대한 비판은 산시로에서도 등장한다.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행동을 하지 않고, 수단으로서 행동을 하는 것은 모던하지 않으며 자연스럽지 못하다. 자연의 법칙과 사회의 법칙 중 더 고차원적이고 궁극적인 것은 자연의 법칙이므로, 인간이 만약 사회의 법칙을 따른다면 그것은 자신의 존재 목적을 거스르는 행위가 된다.


다이스케와 하라오카의 대립은 자연과 사회(문명)의 대립이다. 다이스케는 로맨티스트라서가 아니라, 사회를 거부하기에 하라오카를 배신한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이상을 추구하기 위해 현실을 거부했다고 할 수 있다. 현실의 허구성은 다이스케의 죄의식에서 조금 더 드러난다. 그에게 사회적인 제재는 로써의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다이스케가 진정으로 자신의 죄를 느끼고 벌을 받을 때는 오직 자신의 양심이 가책을 느낄 때뿐이다. 다이스케가 죄의식을 느낄 때마다 그는 붉은 색으로 고통 받는다. 사회적 잣대가 아닌 자신의 양심을 기준으로 했을 때 비로소 그는 죄의식을 느끼는 것이며 그 때만이 진정한 벌을 받는 때가 되는 것이다. 심지어 경제적으로 어려운 위치에 처하는 것마저도 그는 벌로써 느끼지 않는다. 그의 벌은 그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위치에 처함으로써 미치요를 보살필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사회를 부정하고 자기자신에 매몰되어 있는 인간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냐는 질문에 답을 하기란 어렵다. 소설 속 다이스케도 마냥 긍정적으로 묘사되지는 않는다. 독자로서 우리는 그의 나태함, 경제적 무능력을 비난할 여지가 충분하다. 다이스케와 상반되는 또 다른 인물로 데라오가 있다. 데라오는 분명 문학을 즐기고 문학 자체를 위해 글을 쓰고 읽고 싶어하는 인물이지만 생활고로 인해 출판업에 매달려 근근이 입에 풀칠을 하는 인물이다. 그는 진지해지고 싶지만 경제 형편으로 인해 진지해질 수 없다. 사회의 굴레는 그렇게 강하고 거칠다. 개인의 힘과 의지만으로 극복하기에는 분명 한계가 있는 것이다. 다이스케가 본가로부터 생활비를 받지 못하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인물도 데라오이다. 평소에는 데라오를 무시하고 그에게 핀잔을 주던 다이스케였지만 막상 사회의 제재로 인해 어려움에 처하자 그는 데라오만큼의 의지도, 그만큼의 능력도 보이지 못한다다이스케의 이론이 부잣집 도련님의 속좋은 세상 타령처럼 보이는 까닭이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다이스케의 관점에서 시종일관 진행되면서도 다이스케의 장단점이 선명히 드러나는 것은 나쓰메 소세키 특유의 문체 때문인 듯하다. 우리는 다이스케의 눈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면서 동시에 다양한 인물 군상의 등장과 세밀한 묘사를 통해 다층적인 시선을 가지게 된다. 다이스케의 편을 드는 듯 하면서 갑자기 한 발짝 물러서 다이스케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묘한 서술이 바로 나쓰메 소세키의 책을 두 번 세 번 읽게 하는 묘미라고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