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가 시작된 이후로 내 삶의 중심은 그대였다. 그대를 생각할 때만 감정이 동요하고 그대와의 이야기가 조금이라도 담겨 있는 영화나 책, 노래를 발견할 때면 온 몸이 울렸다. 죽을 만큼 아파도 보았고 또 그 아픔에 익숙해져 가는 과정도 겪어 보았다. 그렇게 그대라는 존재를 품에 안고 나의 존재는 형성되었다. 그대 덕분에 나의 존재의 경계를 넘어서서 타인의 감정에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고 나와 같은 이유로 아파했던 사람들에게 귀 기울일 수 있게 되었다. 


그대에게 들려 주고 싶은 노래, 보여 주고 싶은 영화, 읽어 주고 싶은 책들이 참 많았다. 하지만 전해지지 못한 채 일기장에 쌓여만 가던 나의 거친 편지들과 함께 이 모든 것들은 체념과 함께 삼켜져 내 안에만 쌓였다. 주위 사람에게라도 쏟아내지 않으면 견디지 못할 만큼 갑갑한 날에는 친구를 붙잡고 나의 감정을 토로하곤 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나의 감정들은 오히려 왜곡되어 전해졌고, 날 것의 감정들은 타인의 불이해만을 불러 일으켰다. 그래서 입을 다물기 시작하였으며 다른 방법으로, 이야기에 나의 감정을 담아 간접적으로 내 안을 비워내곤 했다. 


안나 카레니나의 첫 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 문학동네의 번역본이고, 개인적으로 맘에 드는 번역은 아니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크게 와닿았다. 행복한 가정의 기준은 있으나 불행한 가정의 기준은 없다. 하하호호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면 행복한 가정이다. 행복한 가정하면 떠오르는 흔한 이미지들이 그러하듯이. 이는 행복한 가정이란 외부에서 바라보는 시선에 절대적으로 의존한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내부에서 보아야 한다. 불행한 가정이더라도 겉으로는 행복해 보일 수 있다. 외부에 보여지기 꺼려지는 각자의 불행한 문제들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그대와 함께 하는 시간 동안 남들이 하듯이 함께 찍은 사진을 sns에 올리기도 하고 남들이 하듯이 선물도 주고 받고 기념일도 챙기며 행복한 티를 내지 못해 안달이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사실 힘든 시간이 더 많았고 불행하다고 느낀 적도 많았다. 남들에게는 뻔한 푸념으로 들렸을 지라도 나에겐 너무나 큰 아픔이었고 상처였다. 하지만 자존심에 솔직하게 나의 불행을 털어놓지 못했다. 그저 다른 행복한 커플들이 하는 행동을 따라하면서 나도 행복하다고 느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안나가 알렉세이를 찾아 전보를 치고 기차에 몸을 싣고 자살까지 결심하게 되는 과정을 보며 그대는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다. 나는 그녀가 너무나 안타까웠다. 폭발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그녀와 그런 그녀로부터 멀어져 가는 알렉세이때문에 더욱 상심하는 그녀가 안타까웠다. 그런 그녀에게서 나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격한 감정에 휩쓸린다는 것이, 상황이 악화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 감정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나는 알았기에 더욱 그녀에게 동정을 느꼈다. 그대가 안나 카레니나의 그 부분을 읽는다면, 나처럼 안나를 동정할까, 혹은 이해하지 못할까. 아마도 그런 그녀의 무분별함에 거부반응을 보이리라 생각한다. 불쌍하다고는 느끼겠지만 이해하지는 못하겠지. 그리고 이러한 추측은 나를 더욱 슬프게 한다. 


그대를 잊는 것이 두려웠다. 그대와 함께 한 시간들 마저 잃어버리게 될까봐. 많이 힘들고 많이 얼룩진 시간들이었지만 그 사이사이에 빛나는 추억들이 있고 그대의 미소, 살내음, 온기가 있기에 나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버릴 줄 알아야 얻는 것도 있다고, 그대와의 추억을 놓을 때가 된 것 같다. 그대의 흔적은 지워지더라도 그대와 함께 나눴던 감정들은 내 안 어딘가에 남으리라 생각한다. 그 정도에 만족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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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을 갖는 것과 실제로 참여하는 것은 굉장히 다른 일이다. 스페인에서 교환학생을 하다가 한국에 돌아오고, 이제 나의 관심분야를 직업으로 만드는 과정을 하나하나 밟아나가면서 느낀 것은 맞는 인연을 만났다는 기쁨이었다. 책에도 관심이 있었고, 영화에도 관심이 있었고, 마케팅에도 관심이 있었고, 사회공헌에도 관심이 있었는데 상상하지 못했던 부분에서 새로운 길이 열리고 내가 성장할 수 있는 지평이 열린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우연한 기회에 아쇼카 북토크에도 참여를 하게 되었다. 아쇼카가 뭔지도 모르면서 북토크라는 이유만으로 신청을 했다. 책도 읽지 않았으면서 오랜만에 듣는 책 관련 강의라 기대감을 안고 갔더니, 우연이 사실은 인연이었나보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 내가 닮고 싶은 사람들이 가득했다. 


요즘엔 이런 식의 일들이 자주 일어난다. 창업과는 영영 거리가 멀 줄 알았건만 어느새 보니 창업에 뛰어들었고, 친환경과는 관련이 없는 삶을 살아왔는데 친환경 사업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길을 달랐으나 정상으로 향하는 목표는 같기에 함께 걷기로 했고 그 과정에서 내 생각과는 다른 풍경들을 밟으며 신선한 즐거움도 누리고 있다.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생각하고, 얼마나 더 성장해야 할 것인지도 알게 되고. 


결국은 모든 것이 변화에 대한 문제로 귀결된다. 삐딱한 사람들, 삐딱한 생각들, 하지만 그렇기에 이룰 수 있는 긍정적인 변화들이 있다. 우연히 참여한 아쇼카 북토크에서 또다시 확신을 얻었고 계속 나아갈 원동력을 얻었다. 알면 알수록 세상에는 진정성을 지닌 사람들이 많았고,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더 큰 외로움 속에서 묵묵히 걸어가고 있었다. 변화의 시작에 내가 서 있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또한 내 본연의 관심사인 '소설'과 아쇼카 북토크를 연결시킬 수 있어서 좋았다. 어떻게 보면 취미활동에 지나지 않을 독서라는 행위가 순간 순간마다 삶의 방향을 가리키는 화살표가 되어 반짝하고 빛날 때마다 큰 뿌듯함을 느낀다. "공감의 뿌리"라는 책을 소개하신 김은희씨의 강연 중 다른 사람과 공감을 함으로써 그 사람과 가까워지고 그 사람의 아픔을 이해하게 된다는 내용이 있었다. 듣자마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생각났다. 책에서는 공감대신 '동정'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나 결국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라틴어에서 파생된 언어에서 동정이라는 단어는 타인의 고통을 차마 차가운 심장으로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달리 말해 고통스러워하는 이와 공감한다는 뜻이다. (중략)

동정심을 갖는다는 것(co-sentiment)은 타인의 불행을 함께 겪을 뿐 아니라 환희, 고통, 행복, 고민과 같은 다른 모든 감정도 함께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동정은 고도의 감정적 상상력, 감정적 텔레파시 기술을 지칭한다. (중략)

그런데 그는 그녀를 내쫓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녀의 손을 잡고 손끝에 키스까지 했다. 왜냐하면 그 순간 마치 테레자 손가락의 신경이 자신의 뇌에 직접 연결된 듯 그녀가 손톱에서 느끼는 고통을 자신도 느꼈기 떄문이다.


토마스는 테레자에게 동정하였기에 그녀의 아픔을 내버려 둘 수 없었고 결국에는 자신의 직업까지 버리며 그녀를 따라 간다. 그로 인해 토마스가 그녀를 비난하였는가? 아니, 오히려 그녀를 더욱 사랑하였다. 나와 타인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만큼 숭고한 일은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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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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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있는 내가 미친 것일까, 아니면 이 세계가 미친 것일까?

그동안 책을 하나의 소일거리로 봐 왔던 나의 태도가 부끄러워졌다. 나의 독서 습관이 부끄러워졌다. 내가 내 뱉은 글들이 부끄러워졌다. 나는 도피하기 위해 책을 읽었고, 안일해지기 위해 책을 읽었다. 그리고 그 찝찝함을 조금이나마 덜기 위해, 그리고 지적 허영심을 충족시키며 가짜 선비 놀음을 하기 위해 글을 끄적였다. 나는 치열하지 못하다. 뷔페에 가 음식들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게걸스레 위에 쑤셔넣듯이 책을 삼켰다. 씹지도 않고 음미하지도 못했다. 누군가에겐 목숨을 걸 만큼 위대한 의식인 읽기와 쓰기가 나에겐 허울만 남은 겉치레, 진실을 외면하는 아편과도 같았다. 나는 0.1%로 살아남은 위대한 노장들을 만나면서 악수를 하고 기념사진만 찍고 떠나는 무례한 손님이었던 것이다. 그들의 명예를 드높이는 척하면서 사실은 그들을 광대로 전락시키고 있었다. 


작가의 냉소적이고 날이 선 문체가 자꾸만 양심을 푹푹 찔러 왔다. 책을 읽는 동안 내가 발가벗겨지는 것 마냥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내 눈을 가리고 있던 내가 흥미로워 했던 것들, 심심할 때 하는 것들, 나의 관심사들이 모두 벗겨져 마른 나무 껍질처럼 바스라졌다. 술에 취해 몽롱해 있다가 술이 깨면서 그동안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음을 깨닫는 기분이었다. 그러자 두려워 지더라. 내가 정말 치열하게 고독한 싸움을 해낼 자신이 있는지, 그 광기서린 길을 걸어갈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확신이 서지 않았다. 만약 이 세계가 미쳤다면, 그 세계와 나는 맞서야 한다. 그 말은 내가 지금껏 누려오고 일궈 왔던 세계를 내 손으로 져버려야함을 의미한다. 돈, 직업, 친구, 명예 등 세계의 질서에 순응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달콤한 열매를 '가짜'라고 손가락질하며 던져야 하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자신이 없다. 세상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홀로 고독한 싸움을 하는 것이 내게는 정말 문자 그대로 '미친 짓'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윤택하고 안락한 삶에 익숙해진 나는 아무래도 매트릭스의 네오와 같은 사람이 될 수는 없어,라고 생각하자 입안에 씁쓸함이 텁텁하게 쌓였다. 그러면서도 아예 책을 덮어버리지 못하는 까닭은 완전히 현실세계에 순응할 뻔뻔함조차 내게 없기 때문이다. 한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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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의 고독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조구호 옮김 / 민음사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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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재미있어야 한다, 라고 생각한 계기가 된 책이다. 사람의 상상력이란 얼마나 위대한지! 완벽히 허구적이고 환상적인 세상 속에서 나는 시공간이 확장되는 것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그 안에서 벌어지는 갈등, 사건들은 어쨌든 '삶'에 뿌리를 박고 있었다. 이처럼 환상적이고 정말 소설같은 소설을 읽다보면 역설적으로 '보편성'이라는 것에 대해 실감하게 된다. 너무나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다른 이야기임에도 나는 여전히 그들과 공감할 수 있고 그들을 이해할 수 있다. 똑같이 울고 웃고 비슷한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비슷한 사상에 목숨을 걸고 하는 것이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작가가 쓴 허구적인 이야기에 내가 공감한다는 것은 다른 문화적 배경을 지니고 있더라도 기본적으로 같은 인간이기에 가능한 것 아닐까. 


소설의 테마가 되는 '고독' 역시 보편적인 인간의 속성에 해당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항상 '소통'을 원한다. 지금 내가 이 글을 쓰는 것 역시 '소통'하고자 하는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완전한 소통은 불가능하다. 관념이 언어를 통해 구체화되고 또 전해져 다시 타자에 의해 해석되는 과정에서 수많은 오류와 왜곡이 발생한다. 의도한 바와 달리 떠돌아다니는 낱말들이 나와 타인 사이에 벽을 만들고, 결국에는 그 벽을 기대고 주저 앉아 되뇌이는 것이다. 그래, 인생은 어차피 혼자 사는 거야...... 사람이 그리워서 약속을 잡고 만났다가, 만난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다시 권태를 느끼고 차라리 혼자 방에서 책이나 읽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소통의 불완전함에서 오는 '고독'이 항상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이 드넓은 우주에 떨어진 작고 유한적인 인간이라는 존재가 언젠가는 이 세상에서 사라질 운명에 놓여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고독함을 느끼기엔 충분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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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oxford circus 역에서 내려서 charing cross street 을 쭉 따라 걸으면 헌책방과 책방이 모여 있는 구간과 만나게 된다. 들어가면 천장까지 진열된 책들과 여유로운 분위기의 주인이 아늑한 숨결로 맞이한다. 대개 이런 헌책방은 지하로 내려가는 통로가 있고, 그 안에 다양한 헌책들이 종류별로 늘어져 휴식을 취하고 있다. 주인이나 직원은 손님들에 대해 대체로 무관심한 태도를 취하고, 손님이 질문을 하면 친절히 답해 주지만 그렇지 않다면 손님의 시간을 존중해준다. 온 책방을 헤집고 다니며 이책 저책 뒤적거려도 된다는 말씀. 그나저나 런던 번화가 한 복판에 이런 멋드러진 헌책방이 모여있다는 것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일종의 관광지 역할도 하고 있었다. 런던 명소에 선정되기도 하고.. 우리나라도 헌책방이나 책방에 좀 더 관심을 가지면 좋을텐데. 튼 J.D.Salinger의 책을 구매하고 싶었으나 찾지 못하고 Ernest Hemingway의 단편집을 학생할인 포함, 4.5파운드에 입양. (학생할인 받을 수 있냐고 물으니 학생증을 묻지도 않고 쿨하게 그 자리에서 10퍼센트 할인해주었다.) 출판된 날짜를 확인하니 1986년! 나보다 나이가 많으신 분인데 여행다닐 때 가방에 넣고 다녔더니 표지 모서리부분이 구겨졌다ㅠㅠ. 원체 칠칠치 못한 성격이라 지금은 집에 모셔놓고 짬날 때마다 들여다보고 있다. 

명작을 원서로 읽는다는 것은 감동적이다. 전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글자가 직격으로 뇌로 파고드는 느낌이다. 호흡을 같이한다고나 할까.. 번역서들도 '국문학'이라는 학교 교수님의 말씀에 공감가는 순간이었다. 거기다 헤밍웨이의 단편은 정말 매력적이어서, 아마도 번역판으로 읽었다면 이 매력이 고스란히 전해지지 못했으리란 생각이 든다. 번역판이긴 했지만 그의 다른 소설들을 읽었을 때는 그다지 깊은 감명을 받지 않았는데, 이 단편들은 하나하나가 강렬하다. 구성이 단단하게 짜여 있어 짧은 분량임에도 묵직하게 다가온다. 문장이 짧은 편이라서 속도감있게 진행되어 원서를 접한지 얼마 안 된 나도 읽기가 수월하다. 단편에 흥미가 생긴 계기가 되기도 한, 내 소중한 책을 만나게 해준 헌책방, 땡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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