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은 휴일이었어. 휴일이라는 단어는 묘하게 스트레스를 줘. 할 게 아무 것도 없는 데도, 뭔가 해야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게 하거든. 하지만 사실 진짜 '쉰다'는 건 사람마다 정의내리기 나름인 거 아닐까?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쉬기만 하는 건, 사실 모순이야. 정말 '아무 것도 안 하는' 상태는 음.. 죽음 밖에 떠오르지 않아. 아무튼 그래서 오늘은 휴일이니까, 창문을 통해서 들어오는 햇빛 외에는 네 벽에 반사되는 백열등의 인공적인 전기만 맛 볼 수 있는 내 방에서 벗어나 시내의 광장으로 나갔어. 일단 가장 큰 목적은 햇빛을 쬐고 싶다는 거였고, 그 목적이 도달하는 곳에 책이 있다면 더 좋겠다 싶었지. 결론부터 말하자면 성공적이었어. 햇빛은 눈부시게 하늘을 빛내고 있었고 그 밑의 지상까지 관대하게 반짝반짝 빛가루를 뿌려줬어. 내 파란 코트를 사기 잘했다고 다시금 생각했어. 그 부드럽고 온화한 분위기에 내 파란코트를 더함으로써 '창조'에 일조하는 듯한 기분좋은 착각에 빠질 수 있었으니까. 거기에 내 손에 들려 있는 책이 '백년의 고독'이란 것도 마음에 들었어. 도저히 현실이라고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 몽롱하고 강렬하면서도 잡으려고 하면 스르르 흩어지고 마는 이곳에서의 생활이, 이 책을 오히려 생생하고 '현실적'으로 만들어주었거든.
'운명'을 믿니? 가끔, 지금까지의 발자취를 돌아볼 때면 알 수 없는 끈이 내 몸을, 내 생각을 휘감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왜 하필 나는 그때 그 선택을 했을까? 왜 그런 말을 했고, 그런 것에 동의를 하고, 그런 것에 반대를 했을까?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을까. 그리고 한 편으로는, 또 그 끈들이 나를 어딘가로 끌고 가고 있다는 생각도 들어. 정말 미래가 보이지 않는 거 같니? 한 발짝 바로 앞도 보이지 않는 새카만 어둠에 둘러 쌓여 있는 거 같아? 그렇다면 조심해. 불시에, 발 밑에서 귀 뒤에서 미간 앞에서 운명의 세 여신의 가위가 들이닥칠 수 있으니까. 그러면 공포에 질린 나머지, 그나마 유지해오던 조심성과 예민함마저 잊어버리고 자신이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 조차 모른 채, 사지를 버둥거리게 될 뿐이야.
'고독'을 생각해봐. 나의 인생이 어느 양피지에 전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동시에 적혀 있고 그 양피지 마저 영원히 소멸될 것이라는 고독. 그 양피지가 누구에 의해 쓰였는 지도 알 수 없는 진저리나는 고독. 시작이 있기에 끝이 있음을 알고,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있음을 알고, 세상에 즐거움과 고통이 있음을 알고, 나는 다만 살아갈 따름이라는 것을 안다면 고독은 조용히 찾아올 거야. '운명'과 '고독'은 마치 동전의 앞면과 뒷면 같지. 운명에 대해 생각하고 고독을 씹어 삼켜. 그 쌉싸름한 환상 끝에는 안식이 분명히 있어. 마법의 세계를 뒤로 하고 문을 닫고 나오는 앨리스가 느꼈던, 진득한 고독과 그 끝에서 알싸하게 퍼져오는 해방감이 말이야. 그럼으로써 양피지는 끝이 나고 문은 닫히고 땅은 덮이고 꽃은 꺾이고 빛이 사라지고 어둠도 사라지고, 하늘은 내려앉고....마침표가 찍혀지지.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마음은 편해지지 않니? 아무리 발버둥쳐봐야 고독은 사라지지 않고, 외면하면 외면할수록 공허감만 커질 뿐이야.
만나서 반가웠어, 언제 다시 만날 지 모르겠지만 이 햇빛이 이렇게 따스한데 뭐가 문제겠어. 그지.